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철학적 문제가 앞에 던져졌을 때 우리가 보여야 할 첫 번째 반응은 냉소여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철학함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과도한 진지함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철학함에 있어 으뜸의 윤리는, 그러므로 으뜸의 유혹은 "정직함"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비트겐쉬타인의 말대로). 다시 말해 무의미한 문제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진지함을 유지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진지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말해 철학적으로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해 버린다. 무의미한 문제에 진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진지한 "척" 할 수 있을 뿐. 우리는 어떤 문제에도 "척" 할 수 있다.
비트겐쉬타인은 철학적 문제 따위는 존재치 않는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주장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나로서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 나는 그것을 나의 출신 배경(작년 이맘때까지 나는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 어떤 배타성을 뜻하는 것일 수는 없다. 배타성은 어떤 확연한 경계선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누구나 아다시피 그러한 경계선은 존재치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철학적 문제 앞에서 보이는 냉소는, 역으로 우리가 철학적으로 진지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어 버린다.
그것이 진정한 문제인 한 그것은 나를 다시 그 앞으로 불러 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냉소와 더불어 경외를 불러 일으킨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냉소가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아니다. 기억하라, 경외만이 존재하는 문제는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답들로부터 탐구를 시작한다. 함정은 질문이 "이것이"가 아니라 "이것이란"으로 되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일차적인 답변들은 모두 기각될 운명이다. 아다시피 플라톤이 그의 대화들에서 한 일이 이것이다. 일상적인 답변들을 물리치고, 그럼으로써 문제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를 명확히 해나가는 것. 그러나 대화는 언제나 철학적 막장, 철학적 혼란, 철학적 경련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후대의 소심한 주석가들은 철학은 해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라고 철학에 지치고 실망한 사람들을 위로한다.
비트겐쉬타인은 플라톤의 질문의 사기성에 주목한다. 플라톤이 한 일은 단어를 일차적(즉,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사용에서 떼어내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노동의 고역에서 면제된 무료한 지성이 창조해낸 고상한 공허다. 비트겐쉬타인의 공격은 가혹하고 파괴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트겐쉬타인을 우리의 전제 중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논리는 나의 밖에서 방치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의 사유들 중 하나로 존재한다. 나는 사유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 사유가 나를 선택한다. 나는 사유를 선택할 자유가 없다. 그 사유에 눈길을 보내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느 때고 그 사유는 나를 내적으로 분열시킬 것이다. 그 사유는 언제나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그걸 좋아하든 말든. 내가 그걸 선택했다고, 혹은 배척했다고 믿든 말든.)
플라톤의 대화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창시한다. 그것은 새로운 질문 방법을 창시한다. 동시에 그 질문에 적합한 답변의 형태를 선험적으로 제시한다. 플라톤의 대화란 그러한 새로운 교과에 맞게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내용이 전부다. 그리고 후대 사람들은 그 교과에 철학이라는 이름(피타고라스에게서 빌려온?)을 붙이고 가장 보편적인 학문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플라톤의 패러다임이 얼마나 보편적인가, 하는 것이다. 비트겐쉬타인은 그것의 보편성을 완전히 부정한 것처럼 보인다. 반면, 하이데거는 플라톤 철학의 지역성을 드러내면서 (플라톤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을 구상(혹은 복원)해 내고자 하는 것 같다. (물론,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철학은 "구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플라톤 철학, 그러므로 서양 철학사 전체의 지역성을 드러내는 작업은 대단히 의미있는 프로젝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묻는 것은 성급한 짓일 것이다(예를 들어 하이데거 자신이 예비적 사유자라면 본 사유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어쨌거나 그 작업들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는 없을 것 같다.
어제 런던에 가는 데 아이폰을 충전해 놓지 않아 밧데리가 얼마 남지 않았었다. 예비로 들고갈 종이책으로 고른 것이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였다. 독영 대역으로 분량이 작았고 행간이 넓었다. 예전에 한번 읽고 가볍게 던져 버렸던 책이다. 어제의 두 번째 독서에서는 나를 꽉 붙잡아 버렸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다룬다. 그러나 보통 하듯 "철학"의 정의를 탐구하려 하지 않고 "무엇인가"라는 말을 천착해 들어간다. 그 "what"에 대한 천착을 통해(다시 말하면 질문에 대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말하는 철학의 지역성을 드러낸다. 동시에 새로운 보편성을 암시한다.
나는 늘 하이데거가 "진지한" 철학자인지 의심스러웠었다. 그러나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진지하고 거대한 작업의 계획서라는 것을 의심할 도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의 사유의 한 요소로 파고들어올 것이다. 관념은 그것이 살아있는 관념인 한 경탄과 혐오("존재와 시간"을 처음 읽고 난 훗설의 반응)와 같은 모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사유란 동화와 이화의 변증법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대한 철학자를 만났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