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인가 귀신들림인가?
김진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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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어느 권사님이 몇 번 집을 찾아와 나에게 안수기도를 해주었는데 그때마다 심하게 내 목을 조르며 "귀신아 물러가라"를 계속 외쳐대며 나를 괴롭혔습니다.(?)
나는 권사님의 그런 행위가 싫었지만, 나도 모르게 "알았다. 나간다."라고 대답을 함으로써 멀리 (청주에서) 대전까지 오신 권사님에 대한 예우(?)를 해 드리려는 나를 발견했지요."

 

  

군데군데 일반인에게 자세한 용어는 삼가겠다고 하는 구절이 보인다. 아니 그럼 혼자서 말을 삼가고 쓰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닌가. 너무 전문가와 일반인을 구분하여 쓰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1997년이라면 초등학생이었던 나도 정신질환이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알던 때였는데, 그 때 초판을 냈어도 이건 그 시대에도 뒤떨어지는 약간 촌스런(?) 내용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심리학에 대해서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정리하는 데엔 도움이 된 거 같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 말고 전문서를 보는 게 나에겐 재미있을 듯하다. 하지만 정신질환을 유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책 구절을 인용해주면 설득이 될 듯. 근데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그러고보면 종교인들이 참 시대에 뒤떨어지는 점이 많은데, 신부님이 쓴 책 중에는 심지어 노부부가 아이에게 이거저거 너무 퍼다줘서 망하고 신부님에게 하소연을 해서 훈계를 좀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근데 주변에 그런 사람 이 전혀 없는데 나로선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는 거다. 듣기만 해도 무슨 화석이 살아 숨쉰다는 얘길 듣는 듯하다.

 근데 이 구절만 봐도 정신병환자 가지고 보호자 반응이 너무 다양해서 저자가 힘들었을 것임이 짐작된다. 한명은 내가 잘못 키워서 그랬다는 둥 푸념할 거고 다른 한명은 우리 가족 중 제일 싫어하는 인간 닮아서 저런다고 요양원 보내버릴거라 할 거고(...) 또 다른 인간은 두 말을 동시에 다 하겠지. 에라이 중생들아 ㅡㅡ

 아무래도 너무 옛날에 쓴 책이어서 정신과에 대한 이야기마저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예를 들면 항정신성 약물의 중독성은 최근엔 전혀 없다고 단정지을 순 없다고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요즘은 환자의 의사가 없으면 입원을 시킬 수 없다. 즉 강제입원이 되지 않는단 소리다. 사실 나는 이게 약간 아쉬운 게, 저자의 말처럼 망상에 시달리거나 아직도 정신병원 가면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진다고 믿는 정신병자들은 병원에 가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게 사실 부모의 돈을 노리고 정신과 의사와 합작하여 부모를 강제 입원시킨 자식이 유산을 잽싸게 갈취해간 사건 때문인데, 돈 때문에 영혼을 팔아먹는 사람들이 이렇게 사회에 넘쳐나서 아픈 사람이 병원도 제대로 못 가게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폭력적인 제목, 크리스천이 아닌 일반인들은 기피하게 되는 출판사 외에 또 이 책에 대해 신뢰가 안 가게 하는 점이 있다. 바로 문장을 끊어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 출판사에서 따로 교정을 해주지 않았을까? 저자가 제지했을까? 어떤 문제던 설명을 해야 하는 책에서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문장을 질질 끌면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현저하게 떨어지며 저자에 대한 신뢰성도 떨어지게 된다. 하필이면 중요한 정보를 이렇게 쓰다니.

 일단 저자는 정신과가 그렇게 완벽하진 않다면서 동성애를 정신분열증으로 착각한 병원 예시를 들고 있는데, 이는 귀신들림을 정신병으로 잘못 해석할 수 있다는 예시가 아니다. 즉, 이는 자칫 단순히 저자의 망상일 수도 있다는 결론으로 내려질 수도 있는 상태이다. 정신과가 완벽하지 않다는 건 사실이나 저자의 말대로 하자면, 귀신들림과 정신병은 대등한 상황으로 존재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신병에 걸려도 이 의사에게는 치료받기를 거부할 듯하다. 이런 의미에선 강제입원이 금지된 지금의 법안은 옳은 건지도. 예시도 너무 악의적이다. 대다수의 개신교 사람들이 혐오를 느끼는 게 동성애임을 알면서 일부러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싶다.

 딱히 귀신들리지 않은 사람도 정신이 피폐한 또 다른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케이스도 있다는 걸 내가 발견했었다. 그 케이스는 전형적인 신체망상을 가지고 있어서 한쪽 다리가 3센티나 짧다고 생각하며 다녔었는데, 다중인격장애가 있음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고 그 인격과 대화를 하는 등 상당히 친해서 그 인격과의 대화나 일기의 주고받음으로 인해 다른 인격이 했던 일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무튼 귀신들린 케이스는 아니었음.

