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몇 달 전 한국에 있을 때 은사님을 찾아뵙고 공부를 다시 시작할 작정이라는 말씀을 드렸었다. 교수님이 플라톤 전공이셨던지라 이런 대화가 오고가기도 했다.

나: 박종현 번역의 국가를 읽었는데 번역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런 유려한 번역이라면 도저히 원전에 충실한 것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수님: 아냐, 아냐. 박종현 교수님 번역은 원전에 아주 충실한 번역이야. 그러면서도 가독성이 아주 좋지. 그래서 박종현 교수님이 탁월하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잘 읽힐 수 있게끔 번역해내기가 힘들어...

교수님과 나는 계속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번역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의 질이 뛰어나지는 않다,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에는 박종현 교수님 수준의 대가가 아직 나오고 있지 않다, 그에 얽힌 얘기들...

(그때 나온 얘기는 아니지만, 나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도 참으로 아름답게 번역되었다고 생각한다. 유려하여 마치 소설처럼 읽힌다. 그런데 이 번역은 박종현 교수님의 것이 아니다. 박종현 교수님의 훌륭한 번역에서 많은 계발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전적으로 내 인상에 불과하지만...)

2.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평이 좋은데 일반 독자들은 전혀 그런 느낌을 받는 못하는 번역서들이 왕왕 있는 것 같다. 나도 얼마 전에 학문적으로 아주 충실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번역본의 일부를 원문과 비교해서 살펴 본 적이 있다. 그 경험을 일반화해서 성급히 결론을 내리면, 전공자들이 학문적으로 충실하다고 말하는 번역은 거의 원문에 대한 축자 번역이라는 것이다. 즉, 원문을 옆에 펴놓고 나란히 읽어 갈 때 도움이 되는 번역을 전공자들은 좋은 번역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는 얘기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에게는 그런 번역이 가장 나쁜 번역처럼 여겨질 수 있다. 심한 경우 그런 번역은 거의 기계 번역과 같은 수준으로 보일 테니까(이기상 교수의 하이데거 번역이 적절한 예가 되겠다). 

3. 나의 경우 한국어 번역본을 고르는 기준은 무조건 가독성이다. 중역이 아닌 원전에 대한 번역, 학적으로 정선된 술어의 선택 등등은 내게 부차적이다. 순수이성비판 번역이 새로 나왔다 해서 둘러 본 적이 있었다. 역자의, 문장 구조 하나까지 충실히 옮기려 했다는 말에 내 속은 쓰려졌다. 구역과 신역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펴들고 맨 마지막 문장을 비교해 보았다. 구역은 관계대명사절을 안고 있는 문장을 두 문장으로 잘랐고, 신역은 그대로 옮겼다. 그렇게 해서 신역이 무엇을 얻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렇게 해서 신역은 가독성을 잃었고 판매 부수를 하나 잃었다는 것이다.

4. 철학 서적 번역에 대한 비평의 많은 부분은 개념어를 얼마나 적절하게 한국어 단어로 옮겼는가에 집중되는 것 같다. 나는 이런 비평을 게으른 비평이라고 여긴다.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그런 것은 책을 읽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비평이라는 것! 예를 들어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를 누가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로 옮겼다고 하자. 아마 철학에 조금만 조예가 있는 일반 독자라면 누구나 이런 엉터리 같은 번역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판의 칼을 들이대려 할 것이다. 그러나 물어보자. 존재와 실존은 어떻게 다른가? 실존 대신 존재로 옮기면 안되는 건가?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쓸데없는 걱정들 말라고. 사르트르가 그의 책에서 하는 일이란 결국 존재(실존)라는 말에 대한 다양한 맥락들을 제공하는 것이지 않은가? 설사 어떤 비전문가가 실존이라는 학계에서 통용되는 말 대신 존재라는 말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 단어의 쓰임에 대한 전체 맥락이 제공된다면 독자가 사르트르의 명제를 오독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내 말의 요지는, 특정 개념들에 집착하고, 원문의 축자적 의미를 따라가는 번역보다는, 맥락을 잘 풀어주는 번역이 훨씬 의미있다는 것이다.

5. 해석가들은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의 의미를 한정지으려 한다. 그러나 그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철학자들은 자신이 고안한 용어들에 한가지 분명한 뜻만을 부여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낱말들은 놓여지는 맥락마다 진동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철학자들은 서로를 향해 똑같은 문장을 사용하여 비판을 한다. "당신은 ~라는 말을 여기 저기서 부주의하게, 부적절하게, 혼란스럽게, 때로는 정반대의 뜻으로 쓰고 있다!" (이런 비판을 받자 사르트르는 이렇게 답했었다. "아, 그때 내가 좀 실수를 했지요...")

