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카테고리는 류비셰프를 따라 내가 일한 시간을 기록하고 분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게을러져서 업데이트를 통 안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류비셰프 방법에 대한 사용(후)기를 간단히 적어보기로 한다.

장점: 일하게 한다. 생산적이게 한다. 분석가능하게 하고 예측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효율적이게 한다.

단점: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한다. 예를 들면 책 한권을 읽는 것보다 두권을 읽는 것이 더 생산적으로 보일 것이다. 한 시간 공부한 것보다 두 시간 공부한 것이 더 생산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함정일 수 있다.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은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페이지를 읽을 수 있는 책, 즉 좀 더 가벼운 책쪽으로 나를 유혹한다. 책 한권을 읽고 소화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적어도 한번 읽은 것은 읽지 않은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은 책 한권을 채 소화하기도 전에 다른 책으로 손을 뻗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의 사고는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을 때 가장 활발할 수 있다. 나같은 경우엔 걸을 때가 그렇고 책을 덮고 누웠을 때가 그렇다. 그러나 이런 시간들은 시간 기록에서 제껴 놓아야 하는 시간들일 경우가 많다. 책을 덮고 누웠을 때 나는 타이머를 끈다. 그러므로 그 시간은 기록상으로는 아무 시간도 아닌 경우가 많은 것이다. 최근에는 읽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데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쓰기를 마치려 한다. 더우기 쓴다는 것은 시간 기록상으로는 완전한 실패로 보일 때도 있다. 즉, 몇 시간 동안 쓴 것을 결국 폐기해야 했을 때. 이걸 기록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시간 기록에 극도로 게으르고도 마음에 별 가책을 받지 않고 있다.

둘 중 하나다. 위의 단점은 류비셰프 방법 자체의 단점이든가, 내가 운용을 잘못한 탓이든가. 아마 후자일 것이다. 그러나 전자에도 얼마간 의혹을 던질 수 있는 것이 류비셰프에게서 비슷한 증상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류비셰프는 엄청난 양의 생산물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쓰던 것과 같은 류의 업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급 업적이냐 아니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집중도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류비셰프는 툭 하면 새로운 주제로 튀어 나갔다고 한다. 산만하게 방대한 영역을 휘젖고 다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산만함의 이유를 그의 시간 통계 장치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어 시간 주업무에 집중하고 나면 누구나 피로를 느낀다. 다른 학자들이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다시 주업무에 복귀하는 순간에 류비셰프는 다른 부업무에 빠져 들었을 수 있다. 또다시 피로가 느껴지는 순간이 오면 류비셰프는 또다른 업무로 스위치 했을 수 있다. 물론 류비셰프는 하루 중 상당량의 시간을 주업무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그 시간과 에너지는 다른 부업무들을 고려하여 적절하게 배분된 것일 수 있다. 즉, 기록된 만큼보다 덜 집중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류비셰프도 하루 8시간 동안 5 페이지의 진척을 보였다는 기록보다는 다양한 항목에서 다양한 성취를 얻은, 그러니까 좀 더 긴 기록을 좋아했을 수 있다. 그것 역시 다양한 관심사로 그를 이끄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어떤 관심사에 대해서건 그에 투여한 시간과 업무 항목은 그를 충분히 만족시켰을 것이다. 시간 자체는 차이를 보여주지 않으므로.

이렇게 쓰고 보니 단일하고 집중된 일을 하는 경우에는 류비셰프의 방법이 적당치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스티븐 킹은 하루에 열 페이지를 쓰는 걸 작업 규칙으로 삼는다고 한다. 만약 스티븐 킹이 류비셰프의 시간 통계를 사용한다면 그의 시간 통계 내역은 무미건조할 것이다. 류비셰프의 경우라면 평균 업무 시간량만 나와준다면 어제까지 하던 작업을 거침없이 제쳐 두고 딴 일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이 나와 버렸다. 베드로 앞에 두툼한 시간 통계 장부와 수많은 영역에 걸친 수많은 성과물을 자랑스레 펼쳐 보이는 것보다는 내가 가장 잘 하는 영역에서 높은 순도로 이루어진 성과물을 내놓는 것이 내게는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

