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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은 공중에 글을 쓴다 - 열아홉 시인의 아름다운 생태시 선집
정현종 외 지음 / 호미 / 2010년 9월
평점 :
첫눈에 반한 사람을 향해 고개 돌리던 나처럼
차주일
숲이 만드는 끝없는 바람 소리가 곡선이다
나무가 연애하는
중이다
연애는 제 심장을 끝없이 열고 닫는 것이어서
나무는 수그리며, 꼬며, 뒤틀며 제 곧음을 꼴바꿈한다
본디 곧은 몸이어서
욕정 없던 나무 중 하나가
교성 내지르며 뛰어다니는 짐승들이 낸 굽은 오솔길에
제 그림자 슬그머니 맞춰봤을 것이다
이성의 음부를
연 것이 심장 뛰는 소리였음을 알고
몸을 휘어 심장을 만들었을 것이다
오솔길처럼 굽은 나무가 심장을 여닫으며 첫 바람을
퍼뜨리자
다른 나무들도 그림자를 휘어 오솔길을 안아봤을 것이다
첫눈에 반한 사람을 향해 고개 돌리던 나처럼
연애의 느낌을
표현하는 나무들로 숲은 소란했을 것이다
나무들이 휠 때 생겨난 동사와 형용사로 살아온 나
내 유전자인 첫 오솔길을 찾으러 숲에
든다
숲길은 모두 굽어 모두가 첫 길이다
어떤 오솔길을 따라가도 움막 하나 매달려 있을 것 같다
나무 그림자와 같은 어두운 움막
안에서
바람과 침을 삼키며 기도와 식도를 구부리는 짐승과
침엽 같은 털 수북한 짐승을 만날 것 같다
나무 그림자들이 서로
휘감으며 교미를 한다
그림자 체위대로 나무들이 굽는다
숲에서 바라보면 사랑은 명사가 아닌 동사이다
숲과 잇닿은 길은 모두 굽어
있다
숲에서 멀어진 길들은 반듯이 뻗어 죽었다
그곳엔 동사와 형용사가 없는 무정란 명사만 생존한다
그곳 사람들은 바람 소리를
만들지 못한다

시를 보고 생각난 모노가타리 시리즈 이야기이지만, 그리고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라라기랑
하네카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자길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어도 그렇지, 지가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거야. 그냥 조금 먼 길을 헤메어서 돌아왔어도
하네카와는 그 자리에 있을 텐데. 어차피 아라라기는 절대 요괴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 같은데 같이 꽃길을 걸어가면 안 되는 거니.
그런데 약간 실망이었다. 류기봉이라는 시인과 기타 두 분을 제외하고는 너무나 소극적인 의견 제시에 그치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상순이라는
시인 분이 당시 문학 계열에서 히트를 쳐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허탈한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시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했고 잘
감상했다. 그 많은 시 중에서도 양 세 마리라는 시가 압도적으로 인상적이었으니 말이다. 진정한 생태시가 이러니 저러니 따질 구석이 없다는 것도
인정은 한다. 그러나 농부가 반 정도 없는 대부분의 생태시는 그저 대부분의 책들에 등장하는 귀농 판타지에 불과하다.
나중에서야
류기봉 시인의 시를 보고 책 껍질 뒤의 책소개를 보고서야 이 시집이 류기봉 시인의 포도밭을 테마로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류기봉 시인의
시를 메인으로 두던가, 글 첫머리에 시집을 편찬하게 된 계기를 명확히 설명해야 했다. 환경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선 솔직히 세월호 관련
시집이라던가 사드 설치 반대 시집이라던가 혹은 촛불시위같은 글들을 기대했었다. 자연을 예찬하는 서정시를 기대하고 시집을 보았던 사람이라면 예상치
못한 무거움에 색다름을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순서대로 글을 읽으니 그걸 생각하여 독자들을 좀 더 배려해줬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랬음 적어도 내가 이 시집을 사는 일은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시는 아주 괜찮았다. 단지 취향이 아니었을 뿐이지.

이 시집에 나오는 시인들 중에서도 내가 특히 주목했던 분은 이경우 시인. 원주농고를
졸업해서 서울로 상경하셨던 듯한데, 다시 원주로 돌아와서 시를 쓰시면서 서울과 원주를 왔다갔다 하시는 것 같다. 마치 하이쿠같이 짧은 시를
쓰시던데, 그만큼 다른 어떤 서정시보다도 더 강렬한 울림을 남긴다. 근데 다른 시집을 검색해보니 시들이 보통 시인들의 시들처럼 길다. 이
시집에서만 일부러 하이쿠같은 시들을 올린 건지도 모르겠다.
내안에 피다
이경우
5월,
오동나무 꽃등이 나를 찾아왔다
삼천 개가 넘는 꽃등이
오동나무에 모여
껐다가, 켰다가 하면서
나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