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실비아 플라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제발,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내 얘기를 들어줘. 이번이 마지막이 될 테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 끔찍스러운 용기를 출산하고 있는 거니까, 그리고 이 힘은 내 자식이기도 하지만 네가 낳은 아기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네가 들어주어야 이 아기가 세례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p. 250

 

 일기를 우습게 보지 말라. 최소한 자소서 정도는 어디에서나 돋보일 수 있도록 쓸 수 있는 난 어렸을 때부터 최소 한 쪽은 넘도록 꼬박꼬박 일기를 써왔었다.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여성 문학도들이 대게 자신의 체험을 빌려서 소설을 쓰는데, 그 체험을 글로 정리하여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참고하는 것이 늘상 일기였다. 요즘 본인이 한창 읽고 있는 빨강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도 일기를 충실히 쓴 여성이었고, 이 실비아 플라스도 그런 여성이었다.

 테드가 실비아를 만나자마자 강제로 키스하고 그에 저항하기 위해 실비아가 테드의 볼을 물어 뜯었다는 이야기도 참 기상천외하지만, 그 이전의 인생도 순탄치 않았다. 그 중 가장 큰 사건이 강간, 그리고 리처드 새순이다. 프랑스에 가서 원거리 연애를 유지하다 다른 애인을 사귀었다고 하니, 그녀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 아마도 그녀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테드가 고백할 때 그것을 덥석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녀가 그 인상적인 첫만남 이후로 테드에게도 상당히 신경을 쓰는 게 보이지만, 그녀는 어쩐지 테드와 사귀는 중에도 리처드에게 편지 비슷한 걸 많이 썼었고, 결혼 이후에도 리처드에 대해 문득문득 회상하곤 한다. 

 뭐 딱히 리처드에게 미련이 없었다고 해도 테드는 확실히 결혼하면 안 되었을 남자임에 틀림없다. 신혼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실비아의 목을 조르고, 싸우다가 여러번 그녀를 때렸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여자들이 그를 따라다녔다. 결국 미국에 세를 준 아씨아가 그들 부부가 있는 영국에까지 전화를 하는 걸 보고 실비아는 이혼을 결심했고, 그 분노에 힘입어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쓴다. 여성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면서 좋은 작품을 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나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아이들이 가스 냄새를 맡지 못하도록 문에 테이프를 두른 다음 오븐에 머리를 박고 가스 냄새를 맡으면서 자살했을 때의 기분은 물론이고. 웃긴 건 그 이후로 아씨아가 두번째 부인이 되는데, 그 여자는 딸과 함께 동반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여자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만, 이로써 실비아는 실비아 본인의 생각보다도 매우 고운 성격이었음이 입증되지 않았나 싶다. 애는 뭔 죄야. 실비아 플라스의 이야기가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각색되었을 때 그녀의 딸 프리다가 '내 어머니를 자살 인형으로 만들지 마라'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서 비판했다는 사실로 볼 때 살아생전 아이들에게도 매우 각별한 신경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전남편 테드 휴즈가 그래도 마지막에 그녀의 문학실력을 인정하고 일기를 출판할 결심을 낸 건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거의 대부분을 생략해버리고

(테드 사후에 원본을 보니 그렇게 심한 글이 쓰여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다.)

무엇보다 테드와의 이혼 직후 3개월 동안의 일기를 버린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 생각한다.


 좀 우스운 일이지만, 난 전태일이 생각났다. 물론 그녀는 그 자신의 기구한 삶에 지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시시콜콜 자신의 시에 참견하고 문학의 권력가에게 아첨만 하는 테드에게 이제까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저항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한 때 그녀는 테드가 시를 잘 쓴다고 생각하고 시를 쓰는 이런저런 '비결'을 강요하는 그가 언제나 옳다고 생각했지만, 언젠가부터는 그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지 않는다. 테드의 외도를 알기 전부터 그녀의 진실된 행동과 목소리가 거짓된 남성에게 작품을 보여주지 말아야 한다고 그녀를 설득한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 그녀의 소설 몇몇이 실종되기는 했지만, 난 실비아가 옳은 행동을 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결국 미국에서 살 때 심리상담가와의 끊임없는 대화로 인해 자신에게 과하게 의존하고 있던 홀어머니의 강박관념을 떨쳐내고, 자신을 옥죄고 있는 남성성으로부터 버림받았거나 혹은 스스로 버림으로서 자신이 천재시인임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게 그녀의 꾸밈없는 성격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심지어 일기에서조차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코딱지를 파는 행위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매우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은밀하게 맘에 드는 남자들에서까지 모든 걸 그녀의 일기에 고백한다. 이런 굉장한 글을 쓸 줄 아는 여성을 보호하지 못했다니 미국은 굉장히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려 700페이지에 걸친 기나긴 일기였는데도 상당히 재밌게 볼 수 있었다. 미사여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굉장히 시원시원한 문체여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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