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존에서 중고로 주문한 럿셀의 "Theory of knowledge"가 왔다. 럿셀이 하루에 열 페이지씩을 써갈기며 야심적으로 진행하던 프로젝트였으나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으로 집필을 포기해야 했던 문제의 그 저작이다.
편집자의 서론을 읽었다. 감상. 비트겐쉬타인의 비판으로 책을 포기해야 했을 때 럿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살 충동을 느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럿셀이 그 충격을 비트겐쉬타인에 대한 사적인 감정과 연결시키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럿셀은 철학자였으니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테지만 말이다.
아무튼 읽어야 할 책이 하나 더 늘었다. 책 분량부터 확인하게 되더라.
2. 앤스콤의 "An interoduction to Wittgensein's Tractatus"를 읽기 시작했다. 서문에, 말하자면, 철학자들의 저작을 이해하려면 기존의 선입견을 떨쳐버리고 그 철학자들이 해결하고자 한 문제들을 찾아 함께 궁리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는 식의 조언이 나온다. 지극히 옳은 말이다. 철학책을 읽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철학을 하는 것 뿐이다.
서문 각주에 멋진 이야기가 있어서 각주 전체를 옮겨두려 한다. 플라톤의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문제와 딱 닿아 있다.
" In judging, one judges something; in judging something, one jugges something real; so in judging something unreal one judges nothing; but judging nothing, one is not judging at all"(Plato's Theaetetus 189A) Wittgenstein returned to the problem presented by this argument again and again through his life.
심오함이란 생산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심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