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프랑스철학: 근대성과 주체의 지속(캐롤라인 윌리엄스) 

 

1장 문제들과 역설들을 상속하기 - 주체성과 근대철학

 

주체 개념은 매우 다른 역사적 설명을 갖는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한다(데카르트에서 후설 그리고 그 이후). 근대철학 내에서 주체 개념은 대개 subjectum으로, 인식의 객관화하는 토대로, 모든 가능한 존재들의 토대로 개념화되어왔다. 이때 주체는 우선 인식론적 기능을 하는 것으로, 대상의 재현이 사유, 지각, 주체적 의식의 앎의 결과가 되는 가지성intelligibility의 영역을 구획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체는 이러한 동질성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주체 개념에서 존재론의 영역은 인식론만큼이나 중요하다. 실상 주체의 대문자 역사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의 개념화는 철학적 스타일의 다수성만큼이나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주체에 대한 질문은 이러한 문제들의 역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 장의 목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헤겔에 의해 전개된 주체에 대한 세 가지 개념을 식별하고 정교화하는 것이다.

 

1. 데카르트와 근대적 코기토의 탄생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보였듯이 근대성과 인식의 합리주의적 정향의 탄생은 데카르트적인 사유 주체 그리고 이후의 칸트적인 초월론적 주체와 분리될 수 없다. 정신과 신체, res cogitans와 res extensa의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이후 근대의 철학적, 정치적 사유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성의 구성은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문제틀에서부터 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1)

  데카르트의 철학은 인식의 새로운 토대를 만들고, 사유하는 주체를 구성함으로써 근대를 특징짓는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검증할 수 있도록 한다. 데카르트적 형이상학은 인간 주체의 관점에서 실재의 확실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회의주의로부터 발원한다. 인식론적 불확실성은 주체의 실재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진리의 기준들까지도 회의하도록 만든다(아렌트: ‘데카르트적 회의의 특징은 그 보편성’). 만약 우리의 지성intellect이 유한하다면 어떻게 인식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제1성찰에서 나타나듯이 환상, 상상, 부정확한 감각적 지각과 실재를 분간할 수 없다는 회의와 불안은, 이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진정한 코기토의 창조로서만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인식론적 안정성과 진리의 획득은 이와 같은 주체의 경험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제거할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 또한 인식 능력의 토대를 형성하는 것은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이다. 사유 능력 및 참되고 판명한 관념을 그렇지 않은 것과 구별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은 명석 판명함의 척도로서 기능하는 기하학적 법칙과 관련된다. 사유는 환상, 정서affection, 즉각적 경험 등 신체에 의한 흔적들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데카르트 철학은 주체를 명석하거나 기만적인 사유의 저자author이자 의지하고 사유하는 주체, 진리를 형성하는 것에 책임을 지는 주체를 구성한다. 그러나 신의 권위로부터 주체의 책임으로의 이와 같은 이동은 신을 명석판명한 관념의 원인이자 보증자로 가짐으로써만 가능하다. 홉스의 경우를 보더라도 주체의 능력은 신이 부여한 것이며, 인간의 정신은 신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데카르트적 주체는 인식의 저자이자 또한 이러한 신이 부여한 명석판명한 사유 능력의 오용에 책임을 지는 주체이다. 그런데 이러한 데카르트적 주체의 존재론적 내용은 무엇인가? 그는 주체의 존재론을 본격적으로 내놓지는 않지만, 적어도 데카르트적 주체는 시간 내에서 고정된 것이어야 한다. 그에게 주체성의 본질은 자아의 인식적 능력에 의해 부여되는 것으로, 세계나 타자와의 시공간적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지성의 능력에 대한 내적 반성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순수하고, 비시간적이고, 자기-폐쇄적이며, 반성적인 의식이다.

 이후의 철학은 데카르트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데, 인식론적 회의는 주체성의 모든 담론의 어떤 틈fissure이 된다. 회의나 불안의 억압이 곧 주체를 위한 새로운 토대주의적 이론을 만드는 것은 아닌데, 예컨대 정신분석 이론에서는 바로 이러한 억압이 바로 주체의 토대주의적 이론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캉이 주장하듯이 주체에 의한 대상의 재현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며, 의심은 진리를 보장하려는 시도들을 영원히 방해하게 된다. 코기토는 언어 내에서 그 자체로 경험될 수 없으며, 그 동일성은 영원히 분열된 채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적 주체는 또한 정신분석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서구 철학의 담론, 특히 칸트 철학은 추상적이고 초월론적인 주체성과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주체성 사이의 이율배반을 화해시키려 시도한다. 흄의 회의주의가 주체의 동일성을 그 굳건한 토대가 결여된 연속적인 흐름flux으로 간주했다면, 칸트는 주체성을 주체와 객체의 구별 위에 정초함으로써 데카르트적 문제틀을 발본화했다. 인식 주체는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존재,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이며, 이러한 주체는 인식 가능성의 조건이다(‘경험 일반의 가능성의 조건이 동시에 경험 대상의 가능성이다’).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칸트는 인간 경험의 한계를 인정했으며, 이 점에서 초월론적 주체성은 경험적, 실천적 의식과 일치할 수 없는 이상적 개념화이다. 오류, 환상, 혼동은 데카르트에서처럼 여전히 인식의 자기확실성에 대한 잠재적 방해요인으로 남는다.

  이상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객체성보다 특권적인 주체성 개념은 서구의 정치적, 철학적 사유의 지배적 패러다임을 구성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비판자인 하이데거에게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철학을 인간학anthropology으로 변형시키고 세계를 주체에게 표상(Vor-stellen)되는 것으로 만든다(<세계상의 시대>). 흔들릴 수 없는 확실성의 토대로서 주체의 개념화는 근대적 사유 형태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반-의인론anti-anthropomorphism이 데카르트에서 헤겔의 주체 개념 사이에서 이례적인 것anomaly으로 나타나게 한다.

 

2. 스피노자의 실체 철학: 주체의 분해와 재구성

  스피노자가 현대철학에 미친 영향력은 심대한데, 그는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우선성을 대체하는 주체성의 설명을 제공한다. 주체는 욕망, 의지, 자기이해 등이 실체의 체계적, 합리적 질서의 결과로 간주되는 상호연관된 복잡한 관계 도식 속에 위치한다. 이때 실체란 절대적인 신적 실체와 등치될 수 없으며, 범신론으로도 해석될 수 없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은유적인 의미와 실재적real(구체적) 의미로 사용한다. 이때 은유적인 까닭은 실체가 그것의 가능한 속성들의 무한성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고, 실재적인 까닭은 그것이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천상의 무엇이 아니라 자연적, 물질적인 것, 또한 생life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데카르트적 이원론, 주체를 두 가지 모순적인 영역으로 분열시키는 이원론과 대립된다. 그에게 주체성의 형태 및 인식의 구조에 대한 이해는 오직 신체와 정신, 정념과 지성 사이의 상호연관성interconnectedness을 인지함으로써만 달성되는 것이다. 그는 주체와 인식 사이의 관계를 구현embody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는 헤겔과 같지만, 헤겔과 달리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최초의initial 분리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실 헤겔에 의한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주요 비판은 스피노자의 실체 일원론이 주체성을 역사적인 생성 하에서 파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 헤겔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모두 수학적 모델을 준수하면서 사유의 추상적 개념화를 추구했다고 보았다. 반면 피에르 마슈레는 스피노자의 실체 및 속성 이론이 존재와 인식의 무제한적 가능성을 가진 구체적인 체계라고 기술한다. 사실 스피노자의 경험주의 비판, 인식과 주체성의 상상적 토대에 대한 설명, (개체적이고 집단적인) 정신과 신체의 역량potentia을 구획하고, 규율하고, 포함하는 정념에 관한 성찰 등은 알튀세르와 라캉의 주체 이론을 중요한 점에서 예상하는 것이었다.

  스피노자의 목적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존재론적 이원론으로 서술되지 않는 인식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신이 모든 세계의 행위를 고정되고 미리 주어진 목적에 따라 이끈다는) 종교적 목적telos의 교설을 받아들이도록 인간들을 기만하는 신학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실재에 대한 목적론적이고 선험적인a priori 개념화는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그릇된 설명이며, 신에 대한 이해를 무지하도록 고정시키는 공상에 불과하다. 세계에 대한 잘못된 지각과 오해는, 의지에 대한 합리적 이해와 우리가 자연과 갖는 정념적 교환 사이의 원초적 간극chasm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이 우리의 앎의 형태 속에 존재할 때, 스피노자는 오류의 원인을 보여주려고 한다.

  반성적 자기의식의 역할은 실체를 구성하는 힘과 변용affect의 구조에 의해 엄격히 제한된다. 의식은 이러한 구조 밖으로 연장될 수 없으며, 주체는 관념의 창조적 작인agency이나 인식 가능성 조건을 만드는 자율적인 경험의 주체가 아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의 일정한 변양definite modification에 의해 구성된다’(<윤리학> 2부 명제 10 따름정리corollary). 유사하게, 정신 속에는 절대적인 자유의지란 없으며, 정신은 원인에 의한 이러저러한 의지에 의해 규정되며, 이 원인은 마찬가지로 다른 원인에 의해 규정되고 이렇게 무한히 계속된다(ad infinitum).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를 공통의 실체의 속성의 무한함 가운데서 두 가지 속성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사유와 연장은 이러한 일차적primary 실체의 변용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유, 지성, 의지, 지각, 관념, 대상, 인식의 형태 등은 모두 이러한 실체와의 내재적이고 필연적인 관계로부터 나온다. 주체는 이러한 합리적 총체 내에 위치해야 하며, 실체의 존재 또는 변용의 양태mode로 이해되어야 한다.

