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 쌓인 단상들을 여기에 비워 놓기로 한다.

1.
"...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가 올덴부르크를 처음 직접 만났을 때는 거의 같은 나이였던 셈이다. 스피노자는 28세 때였고, 라이프니츠는 26세 때였다." ("스피노자는 왜" 262 페이지)

올덴부르크는 처음 만난 스피노자에게서 인간적으로든 지적으로든 대단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 스피노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한 경외감을 읽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나중에 올덴부르크는 자신의 길과 스피노자의 길이 엇갈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경력에 있어 스피노자가 매우 위험한 장애물이라는 것도. 그러나 그러한 때라도 스피노자에 대한 올덴부르크의 애정은 식지 않는다. 그것이 혹 분노와 좌절감을 동반하는 것일 지라도. 짧은 직접 만남으로 시작된 올덴부르크와 스피노자의 관계는 그들의 생애 내내 진실함 속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의 관계에 애증이 깃들어 있었다는 것이 그 징표일 것이다.

반면 올덴부르크는 라이프니츠를 다소 사무적이고 퉁명하게 대했던 것 같다. 올덴부르크는 당시의 라이프니츠의 학식을 대단히 높게 사지도 않았던 것 같다. 올덴부르크의 눈에 라이프니츠는 출세를 추구하는 당시의 수 많았던 준천재들 중 하나로 보였을지 모르겠다. 라이프니츠는 올덴부르크에게 뭔가를 증명해 보여야 할 사람이었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올덴부르크에게 더할 나위없이 독특한, 신비롭기까지 한 인간이었다면 라이프니츠는 당대의 숱한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다. 동시에 세상에 빼앗길 것도 없는 사람이다. 스피노자에게서 그의 철학을 뺏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재산을 뺏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단순히 그는 재산이 없었으므로). 그의 기술을 뺏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물론 그의 손가락을 분질러 버리면 되겠지만). 교수라는 명예와 부로 스피노자를 유혹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그는 자유를 더 사랑하였으므로). 심지어 스피노자에게서 생명을 뺏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왜냐하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이 신체와 더불어 완전히 파괴될 수 없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러한 것들이 스피노자를 철학자로, 혹은 진실한 인간으로 정의하는 것들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 앞에 있는 저 작고 여린, 모성애나 부성애를 자극하는 사람이 진실된 인간임을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었을 게다. 그리고 스피노자 자신에게는 그러한 자족감이 자신의 철학의 힘, 즉 자신의 철학의 진리성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어느 지역에서건 어느 시대에서건 희소하다. 그러므로 그렇게 드러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중하게 다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2.
올덴부르크는 변한다. 시야가 새로운 시대를 창조한다는 자부심으로 좁아져 있을 때 올덴부르크는 스피노자에게 저작들을 출판할 것을 강하게 촉구한다.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런던탑에서 죄수 생활을 하고 나자 그의 시야는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올덴부르크는 스피노자에게 저작들을 출판하지 말 것을 간곡히 권유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대의 풍세는 올덴부르크를 때로는 진보적인 사람으로, 때로는 보수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올덴부르크가 폭풍에 흔들리는 배였을 때 스피노자는 등대처럼 자기 자리를 지켰다. 그것이 스피노자에게 만족을 주는 삶이었는지는 지금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스피노자를 철학자로 정의한다는 것과,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등대로써 지금도 우리 눈 앞에 있다는 것일 테다.

3.
"스피노자의 편집증적인 탐구를 촉발한 확고부동한 신념들에 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경우에 수수께끼는 오히려 그러한 신념들의 원천에 있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반면에, 라이프니츠는... (그 자신이 말한 그 숱한 것들을) 도대체 믿긴 믿은 것인가?"("스피노자는 왜" 168 페이지)

여기 똑같은 문제가 또 나온다.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의 진리성을 확신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스피노자가 죽기 전의 마지막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는 사소한 구절마저 그의 철학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반면 그의 철학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찾아내기 힘든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는 의지의 자유를 부정한다. 나는 그의 철학 체계 안에서 의지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매우 정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지의 자유의 부정은 체계에서 연역된 것이라기보다는 체계를 건설해 가는 과정의 한 단계였을 것이다. 그러면 어디서 이러한 관념을 얻었을까? 그리고 왜 이런 관념을 채택했을까? -일단 나는 모른다.

