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 소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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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할 때는, 오로지 국사를 걱정하는 일 외에는 항상 한 걸음 물러서고 한 고개 낮추어, 학문에 뜻을 모아 "나의 배움이 완전하지 못한데, 어찌 성급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겠는가?" 해야 합니다. (...) 그러므로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와 속일 수 없는 식견을 지녀야만 합니다.- p. 26

 

 2012년에 이 책이 다시 정리되어 나오는데, 그 책에서는 '편지를 쓰다'가 아니라 '소통하다'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있다. 요즘 불통을 소통이라 빡빡 우기는 시대이다보니, 나이 차이도 매우 많이 나는 퇴계와 고봉이 서로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허물없이 가정사를 나눌 수 있는 사이란 걸 더욱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요즘엔 전화나 카톡으로 실시간으로 안부를 물을 수 있고, 그나마 남은 우체국마저 무인 우체국으로 변하는 시기이니 편지의 의미가 그닥 중요하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퇴계와 고봉이 편지로밖에 소통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편지를 쓰는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영화 명량을 볼 때 사람들이 더욱 커다랗게 감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배 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병사들 때문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밑에서 커다란 배를 조종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퇴계와 고봉이 편지를 나누던 때엔 붕당정치가 막 시작되었던 시기이며, 따라서 편지를 보내는 것도 상당히 힘들었다.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서 인편이 없으니 누구에게 편지를 부치기가 참 난감하겠다.' '내 아들이 서울로 올라가니 그에게 이 편지를 동봉해서 보내겠다' '내 휘하에 있는 자네의 친구 누구누구가 이 편지를 가지고 내려갈텐데, 잘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등등 그들이 편지를 보내기 참 불편했던 증거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렇기에 편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을까 절실했을 것이고, 편지를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한층 더했을 것이다. 아마 이 책을 읽다보면 편지를 쓰고 싶어질 것이다.

 대충 편지 내용은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론에 고봉 기대승이 퇴짜를 놓는다는 게 주요하다. 하지만 둘 다 같은 성리학 학자이다보니, 논쟁하는 것도 사실 별반 차이가 없다. 오히려 고봉이 꼬치꼬치 따지는 성격이다보니 퇴계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인다. 가끔 책은 쓸모없는 말 뿐이고 실천의 핵심이 담겨있지 않다보니 본뜻은 책 밖에 따로 숨겨져 있다는 말이 떠돈다. 난 법정스님의 에세이로부터 이와 비슷한 글을 접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또 그런 투의 글을 접하게 되었다. 물론 이는 퇴계 이황이나 고봉의 이론에 반대하던 사람이 제시한 이론이고, 기대승은 그에 '성현의 마음씨가 그렇게 좁지 않다고 생각한다.', '옛 성현들은 도를 밝히고 책을 지어 해와 별처럼 찬란한 이론을 지었는데, 어째서 그들이 가르침을 아끼고 숨기는 행위를 할 수 있겠는가.' 등의 의견으로 반박한다. 그는 퇴계 이황이 떠난 마당에서 마지막까지 성리학 학자답게 살려다가 붕당정치가 시작되려는 흐름이 조정에서 일어나자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고 시골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편지들에서 내가 깜짝 놀란 건 퇴계 이황의 태도였다. 사실 먼저 고봉의 의견을 펼칠 것을 요청한 것도 퇴계 이황이었고, 그는 사단칠정 논쟁을 중지할 때도 여러 편지를 나눠보고 나서 그의 학문이 깊음을 파악하고 조정에 고봉을 적극적으로 써달라 추천한다. 이후 그는 먼저 사단칠정 논쟁을 거론하면서 자신의 이론이 부분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시인한다. 심지어 무극이 태극이라는 이론은 또 다른 젊은 학자의 의견을 참고하고선 아예 없애버리는 파격을 보인다. 나이나 직위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자신의 이론을 수정할 줄 아는 그의 모습에서 일면 성자같은 면까지 보였다. 애초에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하고 거기서 또 하나의 새로운 철학을 세우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만일 그가 고봉 기대승의 이론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이후 율곡 이이가 고봉의 의견을 다시 정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 세명은 중국에서 수입해온 이론 외에는 별다른 희망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철학의 꽃을 피워낸 사람들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자신이 '철학교수는 있는데 철학자는 없는' 시대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시대는 자본주의의 극에 달해있고 정치계는 이익다툼하기 바쁘다.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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