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 총서 1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 엮음 / 동인(이성모)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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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는 "파시스트 국가의 전제정치"에 대항한 싸움과 "가부장적 국가의 독재"에 대항한 싸움을 동일선상에 놓고 남성문화 전체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울프는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지배적 문화와 전통이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폭정으로, 정치적으로는 파시즘과 같은 독재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가부장적 아버지가 바로 독재자라는 점을 설명한다.- p. 415~416

 
   

 <버지니아 울프>는 동인 출판사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소설, 일기 등에 대해서 대게 권위 있는 교수들이 발표한 논문 자료들을 모아서 펴낸 책이다. 소설 자체에서 나타나는 버지니아 울프 특유의 문학 기법에 집중한 논문도 있고, 버지니아 울프가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로서 당시의 역사적 문학적 상황을 반영한 점에 집중한 논문도 있다. 본 논문에서는 노턴에서 주로 언급한 시대적 상황과 연관 지어서 <버지니아 울프> 주제를 총체적으로 정리해보려 한다. 특히 여성의 권리가 사회의 새로운 권리들 중 하나로 등장하는 과정, 그리고 여성의 권리보장이 사회에 미치는 직접적 간접적인 영향들을 예측하면서 적어보려 한다.
 우선 나의 독단적인 의견도 다소 첨가해보려 한다. 사실 내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 중에서 제대로 정독한 소설은 <등대로>와 <댈러웨이 부인>, 이 둘밖에 없다. 살면서 보통 사람들보다는 많은 책들을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어려워서 아무리 읽어도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책 혹은 도저히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용납하지 못하는 책이 몇 권씩 있다. 후자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버지니아 울프의 책은 전자에 해당한다. 그나마 <등대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논문들 중 하나를 쓰신 김정 교수님에 의해서 차근차근 배워서 읽었다. <댈러웨이 부인>은 이 책을 읽기 전 최근에 미리 읽어보았는데, <등대로>보다 비교적 읽기 쉽다고 생각했었지만, 이 책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나보다. 세부적인 사항들 속에 버지니아 울프의 저항의식이 숨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미세한 것까지도 몸을 굽혀서 들여다 보는 시각을 가져야 버지니아 울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녀는 감정을 소설 언저리에서 희미하게 표현해내는데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녀는 사회에서 유발된 분노와 공포를 맨 손으로 붙잡은 뒤 뭉쳐서 크게 만들고 딱딱하게 굳혀서 화석으로 만든 뒤, 소설 속 깊이 박아 넣는데 탁월한 솜씨를 지녔다. 설사 겉보기만 대충 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이 딛은 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 위를 불편하게 지나다니고는, 버지니아 울프의 책이 어렵기만 하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심정에서는, 여성차별의 씁쓸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데 대한 불안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와 제임스 조이스가 등장하기 전 시대는 빅토리아 시대이다. 사실 19C가 시작하기 전에도 여성은 소설을 썼다.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그리고 조지 엘리엇은 ‘여성문학’이라는 장르 하나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 브론테 자매 중 한 사람이 여성소설가로서 살아가기 위해 조언을 구했을 때, 로버트 소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문학은 여성의 삶에서 일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거다.” 여성이 재산을 소유할 법적 권리도 이제 막 보장되기 시작한 시대였다. 참정권이 공식적으로 보장된 때는 2차 세계대전 이전이었으므로 더욱 오래 시간이 걸렸음은 물론이다. 교육확립의 자유를 얻음으로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공부를 하는 여성 학생들이 많아지고 여성대학도 세워졌다. 그러나 <제인 에어>에서 나오는 여성학교 내의 온갖 인격모독적인 일들을 볼 때, 그리고 <자기만의 방>에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예산에 비해 여성대학의 예산이 한참 적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을 볼 때, 독자들은 당시 세부적인 점에서 어떤 차별들이 행해졌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산책에서조차도 여성은 차별을 당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의 영향력을 피하기 어려웠던 20세기 초반과 달리 <댈러웨이 부인>에서 런던 거리를 홀로 산책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1차 대전 이후 여성들이 영역 분리의 이데올로기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 핸킨스의 지적처럼 거리를 산책하는 행위에서 울프는 여성으로서 젠더를 보이지 않게 하는 보행자로서의 익명성이 주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점에 주목한다. - <버지니아 울프> p. 131
 