 

관념들과 이미지들, 신체들과 정신들

  ‘관념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2부 48번 명제). 스피노자에게 정신은 그것이 신체의 특수한 관념이기 때문에 개별적 주체이다. 신체는 다수성multiplicity의 장소이자 경험에 의해 많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과 신체 속에서 관념의 질서는 적합하고, 명석 판명한 표상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은 혼잡하고, 부분적인 것이 된다. 명석함과 곡해distortion 사이의 구별. 스피노자에서 정신은 사유 내에서 신체의 관념으로서, 신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사유하는 신체이다. 이러한 신체와 정신 사이의 중요한 상호연관성, 관념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material 장소로서 신체를 고려할 때, 스피노자는 어떻게 순수 인식의 이론을 전개할 수 있는가?

  그는 3종의 인식을 구별한다. 각각의 인식은 실체에 대한 각각의 관계 및 존재양태에 대응한다. 1종의 인식은 ‘개별 대상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지성적 질서도 없이 단편적이고 혼잡한 방식으로 감각을 통해 드러나는’(2부 명제 40 sch. 2) 인과적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부적합한 관념을 낳는데, 이는 오직 정념, 감정, 신체적 변용들bodily affects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1종의 인식은 신체적 경험의 다수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취해진 이미지들, 상징symbol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어떠한 표상 대상도 필요로 하지 않는 스스로에게 적합한 관념과, 이미지나 기호sign에 결부된 관념을 구별한다. 상상imaginatio은 관념과 이미지의 관계를 혼동할 수 있고,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 인식의 상상적 형태에 관한 연구에서 스피노자는 언어의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언어는 재현과 진리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없으며, 기만, 왜곡, 환상 등에 종속되어 있다. 그에게 언어는 반동적인 것이며, 상상력에 결부되어 있고, 신체적 변용에 밀접히 결부된 부적합한 관념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관념의 물질성 및 그 언어적 형태와의 구체적 연관성을 지적한다. 언어와 주체성은 밀접히 연관되어있다.

  2종의 인식은 ‘우리가 갖는 사물들의 특성의 적합한 관념과 공통통념common notions이라는 사실로부터'(2부 명제 40 sch. 2) 나온다. 2종의 인식은 1종과 3종의 인식 사이를 매개한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공통통념은 사유가 신체의 직접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일반성generalities을 드러낼 수 있다는 증거이다. 공통통념은 정신이 여러 신체들의 변용의 통일성unity을 추론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나온 상호연관성, 필연적 통합integration 등을 보여준다. <윤리학> 3부와 4부3)에서 스피노자는 신체적 변용을 표상하기 위한 정념의 복잡한 도식을 만드는데, 이는 상상력이 가상illusion, 부적합한 관념 및 상상적 동일화를 낳을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4부에서 특히 그는 대중들multitude이 신학적이거나 정치적인 권위에 의해 묶일 수 있는 방식에 대해 토론한다. 그는 특히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공포 사이의 정념의 동요와 인간 사이의 갈등과 불안정성의 항구적인 원천을 추적한다.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에게 다중은 상호적 인정mutual recognition 과정에 의해 형성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모방과 동일시는 주체를 대중의 한 부분으로 구성하고, 복종적이고 예속적인 사회적 유대를 창조한다. 정서적 모방(affectuum imitatio)에 대한 연구는 많은 부분에서 정신분석학과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관행practice에 의한 신체의 규율(알튀세르) 등을 예상하는 것이다. ‘신체의 물리학’은 다른 정치적 형태에 따라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정념의 취약함과 항구적 진동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독해는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 이론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이성은 체화된 이성embodied reason의 한 종류로, 단지 매우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변증법적이다.

  사유의 자율적 능력을 보여주는 오성understanding의 단계는 스피노자가 지성intellec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성은 사유 속성의 한 양태로, 무시간적이고 무한하며 실체에 속하는 것이다. 실체의 속성들로서 유한한 신체와 정신은 모두 지성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지성은 본질과 실존이 하나의 것인 비판적이거나 순수한 사유의 형태이다. 이때 인식의 구성은 대상의 실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관념은 대상 이전에before 오는 것이다. 관념은 사유 속성의 효과로, 그것에 내재적인 것이며 관념의 대상ideatum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주체의 감각 지각에 의해 생산된 대상의 관념과, 유한한 신체 및 정신에 의해 동요되기 이전의 사유 내의in thought 대상의 관념은 구분되는 것이다.4) 의인론 및 의식의 주체 이론을 거부하면서,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은 의식을, 관념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의 질서와 연관과 동일한 실체의 반성된 실체reflected substance로 정립한다. 3종의 인식은 내재성immanence에 근거하는 것이지 구체적-특수한 것의 초재성transcendence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두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내재적이다. 첫째로 스피노자의 인식 이론은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에 근거하지 않으며, 양자는 모두 실체의 속성들이자 재귀적reflexive(내재적) 인식의 조건을 (양태적으로modally) 포함하고 있다. 둘째로 내재적 인식은 관념의 점증하는 적합성과 신체 및 정신의 관념들의 일반화 위에 기초한다. 이때 신체와 정신 사이에는 평행론, 즉 인식의 상호연관성 및 이성에서 지성으로의 이행이 변용된 사물로서 신체에 대한 자각과 평행됨 모두를 요구하는 평행론이 존재한다. 실체와 그 양태 사이에는 동일성이 존재하며, 이는 원본적인, 존재론적 차이나 헤겔적인 단절적인ruptural 부정성 같은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인식의 발전은 유한한 사유와 무한한 지성 내에서 내재적이지만, 이는 실체에 대한 선험적 개념화를 의미하거나 어떤 목적인final cause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는 코기토의 철학이나 절대적 주체성의 철학을 표상하지 않으며, 그에게서 우리는 ‘구조’에 관한 첫 번째 이론을 발견한다. 그는 존재 양태를 실존의 매우 다양한 평면plan 위로 분배한다. 타자로부터 분리되고, 자기-함량적인self-contained 동일성으로 주체를 재구성하는 것은 오직 부적합한, 인식의 상상적 형태일 뿐이다. 주체성이 결여된 스피노자의 구조화된 총체성structured totality 개념은 현대 비판 사상의 반인간주의적 입장과 중요한 관계를 가지며, 또한 알튀세르의 인식론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주체와 객체는 모두 실존의 실재적 평면에 대해 무지한 인식의 상상적 형태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인식의 모든 상상적 형태는 이데올로기적이며 참된 인식의 지위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라캉에게도 상상적인 것은, 코기토가 항상 준거해야 하는 주체의 자아ego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3. 헤겔적 현상학: 역사의 주체를 구성하기

  헤겔로의 회귀는 프랑스철학에서 193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데카르트적이거나 스피노자적인 합리주의 형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다. 헤겔에 관한 논쟁은 이폴리트, 코제브, 장 발, 메를로-퐁티, 사르트르, 루카치 등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된다. 이는 또한 의식의 역사성historicity의 이론으로의 회귀였다. 헤겔적 의미에서 현상학은 의식의 역사적 경험과 관련된다. 그의 사변 철학은 사유와 경험의 여정을 의미와 진리 추구의 과정으로 본다. 헤겔에게 주체성은 보편성, 특수성(specificity or particularity), 개별성(singularity) 등을 통해 분석될 수 있다. 변증법이란 지양의 과정을 통해서 대립물, 모순 그리고 차이를 극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관계이다. 변증법의 논리는 인식과 역사 모두에서 대립되는 운동들을 종합할 수 있게 해준다.

  헤겔의 현상학은 철학적 주체의 역사에 관한 변증법적 분석으로, 정신Geist으로서 자기의식의 점진적인 전개로 간주될 수 있다. 그에게 진리, 합리성, 그리고 절대자 모두는 역사적이고 주체적인 생성 과정을 통한 성취achievement이자 결과로서 간주된다. 요컨대 운동과 자아의 시간성temporality없이 사유와 존재는 그 자신들을 정립하거나 넘어설 수 없다. 헤겔의 체계는 정적이지 않고 동적이며 변혁적이다. 운동, 생성 등에 대한 그의 관심은 주체를 운동 자체의 원리로 간주하도록 한다. 주체는 어떤 고정점에 포섭되거나 시공간 상에서 유예될 수 없다. 헤겔에게 철학의 업무는 규정적인 사유를 그 고정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반정립의 운동을 보는 것이다. 데카르트적 이원론, 그리고 헤겔이 ‘단조로운monochromatic 형식주의’라 부르는 칸트 철학 등은 타자성과 모순을 배제하고, 변증법적 사유만이 종합할 수 있는 본질과 실존 사이의 근본적 관계를 간과하는 주체성의 한 예이다. 헤겔은 그의 실체와 주체 개념을 근원적 차이 또는 틈, 그가 부정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표시한다. 그 자기 운동이 주체를 존재로 만드는 힘이며, 그 본질에 존재를 부여하는 힘은 부정성이다. 실체와 주체 모두 그 자신의 부정을 포함한다. 자아와 주체(의식과 자기의식) 사이의 구별은 인정과 자기의식, 절대지에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고된 자기 외화의 과정을 하도록 이끈다. 의식은 절대자 안에서 그 자신의 완전한 의미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의 동일성을 거듭해서 상실하며 강제된 망명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이러한 욕망하는 주체 개념은 이폴리트, 코제브, 라캉 등에 의해 보다 상세히 전개된다.

 이제 헤겔의 스피노자적인 형이상학적 일원론 비판의 토대가 명백해진다. 주체의 복잡한 구조를 실체의 단순한 변양modification으로 환원함으로써 스피노자의 논리는 주체적 생성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표현적 총체성expressive totality에 대한 헤겔의 변증법적 개념화는 부정성 개념과 더불어 주체의 작인, 의지, 행위라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응답이다. 헤겔이 보기에 표현적 총체성과 부정성은 차이와 특수성의 구체적 표현, 상호성과 인정, 역사 속에서 의식의 능동적 생성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스피노자의 추상적 실체에 대한 중요한 교정자corrective가 된다.