 결정적인 문제는 귀신들림이 정말 나쁜 현상인가하는 것이다. 분명 대다수의 일반인들에게는 거부감이 들 수 있으리라. 하지만 몇몇은 용한 무당이 되어 사람을 구하기도 하고(복채를 필요로 하긴 하지만) 퇴마록처럼 어딘가에서 사람을 괴롭히는 귀신을 영능력으로 퇴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종교가 다르고 신념이 다르다고 해서 멋대로 마귀라고 여기면 곤란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부분은 쿠르트 코츠 목사의 저서들을 읽어보면 조금 더 심층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분이 있었다. 동양권에서 말하는 신내림과는 조금 다른 영역이라는데, 가톨릭 구마의식 허가 기준을 보면 신병과는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전혀 배우지 않은 두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며, 정신과 의사의 진단도 필요하다나.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환자를 치료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뭐하러 마귀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고, 무엇보다 너무나 서양 위주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판타지에서 보면 동양에서의 귀신 쫓는 의식보다 약하더만.

 대부분 푸닥거리가 효과가 있는 건 모두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양기로 인해 일시적으로 효과가 좋아지는 것뿐이다. 마치 안녕하세요에서 정신병있는 애가 나와서 이상한 말을 지껄이지만 모두의 경악스러워하는 얼굴을 보고 잠시 움츠러들듯이. 만일 초능력도 쓰고 푸닥거리에서 정말 효과가 있다면 무당을 하셔야지.

 그냥 임상노트나 에세이라 하기엔 정신분열증에 대해 너무 정리가 잘 되서 되려 아쉬웠다. 기대치가 높아지니까, 오히려 귀신들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땐 확 꺾이는 느낌이었다. 귀신들림은 다른 책에서 썼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그러나 경력에서 나오는 연륜은 인정한다. 솔까말 크리스천들은 다 봐야되지 않을까 싶은데, 천주교에서도 천동설 지금까지 믿는 신자들이 많다. 우주까지 던져주고 싶은 인간들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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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껴안기 - 황창연 신부의 행복공감 에세이
황창연 지음 / 홍익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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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위해 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함께 간 신부님과 시내 구경을 나갔습니다. 가는 길에 건널목을 두 걸음 정도 건너갔는데 빨간 신호등이 켜지는 바람에 우리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건널목에 멈춰 있던 자동차가 우리가 물러나는 걸 보고도 출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먼저 건너가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뒤에는 차들이 쭉 서 있고 우리 일행은 빨간불에 걸려 있고, 자기 차는 파란불인데도 사람이 우선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가 무사히 건너갈 때까지 미소를 머금고 기다렸습니다.

 

 

일단 가톨릭을 우리나라 사람들, 그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 시점에서 풀이하는 부분은 맨 처음에 나오기도 했고 새롭기도 해서 여러가지로 눈길을 끄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에세이로 명확하게 정리해놓으니 여러가지로 읽는 사람의 마음이 호쾌한 게 있었다. 신분계급의 차이가 큰 조선에서 그나마 낮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 주장한 성경이었다. 신부이기도 한 저자는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들이 남에 대해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이익을 셈하여 부자들을 위해 행동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잠비아 이야기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잠비아에 봉사활동을 하러 가기를 초반에 거부했던 의사는 일단 귀찮고 병원 문을 닫아 걸어두는 동안 수익을 벌지 못할 걸 셈했으리라. 그래서 잠비아에 돈을 기부하겠다고 했건만(아마 잠비아로 가는 기간동안 벌 수 있는 비용에서 조금 모자란 정도의 금액이라 생각된다.) 신부님은 단호하게 돈도 기부하고 봉사활동도 가자고 한다. 평창군수가 되고 싶었던 분의 이야기는 좀 더 의미심장하다. 잠비아에 가려면 평창군수를 포기해야 하지만 그는 끝내 후자를 택했다. 그러나 평창군수에서 떨어졌으니, 잠비아에 봉사활동을 하러 가지 않을 구실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 신부님은 짓굳게도 '낙선을 축하합니다'라는 문자를 그에게 올린다. 그들은 돈과 권력의 이익에서 벗어났기에 되려 잠비아에 갈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봉사활동에서 만족을 얻게 되었다. 행복한 이기주의자에 관련된 책들이 많이 나오는 추세다. 기부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게 어쨌단 말인가? 자신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기부를 하지 않는다고 으스대며 말해도, 정말 기부를 포함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에만 종사한다면 우리는 속으로 그의 탐욕에 치를 떨게 된다.