라이프니츠의 경우에 대해서는 그리 고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라이프니츠는 무엇보다도 법률가이자 외교관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벌거벗은 진리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일 것이다. 여하튼 그가 자신의 주장을 믿었건 말건은,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전혀 중요치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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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08-01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를 다시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Weekly 2013-08-01 17:1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요즘 오히려... 좀 가볍게 사는 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 베르그손이 스피노자는 모든 철학자의 첫번째 철학자라든가... 하는 말을 했다던 기억이 나네요. 동의할 수 밖에 없지만 저에게 스피노자는 마치 알의 껍데기처럼 느껴지네요...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와 화이트헤드의 "사고의 양태"를 읽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책은 "스피노자는 왜"와 같은 날 산 것이다. 서가를 둘러보다가 제목에 끌릴 수 밖에 없었고(스피노자의 "형이상학 단평"의 한 주제가 그것이므로) 첫 페이지를 펼쳐 보는 순간 살 수 밖에 없었다.

"...우리 경험 내의 요소들은, 그들이 중요성을 얻는 데 필요한 적정 시간 동안 존속되는 한, 그들의 가변성에 비례하는 <명석 판명성>을 띠게 된다..."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저 문장은 나의 최근의 사고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리고 나의 사고엔 부가적인 노력이 곁들여 지는 데, 그것은 나의 사고를 스피노자적인 틀 안에 구겨 넣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저 문장을 스피노자적인 틀 안에 구겨넣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매튜 스튜어트의 "스피노자는 왜"라는 책은 내게 또다른 가능성을 고민해 보도록 한다. 어쩌면 저 문장은 라이프니츠적인 관심을 더 많이 표현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매튜 스튜어트의 책에서 신-자연의 쌍으로 표현된 것들은 현대적으로는 가치-사태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매튜 스튜어트는 자신의 기획(근대성에 대한 두가지 태도로서의 가치론적 신관과 자연주의적 신관)에 맞추기 위해 스피노자를 과도하게 단순화시켰다. 즉, 스피노자에게서 가치론적 관점을 배제시켰다. 나는 스피노자에게서 가치론적 관점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스피노자의 체계에 정합적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숙제가 하나 더 생겼다.

(어제 거제에서 부친 짐이 도착했다. 그리고 지금 이 포스팅은 어떤 바위 위에서 모기를 쫒아가며 작성하고 있다. 모기 몇 마리가 엉겨서 자판 위에 떨어진다. 한 마리는 내 손에서 사망했다. 그러므로 빨리 피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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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를 다 읽었다. 재미있다. 그 재미의 일단은 라이프니츠를 코메디언으로 만드는 데서 나온다. 저자가 묘사해준 라이프니츠에서 "깡디드"의 팡글러스 교수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 저자는 라이프니츠의 외모를 여러 곳에서 우스갯 거리로 써먹는다. 나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저자의 결론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른다. 그래도 어쩌면 라이프니츠 전공자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든 저자의 결론에 따르면 라이프니츠의 철학이란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라는 부처님의 손바닥 안에서 벌인 한판 희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본질적으로 스피노자주의자인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태생을 거부하기 위해 벌인 자기 분열의 자취이거나.

