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주 주말에 웨이브리지라는 동네에 놀러갔다. 영국에 처음 와서 살던 동네다. 이 동네 하이스트릿에는 워터스톤스라는 영국 서점 체인에서 운영하는 서점과, 그 바로 맞은 편에 자선 단체에서 운영하는 중고 서점이 있다. 전자는 언제나 파리를 날리고 후자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우리는 언제나 북적이는 가게로 향한다.
사고 싶은 책이 많았는데 아내가 쿼터를 두 권으로 정했기 때문에 세 권으로 만족해야 했다. 모비딕, 키에르케고르의 일기, 에코의 칸트에 대한 책. 모비딕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그 유명한 첫 문장과 이어지는 문장들이 나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러나 이 책을 과연 언제 읽을 수 있으려나...? 에코의 책은 집에 돌아와 열어 보았다. 나는 이탈리아 출신의 박학자들에 대한, 아마도 열등감에서 오는 미심쩍음을 갖고 있다. 저렇게 넓게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깊게는 알 수 없을 거야, 깊이란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되새기면서, 휴지를 갖고, 동시에 지속적으로 사유하는 것의 부산물일 테니까... 박학자들이란 한 권의 책에서 다른 책으로 쉼 없이 넘어가는 사람들 아니냐... 이번 에코의 책 첫 몇 페이지에서도 나는 표면에서 표면으로 건너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책은 당장 읽지 않아도 되겠군...
중고 서점에서 책을 다섯 권이나 샀기 때문에 양심에 걸려 새책방에서도 몇 권 사려 길을 건넜다. 그러나 새책방에서는 사고 싶은 책이 없었다. 카운터에 외롭게 서 있는 점원의 눈을 피하며 들어온 모습 그대로 나가야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내게 문제적 철학자다. 케이르케고르는 일부 철학자들에게 철학자의 철학자로 대우받는다. 비트겐슈타인은 키에르케고르를 가리켜 "내게는 너무도 심오한 철학자" 라고 말했다. 이보다 더 잘 된 광고를 본 적이 있는가? 사르트르 역시 키에르케고르를 마치 자신의 철학의 원천이자 지향점인 듯 말한다. 그러나 정작 나는 키에르케고의 저작들에서 별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리라. "죽음에 이르는 병" 등을 읽었고 전기도 하나 읽었지만 남는 게 없었다. 그가 자신의 철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고 있다는 "비학문적 후서"는 그 수다스러움에 지쳐 서두를 뚫고 나가지 못했다. 과연 얻는 게 있을까 하는 미심쩍음이 한가득이었으니...
나는 아내에게 케에르케고르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자기가 구애해서 약혼까지 해놓고 일방적으로 파혼을 해버렸어. 처녀 아버지와 처녀 본인이 와서 사정 사정하면서 제발 결혼해 달라 했지만 거절했지. 약혼까지 해놓은 마당이라 이제 그 처녀의 혼사길은 막혀 버릴 판국이었는데도 말이야. 케에르케고르가 왜 파혼을 했는지에 대해 수 많은 추측들이 있지만 내 생각은 이래. 키에르케고르는 좋은 직업을 갖고 좋은 남편으로, 좋은 아버지로 관습적인 삶을 살아갈 마음이 없었던 것 같아. 그게 자신의 숙명은 아니라고 본 것이지. 대신 그는 치열하게 사색하고 치열하게 글을 쓰는 삶을 살았어. 그는 어마어마하게 썼지. 그런데 무엇을 위해? 이게 나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도 궁금한 점이었어. 그는 어떤 목사장에 반대하는 글들을 집요하게 써냈는데 키에르케고르가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인지는 그 목사장도 이해못했다는 거야. 그 사람은 무응답으로 일관할 뿐이었어. 여튼 키에르케고르는 그런 짓을 하느라 재산을 써댔고 건강을 해쳤어. 결국 산책 중에 쓰러져 죽었지. 어쩌면 그의 문필 활동 일체는 헛짓거리고 파혼에 대한 변명의 외관 이상이 아닌 것일 수도 있어. 뭐라도 하는 척 해야 했을테니까. 그러니 그 사람의 책을 읽고도 그 사람이 결국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게 생기는 것 아닐까? 비트겐슈타인을 포함해서 말이야. 게다가 키에르케고르는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인 사람이야. 극보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에 대해 하는 험담은 그 사람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는 좋은 동기가 되기도 한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에스프레소 한 잔 하는 시간에 키에르케고르를 한 두 페이지 읽기로 했고 그렇게 하고 있다. 아뿔싸, 나는 첫 페이지에서부터 키에르케고르가 영감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작은 활자로 650 페이지 짜리 두터운 책만 아니었다면 당장 읽어내버려야지 하고 덤벼들었을 그런 재미있고, 깊고, 영감어린 책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외쳤다. "키에르케고르 안에 다 있어!" 최근에 우리가 했던 얘기들이 키에르케고르 안에 다 있다는 뜻이었다. 왕양명의 "전습록"의 어떤 귀절에 대해 했던 이야기, 궁극적 의미의 자유란 운명 혹은 성격의 변화 가능성과 관련된 것이라는 이야기, 심지어는 U2의 곡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의 가사도...
"It is this my soul thirsts for as the African deserts thirst for water."(키에르케고르, 33페이지)
"Like a desert needs rain
Like a preacher needs pain
Like a needle needs a vein
Like someone to blame
I need your love"(U2, Hawkmoon 269)
내가 느끼기로는 심지어 내가 키에르케고르에 대해 한 험담까지...
"Different ways of grasping life’s dialectic, e.g. in the legends and stories of the Middle Ages in struggles against wild animals and monsters; in China with an examination; in the Church with doubt."(48페이지)
쯕, 키에르케고르의 열정적인 문필 활동은 그의 파혼에 대한 변명, 정당화, 죄책감 등등과 내적 관계를 가지면서 마치 그것을 초월하는 것과 같은 외관을 취한다는 것... 적어도 어떤 사람의 눈에는...
U2의 가사가 그런 정신의 빛에 의해 쓰여졌음이 명백하게 보이듯, 내가 보기에 키에르케고르는 변증법적 사유의 마술사다. 그러므로 그의 사유는 최소한 한 차원 더 들어가지 않고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의 책 도처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케에르케고르가 의의로운 이유는, 사유가 표면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는 너무도 단순하다. 즉,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나는 키에르케고르에게서 멜랑콜리함이라는 개념에 영감을 주는 귀절을 발견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이번 포스트를 시작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이 얘기는 아주 길 것이고 아마 다른 기회에 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