  헤겔의 프랑스에서의 수용에 대해 논의하기 이전에, 마르크스에 의한 헤겔적 주체 개념에 대한 변형을 먼저 다룰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관념론 대 유물론의 논변 외에도 마르크스와 헤겔 모두는 어떻게 실재와 주체성이 나타나고 형태를 갖게 되는가라는 현상학적phenomenological 질문에 흥미를 가졌다. 알튀세르에게 이는 무엇보다 이데올로기와 인식의 문제였고, 이에 그는 헤겔보다는 스피노자로 회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그 속에서 주체의 실존이 자연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매개되는 세계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에 관심을 가졌다. 마르크스에게 동일성과 차이, 부정과 모순은 언제나 그 형태에 있어 명백히 사회적이다. 그에게 헤겔의 오류는 사유와 사회적 존재를 단지 의식의 영역 안에서 파악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주체의 그 자신과 타인들로부터의 소외estrangement의 정치적 이유에 대해 논의했고, 이는 주체와 타자들 사이의 교류intercourse에 초점을 맞춤으로써만 규정될 수 있다. 헤겔처럼 순수 사유의 영역에서 주체의 실재적 실존 양태는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헤겔 모두는 주체의 대상화objectification라는 질문에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이 소외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사유의 대상화와 혼동한다고 주장한다. 소외alienation는 사유 내 대상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마르크스는 헤겔의 주-노 변증법을 취하고 노동을 통한 주체의 외화externalization를 강조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의 소외는 우선 노동 대상으로부터의 소외이며 또한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이다. 이러한 소외에는 중요한 실존적인 차원도 있는데, 대상적 존재로서 주체는 또한 고통받으며 조건지어진 제한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임무는 주체의 현실에 대한 이러한 부정을 초극하는 것이다. 이때 변증법에 대한 마르크스의 의인화anthropomorphization는 명백하며, 그의 변증법적 기초를 이루는 것은 실체의 내적 부조화가 아니라 자연적 주체, 인간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주체의 문제를 자연의 감각적 주체와 관련시키는데, 이러한 감각적 주체는 사회적 삶의 토대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과대평가하고 자아와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를 과소평가한 것은 아닌가? <정신현상학>도 주체의 복잡한 여정을 기술하면서 이 주체의 유한성과 고통을, 의식과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불균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도입부에서 이야기한 헤겔로의 회귀란 단지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으로 간주된 소외로의 회귀일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관계로의 회귀이기도 하다. 불행한 의식과 주-노 변증법은 각각 이폴리트와 코제브에 의해 주체의 실존의 존재론을 전개시키는 데에 도입되었다. 문제는 소외의 실존 양태이다. 소외는 마르크스가 <파리 수고>에서 주장한 것처럼 사회적인 것 속에서 대상화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아와 세계 사이의 내생적인 관계인가? 만약 전자라면 그 정치적 해결책은 무엇인가(코제브)? 그리고 후자라면 여전히 변증법적으로 개념화될 수 있는 실존의 구조가 존재하는가(이폴리트)? 이러한 새로운 질문방식은 헤겔의 철학을 종합이나 화해없는 반정립, 계속적으로 전복되고 분열하는 통일체 내에서 대립항들의 유희로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코제브와 이폴리트: 주체, 역사, 구조

  코제브의 중심 주장은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의 운동과 주체성은 무엇보다도 인간학anthropology이라는 점이다. 역사와 인식은 오직 역사를 만드는 인간 행위에 의한 시간적 운동에 의해 주어진다. 청년 마르크스처럼, 코제브는 존재와 생성, 부정과 부정성을 인간  노동 행위의 역사적 장 내부에 위치시킨다. 자연 상태에서 존재는 단지 대자존재being-for-itself일 뿐으로 자연적 의식은 고립된, 개별적인 자기-확실성을 달성하며 대상에 대한 인식은 단순히 그것과 무매개적인 동일성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타자로부터의 인정을 욕망하는 주체는 동물적-존재를 넘어선다. 인간은 주어진 존재given-being5)를 변혁하는 부정 행위 자체이다. 주체는 곧 역사의 운동으로서, 자연적 존재의 수동적이고 관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능동적이며 타자의 인정을 통해 자기인정을 추구하는 (부정성으로서) 주체의 인간화하는 욕망이다. 코제브는 욕망을 그의 인간주의적 문제틀의 중심에 놓는데, 후에 라캉은 이를 자신의 이론으로 취하기도 한다. 코제브는 특히 헤겔의 주-노 변증법을 활용한다. 이는 두 가지의 충돌하는 주체성들의 극적인 설명에다가 자아와 그 자신 사이의 내적 관계 및 자아와 타자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서 이원성을 도입하는 것이다. 주인은 의식이 그 자신에 대해 존재하는 의식을 표상한다. 반면 노예의 실재는 그에게 우연과 상실(죽음의 유령)을 주는 주인의 위엄과 우월성의 인정, 그리고 부정적인 것으로 머무는 노동 행위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나 주인은 그의 대상 욕망을 목적 자체로 보는 순수한 부정성에 고정되어 있는 반면에, 노예는 부정적인 것의 초월과 변혁을 위해 준비되어있다. 욕망, 부정성은 자연적 세계를 변용시키며 이 과정에서 노예와의 관계 또한 변용된다. 작업work은 코제브에게 무엇보다도 시간인데, 이는 시간 내에서 존재하며 시간을 요구한다. 작업을 통해서 노예는 인간적 역사로서 인간적 시간성human temporality을 만들고, 자연적 진화를 멈추며 노예적 의식을 극복한다. 이러한 주체성과 욕망에 관한 해석은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의 내적인 이원론에 근거한다. 코제브의 구분에 따르면 인식은 언제나 인간 행위 내에서 현시된다. 관념은 작업과 행위에 의해 매개된 대상 및 기투projects의 산물로 나타난다. 코제브의 인간학적 헤겔 독해는 두 가지 중요성을 가진다. 첫째, 이는 욕망이 인간화되고 주체라는 행위자에 결부되어 인간 주체가 역사의 변증법적 운동을 이끌도록 하는 것. 둘째, 진리와 절대지의 가능성의 조건을 언표의 주체enunciating subject에서 찾는 것. 코제브의 인간학적 헤겔 독해는 청년 마르크스의 인간학적 변증법 독해와 유사하다.

 코제브와 달리 이폴리트의 헤겔 주체 개념 독해는 인간 실존의 비극적 요소를 강조하며, 역사철학에는 인간적 요소나 역사적 행위자로서 주체에 대한 해석이 없다고 본다. 이폴리트는 인간 경험의 조건을 인정투쟁에서 읽어내며, 이러한 투쟁이 타자 및 타자의 인정에 대한 욕망에 관한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절대자의 달성은 영원히 연기된다.’ 이폴리트가 주체의 실존적 곤경에 초점을 맞출 때, 이러한 존재론은 인간학적인 방식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의 가능성과 진리의 경험을 구조화하는 조건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생의 존재는 ‘자아의 불안disquiet’이고, 그 자신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타자로 남는 주체의 고통과 소외이다. 이는 부적합성, 대상의 진리에 대한 무한한 비-상응의 경험으로, 주체는 언제나 그 자신과의 통일에 이르는 데 실패한다. 자기발견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불행한 의식은 주체성의 토대이다. 이폴리트에게 부정성은 존재의 중심에 위치해있는데, 이는 모든 내용에 내재적이며 모든 주체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개체는 주어진 상태에 머물지 않는 절대적 충동이 된다. 노동/작업의 행위에서 주체는 그 자신을 부정하고 대상을 새로이 형성한다. 즉 노동은 이성을 인간적 사건으로 정초한다. 이러한 주장은 마르크스나 코제브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폴리트의 개념화는 이러한 철학적 관점과 구분된다. 이폴리트의 욕망 개념은 이원적 존재론에 의해 파악되지 않으며, 욕망의 인간화는 상상적 운동으로서 인정의 구조에 가깝다. 이폴리트는 다른 곳에서 주-노 변증법을 구조화하는 인정에 대한 욕망을 ‘거울 유희’로 파악한 바 있다. 더 나아가 이폴리트는 시간을 모든 여타의 범주들을 대체하는 것으로 정립한다. 시간은 모든 인간적 실재의 조건이자 주체의 창조적 가능성을 한계짓는 것이다. 이는 주체가 노동 대상과 갖는 마주침을 상실된missed 마주침으로 만든다. 마르크스나 코제브와 달리 자연에 대한 노동은 불행한 의식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으며, 유한성 내에서 욕망은 오직 대상에서 상상적 만족만을 찾을 뿐이다. 코제브에게 시간, 욕망, 인식은 모두 인간화된 것이지만, 이폴리트에서는 시간이 주체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시간은 생을 구조화하는 조건이고, 어떤 수단으로라도 주체에 의해 무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폴리트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자아의 불안 또는 불행한 의식이다.

                 

   

             






1) 반면 발리바르는 ‘시민 주체’에서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사물, 즉 코기토를 주체라고 명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아직 실체론과 관련된 것이었고, 주체를 주권적 존재sovereign being로 공식화한 첫 번째 이는 오히려 칸트라는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또한 이 지점이 정치적 주체, 시민이 등장한 순간이다.


2) 피에르 마슈레에게 이러한 헤겔의 비판은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1부에서 속성의 정의: 나는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파악한다)에 대한 그릇된 독해에서 기인한다. 속성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주장하듯이 속성 개념은 단지 지성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 아니며, 스피노자는 사유를 실체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사유와 연장 속성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무한한 속성이 존재하며, 유일한 실체는 실체의 절대적 무한성, 절대적 역량의 결과이다. 속성은 사유가 실체의 변양modification으로서 실체에 대해 가질 관계를 표현한다. 자세한 사항은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3부 참조.


3) 네그리는 이 점에서 <윤리학>에서 <신학-정치학 논고>의 초안으로 알려진 저작의 개입을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신학-정치학 논고>는 <윤리학>의 형이상학적 담론 내부로 도입되며, <윤리학>의 후반부에 명백한 정치적 토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례적 별종> 5장 참조.