 그러나 나이 들어서도 자신을 위해서 살라는 신부님의 이야기는 좀 고리타분하지 않나 싶다. 실제로 자식에게 모든 걸 다 퍼주고 자신에겐 아무 것도 없다며, 신부님이 계신 생태마을에 살고 싶다고 전화하는 노인들이 계시다고 한다. 나 같으면 그들이 정말로 자식들에게 그렇게 잘 대해주었는지를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부님이라서 그런지 저자는 그 말에 한치도 의심을 품지 않고,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해서 대답해주고 있다. 너무 친절해서 책의 퀄리티가 떨어지는 케이스라 할 수 있고, 아니면 하도 그런 식의 전화에 시달려서 신부님이 이 참에 생태마을에 쓸데없는 일로 전화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았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자식이 어리다고 거짓말로 속여먹거나 하면 자식이 클 때 부모도 똑같이 거짓말에 속을 것이다. 자식이 해준 걸 따지기 전에 자신의 행동부터 신경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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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9 : 살다 나는 오늘도 9
미셸 퓌에슈 지음, 올리비에 발레즈 그림,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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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상처가 났을 경우 몸이 보이는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것이다. "곧 혈소판들이 서로 엉기면서 출혈을 중단시켰다. 조직에 외부 세균이 침투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대량의 백혈구들이 상처 주위로 모였다" 등등. 이런 설명은 마치 혈소판이나 백혈구들이 의지적으로 이런 지능적 활동들을 해내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또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우리의 위와 장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고, 그 일을 멋지게 해낸다는 식으로 말한다. 마치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듯이 말이다.

  

난 이렇게 생각 안 하기가 힘들더라.
지금도 피규어같은 게 살아 있다고 생각함.
그런 의미에서 팟캐스트를 듣다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접했는데 독일-한국 혼혈 10대가 고딩때 남친과 자신의 방에서 동거하겠다고 엄마에게 떼를 썼댄다. 집에서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서 학교에서도 보면 좋겠다나? 피규어를 사랑하면 그런 일이 없는 걸!

 

 나는 오늘도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약간 데카르트의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한 게 아닌가 싶다. 사과나무에게 어느 정도 자율적 의지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 책은 단호하게 사과나무가 무언가를 원하거나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오늘도 시리즈의 말하다 편이 떠오른다. 인간은 생각을 하고 말을 하기에 자신의 의지를 전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동물과 식물은 그렇지 못하다. 또한 생명체가 영혼이나 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더 나가서 생명체는 구조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는 동일한 생명체의 후손이기 때문에 친척관계에 있다는 설명은 불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이 치킨을 먹는 건 자신의 친척을 먹고 있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나는 오늘도 시리즈 중 하나인 먹다를 떠올려볼 수 있다. 이렇게 살다는 이전의 시리즈들을 회상할 수 있게 만드는 최종편이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연을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나는 오늘도 어느 편에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듯이, 여기서도 나오고 있다. 감정을 통해 세계와의 접촉을 유지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든다. 쇼생크 탈출에서 끝끝내 자유를 갈구했던 죄수 주인공처럼 말이다.

 실로 오랫만에 식물원에 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을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일인지라 그 식물원으로 간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식물원을 벗어나 온천으로 가는 길에서 무덤들이 산재해 있는 곳을 만나서 상당히 놀랐다. 어찌어찌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소문을 들어보니 식물원은 좋아도 그 무덤길이 흉흉해서, 실제로 범죄까지 일어났다는 듯하다. 무덤은 대체로 방치되었지만 딱 하나에는 비석이 제대로 있었는데다 풀도 잘 정돈되었고 무덤 위 놓인 꽃까지 싱싱했는데, 강도의 소굴이 되다니. 관광객으로선 굉장히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깝다는 느낌이 든다. 그 강도들은 무덤의 비석을 유심히 봤을까? 아니, 자식이 저질렀다는 만행이 빼곡히 적혀 있었던 어느 어머니의 비석 하나라도 봤을까? 빨리 그 비석을 보고 반성하여 생명을 해치는 일을 중단하면 좋으련만. 문득 어머니의 무덤자리를 잘못 정해서 무덤이 물에 휩쓸려갈까봐 비가 올 때마다 개골개골 울었다는 청개구리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런 불상사도 있으니 아무래도 화장이 제일 좋겠지만, 살아있을 때 잘 해줄 것이지 죽어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때 비석은 요란하게 세워 뭣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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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팝스 2017.7
굿모닝팝스 편집부 지음 / 한국방송출판(월간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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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ead, Soudis were abuzz about #binttrump ㅡArabic for "Trump's daughter".

 

  

진행의 메인 코너인 영화 선택을 요새 참 잘하시는 듯하지만, 자꾸 유행을 따라가려 하는지 최신작과 유행작으로만 선택하는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다. 

