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티시즘
프란체스코 알베로니 / 강천 /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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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울 때는 연애가 시작되는 때라고 보아도 거의 틀리지 않는다.

 

 

여자가 계산을 한다고 착각하지 않길 바란다.

 

여자도 남자가 전부일 때가 있다. 그러나 그녀에겐 타오르지 않았던 과거가, 남자는 잊어버린 과거가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천천히 타오르기 때문에, 항상 사랑의 마지막에는 재가 남는다.

 

 

남성이 느끼는 성적 욕망은 여성에 비해 상당히 제한되어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성은 여성이 자신과 똑같이 욕망을 느끼는 방식을 체험하길 원하거나 생각하며, 그래서 동인지에 나오는 여성의 자위는 거의 언제나 무언갈 넣는 행위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여성들은 마스터베이션 말고도 욕구를 충족시키는 여러가지 방법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향수나 구두나 가방에 오르가즘 비슷한 걸 느끼는 여성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그들처럼 되려 노력하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란 점을 책에선 분명히 하는 듯하다.

여성은 보통 남자가 자기 자신을 봐주길 원한다. 설령 자신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며 남자는 낚인 물고기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아이돌처럼 무대에 오르길 바라고, 적어도 한 명의 남자가 자신을 쳐다봐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남자는 대체로 말을 거는 걸 귀찮아한다. 그래서 여자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서 남자가 자신을 봐주기 위한 모든 적극적 수단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가 귀찮아서 그런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는 이 때부터 머릿속에서 추리소설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결국 남자가 지쳐서 그녀 곁을 떠나려 할 때쯤 그녀는 자신에게 보여지는 모든 권태의 징조를 복잡하게 꼬아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결국 그 모든 서툰 추리가 거짓이었음을, 남자가 고난이도의 사랑(?)을 주작하기엔 너무 단순함을 발견했을 때 여자는 분노하여 남자의 무직이라거나 발기부전이라거나 하는 약점들을 캐내어 공격하면서 헤어질 이유를 찾는 것이다.
는 내가 고딩시절 읽었던 할리퀸 소설 내용임.

그러나 이 책에 의하면, 피부로 성감대를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해서 남성들을 열등하다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여성은 느끼는 종류가 많기 때문에 어떤 남성에게서 풍기는 카리스마를 성적 매력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남성은 보통 보스(종교의 장, 회사 상사)의 매력과 여성의 매력을 확실하게 구분할 줄 알기에 스캔들이 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여성들이 보스에게 정신적 숭배와 함께 몸을 바친 탓에 인생이 파탄난 경우는 자주 볼 수 있다. 물론 사랑은 죄가 아니지만 성애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탈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여성이 딸리다는 걸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렘이 스토리상 예쁜 여자를 가진 남자를 사랑하는 대표적인 예이기 때문에 올렸으며 예쁜 거 쫓는 건 한결같은 남자의 특성을 매우 실천적으로 대표하는 사진이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거세를 끝낸 후에도 유독 불안이 심한데 상대방을 너무 사랑해서 자신이 주는 만큼 달라는 여성의 보챔이 강해질 때가 있다. 그게 보통 남성들에게는 공포로 다가오는가 보다. 그래서 요새 공포스런 동인지에서는 남성을 (실제로) 거세시키는 여성이 많이 나오며 이를 캐릭터화한 게 얀데레이다. 사실 이들의 걱정을 덜어주는 데 성공하여 분노를 없애고 나면 이토록 지고지순한 사랑이 없다. 그러니까 메가데레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앞뒤과정은 생략하고 후반의 메가데레나 초반의 라이벌 여성들을 제압하는 여성이 좋다고 하는 남성들이 의외로 많다. 참 그렇게들도 여자를 모르니 통탄할 일이다... 그 분들하고 사귀시는 여성들은 정말 인내가 대단하신 것이다.

생각해보니 사드는 소설을 썼다고 이야기하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는데, 바타이유는 철학에서 연애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니 용서받을 수는 없겠다. 혼전 성관계로 애가 생길까봐 전전긍긍하는 커플들이 얼마나 많은가. 까딱 잘못하면 새로 생성(...)될 판에 에로티시즘이 죽음이라니 너무하신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철수에서 이야기했듯이 결혼을 해서 애를 낳지 않았으니 저런 소리를 쉽게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아니면 책임감이 없던가.

