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모군의 표절 사태 이야기를 들었다. 송모군이 해외 저널에 낸 논문이 지도교수의 10여년 전 학회 발표문을 표절한 것이며, 송모군이 직접 유도했다고 주장하는 식도 오리지널리티가 없는 것으로 평가를 받아 게재 철회되었다는 것이다.
7년 간의 연구를 결산하는 박사 학위 논문의 일부로 제출된 작품이 저작권 저촉을 염려할 수준으로 터무니없이 복제(80%정도라고 하더라)된 것이라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할 수 밖에 없다. 해당 학생은 연구자로서의 소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연구 윤리가 절대적으로 미비하다는 것. (물론, 현상적인 파악이다.)
송모군이 해당 기관에서 퇴원되는 것도 불가피해 보인다. 만약 해당 기관에서 송모군을 연구원으로 계속 데리고 있으면서 최종적으로 학위를 수여하게 된다면 앞으로 이 기관은 자신이 생산한 연구 결과나 자신이 배출한 연구자들에 대해 어떤 공신력도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송모군은 대학을 중퇴하고 학점은행을 이용해 학사 자격을 얻어 지금의 석박사 통합 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송모군은 왜 대학을 중퇴한 것일까? 송모군측의 이야기로는 대학에서 자유롭게 연구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한 연구 욕구를 대학 강의가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송모군의 통합과정 지도교수는 송모군을 연구원으로 받아들이면서 첫 2년 동안은 학부 과정을 다시 가르쳤다고 밝히고 있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송모군이 대학을 중퇴한 것은 송모군이 학부 이상의 실력을 갖고 있어서 대학에서 더 배울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야망은 양자 컴퓨터, 블랙홀, 끈이론 등을 연구하는 것인데 현실은 강의실에서 일반 물리학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다시 말하면 송모군은 현실과 바람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현실과 바람의 차이... 이쯤해서 사르트르의 철학을 끌어들여 보자.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 인간이 선택하는 것 = 인간이 행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명제대로라면 현실과 바람을 구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그 사이에 존재자들을 개입시킨다. 나의 현재와 나의 목적(바람, 미래) 사이에 현실의 존재자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를 통해 관념론과 실재론을 동시에 극복했다고 믿는 것 같다. 관념론은 현실과 바람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며 실재론은 목적, 미래, 바람과 같은 비존재를 설명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송모군은 관념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들어가 보자. 현재의 나와 멋진 박사학위 논문을 탈고한 미래의 나 사이에는 현실의 충만한 존재자들이 놓여 있다. 이 존재자들은 무엇보다도 수십 권의 두터운 교과서와 수백 편의 논문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내가 나의 바람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이 존재자들을 나의 목적에 비추어 재배치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그것이 곧 나의 연구 활동을 정의할 것이다. 즉, 내가 연구를 수행한다는 것은 현실의 존재자를 이러저러하게 구체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체화는 물론 고유성을 갖는다.
송모군은 수십 권의 책과 수백 편의 논문을 읽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질서를 자신의 주제에 맞게 재배치하지는 못한 것 같다. 즉, 구체화하지는 못한 것 같다. 현재와 바람 사이의 존재자들은 나의 주제의 빛에 따라 통합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채 내가 그 존재자들에 대해 언급할 때 그것은 마치 영혼이 없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교과서의 비체계적인 단편들이 될 것이다. 나는 물상화된다.
우리가 타인에게서 그만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그의 영혼 없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물상화된 것은 지루하기 때문이다...
나는 송모군의 유튭 비디오를 몇 개 찾아 보았다. 짧은 것들이고 송모군은 매우 어렸다. 그리고 그래서인지 교과서에서 오려낸 듯한 답변을 하고는 했다...
아마 송모군이 연구를 하고 싶었다면 대학 일반 물리학 책을 갖고도 충분했을 것이다. 만약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음... 잔인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거기서 누가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인가? 당연히 송모군이지!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순진하다. 우리는 타인의 즐거움을 대신 사는 경우가 아주 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람을 세운 것은 누구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송모군이 천재인가를 물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논해온 것은 근본적인 좌절이기 때문이다. 천재소년과 80% 가량 복제된 학위 논문 사이의 엄청난 괴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거기서 근본적인 좌절을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근본적인 좌절이란 실패만이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수 있는 상황 속의 나를 의미한다. 다행인 것은 그 실패 역시 나의 실패가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