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3 : 수치심 나는 오늘도 3
미쉘 퓌에슈 지음, 이샴 암라니 그림,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유명 브랜드 옷을 입지 않다니, 부끄러운 일 아닌가요?" 혹은 "신상 스마트폰이 없다니, 부끄러울 만하네요."
여기에 대해 "그러는 너는 우리가 수치심을 느껴 소비하도록 돌아가는 것이 부끄럽지 않니?" 라고 응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치심이 특히나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일단 부끄러움이란 제목의 단편소설? 수필?이 시험에 거의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글 중 하나이다. 또한 왕따 현상에서는 이지메같이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왕따에게 수치심을 주려는 노력이 일상다반사로 일어난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적으로 수치심은 개인이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수치심을 느끼는 일이 참 많다. 요즘은 비키니냐 토플리스냐(가슴)로 수치심의 기준이 정해진다면 옛날옛적엔 배꼽을 드러내는 걸 그렇게 부끄러워했다고 하니 말이다. 개인의 종교라거나 내밀한 사정이 이유인 것도 참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남성이 여성에게 세크하라를 할 때, 어떤 게 성희롱이고 어떤 게 성희롱이 아닐까? 맨 앞의 내용으로 보면 당연히 내가 수치심을 느끼는 게 성희롱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남성이 우월한 지위에 있다던가 개인적으로 내가 그 남성을 존중해줄 수밖에 없다던가 하면 수치심을 억누를 수밖에 없고, 그 세크하라에 아무렇지 않은 척 맞장구를 치며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세크하라를 당당하게 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칭찬도 그녀의 눈을 가리는데 한몫한다.) 특히 서브컬쳐의 모임에서 이런 분위기를 자주 보게 되는데, 견딜 수 있다면야 상관없지만, 가슴이 한순간이라도 따끔했다면 상대방에게 말을 해주는 게 좋다. 초보라면 거기서 멈출 테지만, 상습범이라면 계속 세크하라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리를 피해라.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아예 원인에 대한 접근을 피하는 게 좋다.

 공공장소에서 크게 떠드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이다. 부끄러운 줄을 알고 있지만 주변의 소음공해로 인해 목소리가 커지고 결국 상습적으로 수치심을 억누르다보니 아예 수치심이 적어져서 아는 사람이 전화만 하면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것이다. 책에서는 수치심에 떳떳해지는 법을 주로 적는데, 그건 프랑스같은 문화강국에서나 문제가 되는 일이고 우리나라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수치심을 느끼는가부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난 내 패션감각이 구린데에 대해 옛날부터 수치심을 많이 느껴왔었지만, 노출도를 줄이고 살이 찔 땐 헐렁한 옷을 입으려고 노력하면서 사람들의 시선도 많이 가라앉았고 나 자신도 그런대로 떳떳한 듯하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과 수치심을 공감하는 게 좋다. 여러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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