4) <지성개선론>에서 스피노자는 이 중요한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기하학적 유비를 사용한다. ‘참된 관념은 그 대상과는 다른 것이다. 원과 원의 관념은 다른 것이다.’


5) 주어진 존재given-being란 코제브가 쓰는 용어로, 동물적 삶 속에 잠겨있는 무매개적 만족의 단순한 세계 속에 있는 주체를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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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4-23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라님 글 잘 읽었어요.^^ 일부 담아가요^^(혹시 안된다고 하시면 댓글주세요~)

바라 2011-04-23 22:08   좋아요 0 | URL
안 될리가요 ㅎㅎ 책 내용 요약인데 여러 모로 서툴러서 이해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네요(빈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김진숙,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노무현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10330104351&section=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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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스가드 여사의 모습(1952~)   

 


일종의 윤리학사이기도 한 이 책은 규범성의 근원을 다룬다. 코스가드는 주의주의자(홉스, 푸펜도르프) 등 규범성의 근원을 입법자에게서 찾는 입장, 실재론자들처럼 어떤 도덕적 실재에서 찾는 입장, 흄 등 반성적 승인(reflective endorsement)론자처럼 특정한 인간적 본성에서 찾는 입장 등을 차례로 개괄, 반박하고 자율로서의 자유(칸트)에서 비로소 규범성의 근원이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책 후반부에는 버나드 윌리엄스나 레이몬드 게스 등 동료 학자들의 비판 및 코스가드의 답변 등이 실려있다. 현재 하버드에서 가르치고 있고 또 롤즈의 학생이기도 했던 그녀의 책은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책보다 훨씬 유익하고 깊이가 있는 것 같다..

Christine Korsgaard, The Sources of Normativit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 145-166.   


가치의 기원과 삶의 가치

4.3.1 고통은 앞서 논의한 것들에 대한 반론이 된다. 첫째로 고통은 우리의 심적 삶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데에 장애물이 된다. 그가 사적이라고 부른 바로 그러한 의미의 고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고통은 규범성에 관한 자연주의적 실재론의 어떤 형태에 대한 큰 유혹이다. 쾌락과 달리 고통은 규범적 사실의 한 종류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고통은 칸트적 윤리학 또는 인간성의 가치를 모든 가치의 토대로 만드는 윤리학에 대한 반론이 되는데, 다른 동물들도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4.3.2 처음 두 반론은 연관된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에 반한 논증은 규범적 자연주의- 결코 틀릴 수 없는 -에 대한 반대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고통이 어떤 토대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공리주의자들은 쾌락과 고통이 가치이기도 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이것이 자연적 세계에서 윤리학이 토대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감각을 지식의 토대로 놓는 인식론적 주장과 유비적이다.
4.3.3 정말 그런가? ‘나는 빨간 감각을 갖는다’의 경우, 그것을 보는 것은 우리 마음 속의 작은 인간인가?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모든 심적 행위를 감각과 관념의 관조로 환원시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그림을 지지하는 ‘가짐’이라는 언어에 대해 공격한다. 그런데 누군가 고통스럽다고 말할 때 그는 그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에 대해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조건을 바꿔야 할 아주 강한 충동을 갖고 있다고 알리는 것이다.
4.3.4 고통은 단순히 특정한 감각이 아닌데, 고통의 고통스러움은 이러한 감각이 우리가 맞서 싸우도록 이끌리는 감각이라는 사실에 있다(고통의 생물학적 역할). 감정적 고통과 물리적 고통이 공유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감각이 아니라 세계에 대해 맞서 싸우도록 한다는 것이다. 고통은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 자체인 조건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의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를 갖는다는 지각perception이다.
4.3.5 공감sympathy은 단순히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한 불편한 느낌이 아니라, 덜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그들의 곤란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각이다(흄, 허치슨). 동정pity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한 지각, 그의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가 있다는 지각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4.3.6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살아있는 것은 자신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생명에 있어서 이 자기-유지적인 형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 살아있는 것이 동물이고 의식적이라면, 정체성을 보존하는 방식은 감각, 고통을 통한 것이다. 동물은 자신의 물리적 실존을 위협하는 것을 지각하고 그것에 맞서 싸우려 한다.
4.3.7 비교: 인간과 실천적 정체성. 살아있는 것과 물리적 정체성. 의무는 당신의 실천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반성적 거부이며 고통은 물리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비반성적 거부이다. 고통은 이유의 지각이며 이는 규범적인 것으로 보인다.
4.3.8 의무와 고통 모두 부정적인 도덕 감정과 관련된다. 고통은 현재, 과거, 미래 모두에 적용되는 이유에 대한 지각이다. 마음의 권위는 부정적인 도덕 감정의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감정을 절대적으로 함축한다. 이때 자신의 이유를 지각할 수 없는 마음은 마음으로서 전혀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칸트에서 도덕적 이유의 활동에 대한 자각으로서 존경respect).
4.3.9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갖는 것처럼, 동물도 감각적이며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갖고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생명이 가치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동어반복이다. 살아있는 것은 그 정체성의 보존이 정언명령인 것으로, 생명은 도덕성의 한 형태이며 도덕성은 인간적 삶이 갖는 그 형태이다.
4.3.10 우리의 동물적 본성은 인간적, 도덕적 정체성이 의존하는 근본적 형태의 정체성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의 동물적 본성을 가치롭게 여기지 못하면, 당신은 아무 것도 가치롭게 여길 수 없다. 동물적 정체성이 만드는 이유와 의무는 단지 사적인 이유가 아니며, 다른 동물들에 대한 이유는 또한 당신에 대한 이유도 되는 것이다. 고통받는 동물을 당신이 동정하는 것은, 이유를 지각하기 때문이다. 즉 동물은 울부짖음으로써 고통을 표현하고, 이는 그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이 울부짖음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며, 다른 동물들도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당신에게 의무를 부여할 수 있다.
4.3.11 이전에 우리는 동물들은 반성적 의식, 즉 자기의식을 갖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럼에도 고통과 이유는 반성적 구조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유는 충동에 대한 승인이고 고통은 감각에 대한 거부이다. 이러한 이중 구조 또는 자기지시를 가진다는 점에서 고통은 재귀적인recursive 것이다. 고통 속에 있는 동물은 그 조건을 반대하는 것이지만 또한 반대하는 그 조건에 있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고통 속에 있는 것은 고통이다. 이것이 고통이 거의 언제나 나쁜 이유인데, 고통받는 피조물은 그 고통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고통이 내생적으로 나쁜 감각이라는 것은 아닌데 어떤 맥락에서는 고통이 환영받기도 하기 때문이다(장례식에서의 애도). 이때 고통이 내생적으로 나쁜 감각이라 생각하도록 하는 충동은 가치가 단순히 의식과 관련된다는 근본적인 오류로부터 나온다. 고통은 단순히 의식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의식과 무관한 외부 세계에서 오는 정보에 대한 것도 아니다. 가령 스너프 무비 등을 우리가 편안하게 볼 수 없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우리의 고통이 지각하는 악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4.3.12 우리는 식물에게도 의무를 갖는가? 식물은 의식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지 않다. 식물을 존중하지 않는 이는 모든 가치의 토대인 생명에 대한 숭배가 부족함을 보여줄 뿐이지 그가 잘못 되었다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4.3.13 동물과 인간은 서로에게 의무를 갖는가? 개를 길들이는 경우 이는 의무가 아니라 지배 관계 아닌가? 이는 틀린 의견은 아니겠지만 외재적인 기술, 3인칭적 기술이다. 동물 또는 인간의 1인칭에서 압력과 지배는 어떤 규범성의 형태, 형상을 갖는다.
4.3.14 두 동물이 지배를 위해 싸울 때조차 이는 고도로 의례화되며, 의지의 싸움이 된다. 도덕성의 기원에 관해서, 니체와 프로이트는 도덕성과 특수한 인간적 의식성이 우리 종의 진화와 동시에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도덕성은 지배 충동(권력의지, 공격본능)이 출구를 박탈당하고 자아에로 돌아섰을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능을 안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법을 배웠다. 고통, 처벌은 동물이 자신의 정체성에 반역하도록 강제하며 이것이 규범성의 근원이다.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은 자연적 충동을 가질 때조차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이는 자기증오와 허무주의로까지 나아간다. 물론 니체나 프로이트의 계보학적 탐구가 우리가 이전상태로 단순히 회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초인). 아마도 반성적 거리가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통제하도록 했던 것처럼, 아마 또한 자기통제에 대한 반성적 거리가 또한 이를 극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회의주의와 자살

4.4.1 여기서 이야기한 의무에 대한 설명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주의적이다. 규범성은 어떤 자연적 - 심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 사실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이는 자연주의적이지 않다. 자연주의적 관점은 규범적 진리를 사실적 진리와 동일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반성적 승인이 행위를 올바르게 만드는 데에 충분하다는 것이 아닌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든 행위는 올바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규범적 자연주의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결코 틀릴 수 없는 그런 류의 규범성이란 없다. 만약 우리가 쾌락, 고통, 반성적 승인 또는 거부를 의식 바깥에서, 3인칭으로 본다면 그것들은 단순히 가치의 사실들일 뿐이지 가치 자체를 인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치의 사실은 가치 자체가 아니라 단지 사실일 뿐이다. 그러나 이는 삶의 사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가치를 갖도록 하는 자연적 조건이다.
4.4.2 만약 가치가 삶의 사실이라면, 모든 가치에 대한 거부는 삶의 거부의 형태를 갖는다. 따라서 실천적인 규범적 회의주의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는 자살이 될 것이다. 물론 모든 자살이 그런 회의주의의 표현은 아니지만, 단지 자신들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해서, 삶이 아무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저지르는 자살은 문제가 된다. 이때 자살의 부도덕성immorality은 이러저러한 가치의 거부가 아니라 가치 자체에 대한 거부이다. 칸트는 자살하지 않을 의무가 가장 근본적이고 으뜸가는 의무라고 했고, 비트겐슈타인 역시 자살이 허용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라고 쓴 바 있다. 이들은 살아있음이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모든 가치의 조건이라고 보았고, 자살이 특정 가치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가치 자체에 대한 거부라고 보았다. 이 강의에서 내가 주장한 것은 도덕적 의무와 도덕적 가치는 모든 의무와 가치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인간성의 거부는 가치에 대한 거부이며 이는 완전히 실천적인 규범적 회의주의이다. 가치는 오직 우리 삶이 살 가치가 있을 때 존재하며 우리가 하는 일에 의존적인 것이다.
가령 규범적 회의주의자는 자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할 이유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욕망과 충동을 갖지만, 어떤 것을 할 이유는 갖지 않으며 그가 하는 것은 단지 순간의 욕망을 따르는 것뿐이다. 그는 정언명법도 가언명법도 갖지 않는다. 그는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데, 그의 욕망은 그에게 이유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은 가언명법에 필요한 의미에서 추구해야 할 목적을 규정해주지 않는다. 만약 목적이 지배적인 욕망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당신이 하는 어떤 것도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될 것이며, 당신은 틀릴 수 없게 된다. 결국 실천적 규범적 회의주의는 합리적 행위 같은 것이 없다는 관점이 된다. 우리는 살아가는 한에서, 인간 존재로서 합리적 행위를 해야만 하며, 동물적 행위나 비반성적 행위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아니다.