 빅토리아 시대에서 밖을 돌아다니는 여성은 창녀 취급을 받았고, 독신으로 사는 여성은 레즈비언 혹은 고집 센 노처녀나 히스테리컬한 페미니스트로 보았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에서는 울프의 소설 캐릭터 중에서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전형적 인물로서 <등대로>의 램지 부인을 손꼽는다. 그녀는 인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타인들을 충만하게 만들어주고 감싸안아주는 힘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힘이 다해 죽기 전까지 계속 그렇게 살아야만 했다. 병원의 의료시설과 낙농업에 독자적인 의견도 있고 그와 관련된 사업을 꾸려나갈 자신감도 있지만, 가부장 사회에서 그녀는 ‘집안의 천사’라는 미명하에 온전한 인간으로선 도저히 성취감을 느낄 수 없는 가정사에 묶여있는 것이다. 가정의 일도 중요하지만, 그녀의 눈앞 저 너머엔 다르게 살 수 있는 인생의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대에 만연한 차별 때문에 그녀의 가족, 그리고 그녀의 집에서 벌어진 파티에 참여한 사람들 외엔 전혀 알려지지 않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이 점에선 앞에서 이야기한 유명한 여성작가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성들이 글을 쓰기엔 힘든 현실이기에, 그녀들은 남자의 가명을 사용해가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이들 여성문학가들의 피엔 “익명성이 흐른다”고 말하며, “가리고 싶은 욕망이 그들을 지배한다.”라고 서술했다. 
 이 상황에서 근본적으로 스며들어있는 뒷 배경은 식민지를 지배하는 제국주의적, 남성적 사회에 있다. 에세이에서 그녀는 가상적인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장면을 등장시킨다. 한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그녀를 토요일마다 때린대. 지루해서라고 해야겠지, 술 때문이 아냐. 때리는 것 외엔 별로 할 일이 없거든." 우선 보수적이고 남성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고 세계는 광활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점점 넓어지는 세상에 의해 자신 스스로와 자신의 권력이 축소될까 두려워 변화의 비전을 상실한 채 일상에 갖혀 살아간다. 자포자기한 남자의 지루함은 타인, 즉 집에 갖혀있는 여성에게 가하는 만성적 폭력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까지 파괴하는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 행위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의식으로까지 이어진다. 1차세계대전 후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이전, 이 시절 영국은 전원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가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파시즘이 생겨났다고 한다. 파시즘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극도의 편협함과 전쟁을 떠올린다. 그러나 전원주의를 생각했을 때 우리는 파시즘이라는 단어보단 덜 부담스럽고 자연적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전혀 맞지 않아 보이는 이 두 이념이 갑자기 동시에 전국으로 퍼진 것을 보면, 전원주의 자체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홍보용 조작이었을지 모른다. 옛날 좋았던 영국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무슨 시대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무적함대를 부쉈을 적인 엘리자베스 시대? 아니면 인도를 신나게 짓밟았던 그 시대? 버지니아 울프는 영국이 다시는 ‘좋았던’ 옛날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막간에서) 포인츠 홀 내부의 서재나 침실에서 보이는 췬츠라는 면직물은 원래 인도에서 염색, 생산된 직물로 동인도 회사를 통해 타페스트리나 도자기 등과 함께 동양에서 유럽으로 수입되어 유행한 것으로 17세기 이래 영국 저택의 실내 장식에 널리 사용되었다. 췩츠가 영국의 가장 아늑한 공간에 남긴 이 흔적은 본래의 영국적인 문화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믿어지는 곳에서조차 영국 문화는 제국 주의의 영향으로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 <버지니아 울프>, p. 345
 

