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병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47
공광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황금침대 위에서

황금침대 위에 옷 벗고 누워
반성 없이 핥아주고 빨아주고 대준다

"어서 내려와 이놈아!"
젊은 마르크스가 내게 소리친다

"제발 인간의 얼굴 좀 보여줘!"
늙은 교황의 절규도 들린다

황금침대에서 떨어진 적이 있던 나는
겨우 가계를 연명하는 수혈을 받고
그놈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안달한다.

  

30살이 되고나서 나는 어엿하게 한 직장에 취직한지 만 4년이 지나려 한다. 이것도 얼마나 유지할지 알 수 없다. 어제만 해도 반년에 한 번 볼까말까한 본사 사람들에게 몇십만원짜리 실수를 했네 뭐네 하면서 사정없이 걷어차이는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이 온 이유도 매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는데, 뭐 어쨌든.

 

 그러나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닥 다르지는 못한 듯하다. 외국으로 떠나겠다거나 꿈이 달리 없으니 공무원에 취직하겠다는 상념에 빠져 살거나, 나에게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고 이 계획을 발표하면 세상이 폭발할 게 확실한데 그외 다른 일은 남에게 떠맡길 생각이라거나, 분노에 눈이 멀어 그토록 침을 튀기며 욕해댔던 기득권의 황금침대에 눕길 자발적으로 선택하거나. 아주 최악의 경우엔 그저 '군대에서 저질렀던 관습'을 습관적으로 일상생활에 옮기면서 산다.

 시인은 소주병이라는 시에서 알멩이도 없고 텅 빈 병으로 남은 아버지를 의식한다. 그 안에서 바람이 감돌면서 들리는 흐느낌같은 소리와 소주 엑기스같은 눈물을 매우 서정적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버지 시체를 먹어보자는 아버지의 이야기인지 자신의 이야기인지 애매한 이야기가 나오다가 결국 휴일, 권태라는 시에서 아버지가 된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진술한다. 성관계까지도 적나라하게 진술하는 걸 보면 단순히 꼰대가 되어버린 건 아닌 듯하지만, 그 고어에 가까운 리얼리티가 오싹하기까지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 열렬히 저항하면서 그 안에서 이상향처럼 표현되고 강요되는 가족의 화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그가 경건해지는 유일한 계기는 오로지 불교이다. 종교도 기득권으로 취급되는 오늘날을 생각해보면 결국 그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황금침대에 누워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시집에서 나오는 자연이 바다에서 점점 산으로 바뀌는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하다. 나이가 들면 점점 산을 오르고 싶어한다지 않는가. 의식이 깨인 듯 자기성찰과 관련된 시를 쓰면서 서슴없이 자신을 비난하면서도 가부장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시인을 비난하지 말길 바란다. 그의 지나치게 솔직한 시는 사실은 당신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곧 꼰대가 될 새싹들과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한 꼰대가 되었거나 꼰대가 아닌척 하는 비겁한 꼰대들을 말이다.

 

 

시인 분은 결정적으로 대천 바다를 좋아하시는 듯하다. 문체에서 상당히 신경을 쓴 티가 난다. 하지만 어째 대관령이라거나 태백산이라거나 강원도에 관련된 시가 양은 더 많은 편이다. 그나마 백사장에서 모래를 퍼올리겠다고 시가 어리석은 돈욕심을 내는 바람에 경관은 많이 망가졌지만, 등대를 삼킬 듯이 몰아치는 파도는 여전하다.

 

속초에서

겨울 부두 끝에 서 있는 등대가
추위에 몸이 얼어 빨갛다
등대가 바닷가에 나온 이유는
망망대해에 나간 배를 기다리는 것
그것도 모르는 멍청한 바람은
등대가 불에 잘 익은 소세지인 줄 아는지
게걸스럽게 먹어보려다 이가 시려서
웅웅 언 입으로 벙어리처럼 운다
철없는 파도도 그것을 먹어보려고
달려들다 넘어져 이빨이 부러진다
얼굴이 빨갛게 언 어머니 한 분이
방파제에 생선 구럭을 들고 나와
등대처럼 앉아 모닥불을 쬐며 존다
그걸 내려다보는 흰머리 설악은
마음이 안 좋은지 그늘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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