이로써 나의 게으름에 대한 흠잡을 데가 별로 없는 면죄부가 작성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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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22 2012-06-05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고~; 방금 놀랍다는 댓글쓰고 또 한번도 쓰고...다시한번 쓰게 만드시네요ㅋㅋ;;
저는 글로 작성하신 그런 케이스를 "내 열정" 혹은 편집증(강박), 여튼 병적인거라고 생각하고있었는데...미적인 결과물이나...기타 등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 반복패턴을 합리화 했더라지요...사실 아직도 정답은 모르겠습니다^^
 

이 카테고리 안에는 스피노자의 저작들에 대한 나의 번역이 들어갈 것이다. 지금 품고 있는 야심은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신, 인간 그리고 행복에 관하여", 그리고 "지성개선론"까지이다.

일차적으로 이 번역들은 스피노자를 깊게 읽고자 하는 나의 노력의 결과물일 것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스피노자 자신이 표현한 대로의 스피노자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소망의 실현일 것이다.

아다시피 스피노자의 철학은 쉽지 않다.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스피노자의 문제 의식, 즉 스피노자에게 흘러 들어간 사고들, 그렇게 해서 발아된 사고들, 그렇게 해서 배척된 사고들,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의 사상의 맥락이 매우 두텁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의심의 여지 없이 스피노자가 다루고 있는 주제 자체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즉, 철학 고유의 영원한 문제들. 덧붙여 스피노자의 독특한 표현 방식도 이유 중 하나로 들 수 있겠다.

여기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첫번째 항목일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부록으로 실린 "형이상학 단평"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저작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스피노자 당대의 신스콜라 철학자들과 직접 연결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중세 철학으로의,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의 소급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또, 스피노자 철학의 완성태는 "에티카"이므로 에티카에 대한 포괄적이고 심도 있는 선이해 안에서 이 저작이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등등...

이쯤에서 자명해지는 것은 시작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런데 어쩌면 니체의 말 한마디를 내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시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 다음에 나온다. -이런 데 와서 고생하는 니체에게 미안.

그러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작할 것이다. 일단 시작하고 고쳐나가는 방식, 즉 신이 작업하던 방식(진화)을 따를 것이다. 나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스피노자를 공유하고 싶기 때문에 스피노자를 최대한 이해될 수 있는 한국어 문장으로 바꾸어 놓으려 노력할 것이다. 스피노자가 의미있는 것은 그가 다룬 문제들이 현재에도 의미 있기 때문일 것이므로 나는 스피노자라는 빛으로 현재를 조명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즉, 스피노자를 주석하는 데 아무 거리낌을 갖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카테고리는 스피노자에 대한 나의 이해를 깊게 하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라.

자, 이 정도면 충분히 거창하다. 그러니 이제 몸통과 꼬리를 내놓아 보아라!

기본 대본은 아래와 같다.
Edwin Curley, The Collected Works of SPINOZA
Samuel Shirley, SPINOZA COMPLETE WORKS

(참조 가능한 판본과 언어의 가짓수를 늘리는 것 또한 나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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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거제 해금강에 다녀왔다.
스티븐 나이들러의 "스피노자" 5장, 6장까지 읽고 책을 책장에 꽂아 두었다.
컬리판 The Collected Works of SPINOZA 중 "형이상학 단편"을 읽기 시작했다.
스티븐 베이커의 "뉴머러티"를 읽고 있다.

1.
곧 이곳 거제를 떠난다. 떠나기 전에 거제 이곳 저곳을 둘러 보고 싶어 해금강에 다녀왔다. 신선대와 바람의 언덕이 좋았다. 유람선은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해금강은 바다 색깔부터 달랐다. 신선대의 괴암들을 바라보다 문득, 저것들이 어떻게 생성되었을지 궁금해 졌다. 신선대는 화성암(맞나?)인 것 같은데 부위 별로 색깔이 달랐다. 또 두꺼운 편리(맞나?) 같은 게 겹쳐 있었다. 생성 기원이 다른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암석 덩어리가 나란히 서 있기도 했다. 언어가 없어 답답했다. 지질학 공부를 하고 싶어 졌다. 시어리어슬리.