 무엇보다도 버지니아 울프는 <막간>에서 역사라는 드라마에 대해서 정의를 내린다. 드라마는 배우와 이에 박수치는 관객의 합작품이므로, 관객은 박수를 칠 수도 있지만 야유를 보내거나 극장을 떠나버릴 수도 있음을 일깨운다는 것이다. 배우 못지 않게 관객도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전혀 ‘다른’ 역사를 쓰는 것마저 가능하다. 폭력적 담론이란 위에서 받아들이고 바라보기만 했던 방관자가 선택하기 가장 쉬운 길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전기 땐 자기 세계에 갖혀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델러웨이 부인>이나 <올란도>, <막간>에서 남성적인 사회의 문제를 이렇게 확실히 지적하고 있다. 그녀가 사회 시대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고민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그 작고 미세한 사물들을 등장인물의 내면의식과 엮어 그렇게 적절히 표현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작가는 자기의 생각에서 떠오르는 것을 쓸 뿐이니까, 아무래도 울프의 사회의식들도 그런 식으로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성행함과 동시에 여성들의 권리를 개선하려는 움직임도 더욱 활발히 일어났으며, 이런 분위기는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워먼 퀘스천‘에서는 이미 빅토리아 시대에 sisterhood가 가부장적 사회에 대항하는 한 방식으로 한편에서 각광받기도 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에서 한 논문은 버지니아 울프의 양성적인 면모와 함께 <올랜도>에서 이런 특성을 잘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등대로>에서의 릴리 등 양성적인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서 “여자는 여자의 적이다”라는 패러다임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남성은 여성이 아무런 욕망도 없이 오직 허영심만 갖고 있다고 여성의 욕망을 무시하고, "여성은 동성에게 애정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서로 극도로 혐오한다"고 여성의 동료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폄하시킨다. 남성의 자극이 없으면 여성은 말도 안하고 서로 할퀴기만 한다는 그릇된 남성적 믿음은 "올랜도가 동성과의 교제에서 커다란 즐거움을 느낀다고 고백하였다"는 전기 작가의 언급에서 거짓임이 드러난다.- <버지니아 울프> p. 239
 

 물론 그녀는 극단적으로 여성적인 세계엔 찬성하지 않았다. 세상에 남성만 사는 것도 아니고, 여성만 사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여성과 남성 모두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관용적인 세상을 꿈꾸었다. 예를 들어, <자기만의 방>에선 한 택시에서 같이 내리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리고 <댈러웨이 부인>에서 등장하는 영국은 정확히 시간을 맞추는 딱딱하고 남성적인 ‘빅밴’, 그리고 빅밴보다 몇 분 늦게 작동함으로서 사람들에게 아직 여유가 있음을 알리는 ‘성 세인트 폴 성당의 종소리’가 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독재자로 발전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차별이 어느 정도 해결된다면, 다른 차별들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증폭현상도 해결될 수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소설의 기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드러냈다. 그녀는 기존 에드워드 시대의 사실주의 작가들을 물질주의자들이라 명명하면서, “일상적인 날의 일상적인 기분”을 표현하는 글들을 썼고, “Look within”을 주장하면서 모든 삶에 있어서 문제의 근본인 정신적 삶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하려 애를 썼다. 과거와 과거가 드러내어지는 과정에 있어서 그녀는 월터 페이터의 내면의 비전, 순간에 작용하는 힘을 보려고 애썼고, 인물과 독자 사이를 중개하며 인물의 생각들을 해석하는 ‘내적 분석’으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이는 여성성을 부각시켜 이미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성성과 동일해지려는 버지니아 울프의 노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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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선옥 옮김 / 집사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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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밋빛 얼굴이라고, 하고 부인은 냉소했다. 다 쓸데없는 거란다, 얘야. 왜냐하면 먹고 마시고 같이 자고 그리고 좋은 날 궂은 날도 있어서, 인생이란 장밋빛 얼굴 같은 건 문제도 되지 않거든. 더구나 정말이지, 이 캐리 뎀스터는 켄티시 타운에 사는 어떤 여자하고도 운명을 바꾸고 싶진 않았단 말이야! 그러나 그녀는 동정을 애원했다. 장밋빛 얼굴을 잃어버리 데 대한 동정을. - p. 45~46  
   

 신기하다. 김정 교수님께 <등대>에 관한 수업을 받고 나와서 그런가. 그럭저럭 내용이 이해가 잘 된다. 더불어 그녀가 소설에 집어넣으려고 애쓴 듯한 무언가의 감정들이 툭툭 살아서 튀어나오는 것이 선명히 보인다. 여태까진 막연히 그녀의 소설을 봤지만 이젠 사람들이 그렇게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버지니아 울프는 분노와 공포를 맨 손으로 붙잡은 뒤 뭉쳐서 크게 만들고, 딱딱하게 굳혀서 화석으로 남긴다. 그리고 그 것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소설 속에 박아넣는다. 독자들은 그 위를 불편하게 지나다닌다. 적어도 내가 느낀 그녀는 그랬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겨우 두 권밖에 읽지 못했지만, 그녀의 글 쓰는 방식이 하도 특이해서 오히려 그녀의 스타일대로 따라가면 주제를 쉽게 포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생각을 그저 물 흐르듯 흘러가게 한다. 한 명의 생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수십명의 생각들이 우리의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등장인물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가 사는 세상의 관점에서 세상을 내려다 볼 때 등장인물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이 책에서 담고 있는 이야기는 사랑이야기이다. '세상엔 다양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메세지는 넘치고 넘치지만, 이 책에서는 교훈만 달랑 담겨져있는 게 아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현실에 없는 댈러웨이 부인, 현실에 없는 피터가 된다. 그 오싹한 기분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 아울러 버지니아 울프가 항상 찬양하는 전통적인 여성, 남성을 거울처럼 비추는 여성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느끼게 된다. 그 즐거움을 직접 감상하시라고 마지막 부분은 인상깊은 글귀에 올리지 않았다. 직접 읽어라.

