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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쩌면 글감의 빈곤은 존재의 빈곤이고, 존재의 빈곤은 존재의 외면일지 모른다. (...) 아버지인 가해자가 자신의 성장기에 걸쳐 하루도 빠짐없이
365일 폭군이었던 것은 아닌데 글로 써놓으면 하나의 나쁜 이미지로 고정되고, 자기 인생이 온통 불행한 것처럼 보일 텐데 사실과 다르며 그걸
원치 않는다고 했다. 나에게도 조심스러운 문제였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상황과 미묘한 심정을 잘 표현하는 게 글쓰기의 관건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언젠가 독서모임하는 곳의 서점 주인장(A)의 책을 대판 까다가 글을 내려달라는 주인장
친구(B)의 부탁을 들은 적이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제 2탄을 이야기하겠다.
주인장 친구(B)의 친구(C)는 내가 평소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아이가 그(C)의 친구(D)를 '대머리
선생님'이라고 말하는 시를 썼는데, 외모비하가 걱정되서 시를 고쳐 쓰라고 권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은유의 말에 의하면 B와 C
모두 잘못된 말을 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글쓰기는 개인이 쓰는 것이니 남을 비방하는 글을 썼다면, 그리고 그에게 피해를 준다면 글을 공개하지
않는 게 답이다. 그런 의미에서 B는 글을 고쳐써 달라고 한 게 아니라 내려달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B의 나를 대하는 태도는 예전과 현저히
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좀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할까 경계하는 태세라고 할까. 하기사 나도 C의 그 말을 듣고 엄청나게 실망했으니 쌤쌤일지도.
그러나 C의 글은 널리 읽힐 테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그 아이에게 글을 고친 그 사건이 억압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은 걸까? 선생님인데? 결국 글쓰기에는 상당한 계급차가 있다. 쓸 때부터 차이가 있지만 결국 쓰더라도 '니가 뭔데?'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서점 직원으로 일하면서도 규격과 형식차이로 인해 서점 직원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그 이유로 대학을 다녔는데도 대학을 다녔다고
인정받지도 못한다. 사르트르는 그래서 일부러 유명 학교에 재수해서라도 굳이 수석으로 입학했다는데, 요즘 내가 겪는 일들을 보면 그럴 만 했겠다
싶다. 그래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자본의 평등처럼 그녀는 글쓰기의 평등을 주장하고 있다. 내 경험상으론, 일단 띄어쓰기에 맞게 글을 쓰기만
하면 그에 공감하는 사람이 세상에 한 명 정돈 반드시 있다. 그런데 지식인들이 공감이 가지 않는다, 형식이 어긋난다 왈가왈부하며 사전에
꺾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작은 서점직원인 나에게 선생님(B)이 그러듯, 어린 아이(D)에게 작가(C)가 그러듯.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기
주장이 강한 나에게도 저자는 개인의 감정을 일반화시키지 말라고, 켐페인 식으로 남에게 자신의 정의를 강요하는 글을 쓰지 말라고 일축한다.
흥미로우면서도 일면 뜨끔한 점이 있는 책이었다 할까.
그리고 아버지는 365일 폭군이 아니었다 하는데 세상엔 365일 내내 한
번도 아이를 때리지 않은 아버지도 있다. 자신의 인생이 365일 불행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365일 내내 폭행을 당하지 않은 아이와 그는 체험한
게 다르다. 글로 써놓아야 한다. 당신이 그 경험을 써놓은 건 발가벗은 채 거리에 서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게 이 세상에서 자유로 보장되어
있는 이상, 발가벗었다고 놀리고 험담하는 사람들이 미친놈년들이다.
여성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타자로 살아왔다. 여성의 경험은 사적 경험으로 할당된다. 자기 삶의 궤적이 보편 경험이 되지 못하는 소수자들은 늘 언제
어디서나 할 말이 많은 법.
왜 지적인 남성들은 여성들의 하고많은 경험 중 오직 '출산'만을 부러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 전에 겪어야 할 여성의 수많은
경험들을 알지 못하거나 알고 싶지 않아서이다.
글쓰기의 최전선 책을 보다보면 저자 은유가 미래파 시라거나, 김영민 책이라거나,
사르트르의 말 등 박학다식을 넘어 도전정신이 넘쳐야만 볼 수 있고 정말 도서를 사랑해야 볼 수 있는 것들을 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후에
나온 페미니즘 책의 목차를 볼 때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왜 그녀는 페미니즘 에세이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까. 이 책에 그 이유도
나와있다.
1.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의 글쓰기 수준을 위해 글쓰기 강좌를 시작한 이상 그들에게 강의를 해 주는 게 목표였고 그들의
레벨을 고려해야 했다.
2. 그녀가 선정하는 책이 어렵다고 사람들이 항의하기도 했고 리뷰 글을 공개하는 것조차 어려워했으며 과제에
참가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토론 주제는 상당히 수준이 낮았다.
3. 책을 느리게 읽는 사람들이 많기에 일주일에 한 번 한 권을
100 페이지밖에 읽지 못했다. 대다수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책을 읽었을 확률이 높다.
결국 사람들이 강의에 참가하고 자신의 책을
읽게 하기 위해 글쓰기의 최전선을 썼는데 그것도 안 되서 수준을 더 낮췄다는 건데. 이런 식으로 가면 어디까지 수준을 낮춰야 하나 그게 그녀에겐
항상 고민이 되는 사항인가 보다. 그러다가 그냥 일반 사람들의 수준까지 낮아지기로 아예 결론을 내린게 아닐까. 개인적으론 그녀가 참 아깝다.
사르트르의 말을 풀이한 책도 내줬으면 좋겠지만, 최근 출간한 책을 보면 무리이지 않을까. 한 번 낮아지면 높아질 수 없는 게 에세이스트 대부분의
현실인지라...
고백하자면 내게도 도통 읽히지 않는 시도 있었다. 통칭 미래파라고 칭하는 2000년대 이후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을 보이는 시들이다.
시점의 혼동, 시제의 이탈, '덕후적' 문화코드로 이루어진 시 세계는 카오스 그 자체였다. 물구나무를 서서 읽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처럼 시구를 못 알아듣는 게 속상하고 답답했다. 감각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꼰대 같은 어른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미묘한 충동이
일었다. '그래 봤자, 시 아닌가.' 호기심이 일었다. 미래파 시도 궁금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궁금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래서 시
세미나에서 동료들과 함께 미래파 시집 열두 권을 한 계절 동안 꾸준히 읽었다. (...) 취향을 만드는 일은 탈취향을 향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두 덕후가 되는 겁니다.
근데 난 시 중에서 제일 잘 읽히는 게 미래파 시고
가장 안 읽히는 게 강은교 시라서 미래파 안 읽힌다는 사람들이 되려 이해가 안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