2.
스티븐 나이들러의 "스피노자"에 대한 흥미가 되살아나지 않는다. 나중에 필요할 때 다시 보겠지 싶어 책장 안으로 퇴장시켰다. 간단한 리뷰를 여기에 쓰기로 한다. 좋은 얘기를 하게 될 거 같지 않아 따로 리뷰 카테고리에 리뷰를 쓰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번역 상태가 좋지 않다. 굉장히 서둘러 번역한 느낌이 난다. 특히 스피노자의 철학 부분을 서술하는 부분에 약점이 많다. 그냥 그러려니 하다가 역자의 프로필을 보고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역자는 이미 스피노자의 "신학 정치론", "정치론"을 번역해 낸, 말하자면 나름 스피노자 권위자다. 그런데 마치 스피노자라는 철학자를 처음 대하는 사람인냥 번역을 해놓았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미스테리를 느낀다. 악역으로 이름 높은 "새로운 과학 사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프로필을 보면 역자는 바슐라르에 대한 논문과 책을 쓴 바슐라르 전문가다. 그러나 번역된 책을 보면 마치 바슐라르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번역을 해놓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화가 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이유에 대해서 지적 호기심을 느낀다는 말이다.

편집적인 부분을 보자.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스피노자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이다. 그리고 번역 대본은 "Spinoza by Steven Nadler"로 되어 있다. 나는 스티븐 내들러가 "Spinoza: A Life" 외에 "Spinoza"라는 제목의 또 다른 책을 썼나 싶어 잠시 혼란을 느꼈다. 한국어판 책 제목을 달리 하더라도 원 대본의 서지 정보는 정확히 해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중에는 나같이 바보같은 독자도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사소한 부분 몇 가지를 더 말하자. 책 앞 부분에 도판이 몇 개 있다. 올덴버그도 있고 므나세도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없다. 결과적으로 이 책에는 스피노자의 초상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쪽수 번호가 책 안쪽 접히는 부분에 적혀 있다. 색인과 해당 페이지를 왔다 갔다 하다보니 그게 사용자 경험을 고려한 방식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말 하기가 좀 그렇긴 한데 한번 물어 보자. 도대체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란 말이 무슨 뜻인가? 스피노자를 야만적 별종이니 탈주자니 전복자니 하는 수식어로 광고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내게는 그저 말장난으로 들릴 뿐이다. 스피노자에게 저런 타이틀을 붙인다고 책이 얼마나 더 팔릴까 싶기도 하다.
어떤 책에는 이렇게 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신학-정치적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그는 레인스뷔르흐, 포르뷔르흐, 레이든 등지에 은둔해, 암스테르담에서 그를 지지했던 '스피노자 서클'과 함께 지하 활동에 들어간다. 발리바르의 표현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민족 해방 투쟁의 후계자이자 시민적 자유와 양심의 자유, 지식인의 자율성을 옹호한 투사였다." 제발!! 이러지 말자.

이제 원저작자쪽으로 방향을 틀어보자. 솔직히 내들러의 책은 지루하다. 일반적으로 철학자의 전기는 철학자의 사상에 접근하기 쉽도록 짜여진 입문서 역할을 한다. 철학자의 개인사와 당시의 정치 사회적 역학 관계, 철학자가 영향을 주고 받은 지적 환경 등등이 적당히 버무려져서 철학자의 사상에 맥락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내들러의 책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서술과 유대 관련 자료가 과도하게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내가 편집자라면 적어도 1/3은 잘라내려 했을 것이다. 내들러가 섭렵한 자료들의 방대함, 그 철저한 고증에는 거의 경외감마저 들지만 정작 중요한 스피노자의 삶과 사상의 변증법은 대체로 평면적이고 생기없게 취급되고 있다. 요는 내들러의 관심과 기획이 내가 기대하던 것과는 달랐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면 내들러의 편집자는 어떻게 했는가? 나같은 독자는 뭣 모르고 내들러의 책을 구입했다가 꾸벅꾸벅 졸면서 책을 읽다가, 의무감에서 읽다가, 결국 치워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사태를 내들러의 편집자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내들러의 편집자는 어떻게 했는가? "철학을 전복한 철학자"라는 아무 알맹이 없는 수사로 어떻게 해서든 눈먼 독자들의 지갑을 열려고 했을까? 책 맨 앞부분을 보면 양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참으로 부러웠고 그러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조직)이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다음은 (아마도) 이 책의 편집자가 이 책에 대해 소개한 글이다. 맨 첫 페이지에 있다.