 

 

 

 

계속 제복 관련 논란이 나오니 에리치카 제복 스페셜 사진을 올려봤다. 남자들은 누드를 더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스타일 좋은 사람이 제복을 입은 모습도 꽤 좋지 아니한가<- 

 

남자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중이다. 남자들이 나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사실을 안 게 7이라면 내가 남자들을 이해하지 못했구나 깨닫는 게 3 정도인 듯하다. 심지어 남자가 강간을 당하는 건 여자가 강간을 당하는 기분과는 큰 차이가 있으며 섹스 자체로 당하는 게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당한다는 견해는 참으로 지당한 듯하다.

 

 

 

확실한 예를 들자면 이성애 남자들의 이상향 하렘은 아이마스고 지도자(P)적인 남자 한 명에 다수의 여성이 들러붙음. 

 

일대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우정과 사랑을 분간하기가 어려운 건 러브라이브. 그래서 아이마스는 가능한 한 많은 여자가 있는 편이 좋고, 러브라이브는 1학년 셋 2학년 셋 3학년 셋이 이상적인 것이다. 하나면 쓸쓸하고 둘이면 커플결성 가능성이 너무 높아지니까.

 

 

책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일단 썸을 탄다. 나는 상대방에게 선망이나 호의를 품게 되며 이는 연애라고 볼 수는 없지만 징후라고 볼 수는 있다. 구체적인 사랑으로 대상을 고려하게 되면 증오도 깊어진다. 상대의 한계점이 보이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슬픔을 자기 탓으로 보며, 이를 억울기구라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상한 기분을 다른 일 때문으로 돌리며, 이를 박해기구라고 한다. 그런데 억울기구가 과잉부담되어서 사라지게 될 때 공격은 사랑의 대상에게 향할 수 있으며, 이는 생성과정에 들어가게 되는 인간의 상태이다. 각각의 요소가 완전히 재구성되며, 이 때 사람들은 종교를 바꾸게 되는 등 개인적이지만 큰 변화를 겪는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랑이 나타난다. 여기서 새로운 사랑은 내가 사랑했던 그 대상일수도 있고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탁월하게 숭고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다. 여기까지는 개인의 변화지만 쌍방의 연애는 두 사람이 서로 그런 상태에 있는 걸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전염이라 일컬여지기도 한다.

 

 

P.S 남자들은 보험?같은 잔머리 쓰지 않는다고 본다. 

 

물론 미래를 생각하고 여자 한 명 들여놓긴 하겠지만 이 남자놈들은 여자랑 같이 자는 것만 아니면 여자랑 모든 감정교류 다 하고 밥 다먹고 스킨십 다 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면 보험 아니고 뭐냐고? 정답은 '애완동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기분이 나쁠테니 예의상 보험?이라 하자. 이 나쁜 놈들은 보험?보다 더 이쁜 여자만 보면 정신이 나가서 넙죽거리고 굽신거리지만, 그것도 잠깐 뿐이다. 그러니 여자들이 할 선택지는 세가지가 있는데, 1번 그 남자의 전부를 수용하던가, 2번 싸우고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하던가, 3번 그냥 그러고 살게 내버려두는 게 있다. 3번을 선택하면 좀 외롭긴 하겠지만 아무 슬픔 없이 살 수 있다. 그리고 이후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그에 대비할 것.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만날 사람 다 만나. 그래도 괜찮아.'에서는 (너는 보험?이니 내가 맘이 내키면 갈 건데 좀 돈도 많이 벌고 이쁘게 하고 살아, 지금은 이유는 딱히 없는데 너 참 맘에 안 들어)라는 뜻이 있다. 이것도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남자 집 차려주던가, 다이어트하고 성형하고 화장 배워서 꾸미던가, 아니면 아예 만나질 말던가. 근데 아무리 그 남자 꼬시려고 고생해도 넘어갈지 안 넘어갈진 장담 못한다는 거. 이 세상에 예쁜 여자는 많고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며 남자는 어린 여자를 좋아하니까.