강의의 결론

1 홉스나 푸펜도르프 같은 주의주의자는 규범성이 입법자의 명령으로부터 규범성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리와 우리 자신에 대한 관계를 기술한 것일 때 참이다. 즉 사유하는 자아는 행위하는 자아에게 명령한다. 2 네이글 같은 실재론자들은 이유들이 내생적으로 규범적인 존재자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유하는 자아가 우리에게 현전하는 충동들을 평가하고 욕망이 이와 같은 규범적인 이유인지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보도록 하는 행위를 기술한 것일 때 참이다. 3 또한 사유하는 자아와 행위하는 자아의 관계는 입법적 권위의 관계이며, 우리가 자신에게 권위를 갖는만큼 우리는 우리의 법을 만들 수 있고, 이 법은 규범적이다. 이 점에서 칸트의 견해는 옳다. 자율성은 의무의 근원이다. 4 반성적 승인 이론은 다른 층위에서 또한 참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승인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규범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반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 가치의 규범성이 우리가 어떤 종류의 동물, 즉 자율적인 도덕적 동물이라는 사실에서 기원한다는 것이다. 5 이는 실재론이 또 다른 층위에서 참이라는 것을 뜻한다. 실재론을 비판하는 존 맥키의 ‘기이함으로부터의 논증’을 상기해보라. 맥키에 따르면 세계가 객관적인 규정성objective prescription을 갖는 가치, 또는 내생적으로 규범적인 존재자를 포함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그러나 맥키는 틀렸고 실재론은 옳다. 그것을 앎으로써 행위에 대한 이유와 동기를 모두 제공하는 존재자는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매우 특이한 존재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이러한 존재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맥키는 도덕적 실재론을 비판하는 위와 같은 말을 썼을 때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방에서 홀로 존재하고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존재자를 세계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가장 익숙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이고 다른 동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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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5장 민주화 이후의 국가

1. 민주화 이후 강력한 국가, 무력한 정부의 문제
민주주의와 국가: 민주화 이전 한국의 국가는 과대 성장 국가, 발전 국가, 강한 국가 등 권위주의 국가로 개념화되었다. 한국에서 국가의 지배는 냉전 반공주의나 발전주의 같은 이념적 기제를 통해 뒷받침되었으며, 권위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동질적인 지배 엘리트(관료 엘리트, 정치 엘리트, 기업 엘리트)를 형성시켰다. 그러나 이제 민주화와 더불어 국가의 이런 성격 및 구조는 변화의 압박에 직면한다. 민주화 이후 유권자의 투표는 민주 정부를 만들어내었고, 이것의 결과는 권위주의 하에서 융합되어 있던 정치 엘리트와 행정 관료 엘리트의 분리였다.

민주화와 국가의 두 수준: 국가는 두 수준에서 고찰될 수 있다. 하나는 하부구조적 수준의 국가, 대규모 공조직으로서 관료행정적 형태로 제도화된 체제이다(일반적으로 한국의 국가를 강력한 국가라 할 때는 이를 가리킴). 다른 하나는 정부적 수준에서의 국가다. 정부는 권력의 획득과 행사 과정에서 특정의 이념적, 정책적 정향을 갖는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의 수준이다. 권위주의 하에서 양자는 융합되어있었으나 민주화가 되면서 이 두 수준이 분리된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경우, 집권 초기 이들 정부는 개혁에 대한 열망을 배경으로 집권했으나, 집권 말기에 이르러서는 대통령 리더십이 최하점에 도달한 바 있다. 집권 초 정치 엘리트는 행정 관료에 압도적 우위를 가졌으나, 점차 정치 엘리트는 국정 운영의 무능력과 미숙을 드러냈다. 민주 정부의 정치 엘리트들은 그들의 권력과 개혁 의제를 실천할 능력 사이의 커다란 격차에 직면했기에, 행정 관료 엘리트의 권력은 권위주의 시기보다 커지게 되었다.

무력한 정부와 헤게모니의 문제: 민주화 이후 과거 야당이 집권하면서 대면하게 되는 문제는 정부의 무력함이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 모두 차이는 있으나 무력한 정부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헤게모니의 약함은 무력한 정부의 결정적인 요인인 것이 아니며, 이는 개혁 부진 및 정권 약화의 알리바이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거대 행정 관료 기구를 운영하는 원리로서 절차적 보편성과 개방성이 없었다는 점이다(비선 조직).

사회적 기반 없는 야당의 문제: 무력한 정부의 등장은 야당이 어떻게 집권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는 우선 이들이 기존의 발전주의적 모델을 대체할 대안적 비전이나 민주주의 모델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며, 또한 냉전 기득 세력의 이념 공세를 피하고자 그들의 대안을 보수화하려 했다는 것이다(뉴DJ플랜). 이러한 전략적 모호함의 태도로 인해 투표자의 지지와 선출된 자의 책임성 사이의 관계는 느슨하고 모호해지며, 이는 또한 집권정당의 정체성 상실로 이어진다(오도넬의 ‘위임민주주의’).

2. 무력한 정부와 관료제의 문제
관료행정 기구에 포획된 정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경우 민주주의에서 국가에 대한 대안적이고 구체적인 관념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으며, 기술 관료적 경영주의의 이념에 압도되었던 까닭에 국가 운영에 있어서는 앞선 권위주의 정부 사이에 차이는 별로 없었다. 민주적 국가 운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때 이는 과거 권위주의 하의 행정 관료 기구를 개혁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지만, 새로운 집권 엘리트들은 이를 진지하게 시도하지 않았다. 또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은 천명만 되었지 정책적으로 구체화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시장효율성, 시장 근본주의가 발전주의에 이어 새로운 헤게모니로 힘을 갖기 시작했다. 민주적 발전 모델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 정치 엘리트들은 점차 관료에 의존하고, 결국은 관료에 포획되는 관계로 바뀌게 되었다.

민주화와 무능한 관료 체제의 문제: 민주주의 하에서 한국의 관료는 복지부동, 무책임, 전문성 결여, 무능, 부패 등의 특성을 갖는다. 왜 그런가? 첫째, 박정희 정부 시기처럼 위로부터 주어진 국가 목표의 부재. 둘째, 중앙정보부, 안기부 등의 강권 기구의 역할이 사라짐(수평적 책임성의 기능 부재). 셋째, 단기적 정권 교체는 관료 개개인의 장기적 전망을 약화. 넷째, 정권 교체에 따른 연줄 관계의 변화로 관료적 위계 구조의 혼란. 결국 이러한 원인들은 관료 체제의 민주적 운용 패러다임 개발하지 못한 탓이다. 민주주의 하에서 관료의 부패가 권위주의 시기보다 심해진 것은 아니더라도, 또한 강조해야 할 것은 시장과 민간 부문의 부패, 상층 엘리트의 부패이다.

3. 민주화와 대통령제의 문제
무력한 정부와 강력한 대통령: 한국은 건국 이후 1987년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무려 아홉 차례나 헌법을 개정했는데, 이는 정치체제의 불안정성과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 제도화를 보여주며, 한국 헌정사의 불안정은 거의 대통령에 관련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슈의 중요성에 비해 광범위한 토론과 논쟁이 없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제는 권위주의와 친화적인가?: 민주주의 하의 대통령은 정당을 매개로,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적 리더십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대통령은 당선되는 순간부터 물리적 환경의 변화에 압도된다(경호, 공관과 집무실, 비서실). 이는 대통령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이 권위주의와 매우 친화적임을 보여준다.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 제왕적 대통령을 제기하는 담론은 그러나 그 속에 내장된 보수적 파당성으로 인해 진실을 왜곡하는 측면도 있다. 제왕적 대통령을 비판하는 이들은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CEO 대통령이라는 새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CEO 대통령 논의에는 근본적 문제, 즉 이것이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경제로부터 정치의 분리)와 상충되기 때문이다. 기업 구조는 기본적으로 권위주의적이며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국가는 한 사회의 통합 및 시민권의 원리, 공공복리 실현 등을 위한 공공조직이다. CEO 대통령 논의는 정치를 경제적 힘에 종속시키려 하는 신자유주의 내지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시장지향적이고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더구나 애초에 제왕적 대통령 논의가 기원한 미국의 경우 이는 본래 대외 정책 이슈에 관련된 것이었으며 자유주의파의 파당적 비판을 표현한 것이었다. 반면 한국의 경우 이 논의는 권위주의 세력들이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 비판의 일환으로 제기한 것이었으며, 헤게모니를 갖지 못한 김대중 정부에 대한 거대 언론과 보수 야당의 동맹에 의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들은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않아서 만들어진 문제의 원인을 특정 대통령, 정부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을 뿐이다.

