아마 현대 철학의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하이트헤드가 인용하여 말한 것처럼 우리의 출발점은 원리로 환원될 수 없는 구체적 현실이라는 것이리라. 그러나 분명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직 남아 있는 이원론적 사고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변증법의 도입이 필수적일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포괄하는 방법론은 현상학적이라 불리든, 경험론적이라 불리든, 비판론적이라 불리든, 변증법적이라 불리든, 실천론적이라 불리든 결국은 단일한 현대의 정신을 공유하는 셈일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 현대 철학의 진보를 선언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흔한 예이다. 아프리카 흑인 아이가 시를 하나 썼다.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 뛰어 왔더니 심장이 쾅쾅 뛰고 얼굴이 발그레해졌단다. 이 구절을 읽으며 우리는 아이의 경험의 절대성을 주창할 것인가, 아니면 인식론적 오류를 지적할 것인가? 물론 둘 다 아니다. 아이의 경험을 상대화하고, 즉 그것을 타자화하고, 그것이 구성되는 과정에 주목할 것이며, 다시 그 구성적 힘(사회적 실체)에 의해 생산되는 아이의 경험과 아이가 경험으로서 그 구성적 힘을 재생산하는 과정을 추적하게 될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때 매개항을 고려한 사유가 곧 변증법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엡도 테러 당시 파리 시민들이 내건 "자유, 평등, 박애"의 표어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법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방법이 아직도 '현대적'인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읽고 있는 사상가들이 약간은 예전 사람들이고, 약간은 시대에 뒤진 것으로 평가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어제 읽은 이번 호 "뉴 레프트 리뷰"의 "Why the Euro Divides Europe"(by Wolfgang Streeck)이라는 논문은 내게 큰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예전 사상가들'의 익숙한 논리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유로존 위기를 색다르게 조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기로 관건은 어쨌든 방법론이다. 물리학에 대한 체계적 논술을 써달라는 요청에 대해 스피노자는, 아직 그것을 질서 있는 방법으로 서술할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답했다. 사고가 막장에 도달했다면 돌아볼 곳은 역시 방법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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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용.
    from 하나와 앨리스를 위한 작은 방 2015-12-06 04:11 
    "내가 느끼기로 관건은 어쨌든 방법론이다. 물리학에 대한 체계적 논술을 써달라는 요청에 대해 스피노자는, 아직 그것을 질서 있는 방법으로 서술할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답했다. 사고가 막장에&n...
 
 
무진무진 2015-11-24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신없이 몇 시간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국시간으로 7시가 넘었네요. 에티카를 열심히 읽고 있는데 영어는 잘 못하고, 한국 사람들이 저 책을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하기도 하고 논문도 검색해보다 우연히 weekly님의 사적인 공간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많이 배워갑니다...자주 들리고 싶은 공간인 것 같아요. 땅을 한 곳만 깊게파면 옆의 토양이 점점 무너지듯이 weekly님이 쓰신 글들을 보고 그런 깊음과 넓음이 느껴져서 좋네요. 다쓰고 나니 이 글 <방법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는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weekly 2015-11-24 15:1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찬이시구요... 여기 있는 글들의 한계는 제게도, 제삼자에게도 명확한 거 같아요. 그 점이 항상 고민스럽지만 이곳이 저의 `사적인 공간`이라는 점을 그나마 면피책으로 삼게 되네요.

좋은 하루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