"이 책은 각종 언어로 쓰인 스피노자의 전기 중 최초의 완전한 전기이며, 상세한 기록들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다. 그렇다고 스피노자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단순히 열거하지 않는다. 이 책은 17세기에 유대인이 살고 있던 암스테르담의 중심부로, 그리고 유대교에서 발생한 스피노자의 추방 사건을 포함한, 초기 네덜란드 공화국의 동요하는 정치적, 사회적, 지적, 종교적 세계의 한 가운데로, 독자들을 이끈다.
이 책은 철학자들, 역사가들, 유대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 유대 역사, 17세기 유럽의 역사 또는 네덜란드 황금기의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독자 대중을 위해 쓰였다."

정확하고 솔직한 소개글이다.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다. 그리고 이런 것이 양식이라고 본다.

3.
컬리판 "스피노자"로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부록으로 달려 있는 "형이상학 단평"을 읽기 시작했다. 내 느낌에는 스피노자를 이해하는데 부록"들"만큼 적당한 분량에, 상대적으로 쉽고 명료한 서술을 하고 있는 문헌이 없는 것 같다. 이제 첫 장을 읽었지만 스피노자의 명료한 사고와 논리에 감탄하고 있는 중이다. 번역을 해서 올려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만한 실력이 되기만 한다면. 이제 시간은 핑계가 아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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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 제7장, 8장을 읽었다.
스티븐 베이커의 "뉴머러티"를 읽기 시작하다.

1.

lifting

공장 철제 기둥에 붙어 있던 포스터다. 어제 점심 시간에 아이폰으로 찍어 놓았다. 포스터 아래의 손자국은 물론 나의 것이다. 포스터 아래가 말려 있어서 펴느라고 손을 좀 댔다.

포스터 문구를 보면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은 매우 구체적인데 한국어로 되어 있는 것은 두리 뭉실하고 추상적이다. 한국어 문구를 읽고 나서는 사고를 한번 더 해야 한다. "어떻게 드는 것이 바른 자세로 드는 거지요?" 비경제적이다. 왜 저렇게 번역했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난 한국인들은 매우 추상적인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예를 들 수 있겠으나 딱 하나만 들겠다.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구글노믹스"다. 그리고 원서 제목은 "What would Google do?"다. 더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작가 박상륭도 비슷한 얘기를 한 것 같다. 동양의 고전은 너무 추상적이라서 읽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영문판으로 읽었더니 이해하기가 쉽더라. 공감.

추상이란 약어이며 기호이다. 그것은 사태들을 조망할 때, 그리하여 새로운 연결을 발견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추상이 의미가 있으려면 언제든 구체적인 사태를 가리킬 수 있어야 한다. "바른 자세로 든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언제든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무릎을 구부려 물건을 들라는 얘기입니다."라고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화될 수 없는 추상이란 완전히 무용하다. 사태와의 연결을 찾을 수 없는 개념은 말장난일 뿐이고 말장난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자 파인만도 비슷한 말을 했다. 파인만은 어떤 개념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점검할 때 물리학의 문외한(예컨대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혈기왕성한 숙모)에게 그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파인만의 설명을 듣고 그 문외한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길을 살살 피하면 파인만은 "내 차라리 난로에 대고 이야기하는 게 낫겠구먼..."이라고 혀를 차는 것이 아니라 "이 개념에 대한 나의 이해가 아직 부족한가 보군..." 하고 결론 내렸다는 것이다.

추상을 최대한 일상의 영역으로 끌고 내려온다. 다시 말하면 일상어로 번역한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개념은 힘을 갖고 있는, 적법한 개념이다.

후기 비트겐쉬타인이 왕성하게 토해내던 실험들이 그런것 아니었는지?

추상은 벼랑끝에 걸린 바위와 같다. 그것은 언제든 땅으로 떨어져 내리려 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구체로 향한다. 추상이 내려 앉을 저 땅, 그것이 진리의 영역이다. 그러나 추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추상이 구체와 아무런 연결을 맺고 있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사람들과 함께 진리를 향유하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추상을 좋아하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추상이 벼랑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걸 막으려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이런 말을 좋아한다. "질문 금지!"

제도 교육이 고도로 발전시킨 기술은 바로 "질문 금지!"를 명시적이지 않게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이었다.

