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 키스 문학과지성 시인선 332
신대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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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중에서

2. 바이칼에선 누구나 한 영혼?

우리는 허공으로 숨 몰아쉬고
높은 데로 오르고 오르다가
수심으로 푸르게 숨쉬다가
그대 눈으로 알혼 섬을 보고
내 눈으로 후지르를 생각하고
한 영혼이 되어 호수를 건넜습니다.

 

 

나름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일을 겪은 건 학창시절이었는데, 그 시기가 끝나갈 무렵인 고3시절 팬픽을 쓴 적이 있다. 강철의 연금술사 하보로이 커플 중심 BL소설이었는데, 전쟁 이야기였다. 나는 내 빈약한 상상력을 넘어 가장 끔찍한 전쟁 장면을 그려내려 노력했었다. 결국 졸작이었겠지만 당시 쓴 많은 팬픽 중에서 그나마 무난한 작품으로 통했었다. 다른 팬픽들은 개그물만 제외하면 정말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당사자인 나만 알고 있는 내용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처음 시 부분에서는 잘 티가 안 난다. 약간 난해하지만 평범하게 러시아를 여행하는 이야기로 알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의 군데군데마다 죽음의 분위기가 어려 있는 건 숨길 수 없었다. 평온하고 따뜻한 벌판에서 잔혹한 전쟁이 펼쳐졌을 때 군인이었던 시인은 그 언밸런스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달아나듯이 춥고 거친 황야로 뛰쳐나온 그는 자연의 척박함에 자신을 온통 맡겨버린다. 아주 늑대소년이 되어버린다. 그의 마음 속에 물이 차오를 때였던가. 그는 신나게 자연을 예찬하는 시를 쓴다. 그러나 인간일 때의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고 속박되어 있는 그는 자꾸만 자연을 사람으로 본다. 다시 과거의 사람을 찾고 싶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여 제대로 부르고 싶어 알래스카 벌판에서 천지를 부여잡고 백두대간을 미끄러져 내려가 한계령에 걸터앉았다가 지리산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다. 러시아에서 배운 주문을 읊는다. 아이두세 요하르 아이두세 헤이부룰라. 기적같이 그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번은 전의 독에 가득찬 회상과 다르다. 기억 속 영혼들은 시인을 빙 둘러싸고 강강술래 춤을 추며 정화된다. 이 시는 PTSD를 극복하는 과정이며, 또한 늑대아이가 늑대인간이 되었다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시집 자체가 대형 서사시다.

 그러나 영혼들이 모두 떠났을 때 그의 마음 속에 소년만 남은 건 아니었다. 전쟁에 마음이 쪼글쪼글 말라붙어 전쟁이라는 현실 생각밖에 없던 시인. 그의 마음에 물이 차오르고 젖어들자 돌연 할머니가 나타난다. 할머니는 벌하고 꽃한테만 일 시키지 말고 골도 파고 물도 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페미니즘이 뭐 별건가. 남자들의 전쟁과 피로 얼룩진 과거를 용서하고 여성들이 대신 앞으로 바르게 나아가겠다는 사상이다. 그 사상은 할머니의 눈주름을 타고 내려 시인의 아내에 이르고 또 그 다음 딸이나 며느리로 계속 이어지리라. 그리고 그들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겠다는 시인의 다짐이 사이라는 훈훈한 시 두 편에 들어있었다. 내가 시에서 받은 기타 느낌들은 죄다 황광수라는 사람이 시집 뒤 평론에서 썼다. 제법 솔직하고 뛰어난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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