6. 여기서도 다시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개념어에 대한 확고한 대용어를 한국어에서 찾는 일은 지나친 정력의 소모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그 개념이 그 맥락에서 정확히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부각시켜 주는 것이 훨씬 값지고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에게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축자 번역(그리고 개념어 번역에 대한 과도한 집착.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은 맥락에 대한 요구를 회피하려는 아주 적절한 핑계라는 것(물론 해석적 중립성을 내세우지만). 앞서 이야기한 가독성이란 결국 역자가 원문을 읽고 앞뒤가 맞게 잘 이해한 것을 한국어로 풀어줄 때 나타나는 현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반면, 축자 번역에 특징적인 것은 이해를 아주 희소하게만 담고 있다는 것. 

7. 이러한 맥락 드러냄이 없는 철학서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어떤 분은 한국어판 정신현상학을 읽을 때는 거의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영어판을 읽으니 이해가 잘 되더라, 그러나 다시 한국어판으로 돌아와 읽으니 또 이해가 안되더라, 그러나 아무래도 이건 역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어와 독어 사이의 간격이 너무 커서일 것이다... 라고 말하더라. 비슷한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번역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로 읽으면 이해할만 한데 한국어로 읽으면 그야말로 형이상학이 된다! 이걸 고전 그리스어와 한국어 사이의 간극이 커서 그렇다고 양해해 주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걸 박종현 교수님이 충분히 증명해 주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독어와 한국어 사이에서만 그 간극을 인정해야 할까?

8.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어가 영어에 비해 많이 추상적인 언어라고 생각했었다. 영어를 옮긴 글들이 원문에 비해 추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나는 비슷한 말을 들었다. 라틴어 문헌을 번역하는데  있어 영어가 라틴어의 생생한 구체성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는. 우리가 바보가 아니라면 라틴어>영어>한국어 순으로 각 언어가 구체적 현상을 제대로 포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짓지 않을 것이다. 사유가 시작된 곳에 생생함의 권리가 놓여 있다. 사유가 전달되는 과정이 곧 추상화의 과정이다. 추상화되지 않으면 사유가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가 추상화의 외피에 갇혀 있는 한 그것은 사유가 아니다. 즉, 그것은 고유의 생생함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이때 "고유함"이란 사유가 처음 발생했던 그곳의 고유함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바로 지금 이곳, 그 사유가 전개되고 있는 바로 이 맥락에서의 고유함이 그 사유가 드러내야 할, 그리고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구체적 생생함이다. 만일 이 명제를 긍정한다면 철학서들이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도 자명할 것이다. 즉, 축자적 번역을 지향한다는 말은 철학적 넌센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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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선생 2012-07-26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얼마전 국가 (박종현 역)을 읽었습니다만, 블로거님의 평가와 달리 저는 매우 블편한 독서를 했었습니다. 제경우에는 반대로 번역이 전혀 매끄럽지 않았거든요. 문장의 호응관계도 뭔가 어색하고... 그래서 영문판을 찾아 몇장 대조해 보았더니 확실히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윗글의 7번에 해당하는 경우죠. 사실 '국가'에 담겨진 내용이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매끄럽게 읽히지 않아 짜증이 났었는데, 결론적으로 제 문장이해 능력에 문제가 있었는가 봅니다. 아무래도 제가 철학 전공자도 아니거니와 원문의 '참맛'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처지라 더욱 그런가 봅니다.

Weekly 2012-07-27 02:4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제가 국가를 읽은지 너무 오래 되어서 위 포스팅의 이야기는 제 기억에 남은 인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제 기억에도 박종현 번역의 국가가 읽기 쉬운 글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원문의 스타일을 반영한 때문인지 문장들이 무척 길고 단어들이 풀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피통치자"라고 하면 읽기에 더 쉬울 수 있는 것을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이 예는 물론 제가 지금 즉흥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제가 박종현 번역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문장이 그렇게 늘어져 있으면서도 아귀가 딱딱 맞아서 번역문이 아니라 한국어 문장처럼 읽혔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복잡한 사유를 개념어를 배제하고 일상적인 어법으로 풀어 쓴 것 같은 느낌... 플라톤 시대에는 개념어들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상적인 단어들과 예를 가지고 추상적인 사유들을 표현해야 했었으니 박종현 번역이 그러한 분위기를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한 이년 전쯤에 조대호 번역의 파이드로스를 나름 꼼꼼하게 읽었었는데 박종현 번역의 국가와 유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의 은사님의 평가에 따르면 박종현 번역이 그리스어 원문에 아주 충실한 것이라 하니 이제 스타일의 문제가 남겠지요. 스타일은 개인의 취향이 되겠습니다만, 저는 플라톤 철학의 진수는 일상적이고 소박한 단어들로 추상적인 사유를 표현해 내려 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박종현 번역의 스타일에 높은 가치를 주고 싶습니다. 물론 문장 호응이 안맞는다든지 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는 악역에 해당하는 문장이 왕왕 있다는 것이니 이런 것은 논외가 되겠지요...