 사실 <등대>를 읽고, 영화로 봤을 때 많이 실망했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전하려고 하는 효과는 아무래도 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나보다. 그래서 사실 <댈러웨이 부인>을 영화로 선뜻 접하기는 겁이 난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그려냈다는 <세월>이란 영화는 보고 싶다. 매우 찾기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은 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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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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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너희 머릿속에 잘 주입되었겠구나."
"그럼요. 모두들 그 설교를 듣곤 새파랗게 질렸으니까요."
"너희들에게는 그런 설교가 필요하다고. 너희를 공부하게 하려면 그런 설교가 더 많아야지."- p. 195
 
   

  으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율리시스>에서 나온 스티븐 데덜러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이었다니! 그럼 난... 2권 완결인 책을 지금 거꾸로 된 순서로 읽었다는 것인가 의사양반!!! (그것도 한 중간쯤 읽고서야 깨달았다.)

 아무튼 이 책은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가치를 일구어내지는 못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까 앞에서 말했던 대로 1000장이 넘는 율리시스 이야기를 마스터했다보니 자꾸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쪽의 문체와 비교가 되었다. 그리고 성찬에 대한 회의라던가 종교에 대한 비판은 톨스토이가 훨씬 더 깔끔하게 감정을 정리해서 잘 썼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혼합되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장에 따라 너무 문체가 딱딱하게 나눠져있는 것 같아서 좀 거북스러웠다. 고등학교 시절을 서술할 땐 현실을 관조하는 모습만 드러내다가, 대학교 시절을 서술할 땐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줄줄이 늘어내는 모습만 드러내다니. 그러다가 갑자기 훌쩍 아일랜드를 떠나지 않나. 아무리 의식의 흐름 때문이라곤 하지만, 상당히 변덕스러웠다. 어쩌면 제임스 조이스가 자신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잘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조금 들지만. 하지만 제임스 조이스 특유의 부정적이고 삐딱한 모습은 뭐니뭐니해도 <더블린 사람들>에서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에서 스티븐의 말투에서는 어느 정도 낭만주의와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의 수기같은 이 글을 쓰면서 눈치챘을까? 아일랜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해결못할 분쟁을 벌이고 있으리라고, 미션 스쿨이 아직도 살아남아 학생들을 농락하고 있으리라고, 혹은 전세계적으로 명확한 기준도 의지할 곳도 없는 혼잡한 시대가 나타나리라고... 이제 <피네간의 평야>만 보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전부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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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초록 삼각형이다
오순택 / 을지출판사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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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속초

속초는
눈 속에 숨어 있더라.

눈 속에 숨어서
배시시 눈을 뜨더라.

설악은
눈의산이라서
눈을 덮고 자더라.

설악은
햇빛 받아 눈부시더라
멀리서 바라보니
어머니 같더라.
우리 어머니같이 펑퍼짐하더라.

속초는
영랑호를 끼고 자더라.
설악의 발가락이
영랑호에 젖더라. 

- p. 99

 
   