 

 나도 라라랜드를 개인적으로 참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시 코너에서 가지 않은 길을 뽑은 것도 라라랜드의 주제에 맞춰서 뽑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지 않은 길은 읽을 때마다 아주 다채로운 감상이 생겨나는 시이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땐 시인의 개척 정신을 자랑스럽게 읊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시를 공부할 때 교수님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시인이 후회하면서 지은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정말 시를 읽어보니 그런 듯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지금 읽어보니 또 다른 생각이 든다. 풀이 덜 나 있는 편한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가는 것도 좋겠지만 어차피 그 길 이후에 전부 풀이 나 있는 두 갈래의 길을 발견할 수 있으니, 불편한 길에 다른 이유로 매력을 느낀다면 좋을 대로 가라는 말로 읽힌다. 살아가면서 이렇게 한 시를 다르게 읽을 수 있다는 게 흥미롭다.

 여름휴가 추천 도서로 나온 책들 중 '나는 너를 본다'가 유독 끌린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도 이 책을 팔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예의주시하고 있던 책인데, 영어로 보니 핸드폰을 쓸 때의 비속어가 영어로 적나라하게 나오는 듯하다. 번역이 이를 쫓아가지 못해 약간 딸리는 면이 있는 듯할 정도다. 언젠가 꼭 한번 빌려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여름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장르는 스릴러가 아닐까 싶다.

 위대한 개츠비 영화에 나온 더 엑스엑스의 노래를 무심히 넘겼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위대한 개츠비를 끝까지 읽고 나서 보니 영화에 나오는 그 어떤 음악보다도 더 엑스엑스의 노래가 제일 끌렸다는 점이다. 굉장히 몽환적인 음악을 많이 부르는지라 장르가 EDM인데도 불구하고 감수성이 돋보인다. 굿모닝팝스에서 그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게 되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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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8 : 버리다 나는 오늘도 8
미셸 퓌에슈 지음, 파스칼 르메트르 그림,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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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과거에 버린 연인을 우연히 마주치는 일 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련만...

이 문제를 좀더 명확히 들여다보기 위해, 일단 어떤 관계에서라도 상대에 대해 거리를 두고 멀어지거나 관계를 끊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점부터 짚어두자.

  

이 책에서는 쓰레기를 버리는 문제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구라는 우주 비행선의 주된 문제는 우리에게 식량을 공급해줄 식량 칸이 따로 없다는 것이라고. 다만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아야만 필요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으므로 엄청난 양의 재생 가능 에너지인 태양에너지를 더 잘 이용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게 시급한 문제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태양에너지와 풍력에너지가 주요 에너지 생산원으로 대체되면 가격이 비싸진다며 폭주하는 닝겐들이 있다. 그러면 원전은? 정부에서 지원하기 때문에 그 정도로 가격이 싼 것이다. 그것도 폐기처리할 때의 가격까지 붙여서 제대로 정산하면 상당한 금액이다. 아마도 그 이야기 한 사람은 경주방폐장까지 가보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그래도 난 근처까진 가봤다.
그러면 원전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어쩌냐고? 만약 지금 원천적으로 탈핵을 시도할 때, 우리는 그 남은 방사능 쓰레기들을 처리할 책임이 있다. 빨라도 60년 동안은 충분히 근무할 수 있다. 몸에도 심히 안 좋은 일자리 오래 붙잡지 마라. 아, 자식에게 일을 물려주려고? 자식 몸까지 망칠 일 있냐.

 친구를 제외시키고 쓰는 글이라 좀 찔리긴 하는데, 어차피 블로그에는 올릴 거다. 이건 안 쓰고 지나갈 수가 없다. 아까 원전 노동자 해고? 문제의 연장이다. 만일 A가 홍콩에서 쓰레기를 두고 간다. 왜냐하면 홍콩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쓰레기를 줍지 않으면 해고되며 해고되지 않으려면 '관광객이 함부로 버리는 쓰레기'라는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쓰레기를 홍콩 직원이 발견하기 전 5분의 시간 동안, 가령 홍콩의 원주민과 관광객 B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그 쓰레기를 발견한다. 관광객 B는 (나처럼) 쓰레기가 함부로 버려지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모처럼 홍콩을 여행하면서 기분을 풀려고 했는데 잡치게 된다. 또 홍콩 원주민은 어떨까? 어떤 개념없는 외지인이 쓰레기를 또 함부로 버리고 갔다고 욕을 할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청소부들의 지속가능한 직장과 행복을 원한다면, 그들에게 친절하게 미소를 띄며 인사하는 게 정답이지 그들을 위해서 쓰레기를 버리는 게 정답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어디에서나 쓰레기는 널려있다는 걸 난 당장 오늘 집밖에 나가서 사진 수십장을 찍어 증명할 수 있다. 정말 사람을 위한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지, 다르게 본다면서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세상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다른 의견일지는 몰라도, 그닥 새롭지는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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