(박종현 번역이 실제로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제가 한국 밖에 있는 관계로 직접 책을 참조하지는 못하고 박종현 번역의 일부를 어느 분이 발췌해 놓은 것을 긁어다 아래 그대로 붙여 보았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니까, 트라시마코스 선생, 그 밖의 다른 어떤 통솔(다스림, arche)을 맡은 사람이든, 그가 통솔자(다스리는 자)인 한은,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통솔(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 주게 되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오. 또한 그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 그 쪽을 염두에 두고서 그 쪽에 편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 342e, (pp. 92-93)

수경선생 2012-07-28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철학적 '무지자'의 애꿎은 투정에 이렇게 긴 글로 화답하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은 아마도 첫 편에서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가 '올바름'에 관해 논쟁을 벌이는 내용인 듯합니다. 플라톤이 쓴 대화편들은 아시다시피 일상적인 대화의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원문의 엄밀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좋은 번역일른지 모르지만, '일상적인 대화'라는 관점에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이런 식의 표현으로 대화를 했을까요? 구체적인 지적을 하자면 다시 책을 빌려 조목조목 따져봐야겠습니다만, 블로거님이 예시한 문장(정확한 인용이란 가정하에)만 보더라도 어의 중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보실까요?

A 통솔(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 주게 되는 쪽에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오.
B 그 (통솔을 받는)쪽을 염두에 두고서 그쪽에 편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

A-B 두 문장을 비교하자면 '생각하고 지시하는 것'과 '말하고 행하는 것'을 구분하여 표현하기 위해 '통솔을 받는 쪽에 편익이 되는 것'이 반복 사용되고 있습니다.
A 문장에서는 바로 앞서 제시된 '생각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반복 사용되고 있습니다.
B 문장에서는 '그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와 '말하고 행하오'가 어색한 호응관계를 이루고 있고, '염두에 두고'가 반복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정확히 원문이 어떠한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이 정도로도 간단히 뜻이 통하지 않을까요?

소크라테스:"그래서 트라시마코스 선생, 여타 어떠한 통솔을 맡은 사람이건 간에 그가 통솔자라고 한다면 자기에게 편익이 되는 쪽보다는 자신에게 통솔을 받거나 혹은 자신이 통솔하게 되는 이들에게 편익이 되도록 생각하거나 지시할 거요. 게다가 말하고 행할 때도 또한 이에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겠지요.

조금 더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영문판과 대조해 보아야겠습니다.

Weekly 2012-07-29 18:1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저의 원칙은 역자가 원문을 정확히 이해하고(물론, 이 이해에는 해석이 들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번역하는 하는 한에 있어서, 번역문의 스타일은 역자의 선택사항이라는 것입니다. 문제의 번역문에서 저자인 플라톤이 무의미하게 어의를 중첩하였을 경우, 즉 나쁜 스타일로 글을 썼을 경우, 역자가 이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저는 역자의 선택사항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선택은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그것이 나쁜 스타일이라는 확증이 있어야 하고, 나쁜 스타일임을 주석하는 데 머물지 않고 굳이 교정해야만 하는 근거가 제시되어야 합니다. 단지 어의가 중첩되었고, 중첩은 나쁘므로 중첩을 해소해야 한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저는 플라톤의 스타일이 전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걸 살려준 박종현의 선택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수경 선생님께서는 생각이 다르시겠지만요... (이에 대해 더 자세한 논의를 하려면 저 문장의 앞뒤 맥락을 살펴야 하는 등의 수고가 따르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호응이 어긋나게 번역된 문장들은 악역에 속한다고 저는 봅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가 예시한 문장에 한해 말씀드린다면, 저는 박종현이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저 한 문장을 옮기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겠지요. 그리고 그 결과물은 얼마나 훌륭한지요! 저 문장의 영어역을 한국어 문장으로 옮길 생각을 하면 저는 암담합니다. 단어들이 풀어져 있어 문장이 늘어졌는데, 곳곳에 쉼표를 치면서도 호응을 유지해야 하고, 절대 외국어 번역문의 냄새를 나게 해서는 안된다! 차라리 "통치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통치자의 이익을 위해서 통치 행위를 한다."고 대의만 전달해 주고 싶은 욕망이 생길 수도 있겠지요. 저는 이런 번역도 하나의 스타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박종현의 것보다 나은 번역이라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런 스타일의 번역은 원문이 극도로 난해하든지, 원문의 스타일이 극단적으로 나쁜 경우에만 인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플라톤의 특수성에는 플라톤이 훌륭한 철학자 이전에 훌륭한 작가라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의 번역자들은 플라톤의 스타일을 가능한 살려주어야 하는 임무도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수경선생 2012-07-31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철학 전공자도 아니고 그리스 원전을 읽을 만한 능력도 없는 처지라 더이상 사족은 달지 않겠습니다. 더군다나 Weekly님께서는 철학 전공자이시고 영국에서 유학도 하고 계신 것 같으니 아래 영문본을 옮기는 것으로 저의 어리석은 지적을 마치려 합니다.