정치에 있어서도 똑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추상이란 주제로 시작한 이 이야기는 하나의 삶의 방식, 즉 민주주의라는 삶의 방식을 결정적으로 가리키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유롭게 의심하는 것이며 질문하는 것이며 진리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것이며 진리의 바닥에서 몸소 길어온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권위는 오로지 진리의 바닥에 기반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아래는 들뢰즈의 어떤 단편의 첫 문단이다.

   
 

Philosophy is the theory of multiplicities, each of which is composed of actual and virtual elements.

철학은 다양체들(multiplicities)에 관한 이론이다. 다양체들은 (현상)현실적인 요소들과 잠재(활력)적인 요소들로 구성된다.

Purely actual objects do not exist. Every actual surrounds itself with a cloud of virtual images.

현실적이기만 한 대상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현실적인 것은 그 주위를 잠재적인 이미지들의 구름이 둘러싸고 있다.

This cloud is composed of a series of more or less extensive coexisting circuits, along which the virtual images are distributed, and around which they run.

이 구름들은 그 외연의 크기가 다른, 일련의 공존하는 회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회로들을 따라 잠재적인 이미지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이 이미지들은 그 회로들을 돈다.

These virtuals vary in kind as well as in their degree of proximity from the actual particles by which they are both emitted and absorbed.

이 잠재적인 것들은 그 종류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입자들과의 거리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현실적인 입자들은 잠재적인 것들을 방출하는 동시에 흡수한다.

They are called virtual in so far as their emission and absorption, creation and destruction, occur in a period of time shorter than the shortest continuous period imaginable; it is this very brevity that keeps them subject to a principle of uncertainty or indetermination.

이 방출과 흡수, 창조와 파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연속적 시간보다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한에서 이것들은 잠재적이라고 불린다. 잠재적인 것들을 불확실성 혹은 비결정(indetermination)의 원리에 종속된 상태에 놓는 것은 바로 이 짧음이다.

The virtuals, encircling the actual, perpetually renew themselves by emitting yet others, with which they are in turn surrounded and which go on in turn to react upon the actual: 'in the heart of the cloud of the virtual there is a virtual of a yet higher order...every vitual particle surrounds itself with a virtual cosmos and each in its turn does likewise indefinitely.‘

현실적인 것을 둘러싸고 있는 잠재적인 것들은 또 다른 잠재적인 것들을 방출함으로써 스스로를 영속적으로 갱신한다. 이 새로이 방출된 것들이 다시 [원래의] 잠재적인 것들을 둘러싸며 그 다음으로 현실적인 것에 작용하게 된다. ‘잠재적인 것의 구름의 중심부에 더 높은 등급의 잠재적인 것이 있다...모든 잠재적인 입자는 그 주위를 잠재적인 우주가 둘러싸고 있으며, 이런 식으로 무한하게 이루어져 있다.’

It is the dramatic identity of their dynamics that makes a perception resemble a particle: images, distributed on increasingly remote, increasingly large, moving circuits, which both make and unmake each other.

지각(perception)으로 하여금 입자를 닮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동력학의 극적인 동일성이다. 현실적인 지각은 그 주위를 잠재적인 이미지들의 구름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 이미지들은 갈수록 멀어지고 점점 더 커지는 움직이는 회로들 위에 분포되어있으며, 이 회로들은 서로를 만들었다, 없앴다 한다.

These are memories of different sorts, but they are still called virtual images in that their speed or brevity subjects them too to a principle of the unconsciousness.

이것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기억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 속도와 짧음으로 인해서 무의식의 원리에도 종속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잠재적 이미지들이라고 불린다.

 
   
(출처는 http://trustsun.net/xe/?mid=bookreading&page=2&document_srl=811이며 내가 이 포스팅에서 하고 있는 말은 원글 작성자에 대한 비평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저 글을 읽고 혐오감을 느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다. 들뢰즈는 저런 식의 표현을 쓴 것에 대해서 정당성을 추궁받아야 할 것이다. 나로서는 이러한 경우를 생각해 줄 수 있다. "나는 원래 현대 물리를 전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의 사고가 과도하게 현대 물리적 언어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런 표현을 쓴 것은 제게 발생한 사고를 빠르게 포착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점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들뢰즈가 이러한 경우에 속하는지?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들뢰즈의 저러한 표현들이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지 매우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가능성은 두가지다. 들뢰즈 사상의 심오함, 아니면 말장난. (물론 심오함과 말장난은 종이 한 장 차이일 수 있고 나는 그러한 예들을 더러 알고 있다고 말하겠다.)