대통령의 민주적 리더십: 대통령의 권위주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여러 문제들의 결과물이다. 대통령을 권위주의적으로 만드는 것은 투표자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고 구속되지 않는 상황의 결과인 것이며 또한 정당의 허약함 때문이다. 핵심은 오히려 정당과 정당 체제를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는 것, 즉 정당을 사회의 갈등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본 것처럼 냉전 반공주의는 한국의 정당 체제를 이념적으로 극히 협애한 틀에 가두어 놓았다. 정치는 갈등과 이 때문에 분열된 사회를 전제로 경쟁과 타협을 통해 갈등을 민주적으로 표출하고 정당을 매개로 이를 민주적으로 해소하는 과정인데(립셋-갈등과 컨센서스가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 한국에서 갈등은 대표될 수 있는 여지가 극히 좁다. 갈등의 부재는 사회의 특정 집단이 공공의 집합적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음을 보여주며, 따라서 냉전 반공주의와 접맥된 낡은 정당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갈등 구조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4. 민주화와 중앙집권화의 문제
초집중화 = 지리적 집중+엘리트의 동심원적 중첩: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중요 동인 중 하나는 중앙 집중화로, 이를 가져온 역사적 계기는 권위주의적 산업화이다. 중앙 집중화의 구조는 대규모의 정치와 경제를 지향하는 것으로, 정치에 있어서는 국가 중심적, 경제와 시장에 있어서는 재벌 중심적 구조를 강화하는 성격을 지닌다. 한국의 지역당 구조는 지역에 기반을 갖는 다원적 정치 세력 간의 경쟁이 아니라 중앙 집중화의 구조에서 엘리트 간 경쟁의 산물이다. 이는 정치 경쟁, 교육의 경쟁 등을 생사 투쟁처럼 격화시키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정부들은 집중화를 완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화시켰다. 지금까지 중앙 집중화에 대한 대책은 대체로 수도권 개발 억제, 지방 분산 등이 그 대안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사회 각 분야의 엘리트 집중도가 여전히 강하고 그 충원 구조가 동심원적 구조를 갖는 상황에서 이런 지방 분산이 초집중화를 얼마나 완화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리적 분산 역시 시도되어야 하지만, 그보다 엘리트의 동심원적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사회 주요 영역의 독자성을 강화하고 다원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정치 영역에 있어서는 정당들이 넓은 이념적 공간에서 경쟁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한 사회집단들, 특히 노동자계급이 정치의 중요 행위자로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치의 다원주의는 교육 개혁, 재벌 개혁 등 여타 영역으로 다원주의를 확산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6장 민주화 이후의 시장

1. 민주화와 시장의 개혁
권위주의 산업화는 어떤 시장을 만들었나: 한국의 시장은 서구의 시장과 상이한 경로로, 즉 민간 부문에서 생성, 발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권위주의 산업화 과정에 의해 만들어졌다. 권위주의 산업화에서 형성된 시장은 강한 국가 주도성, 재벌 경제체제, 노동의 배제라는 세 가지 특성을 갖는다. 곧 경제 시장에서도 독점과 배제가 지배적 원리가 됨으로써 투명성과 공정 경쟁과 같은 시장경제의 본래적 특징이 발휘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시장에 대한 강한 개입주의 국가의 역할은 한국 사회에 관료적 권위주의를 뿌리내리게 했다. 또한 권위주의적 노동 배제는 재벌 편향적 성장 제일주의의 다른 한 축이었다. 노동자의 참여가 배제된 정책 결정의 조건에서, 정치는 결국 사회 상층 엘리트 간의 게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의 경제적 의미: 한국의 민주화가 갖는 사회경제적 내용은 기존의 권위주의 시장구조를 개혁하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과 재벌 간의 연합이 주도하는 시장 구조는 재벌, 중소기업 간, 지역 간, 부문 간, 계층 간 불균등성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또한 노동의 배제는 갈등을 만들어 내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권위주의적 국가 기제를 필요로 하는 악순환도 일어난다. 이런 구조를 해체하고 정치와 경제 간의 관계를 투명하게 만드는 개혁없이는 어떤 민주개혁도 실효성을 갖지 못한다.

개혁의 두 계기: 민주화와 세계화: 권위주의 하의 시장구조가 개혁의 의제로 제기된 계기는 두 가지, 민주화와 세계화였다. 먼저 민주화가 기존의 시장구조에 변화를 요구하는 힘으로 작용한 것은 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한다. 현실 정치 세력이 얼마나 민주적인가의 평가 기준으로 재벌 문제와 노동문제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게 고려된 것이다(노태우 정부의 업종전문화 정책, 김영삼 정부의 금융실명제). 다음으로 세계화는 80년대 초반부터 수용되어 IMF 당시 급진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의 세계화의 실제 내용은 신자유주의 또는 워싱턴 콘센서스라 불리는 특정 정책 내용의 수용이었다. 가령 IMF 이전까지 세계화는 대체로 친재벌적, 반노동적 정책 함의를 가진 것이었다면, IMF 이후 세계화는 반노동적인 동시에 반재벌적인 효과를 갖게 되었다.

2. 민주화는 권위주의 시장구조를 변화시켰는가?
재벌 개혁에 취약한 민주화: 주목할 것은 민주화 이후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권위주의 시기보다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새 정부들은 재벌 개혁을 약속했으나, 이는 집권 초기를 지나면서 구두선에 그쳤다(심지어 노무현 정부에서는 삼성과의 유착이 더 심화). 과거 권위주의 국가에 의해 통제되던 언론과 대학은 이제 재벌의 영향력에 의해 압도되고 있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 87년 6월 이전 노동운동은 직접적인 억압 하에 있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민주화에 핵심적으로 기여했다. 당시 노조의 입지는 강했는데, 이 시기 노동운동은 고성장, 소득분배 구조의 개선, 저실업률, 노동력 부족과 구인난 등 현대사에서 가장 노동에 유리한 조건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김영삼 정부 시기 초기에는 노동정책에 대한 민주적 개선의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중립적 태도와 노조 활동의 자율성 보장은 93년 현총련 연대 파업을 계기로 과거로 후퇴했으며, 이후 개혁적 노동 정책은 반전되었다. 동시에 주류 언론과 경제계의 반격(무노동무임금, 경영권 수호)도 강화되었다. 96년의 총파업은 김영삼 정부의 노동 정책이 갖는 배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이어서 금융 위기와 더불어 강제된 IMF 개혁 패키지의 핵심은 노동시장 유연화였다. 고용불안정이 일반화되고, 소득 불평등도 심화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노동정책은 복지정책과 연계되는 사회정책적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김대중 정부 시기에 새로운 갈등 유형이 나타나게 된다. 즉 노사관계 차원보다도 노사관계의 틀에 영향을 미치는 노동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등장했다. 김대중 정부 역시 정부 정책은 시장경제 우선의 방향으로 기울었으며, 복지, 노동 등 사회정책은 경제정책의 하위 정책으로 간주되었다. 노사정위원회 역시 서구의 코포라티즘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이마저도 민노총의 탈퇴로 지속되지 못했다. 요컨대 전체적으로 보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노동은 여전히 배제되었던 사회집단이었다. 과거 고도성장기에는 권위주의 정부에서라 할지라도 완전고용과 소득 증가를 내용으로 노동자를 통합하는 거시경제적 틀이 존재했다면, 금융 위기와 더불어 이 틀은 사라지고(저성장, 고실업) 노동시장 유연화는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결국 주류 노동운동세력은 정부와 대립하게 되었고, 이에 정부의 대응은 과거 권위주의 노동정책으로 후퇴하는 것이 되었다(정치의 붕괴와 항의의 일상화). 결국 민주화 이후에도 노동정책에 있어서는 담론 수준을 넘어서는 정책 전환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3. IMF 세계화와 경제개혁
새로운 사회 균열로서의 세계화: 담론의 측면에서만 보면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 추진의 정점을 이루는 듯 보이지만, IMF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세계화의 충격은 정치적 수준에서 새로운 균열을 만들지 못했다. 대체로 그 전까지 세계화는 정부와 기득 세력이 민주화와 개혁 요구를 회피하는 논리로 동원된 것이다. 그러나 IMF 이후 세계화는 달랐다. 정부는 세계화의 규범에 맞는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추구했고, 재벌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시장의 자율성은 허용하길 바라면서도, 기존의 특혜를 없앨 수 있는 세계화 규범의 적용에 반대했다. 노동의 경우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요구하는 세계화 규범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노동시장 보호 정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분명한 정치 균열 라인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더욱 혼란스러운 양태로 나타났다. 금융 위기 이후 균열의 축과 동맹의 양태가 더욱 분열적이고 혼란스러워진 것은 사회적 갈등이 정치적으로 동원되고 대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갈등의 축과 동맹의 축을 명료하게 하며, 경쟁적 대안을 발전시켜야 할 정당의 역할이 존재하지 않았다.

왜 한국의 민주화는 실질적 개혁에 무력했나: 한국의 민주화는 강권적 권위주의 통치 종식에 있어서는 효과적이었으나 실질적 내용, 사회경제적 측면의 개혁에 있어서는 무력했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계급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재벌은 강화되었으며 노동 배제는 지속되었다. 김영삼 정부 시기까지는 실질적 개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수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재벌 개혁이 실질적인 개혁 의제가 될 수 있었다. 이들 집권 세력은 권위주의 시기 고착된 지배 엘리트 구조에서 소외된 주변부 엘리트 집단이었으며, 당시 세계화라는 외적 충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집권 초 김대중 정부는 국내 기득 세력에 대해 이전 어느 정부도 누려보지 못한 자율성을 가졌다. 당시 개혁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구조조정으로서 금융 위기에 대처할 생존 전략으로서 기존의 거시 경제 운용 모델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수동적 의미의 개혁이며, 다른 하나는 구조개혁으로서 민주주의의 틀에 맞게 경제 발전의 대안적 모델과 사회정책적 대안을 위한 개혁이다. IMF 하에서라도 민주주의에 걸맞은 시장경제체제를 창출하거나 민주주의를 통해 시장경제의 부정적 효과를 보완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은 수사로 그쳐버렸다. IMF 개혁 패키지와 같은 수동적 개혁에 그친다면 김대중 정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구조조정을 넘어서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한 장기적이고 자율적인 구조개혁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지역 정당 체제나 보수 편향적 정치 구조를 개혁하고자 하지 않았으며, 자민련과 같은 세력과 연립 정권을 유지할 뿐이었다.

