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시인선 24
서대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지

 

길은 말라 있었다 바람 불자 빙판에 엉긴 비닐 조각들 일제히 휘날렸다 쓸쓸해하는 애인의 손을 잡고 여관에 들어섰다 여관의 문 앞에서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 모퉁이를 급히 돌아가는 사내가 보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가만 감싸쥐었다 날이 쉽게 저물었다 여관방 유리창은 미세한 정적을 머금은 잔금들로 가득했다 그녀가 기침을 하며 몇 개의 얼음을 뱉어났다 잔금들이 환하게 빛났다 멀어져가는 나는 상관할 것 없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는 말없이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엷은 김이 방 안을 채웠다 

 

투명한 정사가 시작되었다 그녀가 내 위로 난폭하게 올라섰다 나는 고양이처럼 소리를 내었다 전봇대 곁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여관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리칼이 언뜻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와 나는 내가 이곳에서 그들을 엿보며 서성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거리는 너무 추웠다 나는 옷깃을 목 깊숙이 끌어올린다 나는 그녀를 쓰러뜨리고 그녀의 위로 올라선다 그녀가 내 목에 팔을 감으며 미안해, 미안해 속삭였다 흐느끼는 목소리 나는 그녀의 차디찬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갠다 네 잘못이 아냐 네 잘못이 아냐 그녀의 목에서 윽윽 사무치듯 얼음이 올라왔다 혀끝에 달라붙는 뜨거운 얼음

 

 나는 눈을 감았다 뜬다 나는 그들의 동작을 하나하나 볼 수 있다 나는 내가 그녀의 전신을 으스러지도록 안으며 속으로 속삭이는 파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그녀와 나를 나의 문법에서 이탈시킨다 나는 그녀와 나의 슬픔을 향해 그녀와 내가 벌이고 있는 투명한 정사를 향해 더듬더듬 속삭인다 너희들의 잘못이 아냐 너희들의 잘못이 아냐 어느새 가로등이 켜져 있다 저편에서 골목 모퉁이를 돌아오는 그녀가 보인다 전봇대에 기댄 체 그녀는 내게서 담배를 받아든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한다 여관 창문에서 침대 삐걱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우리는 천천히 그 골목을 빠져나간다

 

 

  

나중에 나올 파일럿이란 시에선 파일럿을 이마 정중앙에 앉힌다.

에반게리온으로 인해 덕후에 입문한 나로선 굉장히 생소한 로봇 조종방식이다.

로봇을 리모컨으로 조종했던 이후의 방식이라고 하던데.

로봇 덕후도 아닌 내가 뭐라고 왈가왈부할 수 없으니 링크 참조. https://zibitblog.wordpress.com/2013/10/08/atom01/

맨처음 정보를 제공해주신 니니 혹은 니니의 사부니에게 이 공을 돌립니다.

 

 그러나 Y와 벌였던 논쟁이 잠시 생각났다. 무슨 이야기를 했다가 그런 대화로 진행이 되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난 '사람은 머리로 살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 말을 내뱉었을 땐 단순히 그동안 감정적으로 행동했던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었다. 좀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자는 다짐 하에. 그러나 Y는 '사람은 가슴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시종일관 나에게 너무나 냉정했으니까, 혹시나 그게 부끄러워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일까? 그의 논리에 의하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야 진정으로 행동에 옮길 수 있지, 머리로 생각하면 머뭇머뭇거리게 되서 늦어진다고. 그러나 우리 둘 다 틀렸다.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이성도 감정도 모두 뇌에서 주관한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잠시 존경의 감정을 품었던 것도 뇌에서 일어난 하나의 착시 현상이었을까?