심오함과 말장난 사이를 가르는 기준을 우리는 갖고 있다. 바로 앞서 소개한 파인만의 원칙이다. 들뢰즈의 해설자이든지 스피노자의 해설자이든지 학교 교사이든지 기업 사장이든지 그게 누구든 어떤 주장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파인만의 원칙을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것만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다. 즉, 탈선과 위선, 오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다.

횡설수설은 여기까지 하자. 방법론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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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로 2015-03-07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추상적인 말을 풀어서 설명하지 못하면 이해를 못한게 아닌가 에세이를 쓰면서 고민하던 생각이었는데 명료해졌습니다 감사해요

weekly 2015-03-10 03:2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도 예전에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어 보게 되었네요.:)

지금 다시 읽어 보니... 무엇보다도 들뢰즈에 대한 언급이 조금 걸립니다. 어쩌면 들뢰즈의 철학을 가장 응축적으로, 가장 효과있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0. 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 9장, 10장을 읽었고 지금은 7장을 읽고 있다.

1. 회사 그만 두기 전날. 매주 수요일은 이 지역의 모든 공장이 잔업이 없는 날이다. 삼성중공업의 본을 따라 모두 그렇게들 한단다. 동료와 저녁 식사를 하러 시내에 나갔더니 똑같은 옷(삼성중공업의 사복을 거의 모든 삼성 하청업체들이 자사 유니폼으로 채택했다)을 입은 사람들로 거리와 식당이 붐볐다.

갈비탕집에 빈 자리가 있어 거기서 갈비탕을 시켜 먹었다. 옆 자리에는 남자 셋과 여자 하나가 밥을 볶아 먹고 있었다. 그네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퇴근하고 기숙사에 있다가 시간이 아까와서..." 시간이 아까와서 밖으로 나가 동료들과 술도 먹고 그런다는 이야기다. 그러다 보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고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 지고... 그러나 퇴근하고 나면 또 "시간이 아까와서..."의 반복.

맞은 편 여자가 "책 읽으면 되잖아요..." 라고 말한다. 나도 그걸 선택했다. 그냥 자기에는 시간이 아까와서...

공장 노동자들은 종속노동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느낀다. 종속노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공장 노동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일 게다. 한국의 거의 모든 공장들은 잔업이 기본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보통 하루 12시간을 공장에서 보내게 된다. 그 12시간에다가 출퇴근 시간과 잠자는 시간 등의 생리적 용도의 시간을 더해 보라. 무엇이 남을까? 우리가 생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위해 남겨진 시간은 없다. 그러므로 생리적 용도의 시간을 줄여서라도 "생활"을 위한 시간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시간이 아까와서... 라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2. 회사 그만 두던 날. 그러니까 어제. 내가 일하는 업종은 이직이 비교적 자유롭다. 그래서 그만 두는 날에 통고하거나 아예 아무 말도 없이 그만 두는 사람도 많다. 나는 인수인계를 생각해서 이주 전에 미리 이야기를 했었다. 반장에게 당분간 비밀로 해달라 했지만 다음날 오전부터 사람들은 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난 이 주는 길었고 내 마음은 펄럭였다. 드디어 그만 두는 날. 나는 작업 종료 시간보다 이르게 토치를 내려 놓고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작별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가는 귀가 먹은 노인도 있고 캄보디아 사람도 있고 조선족도 있다. 필리핀 친구 하나가 캔음료 하나를 건네 주어서 받아 왔다.

친구가 문자로 이제 새로운 장(chapter)로 넘어가는 거냐고 물어왔다. 내 느낌이 정확히 그랬다. 이제 인생의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는가 보다. 새로운 장은 아직 쓰여 지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 아이마냥 왼쪽 가슴에 작은 손수건을 달고 가방 필통엔 전날 밤에 누나가 정성스레 깍아준 연필을 가득 담아 놓았다. 글쎄 뭔가 집에 빠뜨리고 온 것이 있긴 할거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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