개혁 실패가 남긴 것: 민주화와 세계화라는 내외적 충격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시장구조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국가와 재벌의 힘 관계에서 국가의 일방적 우위는 사라지고 재벌은 국가에 의해 쉽게 통제되기 어렵게 되었으며, 노동 배제의 경제체제도 그대로였다. 이는 신자유주의라 할 수 있는 정치에 대한 특정 관점이 사회에 확산되도록 만들었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적, 부정적 태도를 확산시키며, 내용적으로는 재벌 체제를 안정화하는 효과를 갖는다. 정치를 폄하하고 조롱하며 정부 기능을 부정할 경우, 민주주의의 의미를 경제에 종속시킬 경우 한국 민주주의는 무력하게 되고 만다. 보수 언론을 통해 유포되는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권위주의적이며, 민주적 노사관계를 위한 인식상의 변화도 지체되었다.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노동운동 내부의 연대는 약화되는 반면, 노동운동의 리더십은 아직 관념적인 급진주의에 의해 자신의 잠재력을 소진하고 있다. 만약 민주주의의 정치적 틀에 조응하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없다면 시장의 부정적 역할을 제어할 힘은 없다. 시장은 하위 체계 중 하나일 뿐이며, 이는 전 사회의 운영 원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계급 구조화의 심화, 소득 불평등 등 한국 사회의 현실은 유능한 민주주의 국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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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고별 강연  


