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올라가는 길에 읽으려고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을 샀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감명 깊게 본 기억이 났다. 저녁녁. 고속 버스의 실내 독서등이 켜지지 않는다. 커튼을 열고 저물어가는 하루의 빛에 기대어 책을 읽었다. 대사가 마땅치 않다. 전날 헤밍웨이를 읽은 휴유증이 남았나 보다. 날은 어두워지고 나는 그만 책을 내려 놓는다. 테레비젼에서 뭔가가 부지런히 움직인다. 아이폰을 들여다 보지만 밧데리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창 밖을 본다. 노란 불빛들을 옹기 종기 모아 놓은 마을이 보인다. 그 너머로 투명하고 파랗고 선명한 외곽선이 땅의 경계를 짓고 있다. 마을은 급격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무성한 나뭇잎들이 그것을 대신한다.
차가 휴게소에 들어서자 실내등이 켜진다. 덩달아 내 자리의 독서등도 켜진다. 전기를 아끼느라 독서등을 꺼 두었었나 보다. 그 세심한 마음씀에 감탄. 다시 출발하려고 기사 아저씨가 인원 파악할 때 나는 손과 눈에 힘을 주고 책을 붙들었다. 봤겠지? 봤다. 차가 출발하고 실내등이 꺼지자 나는 독서등을 켰다. 노란 불빛이 책장에 떨어진다. 작은 활자들이 희미한 몸짓을 한다.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겼다. 글자들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피곤한 눈을 차창 너머로 옮겼다. 기하학적이고 거대한 구조물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작은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차는 내가 살던 마을을 지나왔을 것이다. 엊그제까지 일하던 공장을 지나왔을 것이다. 처음 거제에 들어갔을 때 일했던 공장을 지나왔을 것이다. 바다 위에 걸린 다리를 건너 거제와 작별했을 것이다. 나는 그 모든 순간을 놓쳤다. 나는 나의 무관심과 냉정함이 부끄러웠다.
이제 톨게이트다. 앞에도 옆에도 차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나를 태운 차는 한번 멈추지도 않고 톨게이트를 통과한다. 마치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나는 내가 "세월"이라는 작품에 몰입하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