 그러나 서대경 시인은 놀랍게도 영혼을 믿는다. 그는 안타깝게도 다중인격자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수많은 목소리들을 듣는 듯하다. 그의 정제되지 못하고 산문으로 주절주절 흐르는 시가 그것을 반증한다. 원숭이라는 시를 보면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가 그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렇게 간단히 정의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서대경 시인도 좀 다르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쉴새없이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그 원숭이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자신의 어린 시절, '소설가와 사귀는 전애인'을 곰곰히 곱씹어본다. 그 둘은 다 그의 상처를 이루는 일부분이다. 담배연기와 같이 허망하고 희디희게 사라질 뿐이지만, 그는 그 꿈을 쫓고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아름답기 때문에 나와 너와 우리들은 죄가 없다고. 설사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서, 백치라서 가난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빈털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짓거리를 했더라도.

 머리로 생각한다는 게 고작 추악한 정념과 망상 뿐이다. 어떤 말을 해도 너와 내가 되어버린 우리 둘 사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기차가 지나가는 순간의 그 봄을 곱씹어봄으로써, 상처를 좀 더 깊이 아프게 헤집음으로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당신을 만났던 그 추운 날은 흐릿한 담배연기를 배경으로 하여 다시 꿈 속에 찾아온다. 그리고 서서히 몰입하기 시작한 독자들은 이 시집을 덮을 때까지 시집이 계속 소리치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가지 말아요. 나랑 좀 더 놀아줘요. 그는 귀신과 좀 놀 줄 아는 시인이다. 뇌에 탑재되어 있는 파일럿인데도, 멀쩡한 정신인데도 불구하고 시라는 엄청난 몸짓을 계속할 수 있다. 난 개인적으로 그의 꿈이 영원히 깨지 않기를 바란다.

 

  

아마도 파일럿 시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진정한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진마징가 Zero(...)

만약 서대경 시인이 몰랐다면 대예언이 아닐까...

수트가 지네같긴 하잖아?

 

 

파일럿

 

 그는 거대한 로봇의 이마 정중앙에 위치한 조종석에 앉아 있었다. 조종간 위쪽에 달린 유리창을 통해 부슬비가 내리는 바깥 풍경이 내다보였다. 로봇은 배터리가 나가 있었다. 로봇은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쪽 다리를 지면에 붙인 상태로 두 팔을 공중에 치켜들고 비행 자세를 취했었다. 그러나 그때 전력 공급이 중단되었고 로봇은 팔을 치켜든 채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뿌연 안개가 스멀거리는 대지 위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입에 담배를 물고 조종간 핸들 위로 두 다리를 걸친 채 창밖을 바라본다. 그는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로봇 부대의 파일럿이라면 대체로 그러하듯이 스물을 넘지기 않은, 눈이 크고 윤기가 흐르는 생머리를 가진 그런 부류의 미소년은 아니었다, 그는 아랫배가 처져 있었고 면도를 하지 않은 얼굴에는 여드름이 뒤덮여 있었다. 조종석 바닥에는 축축한 정액이 묻은 휴지 뭉치가 뒹굴었다.

 그는 지네의 형상을 한 적군의 기갑 군단과의 교전중에 낙오되었다. 적군은 점액질로 된 독극물을 사방에 뿌려대었었다, 그것은 신형이었고 놀라운 마력을 자랑하는 엔진을 달고 있었다. 그는 지네 다리에 칭칭 감긴 채로 교성을 지르던 그녀의 표정을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타고 있던 로봇이 지네 다리에 감긴 것이지만. 그러나 그녀는 소리를 질렀었다. 그녀의 팔이,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조종하던 로봇의 팔이 지네 형상인 그것의 머리를 향해 조준되었고 주먹이 발사되었었다. 그는 그녀의 교성을 생각한다. 마이크를 통해 전해오던 그녀의 젖은 음성을 생각한다. 미사일 버튼을 필사적으로 쾅쾅 내리치면서, 그녀가 내뿜던 거친 숨소리를 생각한다. 그는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하나 꺼내어 딴다. 그는 의자를 비스듬히 뒤로 눕힌 다음 맥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녀는 적군의 포로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요즘도 그녀는 타이즈 바지를 입고 새벽 조깅을 할까? 그는 몸을 둥글게 웅크린다. 부슬비가 조종석 유리창 위로 가늘게 부서져내리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