Then, I said, Thrasymachus, there is no one in any rule who, in so far as he is a ruler, considers or enjoins what is for his own interest, but always what is for the interest of his subject or suitable to his art; to that he looks, and that alone he considers in everything which he say and does.

- Scott Buchanan, He studied philosophy at Balliol College, Oxford as a Rhodes scholar between 1919 and 1921. He continued his studies in philosophy at Harvard University and received his doctorate in 1925.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플라톤은 당대 최고의 철학자로써 누구보다도 훨씬 간결하면서 명료하고 논리적인 언명을 구사하였을 것이며, 적어도 박종현 선생의 번역이 플라톤의 스타일을 그대로 옮긴 것 같지는 않습니다.

weekly 2012-07-31 18:5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수경선생님께서 달아주신 댓글들에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사소하지만 그릇된 인상들에 대해서는 정정을 하여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제가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한 것은 맞지만, 졸업 후 10 여년의 세월 동안 철학과는 다른 길을 걸었었기에 철학 전공자로 간주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블로그 사이트에서 그런 인상을 피웠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저의 잘못이겠지요. (저는 작년 여름까지 거제도에서 용접을 하던 노동자였습니다.)
또, 작년 여름에 영국에 건너와서 이번 가을 학기부터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할 예정인 것은 맞지만, 영국 체류의 대부분은 어학 코스를 밟는 과정이었고, 대학원엔 아직 등록도 하지 않았습니다. 철학에 있어 저는 수경 선생님과 같은 일반인이지, 전공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제가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댓글들 중에 수경선생님 겸손이 지나친 점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제가 설사 학계의 대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그렇습니다. 철학은 아무 유보없이 바로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플라톤이 알려준 소크라테스가 철학한 방법이겠지요...

예시 번역문에 대해 제가 구체적인 비평을 피한 것은, 단순히 제가 그리스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마디 하자면, 저는 수경선생님이 수정한 문장이 박종현의 문장보다 명확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통솔을 받거나 혹은 자신이 통솔하게 되는 이들에게" 같은 대목은, 아주 나쁜 한국어 문장이고, 그러므로 철학적으로도 틀렸습니다. 그 이유는 박종현본이든 영역본이든 다시 한번 살펴 보시면 바로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일반론적으로 얘기해서 철학자가 어의 중첩의 위험을 무릅쓰고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한 것을 하나로 묶어서 번역하는 데에는 매우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철학자가 지시어를 빈번하게 사용한 문장들은 번역자가 어의중첩을 무릅쓰고라도 지시어를 명확하게 풀어주는 것이 옳은 태도라고 저는 믿습니다. 철학은 이해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철학적 무지자로 자칭하시는 분께서 전혀 명쾌하게 읽히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번역을, 끝까지 명쾌하고 훌륭하다고 고집하는 저 자신을 바라보면서, 원글에서 제가 말한 것과 모순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반성을 하게 되더군요. 진지하고 사려 깊은 댓글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국은 무척 덮다니 건강에 유의하시고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말씀을 나누도록 하지요. 

weekly 2012-08-01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경선생님께

남겨주신 이메일 주소는 제가 잘 간직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인 정보 노출 문제가 염려되어 본의아니게 수경선생님의 댓글을 급히 지웠습니다. 무단으로 수경선생님의 댓글에 손에 댄 점 양해를 구합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지난 기록들을 몇 개 읽어 보았다. 안달해 하는 모습들. 영국에 오기 전이나 그 후나...-.- 에세이 쓴다고 낑낑 매는 모습을 되돌아 보며 안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기고만장한 자신감. 뭘 몰랐을 시절. 나는 지금 엄청난 벽 앞에서 떨고 있는데... 언어의 벽, 너무 오래 학교를 떠나 있었다는 자각, 내가 주로 공장 노동자였으므로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고 마는 문화적 괴리감, 한국도 아니고. 얼마 전 런던에 있는 한 대학에서 철학 강연을 하나 들었다. 나 답지 않게(?) 강의실을 둘러 보며 나 같은 사람(검은 머리를 한 유색 인종)을 찾게 되더라. 없더라. 얼굴에서 스마트함이 풍겨지는 잘 생긴 백인들 틈에서 나는 고작 강사의 말을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을지를 걱정하며 앉아 있었다. (다행히 주제가 아주 낯선 것이 아니었고, 또 프리젠테이션 도구를 활용한 강의였기 때문에 대강은 파악할 수 있었다. 강의 끝무렵에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가며 사유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연회 끝나고 열린 다과회에 참석할 배짱은 없었다...)