3번은 좀 수정할 필요가 있어서 더 써본다. 여성들이 남성들에 대해 저지르는 가장 나쁜 버릇은, 헤어질 때 남성에 대한 모든 추억을 곱씹으며 약점을 찾아서 헐뜯고 결국엔 그가 처음부터 나를 섹스토이로밖에 여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만에 하나 그런 경우가 있을 수는 있으나, 다른 케이스가 있을 수도 있다. 그 땐 정말로 사랑했거나 혹은 사랑했다 생각했지만, 정말로 더욱 크게 사랑하는 상대가 찾아온 것이다. 남자도 안정된 애정을 갈구하며, 상대가 안정된 애정을 베풀기를 요구한다. 그저 그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뿐이고 다른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요구가 과한 쪽이 있다면 서로 타협을 해 나가면서 맞출 필요가 있는데, 그러면서 애정이 확고해진다고 난 생각한다. 예전에는 시간과 거리가 사랑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좀 생각이 다르다. 뭔가 길게 말했지만 남자던 여자던간에 헤어진 이 인간이 처음부터 꽃뱀(제비) 혹은 나쁜 여자(남자)였냐 아니냐가 중요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1992년에 이 책이 번역되고 25년이 지났지만 이 책의 논리는 아직도 필요한 듯하다.

 

 

 

 게이나 폴리아모리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편인데, 특히 폴리아모리 쪽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는 편이다. 일단 레즈비언에 대한 글귀 중 마음에 드는 대목을 가져왔다.

 

레스비언끼리의 사랑은, 적은 수의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자기들이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나 모범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함에 의하여 성장하여 왔다. 베르린의 커뮤니티에 관한 여자의 말을 인용해 본다.
"동료의 한사람, 한사람이 다른 동료에게 나타내는 유순함과 보살펴 주려는 마음가짐은, 그대로 연인끼리의 관계에 해당됩니다. 우리들의 기분이나 느낌도, 서로 융화되어 있는듯한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우정 같은 것과 섹스에 관계되는 것, 즉 신체에 관한 것을 엄밀히 분간하기는 어렵겠지요. 우리는 서로의 몸을 부드럽게 다룹니다...... 그러한 부드러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 상대와 연애관계를 맺지 않고, 4년간 거기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고민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따뜻함에 관한한 부족한 것은 없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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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짧지만 큰 가르침
원택 지음 / 장경각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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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예경을 하는 것은 발심을 하기 위해서 한다. 실행하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다.

 

 

발심을 달심으로 봤다는 페북친구가 있어서 이 글귀를 올렸을 뿐이며 다른 글들도 다 좋아서 고르지 못했음을 밝힌다.

 

사실 실천은 고행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며 삼천배 정도의 수행으로 이룰 바이다. 횐님들 아랑전설을 아는가! (아재)

 

37 불립문자,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함은 최상급에서 하는 말이다. 경전도 필요 없다, 부처님 법문도 필요 없다, 조사의 법문도 필요 없다는 말로 알아서는 큰일이다. 부처님이나 조사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의지하겠다는 것인가? 제멋대로 생각하고 산다면 그것은 외도요, 악인이 되기 쉽다. 부처님이나 조사의 말씀이 필요 없는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반드시 그 가르침에 의지해야 바른 길을 갈 수 있다.

 

어느 모임에 갔다가 파계승을 만났다.

 

한국 불교에는 이제 염증이 나서 티베트를 여행했다고 했다. 거기서 여인을 만났다고 했는지 한국에 다시 와서 여인을 만났다고 했는지 그 전부터 여인을 만나왔었는지는 뭐라 말했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그저 고개만 주억거리면서 듣고 있었거든. 농사를 하며 살려고 생각하고 있기에 환경에 지극히 관심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모임의 자잘한 공무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진행되자 황급히 자신은 바쁘다며 말을 가로막았다. 친구의 도로건축 일을 도와주러 멀리 가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무슨 일에 흥미가 있느냐 했더니 페미니즘을 거론했다. 여성들이 얼마나 차별받고 사는지에 대해 뼈저리게 알았다며 말을 주욱 늘어놓더니 정희진 씨의 책을 본다고 했다. 사람이 아주 말과 마음씨가 깔끔하더라며 호감이 간다고 했다. 성철 스님에 대해 이야기하자 눈살을 찌푸리더니 '우리나라의 모든 중들이 다 똑같이 타락했다'라고 일축했다.

법신진언은 판타지 소설에서인가 잠시 본 적이 있고 왠지 모르겠지만 들은 적도 있다. (절에선 아니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 외는 다른 절들은...

 

 

 

공부하라는 글이 특히 많은데 내가 이런 글 보면 유달리 찔린다.