스피노자 부분에 대해 말하자면 스피노자에 대한 좋은 입문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스피노자가 3차원의 철학자라면 매튜 스튜어트는 그 중 1차원 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스피노자에게서 제대로 보지 못한 부분, 외면한 부분에서 저자 역시 독자성을 고집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 부분 중 하나는 물론 "주체"다. 스피노자와 근대성에 대해 말하려면 그 상위 카테고리는 신이 아니라 주체여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주체 개념은 근대성의 주체 개념과 융합될 수 없다. 아마 많은 저자들이 이 점에 대해 논하여 놓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리고 내가 스피노자에게서 찾는 현대적 의의 중 하나도 이러한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저자의 결론 부분은 수사의 향연 이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책은 재미있고 얻는 바도 많다. 나는 이곳 저곳에서 "끙" 소리를 내거나 "앗하!"하는 감탄을 하였다. 이런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한번 더 읽고 리뷰에 올릴 생각이다.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라는 제목에 딴지 하나 걸자면 몰래 만난 사람은 스피노자가 아니라 라이프니츠다.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날 이유가 없었다. 제목을 저렇게 뽑은 이유는 스피노자가 라이프니츠보다 브랜드 파워에서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데카르트보다 더. 어쩌면 다 덤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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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 문고에 갔다. 얼마만이던가. 깔끔하고 산뜻했다. 천장을 덮고 있던 유리가 사라진 덕분인 것 같았다. 천장의 유리는 서점을 두 배는 더 사람들로 북적여 보이게 만든다. 교보 문고 사장이 원한 게 그런 것이라면 나는 세 배는 더 북적여 보이게 만들 방법을 말해 줄 수 있을 텐데...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상식으로 돌아와줘서 감사.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를 손에 들었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스피노자를 주제로 하는 책이 다룰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에피소드라고 생각해 왔다. 책은 거의 600 페이지에 가깝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들로 채울 수 있는 분량은 아니다. 적어도 "비트겐쉬타인은 왜?"와 같은 엉터리 책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롤로그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19 페이지. "(스피노자)는 우리가 자연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분쇄되고 난 후라면 과연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를 서술한다. 그는 낡은 신학이 신뢰를 잃어버린 시대에 어떻게 행복과 덕을 찾을 것인지 그 수단을 처방한다." 나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계산대로 향했다.

오늘 종일 이 책을 읽었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다. 이 책은 훌륭하다. 특히 9장부터는 탁월하다. 나는 스피노자에 대해 매튜 스튜어트처럼 이야기해 주는 저자를 기다려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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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라가는 길에 읽으려고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을 샀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감명 깊게 본 기억이 났다. 저녁녁. 고속 버스의 실내 독서등이 켜지지 않는다. 커튼을 열고 저물어가는 하루의 빛에 기대어 책을 읽었다. 대사가 마땅치 않다. 전날 헤밍웨이를 읽은 휴유증이 남았나 보다. 날은 어두워지고 나는 그만 책을 내려 놓는다. 테레비젼에서 뭔가가 부지런히 움직인다. 아이폰을 들여다 보지만 밧데리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창 밖을 본다. 노란 불빛들을 옹기 종기 모아 놓은 마을이 보인다. 그 너머로 투명하고 파랗고 선명한 외곽선이 땅의 경계를 짓고 있다. 마을은 급격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무성한 나뭇잎들이 그것을 대신한다.

차가 휴게소에 들어서자 실내등이 켜진다. 덩달아 내 자리의 독서등도 켜진다. 전기를 아끼느라 독서등을 꺼 두었었나 보다. 그 세심한 마음씀에 감탄. 다시 출발하려고 기사 아저씨가 인원 파악할 때 나는 손과 눈에 힘을 주고 책을 붙들었다. 봤겠지? 봤다. 차가 출발하고 실내등이 꺼지자 나는 독서등을 켰다. 노란 불빛이 책장에 떨어진다. 작은 활자들이 희미한 몸짓을 한다.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겼다. 글자들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피곤한 눈을 차창 너머로 옮겼다. 기하학적이고 거대한 구조물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작은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차는 내가 살던 마을을 지나왔을 것이다. 엊그제까지 일하던 공장을 지나왔을 것이다. 처음 거제에 들어갔을 때 일했던 공장을 지나왔을 것이다. 바다 위에 걸린 다리를 건너 거제와 작별했을 것이다. 나는 그 모든 순간을 놓쳤다. 나는 나의 무관심과 냉정함이 부끄러웠다.

이제 톨게이트다. 앞에도 옆에도 차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나를 태운 차는 한번 멈추지도 않고 톨게이트를 통과한다. 마치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나는 내가 "세월"이라는 작품에 몰입하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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