기고만장했던 시절의 기록들 중 하나엔, 이제 테마를 잡았으니 1년 정도 후에는 엄청나게 진보해 있겠지! 하는 대목이 있다. 그로부터 7, 8 개월이 지난 지금의 사정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 그렇게 지난 버린 시간의 크기가 내게 충격을 준다. 나는 전혀 진보하지 못했다. 나의 테마에 대해서든 다른 무엇에 대해서든. 아직 4 달 정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나는 또 안달이라는 익숙한 옷을 껴 입을 것 같다. (정확히 일년 전 이맘 때쯤 나는 공장 생활을 그만 두었었다. 삶의 단계를 특정할 수 있는 날짜를 갖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인 것 같다. 그걸 측정의 도구로 쓸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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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철학적 문제가 앞에 던져졌을 때 우리가 보여야 할 첫 번째 반응은 냉소여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철학함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과도한 진지함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철학함에 있어 으뜸의 윤리는, 그러므로 으뜸의 유혹은 "정직함"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비트겐쉬타인의 말대로). 다시 말해 무의미한 문제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진지함을 유지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진지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말해 철학적으로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해 버린다. 무의미한 문제에 진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진지한 "척" 할 수 있을 뿐. 우리는 어떤 문제에도 "척" 할 수 있다.

비트겐쉬타인은 철학적 문제 따위는 존재치 않는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주장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나로서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 나는 그것을 나의 출신 배경(작년 이맘때까지 나는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 어떤 배타성을 뜻하는 것일 수는 없다. 배타성은 어떤 확연한 경계선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누구나 아다시피 그러한 경계선은 존재치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철학적 문제 앞에서 보이는 냉소는, 역으로 우리가 철학적으로 진지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어 버린다. 

그것이 진정한 문제인 한 그것은 나를 다시 그 앞으로 불러 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냉소와 더불어 경외를 불러 일으킨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냉소가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아니다. 기억하라, 경외만이 존재하는 문제는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답들로부터 탐구를 시작한다. 함정은 질문이 "이것이"가 아니라 "이것이란"으로 되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일차적인 답변들은 모두 기각될 운명이다. 아다시피 플라톤이 그의 대화들에서 한 일이 이것이다. 일상적인 답변들을 물리치고, 그럼으로써 문제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를 명확히 해나가는 것. 그러나 대화는 언제나 철학적 막장, 철학적 혼란, 철학적 경련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후대의 소심한 주석가들은 철학은 해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라고 철학에 지치고 실망한 사람들을 위로한다. 

비트겐쉬타인은 플라톤의 질문의 사기성에 주목한다. 플라톤이 한 일은 단어를 일차적(즉,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사용에서 떼어내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노동의 고역에서 면제된 무료한 지성이 창조해낸 고상한 공허다. 비트겐쉬타인의 공격은 가혹하고 파괴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트겐쉬타인을 우리의 전제 중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논리는 나의 밖에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의 사유들 중 하나로 존재한다. 나는 사유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 사유가 나를 선택한다. 나는 사유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 그 사유에 눈길을 보내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느 때고 그 사유는 나를 내적으로 분열시킬 것이다. 그 사유는 언제나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그걸 좋아하든 말든. 내가 그걸 선택했다고, 혹은 배척했다고 믿든 말든.)

플라톤의 대화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창시한다. 그것은 새로운 질문 방법을 창시한다. 동시에 그 질문에 적합한 답변의 형태를 선험적으로 제시한다. 플라톤의 대화란 그러한 새로운 교과에 맞게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내용이 전부다. 그리고 후대 사람들은 그 교과에 철학이라는 이름(피타고라스에게서 빌려온?)을 붙이고 가장 보편적인 학문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플라톤의 패러다임이 얼마나 보편적인가, 하는 것이다. 비트겐쉬타인은 그것의 보편성을 완전히 부정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 하이데거는 플라톤 철학의 지역성을 드러내면서 (플라톤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을 구상(혹은 복원)해 내고자 하는 것 같다. (물론,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철학은 "구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플라톤 철학, 그러므로 서양 철학사 전체의 지역성을 드러내는 작업은 대단히 의미있는 프로젝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묻는 것은 성급한 짓일 것이다(예를 들어 하이데거 자신이 예비적 사유자라면 본 사유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어쨌거나 그 작업들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는 없을 것 같다.