 

사실 철학서는 대학에서 봤어야 했는데 지금 와서 굼벵이 기어가는 속도로 읽고 있는 것도 기막힌 일이다. 게다가 먹을 거 다 먹어야 하니 먹을 때 책 안 읽고 팟캐스트 듣지, 출근 때 늦을지도 모르니 음악 들으며 출근하지. 나이가 들면 눈도 이제 노화될 텐데 책을 눈에 대지 않는 핑계는 점점 늘어가고 내 마음이 흔들릴 때는 책을 읽지 않거나 쉬운 책만 골라 읽으려 한다. 반성하고 있다. 요즘엔 철학 위주로 공부하듯 책을 읽는 게 내 목표다. 가뜩이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잠이 너무 많아서 남들 한 시간 읽을 분량이 내 하루치 분량인데 나놈 뭘 믿고 이리 게으른가. 이러니 사람들이 내 일에 딴지를 걸지. 일에 더욱 정진하라는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련다.

요새 잠깐 가면라이더 전대물 한꺼번에 보기에 정신이 팔렸었다(...) 그렇기도 하고 몸도 안 좋기도 해서 하루 책을 안 보니 그렇게 죄책감이 들 수가 없었다. 내가 산 책들, 빌린 책들, 독서모임 갈 때까지 다 읽어놔야 할 책들이 나를 끊임없이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하루치 분량을 보충하려 지금도 걸으면서 책 열심히 읽는 중이고 집에가서 운동할 때도 읽으련다. 무엇이든 꾸준히 한결같이 하면 성과를 이룰 수 있다는 성철 스님의 말에 힘이 난다. 전국의 오타쿠들 힘내시고요 열심히 덕질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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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물들 - 시인의 마음에 비친 내밀한 이야기들
강정 외 지음, 허정 사진 / 한겨레출판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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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집중된 밤의 독서를 통해 저는, 판타지 소설 속의 주인공이 갑자기 어떤 시공간에 내던져지듯이, 시공을 초월한 어딘가로, 누군가의 광막한 마음속으로 들어가곤 합니다. 타인의 마음을 마치 온전히 자신의 것인 양 느끼게 되었을 때의 정신적 일체감은 역설적으로 완벽한 육체적 고독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에 1인 가구는 많아졌는데 오랫동안 불을 키고 있는 가구 또한 많아진 듯하다. 여러모로 고독한 미식가가 생각나는 구절이다.

 

유달리 강원도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되는데 나만 그런가. 특히 원주라거나 속초라거나 설악산이라던가가 툭툭 튀어나와서 나를 움찔거리게 했다. 물론 당신의 사물들이란 책에서도 나오긴 했지만 유독 이 책이 그랬던 이유는 아무래도 이 책이 훨씬 일상물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일상물 애니메이션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라거나 목숨 걸 멜로물이 별로 등장하지 않고 단지 잔잔한 개그라던가 훈훈한 덕담이 흘러가는 장르이다. 그러고보니 강원도 분위기이기도 하다. (즉슨 국뽕물도 섞여있다는 이야기이니 주의를 요한다.) 요새는 개발로 인해 점점 회색빛으로 물들고 있고 불안한 분위기로 기울고 있긴 하지만.

 

술에 대한 이야기도 당신의 사물들보단 비중이 훨씬 없다. 뭐 예닐곱 살 때 술심부름하면서 막걸리를 훔쳐 마셨다는 굉장한 기록도 있긴 하지만 딱 그것뿐이다. 당신의 사물들보다 격한 인생이 나오지 않아서 재미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맥이 빠지긴 하다. 솔직히 시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채 시인의 사물들이 더 격할 줄 알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물들 자체에 더욱 집중해서 탐구한 듯한 기색은 있다. 남의 인생역정을 각인시키게 되는 일 없이 덤덤하게 책을 읽고 싶은데 당신의 사물들과 시인의 사물들 중 굳이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난 후자를 추천하고 싶다. 내 마음에 드는 건 막장드라마에 가까운 전자이지만.

함성호의 치마라는 글은 사람을 여러모로 놀래킨다. 일단 강원도 속초 출신인데도 이렇게 자유로운 글을 쓰신다는 게 그 첫째이다. (아무래도 지금은 다른 데서 살고 계신게 아닐까 싶고 그게 아니라면 더더욱 위대하신 듯하다.) 그것도 그런데 글은 또 무지하게 80년대 꼰대답다는 게 그 두번째다. 연애금지 법칙은 대체 뭔가욬ㅋㅋㅋㅋ 그러고보면 우리나라 페미니즘은 아직도 치마 입고 다니는 여자들을 좀 눈꼴시리게 보는 게 있는 듯하다. 지금부터라도 이들이 술 마시고 담배 피는 남성들을 따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애하면서도 치마도 원피스도 자연스레 입고 왕언니 혹은 여장부로 살았으면 한다. 근데 앞의 문장을 쓰고 생각해보니 촌나 힘든 일이네 그거 ㅋㅋㅋㅋ 상상만 해도 천개의 고원 보는 줄.