 어릴 때 어머니가 사준 동시집이다. 이 책을 어떻게 집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지 감동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문득 이 동시집이 기억나서 중고로 하나 구입해두었다가 설악산으로 가는 길에 집어들었다. 15년 후에 두번째로 접하게 되는 동시집이라서 기대가 컸다. 물론 이 시집은 나의 기대에 놀랄 정도로 잘 부응해주었다. 원래부터 내용이 좋아서 성인일 때 읽어도 그렇게 똑같이 감성이 느껴지는가 보다. 부끄럽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어린 시절 <유관순누나 생각>에서 무턱대고 유관순언니가 불쌍해서 펑펑 울어댔었더랜다. 지금은 그 시를 읽으면서 울지는 않았지만,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시인은 삼일절날 유관순이 그려진 우표를 들여다보고 이 시를 쓴 것일까. 그 당시 '태극마크가 작아보이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었을까. 동시집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서 여기서 생각을 중단하려 했으나, 어떤 방식으로 보던간에 인상적인 시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겨울 속초>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고 계시는 분 같아서 반갑기도 했다. 이 시를 읽던 시절엔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데, 눈을 감고 '속초가 대체 어떤 나라일까' 상상했더랜다. 그 이후 아버지의 사업상 사정으로 속초에 내려가 7년 동안은 직접 질리도록 설악산과 영랑호를 마주치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어릴 적의 소원 하나가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이 시를 읽게 되었을 땐 '그래, 어렸을 땐 이런 시도 읽었었지.'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마음이 매우 훈훈해졌었다. 눈이 바스락바스락 내리는 날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이 시를 가만가만 읊으며 그대로 시의 언어 속에서 감싸여있고 싶다. 현재는 시낭독모임에 한번이라도 나가보는 것이 소원인데, 시간이 없어서 계속 미루고 있지만 만일 기회가 있다면 이 시를 처음으로 시작하고 싶다.

 이 시집의 제일 큰 장점은 시들이 연쇄적으로 모여서 하나의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생명이 자아내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있다. 오순택 시인은 그 흐름을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간결한 언어에 모든 뜻을 품고 있는, 자연을 닮은 자연에 대해 쓴 시들. 내 취향에 너무나도 잘 부합했다. 어쩌면 나는 이 사람의 시를 읽으며 내 시적 취향을 키워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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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생태 2011.10
자연과생태 편집부 엮음 / 자연과생태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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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건 그런 거다. 떠다니는 것들은 눈길을 끌지만 지나치면 이내 휘발되고, 가라앉은 것들은 오랜 시간, 속에 들어앉아 때로는 짓누르고 때로는 찌르다가 마침내 그중 어떤 것이 어떤 때에 사람 눈에 자꾸 밟히다가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다. -p. 62~63  
   

 이번 표지에는 전어와 나비사진의 언밸런스한 조화가 특히 눈에 띄었다 ㅋ 가을이라고 해서 그런지 전어를 특집으로 뽑아서 글을 썼는데, 처음부터 쉽고 정겨운 주제로 나가서 그런지 다른 글들도 눈에 쏙쏙 들어와 하루만에 다 읽었다. 간단하지만 두물머리에 있는 생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적어주셔서 기뻤다. 혹시 이 기사를 쓰신 사진기자 분도 두물머리 강변가요제에 가셨는지 궁금하다. 팔당댐을 지킬 겸 4대강을 반대하는 취지에서 만든 음악회였는데, 갔다오신 분의 말씀에 의하면 대성황이었다고 한다. 나도 같이 가고 싶었으나, 일요일날 아르바이트가 있었고 한 달에 두 번을 쉴 수가 없어서 안타깝게도 보지 못했다.

 10월호는 새삼 색상도 선명하고 윤곽도 뚜렷한 사진들이 눈에 확 띄었다. 사당리 푸조나무가 머리카락마냥 가지들을 사방으로 늘어뜨려 하늘을 덮는 광경은 매우 신비스러워보였고, <마음 따라 발길 따라> 코너에서 흑백사진이 나왔을 땐 왠지 정겨워보였다. 무엇보다도 생물교과서에서 잠깐 봤던 팔색조가 으리으리한 천연색깔로 등장해서 깜짝 놀랐다. 그야말로 눈이 부신 새였는데 그 새가 부리에 징그러운 지렁이를 한웅큼 물고 있었을 때엔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네' 이런 생각도 들었다. 팔색조는 말 그대로 자기 새끼 먹을 것을 찾아다니고 있을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무의식적으로라도 어울리지 않는다 징그러워 보인다라고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편견에 벌써 상당히 물들어버린 것일까. 그저 씁쓸할 뿐이었다.

  <숲에서 자라는 아이들> 코너는 항상 관심있게 읽고 있다. 항상 생물들을 사용하여 다양하게 학습하는 생태학교를 다루고 있는데, 이번엔 오동나무로 만든 악기들을 모아 드림서클 방식으로 음악을 직접 연주해보는 수업을 했다고 한다. 이런 글들을 보고 있으면, 다소 시대에 맞지 않더라도 간디학교라던가 생태학교 중 어느 하나에서 잠깐이라도 미래의 내 아이를 맡기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물론 가정이 생기고 아이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즐거운 고민이겠지만;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그 기쁨을 맛보게 해줘야 감수성이 풍부해지지 않을까... 살아가면서 좀 더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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