어제 런던에 가는 데 아이폰을 충전해 놓지 않아 밧데리가 얼마 남지 않았었다. 예비로 들고갈 종이책으로 고른 것이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였다. 독영 대역으로 분량이 작았고 행간이 넓었다. 예전에 한번 읽고 가볍게 던져 버렸던 책이다. 어제의 두 번째 독서에서는 나를 꽉 붙잡아 버렸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다룬다. 그러나 보통 하듯 "철학"의 정의를 탐구하려 하지 않고 "무엇인가"라는 말을 천착해 들어간다. 그 "what"에 대한 천착을 통해(다시 말하면 질문에 대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말하는 철학의 지역성을 드러낸다. 동시에 새로운 보편성을 암시한다. 

나는 늘 하이데거가 "진지한" 철학자인지 의심스러웠었다. 그러나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진지하고 거대한 작업의 계획서라는 것을 의심할 도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의 사유의 한 요소로 파고들어올 것이다. 관념은 그것이 살아있는 관념인 한 경탄과 혐오("존재와 시간"을 처음 읽고 난 훗설의 반응)와 같은 모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사유란 동화와 이화의 변증법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대한 철학자를 만났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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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2015-06-2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과도한 진지함 때문에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너무 딱딱하고 공격적인 사람 앞에서 그 문제가 왜 중요하지 설득시키려고 하다보면 갑자기 화가 나서 힘들어지더라고요.

철학이나 다른 학문이나 다 마찬가지로 소수의 사람들이 그 학문을 개척하고 있고...저는 그냥 제 인생시간 때우려고 공부하는 학생에 불과하고요., 공부하다가 비트겐슈타인 붙잡고 있다보면 또 흥분해서 뭔가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스스로가 병신같다는 생각이 들고...

자꾸 주변에서 도덕적 해이가 어떻고 왜곡이고 뭐 이런 소리 듣다보면 그냥 돌아버릴 것 같네요.

weekly 2015-06-28 04:0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넘겨짚기로 말씀드리면... 우리 시대에 철학을 한다는 것의 의의에 대해 고민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철학도들이 이런 고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구요. 탈레스 시대부터 똑같은 고민이 있었으니 이 고민의 역사는 참으로 장대하네요.:)

답은 둘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경제적 여유와 철학적 재능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일생을 걸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면 귀명창으로 남으면 되고요. 진지한 작가와 사상가들을 찾아내서 그들을 격려해 주는 거죠. 진지한 분들은 외로우므로... 철학에 대해 과도한 진지함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이 외의 옵션이 있을까요?

아,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고 있는 옵션이 있습니다. 철학을 통해 철학(에 대한 관심)을 끝장내는 것이죠. 제 경험을 곁들여 말씀 드리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도들에게 매우 위험한 철학자인 것 같습니다. 항상 철학이냐 아니냐, 삶이냐 아니냐라는 절대적인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이니까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철학에 대한, 삶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념론자가 아니기 때문에 철학의 현실은, 삶의 현실은 항상 철학과 삶에 대한 정의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수용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철학을 비트겐슈타인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화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절대주의 화가들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더 나아갈 곳이 없죠. 회화의, 혹은 철학의 가능성을 고민하는 것 말고는. 회화, 철학이 열정의 대상이라면 왜 선험적인 이유에서 그것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죠? 절대주의자들의 시선에 아랑곳 없이 색채와 형태를 마음껏 추구할 자유가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진지한 질문은 항상 실질적인 질문으로 환원될 것입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느냐, 철학적 재능이 있느냐, 철학적 열정이 있느냐... 나머지는, 제 생각에는 다 거짓 고민들입니다.

이종호 2015-07-28 0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철학자들은 물음을 질병처럼 다룬다.-비트겐슈타인, PI 225

내가 선생님한테서 무엇인가 배우기 전에 나는 내 머릿속에 맴도는 수많은 생각들로 밤에 잠을 자기 어려웠다. 나는 정신과의사한테서 약을 받아 먹었다. 나는 물건을 던지고 부수었다. 입에서는 아무런 표현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소리 지를 줄만 알았다.

물음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나를 가르쳐 주신 한 선생님은 나를, 그 주제와 연관된 방식으로, 개인적으로 공격했다. 나는 화가 났다. 선생님은 내가 그 물음을 나의 질병으로 느끼도록 만들었다. 나는 그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내가 느낀 고통은 나에게 그것을 해결하도록 강하게 요구했다. 나는 글을 썼다. 선생님은 나에게 잘했다고 말했다. 나는 아직도 그 고통이 내가 한 발짝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게 끔된다. 그 때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약도 먹고 자해도 했다.