바흐친과 같이 니체도 대부분의 경우 시인을 맹렬하게 공격하던데, 형식에 굴복하기 쉬운 시인들의 자세 자체를 공격하려던게 아닌가 싶다. 아닌게 아니라 김수영 시인의 시 전집을 읽어봤을 때 그의 시는 마치 일기처럼 전개되어 있었다. 그 시를 지었던 연월일이 적혀있었던 걸 보면 다소 시에 변덕성이 드러난다고 알려져 있던 실비아 플라스도 마찬가지였던 걸로 알고 있다. 이 사실은 마치 그들의 인생에 굴곡이 없었더라면 그들의 시도 평범했을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런 비교를 하는 자체가 참 뭣하긴 한데, 박근혜 정권이 성립되었을 때 시인들은 그 당시 정권을 많이 걱정하는 반명 소설가들은 오히려 현재 정권이 그 전의 정권보다 막나가지 않음(?)을 아쉬워했던 측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들 자체를 공격하고 싶지는 않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을테니. 단지 소설가보다는 시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일상에 가깝다는 나의 주관적 의견이 점점 사실이 아닐까 생각된다는 것이다. 일상이라고 해서 또 뭔가 오해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일상의 의미는 뭐랄까 단조로움이랄까.

 

그러다 우연히 대학로에 있던 한 레코드점에서 음반 하나를 손에 넣게 되었어. 시디를 사기에는 돈이 부족해서 늘 카세트테이프만 사던 시절이었지. 음악만이 유일한 위로였던 시절. BLUE라는 이름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었어. 이런 영화가 있었나? 순정만화의 주인공 같은 미소년이 재킷에 실린 음반이라니. 나중에야 그게 동명의 '만화' 콘셉트 앨범이라는 걸 알았지.

  

박상수 시인의 카세트테이프. 그나저나 정말 유투브엔 뭐든지 있구나...
근데 뭐라고요??? 아니 2016년에 블루가 완결되었다고??????(충격)

 

양팔 저울의 한쪽 접시에 나를 올려놓고, 다른 쪽 접시에 무엇인가를 올려놓는 버릇이 있다. 눈금이 똑바로 0점에 이르려면, 그때그때 올려놔야 할 품목들이 다르다. 무지개 백서른아홉 개가 필요할 때가 있고, 어둠 삼천 마지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설악산만 한 것이 올라가도 이쪽이 안 올라갈 때가 있고, 이슬 한 방울로도 가뿐히 올라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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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와 만년필 창간호 - 6~9월, 우리는 귀엽고 강하다
유음 편집부 지음 / 유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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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하던 전 애인이 나와 싸우고 나서 내게 집을 나가라고 했을 때, 나는 지금 당장 갈 곳도 없고 네 요구는 부당하므로 그럴 수는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전 애인은 고양이를 끌어내서 때리기 시작했다. 신뢰하던 존재로부터 갑작스럽게 쏟아진 생에 한 번도 겪지 못한 폭력에 고양이는 꼬리가 몽둥이만 해져서는 털을 세우고 소리를 질러댔다.

 

 

청호동 고양이라는 노래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싶다. 고양이가 있어서 돌을 던지려 했는데 임신했기 때문에 돌을 던지지 않는다는 아이 이야기이다. 나는 궁금하다. 왜 그 이야기를 어른들은 감동적인 이야기라 생각하며 동요로 널리 알렸을까?

 

 네거티브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베푸는 것이라 친다면, 그 아이는 '임신한 엄마' 고양이에게 자신이 더 베푸는 사람으로 보이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누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건 자신이 더 가진 사람, 더 위에 있는 사람이란 걸 어필하려 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신한 고양이 말고도 다른 고양이들에겐 돌을 던져도 된다는 소리일까? 수컷 고양이는? 임신하지 않은 암컷 고양이는? 인생이 성공 혹은 실패로 나누어져 있다면, 나라는 암컷(고양이)은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뜻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북한이 핵을 던지냐 마느냐 걱정하기 전에 자신의 후손들이 맞아 죽느냐 자살하느냐를 가지고 잠도 못 자며 고민한다는 걸 염두에 두란 말이다 좀.

당신들은 왕년에 그런 폭력 겪어본 적이 없다고? 지랄시나이데 ㅋㅋㅋ 얼마나 고집이 쎘으면 옆에 있는 친구들이 너에게 폭력당한 적 있다고 상담도 안 해본 거니? 난 내가 겪은 것도 힘들었지만 여러 군데에서 당한 폭력 사례들이 버거워서 잠도 설칠 정도로 힘들었었다. 폭력은 너네 가족, 너네 형제자매, 너네 친구들, 너네 애인들, 너네 배우자가 겪을 수 있습니다 닌겐들아.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내가 당신이 인터넷 게임을 들먹이기 전에 알려주겠다. 요즘 인터넷 게임 하는 애들 별로 없다고 할 수 있고요. 그저 우리 어릴 때 참교육시킨다고 후드려패는 선생들이 없어져서다. 절대 강자가 없고 법이 없을 때 노예들이 하는 게 뭐겠는가? 약자 골라내서 줘패기밖에 없지.

이제는 시위를 하러 서울로 가는 일이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 혼자 다른 사람들을 동지로 알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동지로 보지 않는 곳에 뭐하러 가나.

사실 이건 내가 일상에서 일어나는 차별로 시선을 옮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출할 때 옷 하나에도 시선이 이상하게 가기 때문에 챙겨야 하는 건 물론이고, 일할 때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감시하는 사람들이 천지고, 무엇보다 성희롱과 사랑고백을 분간 못하는 인간들이 판을 치는 동네에서 난 하나하나 불편한 시선을 던졌다. 확실히 박근혜 정권 때엔 뉴질랜드에 가서 사는 게 어떻냐며 진지하게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으로 들어서면서 그들은 점점 입을 닫게 되었고 그렇게 시시때때로 틀던 뉴스도 보지 않게 되었다. 확실히 정권 교체는 중요한 듯하다. 하지만 이미 전반적으로 평온(?)을 되찾은 상황에서 나는 더 이상 양보하기가 싫은 것이다. 촛불집회에 나갔던, 여기 사는 사람들보다 더 정치에 관심이 많은 여성으로서 나의 입장을 실생활에 맞닥뜨려보고 싶다.

뭐 그렇다고 내가 유달리 특별한 인물은 아닌 듯하다. 다른 남성들이 항상 나에게 세뇌시키고 있듯이, 나는 그렇게 몸집이 좋고 힘이 센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지니고 있는 근력에 비해 외양은 말라 보였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그래서 심지어 여성들에게조차 백치미가 있다느니, 얼빵하다느니, 어릴적의 자신이 생각난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듣는다. 나하고 한 번이라도 같이 일해본 사람들은 내 완력을 아니까 절대 그런 소리를 하지 않지만. 최근 국가대표 운동선수라는 소릴 들었다. 아무튼 그래서 들었던 소리들과 차별들을 서서히 공개하고 싶다.

일단 이 잡지의 메인인 인터뷰가 남자 2, 여자 2명으로 구성된 게 놀라웠다. 그 중 한 분이 살짝 주제랑 엇나가서 이야기하는 측면이 강하긴 하지만, 일단 이런 매거진에 나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생각한다. 남자 세계에선 '넌 남자 놈이 무슨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하냐?'라는 소리를 듣기 일쑤인 게 남자 집사들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고양이는 제가 키워보지 않은 동물 중 하난데, 제 개가 짖으면 덩치가 커도 꼼짝을 못하고 도망가더라. 애완동물 계열에선 약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사회에서 취직할 때 회사내에서 여성이랑 사귀면 일정 정도 공격받는 것과 비슷한 듯.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정말 심각하게 고려해보지 않았던 게 몇 개 있다. 생각나는대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1. 아이스께끼는 성추행이었다.
2. 현실을 말하는 게 어떤 상황에서는 폭력이 될 수도 있었다.
3. 문학소녀란 단어는 성차별 발언이었다.
이런 걸 보면 내가 나이들었다는 걸 느낀다. 치과에 갔는데 잇몸에 노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말을 듣는 때처럼.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는 순수한 마법소녀가 아니라서 싫어한다고 누군가 말한다. 대체 순수한 마법소녀란 무엇인가. 요술공주 밍키처럼 트럭에 치이지 않고, 나노하처럼 배신의 드라마를 겪지 않으면서도 마법을 부리는 소녀가 과연 존재할 것인가. 아님 레미처럼 장렬하게 희생되어야 마법소녀인가.