2. 내가 원하는 것

나는 오랫동안 많은 생각들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런 생각들 때문에 내가 성장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남들보다 더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두려움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자동적으로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치를 취한다. 나는 그런 두려움을 일으키는 사고가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지금 떠오르는 생각:
만약 내가 분명한 태도로 고통을 느끼는 것을 멈추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내가 분명한 태도로 남들보다 더 성장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공부할 수 있다. 그렇게 공부하면 나는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물음을 질병처럼 다루고 싶지 않다. 나는 물음을 공처럼 다루고 싶다. 그런데 남들보다 뛰어나야 나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집착 때문에 계속해서 나는 고통으로 가야될 것만 같다. 나는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나는 또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어쨋든 나는 아직 주어진 대로 살아갈 용기가 없는 것같다. 더 많은 압박을 통해서 결국에 더 잘하겠다는 욕망이 나를 귀찮게 한다.

weekly 2015-07-29 14:0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댓글 감사합니다.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포트란이란 프로그래밍 언어를 설계한 배커스란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추상적인 분야(과학, 철학, 문학 등등)에 종사하는 사람은 일상의 번잡하고 지루한 일을 피하고자 그런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이런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심한 동기를 가리고자 이런 분야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어마 어마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것을 `허영`이라고 부릅니다. (비트겐슈타인이나 하이데거의 전기 자료를 보면 이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죠. 아니 허영 그 자체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물론 허영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겁니다. 스피노자도 허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구요. 허영은 긍정적인 맥락에서 열정, 비전, 진지함, 심오함 등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허영은 이러쿵 저러쿵 해도 결국은 허영인 것 같습니다. 철학적 문제들을 질병처럼 다룬다는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말을 하는 순간 허영 속에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종호님의 말씀대로 철학적 문제들을 공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철학자들이 하는 작업의 본질에 더욱 가까워 보이니까요.

추상적 작업에서 허영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러한 인식에서 끌어낼 수 있는 윤리는 허영에 압도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즉 스스로에 완전히 속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종호님도 저와 비슷한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우리를 노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것,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것이 곧 선의 절대적인 정의이지요. 건투를 빕니다.
 

The Spinoza Problem. 네덜란드 레인스브르크 스피노자거리 29번지에 있는 스피노자 하우스에 가보지 않았었다면 난 이 책을 사지 않았을 것 같다. 아이폰으로 샘플을 받아 첫 몇 문장을 읽었을 때는 그저 그런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어 살 생각이 전혀 안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읽어나가자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내가 스피노자 하우스에서 집지기 아저씨에게 들은 이야기가 소설에 그대로 옮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스피노자 하우스의 거의 모든 전시품들은 스피노자 자신의 것이 아니다,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책들도 어떤 사람이 스피노자 사후 작성된 물품 대장을 참고로 스피노자 당대의 판본으로 다시 사모아 놓은 것이다... 등등.

이 소설은 스피노자와 (나치의 이론가이며 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을 언도받고 처형된) 로젠베르크의 삶을 교차해서 그리고 있는데 그 접합점이 바로 스피노자의 장서다. 그런데 웃기게도 나는 여기서 로젠베르크와 동일시되고 만다. 내가 스피노자 하우스를 찾은 이유 중 하나는, 로젠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의 장서 목록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니까. 나도 그도 스피노자 철학의 원천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경우. 예를 들어 스피노자에게는 콘트롤 센터로서의 자아가 없다. 내 사유 안에 두 개의 경쟁적인 관념이 존재한다고 하자. "나"라는 자아가 있다면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철학에는 자아가 없다! 그러므로 관념은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싸워 이긴 관념이) 스스로를 선택하는 것이다. 도대체 스피노자는 이런 철학을 어디에서 베꼈는가? (이 책에 보니 아인쉬타인이, 독창성의 비결은 아이디어의 원천을 잘 숨기는 것이라고 했다더라.) 나는 그것이 알고 싶었지만, 로젠베르크와 동일한 이유로 시작부터 좌절을 겪어야 했다. 즉, 그 책들의 표지에 적혀 있는 라틴어, 히브리어 등을 알지 못한다는...-.- 물론, 로젠베르크가 스피노자의 철학의 원천을 알고 싶어한 까닭은 나와는 다르다.)

이 소설은 페이지의 절반 이상이 대화들로 채워져 있다. 주인공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한 언어로 진술한다. 소설적 장치들이 많이 포기되고 있지만 덕분에 읽기에 부담이 없다. 스피노자의 철학에 접근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일 것이다. (스피노자의 대화 상당 부분은 그의 저술들에서 인용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철학이 약화된 형태로 소개되고 있다는 느낌은 피할 수 없었다. 약간 간지럽다는 느낌. 물론,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내게도, 그리고 아마 그 어떤 독자에게도.)