 

 

말놀이 위주로 나와서 중요하진 않은 것 같지만, 유희왕이란 게임에서도 고양이가 나오는 카드가 등장한다(...) 여러가지 글이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시였다.

 

 

유희왕 1

권창섭

끝말잇기를 하자면서
형용사만을 말하는 당신은
반칙을 해서라도 이기고 싶은 걸까
아니면 어떻게든 지고 싶은 걸까

"예쁘네"라고 말하는 당신에게
"네루다" 같은 시인의 이름을 말한다거나,
그래서 "다르지"라고 말하는 당신에게
나 역시 "지겨워" 같은 형용사로 답하는 것은,

겁나는 일인 것 같다
마치 그것은
단어를 생각하지 않고, 단어를 생각하지 않는 일들

마치 그것은

"빨리"라고 말하는 당신에게
"리버모륨"이라고 답하는 것
"느리게"라고 말하는 당신에게는
"게르마늄"이라고 답하는 것
빠르든 늦든 우리는 끝날 것이고,
새로운 놀이들을 생각하자

단어를 생각하지 않고, 단어를 생각하는 일들
"하모니"와 "하모니카"
"미스터"와 "미스터리"
"그레이"와 "그레이드"

단어를 생각하고, 단어를 생각하는 일들
"자몽"에 "이슬"
"만수"와 "영자"
"오욕"의 "세월"

무수한 핑계들을 댈 수 있다
웃자, 아니다, 지자,
울자, 아니다, 이기자,
말들은 끊임없이 돌아오고

필요와 피로와
쓸모와 몹쓸을
돌고 도는 일은 너무나도
귀엽잖아 귀엽지 않아

마치 그것은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을 생각하는 일,
당신을 생각하지 않고,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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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7-09-12 0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몰랐던 문예지를 알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시점이 조금 늦었으면 (9월까지이므로) 아예 놓칠 뻔 했어요!!

갈매미르 2017-09-12 0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엌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저도 9월 초반에 이 잡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양이 잡지인 것도 특이한데 페미니즘과 연관시키는 특이한 잡지이더라고요. 강력 추천합니다.
 
나는 이미 한 생을 잘못 살았다 시작시인선 188
김사람 지음 / 천년의시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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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부치

팸을 본다 비빈다 맡는다 빤다 듣는다 눈을 감는다 나타난다 뜬다 사라진다 떠올린다 나를 나타난다 잊는다 나를 사라진다 나는 침대에서 깜,빡,껌,뻑,끔뻑, 깬다 다시 깬다 계속 깬다 벗어날 수 없다 꿈이 나를 꾼다

팸이 나를 깬다

악마의 드레스 자락을 밟는다
파란 하늘이 찢어진다
팸의 피부에서 밤이 번진다
지구가 출렁, 마리아나 해구
은사시나무가 자란다
까막딱따구리가 구멍을 판다
원앙이 둥지를 침탈한다

버뮤다를 이을 펜촉이 물에 빠진다 나의 성기를 움켜쥐고 아스팔트 수면에 서명을 한다 돌이 날아든다 팸을 뚫고 바람을 뚫고 피가 투명하게 흐른다

바다의 처음에서 암덩이가 부화한다 빛이 발한다 암세포가 전이된다 사람의 탈을 쓴 사람들 암세포를 쬐기 위해 사람보다 먼저 많이 쬐기 위해 정상을 오른다

안나푸르나에서는
눈물이 눈과 함께 얼어붙는다

죽은 범고래 새끼가 운다 주파수가 온몸에 닿는다 한쪽 눈가에만 경련이 인다 까막딱따구리가 범고래 입에 알을 넣는다 알에서 통조림이 태어난다 까막딱따구리가 통을 쪼아 먹는다 일렉기타가 바다에 떠다닌다 까막딱따구리가 기타 줄 위에 난장이를 눈다 난장이가 범고래 새끼를 먹는다 난장이가 가라앉는다 금요일 동안 가라앉는다

바다의 바닥은 하늘
하의만 벗은 난장이가 난다
수직으로 난다
하늘의 끝은 땅

팸이 사라진다

통조림 안에서 사람은 죽었고 신이 태어났다 뚜껑을 딸 사람이 없다

 

사실 이미지는 BDSM이 강렬했지만, 안나푸르나가 나온 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안나푸르나가 한 번밖에 안 나왔는데도 왜 그렇게 인상적이었을까. 눈물이 얼어붙는다는 대목이었을까? 최선을 다해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낫다느니, 침묵을 두려워하면서도 침묵을 지킬 때는 두려움보다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라느니, 상당히 아포리즘 같으면서도 맘에 드는 구절이 많았다.

 

  

확실히 시의 느낌은 참 좋다. 팸과 부치, BDSM, 그리고 기타 그쪽 계열에서 전문적인 용어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림자 쪽으로 좀 더 많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게다가 내장 기관을 자세히 이미지화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폐포가 계곡에서 물방울과 같이 흐르면서 흩어지는 이미지는 강렬했다. 훌륭한 시인은 이별에서 많은 교훈을 얻으며 죽음을 직시한다던데, 이 시집이 그 훌륭한 예시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시인 자신의 환경으로서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가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여성에 관해 생각하는 건 훌륭했다. 특히 모두가 어머니하면 출산을 생각할 때, 이 시인이 생리를 떠올리고 그걸 고어틱하게 표현한 점은 훌륭했다. 그러나 왜 그의 '다르게 생각하는 시선'이 사회의 현상에 대한 이해로 확장되지 못했을까? 아마도 그 점에서 김사람 시인을 제외한 모든 시인들이 드러내는 꼰대성이 은근히 반영된 것이라 생각한다. 가령 폴리아모리에 대한 시선이 그러하다. 동성애자는 미셸 푸코가 자신의 명성에 어느 정도 이용한 경우가 있어서, 요새는 특이하게 보이려 자신을 소개할 때 '이반'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그러나 폴리아모리는 관계에 엮어지는 사람들끼리의 동의가 필요하다. 만약 폴리아모리를 사칭해서 바람피는 자들을 비난하기 위해 시를 쓴 것이라면 상관이 없다. 하지만 폴리아모리 자체를 비난하며 일대일의 '트루 러브'를 찬양하려 한다면 역시 이 시에는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다. 만일 폴리아모리가 근시일 내에 동성애자만큼의 메이저성을 얻는다면 반드시 지적을 받을 거라 생각된다. 어쨌던 자신의 의견이라고 주장하며 인격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나도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 있어서 바로 사과했는데, 역시 문단계에 있다는 사람은 다른 것인가?)

 

하스피텔 마이너스 23시 59초

치마 속에는 비가 치렁치렁 내렸다
길 잃은 미아처럼 어둠이 되어가는 얼굴들
만지고 싶어서 스스로 어둠이 된
이바는 행복하다 믿었다

어둠은 돌의 원료 네토라레가 아니다

시야 확보가 어려웠지만
능숙한 손놀림으로 덩어리들을 꺼냈다
피 묻은 쇳조각들
떨리는 손에 전해진 조각들 하나하나를
이바는 혀로 핥고 또 핥았다

어둠은 철의 원료 네토라레가 아니다

의사는 메뉴얼대로 조립하며 중얼거렸다
"무언가 빠져 있어"
"제대로군!"

어둠은 질서의 원료 네토라레가 아니다

완성된 조각의 입에 이바의 입을 강제로 맞추고
긴 어둠을 불어넣게 했다
쇳덩이들 속으로 핏줄들이 돋아나며
눈동자에 깜빡깜빡 불이 켜졌다

어둠은 생성의 원료 네토라레가 아니다

의사는 호루라기를 불었다
이바의 남편이 들어와 돈을 건넸다

어둠은 세계의 원료 네토라레가 아니다

  

여기서 네토라레란 NTR로도 쓰이는데 남의 여(남)친 혹은 아내(남편)을 뺏어서 자신의 것으로 삼는 장르를 말한다(...)

이바에 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오던데, 만인과 사귀고 다니는 여성을 이미지화했다는 사실이 이 시에서 드러난다 할 수 있다. 히키코모리야 요새 무난하게 쓴다지만 설마 이 단어를 쓸 줄이야. 정말 무라카미 류 같다는 느낌이다.

 

 

P. S 블로그 보시는 분들은 다들 알겠지만 다시 말하겠음. 시집의 해설은 볼 때도 있고 보지 않을 때도 있는데 미래파 시집의 해설은 별로 안 봅니다. 평론가에 따라 아주 편협한 시각으로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솔직히 뒤에 소개글만 봐도 대충 그 시의 이미지가 잡히는 경우가 많고, 김사람 시인의 이번 시집도 그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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