소설에서 로젠베르크는 자신이 숭배하는 위대한 독일인 괴테가 유태인 스피노자를 숭배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아마 저자가 책을 더 풍부하게 만들고 싶었다면 이 테마를 좀 더 발전시켜야 했을 것이다. 독일의 국가 철학자 헤겔, 헤겔의 적대자로 정반대편에 서 있는 쇼펜하우어, 그리고 누구보다도 니체, ( 그리고 스스로를 철학자라 칭하는 나치의 이론가 로젠베르크) 다시 말하면 나치의 위대한 철학적 계보의 가장 꼭대기에는 어김없이 스피노자가 놓여 있다는 사실이 로젠베르크의 탐험 중에 속속 드러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면 참으로 장관이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이 위험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럿셀은 그의 철학사에서 스피노자를 가장 사랑스럽고 윤리적으로도 으뜸인 철학자라 소개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스피노자는 가장 사악한 인간으로 비난받았다고 덧붙인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사랑스럽고 조용한 은자의 철학인가, 아니면 냉정하고 독단적인 강자의 철학인가? 누구보다도 스피노자 자신이 자신의 철학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검색을 해보니 이미 독일어판과 프랑스판이 나와 있는 것 같더라. (스피노자의 대중성에 더하여) 나치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렇듯 빠르게 번역판이 나왔을 것 같다. 적어도 내게 이 책의 백미는 로젠베르크의 탄생과 종말을 다룬 부분이다. 뉘른베르크의 재판 과정을 (비소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마지막 장을 나는 긴장감 속에서 매우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로젠베르크의 탄생을 다룬 부분은 소설적 장치들이 매우 허술한 이 책에서 소설적으로 가장 빼어난 부분일 것 같다.

반유대주의 연설을 한 소년 로젠베르크를 학교 선생들이 불러다 꾸짖고, 괴테의 자서전에서 괴테가 스피노자에게 경외를 표현한 부분을 암기에 오도록 과제를 준다. 로젠베르크는 암기를 잘해오지만, 자신이 암기한 문장들의 의미를 묻는 선생들의 질문 앞에서는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더하여 자신이 숭배하는 괴테가 그토록 존경했다는 스피노자라는 사람이 과연 누굴까, 하는 호기심은 그의 머리에서 결코 일지 않는다. 선생들은 낙담하면서도 안심한다. 로젠베르크가 치유불능임에 낙담하면서도, 그의 지적 능력으로 보아 유해한 인물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He has a lack of curiosity that is, most likely, incurable."
"This young man has neither the intelligence nor fortitude to cause mischief by swaying others to his way of thinking."

물론, 그는 나치의 이론가가 되었고, 그의 손으로는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음에도 그 이론에 대한 댓가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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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 다녀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스피노자가 내 머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스피노자를 주제로 한 소설을 읽었고, 럿셀의 철학사를 스피노자 부분부터 읽기 시작했고, 듣고 있는 오디오북도 스피노자에 대한 것이고, 여호와 증인 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도 계속 스피노자를 의식하고 있었고... 물론, 영국에 오기 전부터 스피노자는 내 머리를, 그러므로 나의 삶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스피노자에 대한, 너무 유명해서 닳고 닳았지만 그럼에도 진리임에 틀림없는 두 개의 명언. 첫째, 헤겔. 당신이 스피노자주의자가 아니라면 철학자도 아니다(내 멋대로 버전이다). 둘째, 베르그손. 철학자는 두 개의 철학을 갖고 있다. 하나는 스피노자의 것, 다른 하나는 그 자신의 것. 그러니 만일 스피노자에게 감화를 받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의 원천을 찾아 스피노자를 연구하려 든다면 세상엔 단 하나의 철학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철학이라 선포하는 사람도 있단다. 아, 나 역시 그걸 부정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스피노자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정말로 거대한 사업이다. 나는 지금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에 와 있지만, 스피노자를 연구 테마로 삼을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나는 무모하기에는 이미 충분히 늙었기 때문이다. 나이들러의, 스피노자 사상의 원천을 연구하는 과제는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그저 불가능한 사업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을 뿐이다. (약이 오르는 것은 스피노자 전집의 양 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

그러함에도 스피노자의 철학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생각을 늘상 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자신의 철학으로 받아들일 만한 거의 유일한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부분도 있고, 재고되어야 할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의 철학의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다행히 스피노자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고전 철학자인 것 같다. 그의 저술들도 많이 번역되어 있고. 그러나 한편 스피노자 철학의 결정판이라 할 에티카에 대한 번역은...-.- 나는 이렇게 말해 두고 싶다. 한국에서라면 당신과 스피노자 사이에 서광사판 에티카라는 깊이 모를 계곡이 존재한다고. 서광사판 에티카 제1부를 읽고 난 결론은, 그 번역을 통해 스피노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백 퍼센트 불가능하다는 것. (검색을 해보니 에티카에 대한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고 하더라. 이북으로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안되는 거 같다. 책만 좋게 잘 되어 있으면 몇 날 몇 칠을 두고 그 책을 칭찬하면서 놀고 싶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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