고전의 학문 정신은 데이터에서 출발한다. 반면 신화에는 데이터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what it is? 라고 물을 때 it이 데이터이다. 철학은 모든 이론에 앞서서 데이터에서 출발하여, 데이터를 학문적으로 정리해보고 그것을 다시 반성해보는 작업이다. 철학적 데이터는 개별 과학적 데이터와 달리 모든 데이터의 총체이다. 대화편을 보면 플라톤에게 사람은 항상 어떤 나이이고, 이름이 누구며, 어디에서 무엇 하러 왔으며 등등 고유 명사의 입장에서 데이터가 주어지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람은 그냥 사람,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의해 추상화된 데이터로 나타난다. 이처럼 고유 명사의 극한에서 본다는 것이 플라톤의 데이터의 특색이다. 가령 플라톤에서 형상이 무엇인지 말하려면, 대화편에서 형상이라는 말을 전부 찾아내고 이를 전부 분류해서 각 대목의 의미를 밝혀야하지 형상 일반이란 의미가 없다. 구체적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밝혀야 하며, 그렇지 않고 그저 추상적인 형상은 플라톤에게는 없다. 그런데 플라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 특징 중 하나는 잰다는 점이다. 왜 재느냐? 데이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연장성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직접적인 것은 연장성 속에 있는 질quality이다. 만약 데이터를 재지 않는다면 모든 사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없으며 주관적임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사물을 정량적으로 재야하며, 잰다는 것은 또한 그것이 되풀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재어진 것과 재어진 것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고 그것이 되풀이될 때 이것을 법칙이라 부를 수 있다. 희랍 당시에 이를 탐구하던 학문이 기하학(geometry 땅을 잰다는 뜻)이다. 반면 질의 경우 잴 때 문제되는 것은 정도degree이다.
데이터는 시간과 공간에서 주어진다. 시간은 운동이 있고 이때 문제되는 것은 질이다. 이른바 제1성질은 공간이 가지고 있는 질이다. 반면 공간은 항상 정지해 있는 것, 구별되는 것, 이것은 여기에 저것은 저기에 있다고 구별될 수 있는 것을 일컫는다. 질이라는 것은 각각 서로 다른 것이며 이것들이 같을 경우 양이 된다. 그런데 질이 각각 자기 동일성을 갖고 있기만 할 경우 운동은 성립하지 않는다. 운동은 질이 연결되고 묶여야 성립한다. 시간, 운동이라는 것은 질의 연속 과정이며 서로 연결되는 과정이다. 플라톤에서 데이터는 시공간 속에 있는데 만약 운동이 빠져버린다면, 질들은 모조리 이전의 연결에서 떠나 흩어지게 된다. 질들이 흩어져서 그 자체 전부 有로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분석analysis(ana위로, 되돌려서, lyô 풀어놓는다)이다. 이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분석의 기본 의미는 풀어서 돌려준다 또는 자기 본성대로 놓는다는 뜻이다. 분석되기 이전의 운동에 있어서는 우리 인식 대상인 질이 전부 묶여져서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즉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서 운동을 빼버릴 경우, 그 속의 질은 전부 풀어져서 자신의 동일성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있는 사물은 운동과 결합되어 있고 공간 또한 마찬가지로 유동flux 상태에 있다. 이러한 유동에서는 운동과 공간 모두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다. 유동 속에서 운동과 공간이 뭉쳐져서 서로 분간이 안 되는 상태에서, 공간과 시간은 점점 분리되어 나가고 형상 자체에 이르면 운동은 완전히 빠지게 된다. 즉 운동이 공간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운동이 완전히 나가서 운동과 공간이 딱 구별되어 나올 경우, 비로소 형상eidos이 나온다. 형상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유클리드 기하학도 모든 운동을 빼는 데서 성립한다. 운동이나 시간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인식이 안 되는 것이며 학문에서 문제는 사물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는 형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또한 문제는 모든 데이터가 동일 공간 속에 들어갈 때 그 일반적 성격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플라톤에게 데이터는 무가 아니라는 것. 없다는 것은 데이터가 될 수 없고, 데이터는 있는데 이것이 바로 존재ousia라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무와 존재 사이에는 단절이 있고 양자는 모순 관계에 있다(존재와 무는 서로 접촉contact하며 이 경계선에서 어느 쪽으로 떨어지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contingency이라는 것). 학문의 원칙은 데이터를 취급할 때 모순을 회피하라는 것, 모순율이다. 즉 데이터 속에 모순이 있으나 그 모순을 회피해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항상 존재론은 원인론aitiology이며, 모든 데이터들은 차이difference를 가지고 있는데 이 차이의 원인은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이는 모순이 아닌 것, 즉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다. 학문은 모순율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헤겔처럼 존재와 무가 합쳐진 것이라는 식의 얘기는 하지 않고 존재도 무도 아닌 제3의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때 다름의 원인은 존재도 무도 아닌 무한정자apeiron이다. 무한정자는 모순율에서처럼 단절이 없으므로 연속이 있고 무규정적indefinite인 것이다. 반대로 존재는 한정적definite이며 비연속성을 가진다. 동일성은 되풀이되는 것인 반면 차이는 모순하고 달리 차이의 정도를 극대화시키면 반대적opposite인 것이 되고 반대인 것은 또한 모순으로 간다. 그러나 차이는 반대가 아니며, 다름difference은 공존과 비공존의 양면을 지닌다. 이러한 다름이 비공존에서 나타날 때는 시간이라 하고 공존에서 나타날 때는 공간이라고 한다. 요컨대 어떤 것이 무한정자에서 나타나는 것은 항상 시간과 공간이 함께 나오며, 차이를 통해 나올 때는 항상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다 나온다.
플라톤은 이러한 형식적 존재론을 가지고 다른 사물들의 질서를 찾으려고 시도한다. 동일성과 차이 사이에는 정도 차가 있는데 이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우주의 질서를 정리하는 것(<티마이오스>)이다. 문제는 시간과 공간은 반대되는 것이어서 동시에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플라톤 철학의 난점이다. 사물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동시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물의 동일성이 나와야 하지만 두 개의 동일성이 반대되기 때문에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경험적인 세계로 내려가서 양자가 관계를 맺으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다. 이런 까닭에 플라톤은 자신의 우주론을 우화fable, 이야기mythos라고 부른다. 반면 형상의 일반적 척도만 가지고 설명하자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질료form-matter theory 이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운동은 움직이지 않는 것에 종속되며, 이 구도가 목적론의 전제이다. 이들의 존재론은 우주의 각 사물의 기본적인 자리매김classification을 가능하게 하고 우주 내에서 각 사물의 위치를 정의definition의 차원에서 정하려는 것이다. 정의의 차원에서 각 개별 과학이 완성될 때 존재론은 완성되며, 그래서 철학은 백과사전이 된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든 플라톤이든 철학은 all-wissen을 궁극 목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계승하는 것이 플로티누스 학파 및 스콜라 철학이다. 서유럽의 침입 이전의 이들은 미개인으로서 스스로 데이터를 다루지 못했다. 중세 초에 철학은 학교서 가르치듯 희랍이나 로마의 학문을 가르쳤다. 스콜라 철학은 데이터를 직접 다루지 않으며 주입식(폐쇄적, 세뇌식) 성격을 지녔다. 예컨대 스콜라 철학자는 말 이빨이 몇 개냐는 질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책을 보라고 답한다. 중세기 문화가 발달하고 데이터 취급 능력 및 기구들이 발달하면 스콜라 철학의 결론이 의문시된다(ex 천체의 운동). 결정적인 예가 갈릴레오의 피사의 사탑에서의 실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단적으로 질의 물리학이다. 존재가 운동하는 한에 있어서의 운동을 다루는 학이 바로 물리학이다. 갈릴레오의 실험과 더불어 스콜라 철학은 붕괴하며, 이런 의미에서 근대 학문의 개조자는 갈릴레오이다. 반면 데카르트의 경우 유동 이론에서 출발하여 모든 것을 회의한다. 플라톤도 유동 이론에서 출발하여 경험을 내부에서 정리해서 다시 검증해보자는 것이며, 이 점에서 데카르트는 플라톤의 후예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의심스러운 것이 인식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문제를 회피하고, 결국 데이터로부터 도피한다. 본래 science는 라틴어의 scire, scientia에서 나온 말로 주관적인 견해나 생각, 자의적인 사고는 다 빼버리라는 것이며, 희랍어의 epistêmê 역시 의견doxa과 항상 대립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반대되는 사상이 오귀스트 콩트의 사상으로서, 콩트 역시 중세기 신학과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그의 주장은 현상이나 사실fait 등 데이터로 주어진 것, 실증적positive인 것(<-> 허구적인 것)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콩트는 갈릴레오 물리학 같은 엄격한 학을 모든 학문에 적용하자고 한다. 가령 콩트는 사회학을 사회적 물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콩트에게서 학문은 수학, 무기물, 유기물, 사회학 순으로 전개되며 이를 모두 종합하는 것이 철학이 된다. 이 점에서 불란서 철학에서 근대 학문의 기초를 준 것은 오귀스트 콩트가 최초이다. 콩트가 낳은 실증주의는 후에 물리학, 화학, 레비-브륄 등의 인류학, 뒤르켐의 사회학, 병리학 등으로 발전된다. 우리 내면 세계는 실증적으로 증명해야지 데카르트의 코기토 등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불란서 심리학에서는 병리학, 최면술, 실어증 연구 등이 발달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콩트가 환원론자는 아닌데, 그는 모든 학문이 각 데이터에 따라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콩트의 실증주의와 관련하여 우연과 필연에 대한 결정론에 대한 논쟁이 등장하고 많은 메타과학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사유denken를 통한 현상학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란서 철학자 대부분은 수학자이자 실증과학자였다.
베르그송은 결정론에 관한 논쟁 이전에 생명 현상과 무생물 현상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생물은 자신의 기능을 그 어머니인 생물에서 받는데 이것이 유전(파스퇴르 실험)이다. 이때 유전되는 것은 형질이 아니라 기능이다. 유전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근대 물리학처럼 기계적mechanical인 원인은 항상 결과의 밖에 있으므로 유전을 설명하지 못한다. 기계론은 생명체가 갖는 물질적 부분에 있어서만 설명을 하지 생명 자체의 유전은 설명 못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 이론 역시 형상이 밖에서 질료에 주어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유전을 설명하지 못한다. 운동에 있어 운동의 존재는 일정한 성격을 갖는데, 운동이 운동 아닌 것으로 될 수 있는 측면이 바로 수동성passivity으로서 이것의 극한치가 정지이다. 운동이 일정하다는 것은 운동의 자기 동일성이고, 운동이 운동 이외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운동은 항상 지속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운동이 자기 밖에서 운동의 원인을 얻으면 그것은 양화되는 것이며 언제나 수동성을 요구한다.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운동은 그 운동을 타자로부터 받아들일 수 없기에 자기 운동자이다. 자발성spontanéité은 능동성의 근원이다. 베르그송은 물질이 엔트로피라고 일차적으로 정의한다. 베르그송은 생물과 무생물을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정의하려고 하는 까닭에 플라톤으로 간다. 플라톤도 운동을 중심으로 우주를 분류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질이 엔트로피라도 어느 기간이 걸려서 변하는 것이지 그냥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질도 어떤 의미에서는 지속하며, 따라서 물질과 생명체를 동일 차원에 놓고 다룰 수 있다는 이론이 나올 수 있다. 물질의 세계는 모든 것이 유동이고 모든 것은 변칙, 질quality 뿐이다. 물질과 달리 생명체는 反엔트로피이며 자발성과 자기 운동을 갖는다. 생명체의 자발성, 기능은 반엔트로피이며, 생명체는 언제든 변칙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존existence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여러 기능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현대 분자생물학에 의하면 분자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는 자신의 내부에 정보를 갖고 자신의 외부에 대해 그 정보를 조절해 가면서 자기 내부의 여러 기능을 분화시켜나간다고 한다. 이와 같은 분자생물학의 생각은 발생론적genetisch 측면에서 베르그송 이론과 유사하다. 베르그송은 물질이 분화되는 측면에서 시작하여 성인이 되는 과정으로, 다시 종으로 진행한다. 다음으로 능동성activity의 문제 발생한다. 운동은 A에서 B로 가는 것, 즉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인데 어떻게 운동의 자기 동일성이 유지되는가? 즉 운동 그 자체의 과거 상태의 지금에 있어서의 보존이 문제가 된다. 이 보존이 바로 기억이며, 불란서 심리학자들은 유전도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기억이라고 본다. <물질과 기억>이라는 책을 베르그송이 쓴 까닭이 바로 이 기억 때문인데, 생물과 물질의 차이는 바로 조절 능력과 기억에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하나의 모범형ideal Typus으로서 인간(어린아이나 장애인이 아니라 정상적인 성인)이 나오지만 베르그송에서는 종에서 성인이 되어 다시 종으로 가는 모든 순환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나오지 않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연속되어 나오는가도 보아야 한다. 인간은 생명체의 하나의 생태학적 어떤 외형aspect에 불과하다. 이렇게 보면 철학도 인간 생활의 하나의 생태학적 형태일 뿐이다. 왜 새가 되고 사람이 되는가? 그 상황에서 삶을 유지하려고 조절한 결과이다. 사람 형태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지 가령 바닷속에 살면 물고기 같은 형태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베르그송과 더불어 철학은 본질essentia의 입장에서 실존existentia의 입장으로 간다. 실제 생물학을 볼 경우 식물만이 자기 영양 섭취 능력을 지니지 다른 모든 동물은 가지고 있지 않다. 전부 식물의 기생충이자 일종의 불구자인데 이것을 메우기 위해 여러 가지 기구가 나온다. 인간의 대상화하는 능력도 이것의 일종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 공부하고, 학교도 아니고 복잡한 도구를 만들어내는 등 아주 복잡한 존재이다. 인간이 대상화시키는 능력이나 신경 계통이 나오는 것도 식물이 갖고 있는 능력을 보충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여기서 과거의 homo sapiens지성인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어지며, 베르그송의 입장에서 종에서 성인이 되어 종으로 가는 전 과정을 볼 때 그 밑에 공통치를 빼면 조절 능력, 즉 무의식이 나온다. 즉 무의식이 중심이며 대상화된 인식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실증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 근대의 인식론과 달리 베르그송의 인식론은 단순한 사변이 아니라 동물생태학, 식물학, 분자생물학 등 데이터를 모집해서 공통치를 논해야 나오는 것이다. 동물은 대상화하는 능력이 없어도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가령 병아리는 알에서 막 깨어나도 먹을 것, 못 먹을 것을 본능적으로 다 알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으면 안 되는지 배워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인간 중심의 경험론이나 합리론 등 인식론은 동물의 영역까지 보자면 재고해야 한다. 또한 베르그송에서 실증과학의 문제는 가령 이런 것이다. 앞서 본 것처럼 과학은 재는 데부터 시작한다. 플라톤은 질을 재는데서, 공간에 있는 것을 재는데서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대개념, 중개념, 소개념, 보편자, 특수자 등의 범주를 통해 질을 재어 양화시킨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질은 서로 다른 것인데 이를 어떻게 재느냐고 질문한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운동, 과정process은 잴 수 없는 것이고 기존의 실증과학은 운동이 지나간 그림자, 스쳐간 공간을 쟀을 뿐이다. 이처럼 실제 운동이 스쳐간 공간을 측정함으로써 모든 이론이 생기는 것이고 모든 학문은 실제 있는 변치로서의 세계를 단지 스쳐갈 따름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세계를 잴 수 없다는 것이다. 물질과 달리 생명 현상의 기본은 자발성이고, 자발성은 자기 조절하는 능력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척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척도를 받아들이면 인과 법칙에 빠지게 되지만 생명의 자율적인 측면은 잴 수 없는 것이다. 심리 현상은 어느 한계 이상으로 잴 수 없으며 이를 재려고 하면 물질 현상처럼 수학적 공간에 넣어야 하는데 이렇게 될 경우 실제 심리현상은 죽어버리고 만다. 베르그송에서 세계는 모두 변칙뿐이며 질로 가득 찬 상황situation이다.
플라톤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순율, 무가 아니라는 것은 모든 학문과 모든 데이터의 기본이다. 실재하는 사물은 언제나 일정한definite 것이다. 무한정적인 것과 자기동일성을 가진 것 중 존재에 가까운 것은 자기 동일성을 가진 것이다. 이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것은 일정한 것이다. 일정한 것의 극한치는 고유 명사이며 이것이 양화될 경우 보통 명사가 된다. 그러나 질, 운동, 되풀이되지 않는 내용은 잴 수 없는데 이럴 경우 모든 것이 변칙이 되고 만다. 법칙이 성립하려면 운동은 양화해야만 하고, 확정되어definite 있는 질을 빼버려야 하는데 질은 베르그송이 보였듯이 양화되지 않는다. 우주는 질로 차 있으며 일정한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법칙은 한정적 세계에서 무한정적 세계, 양적인 세계로 자꾸 내려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특정한 존재가 아닌 그냥 사람 일반을 말하는 것은 그가 질을 양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질은 양화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형상의 세계는 다 고유한 것이며 고유명사로서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본다. 어떤 형상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은 선험적a priori으로 주어질 수는 없다. 형상, 다가 성립하려면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사건으로서, 법칙도 사건으로서 성립한다. 만약 2+3=5가 성립하는 공간을 수학적 공간이라 하면 왜 수학적 공간이 성립하는지가 우선 문제이며, 그 공간에서 2가 성립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추상적 공간에 대해서는 순전한 우연이다. 우리에게는 모순율이 최고인데 이는 그것이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2가 성립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우연(2가 그 자체 무가 아닌 것으로서 무에 대비되어 단적으로 존재, 즉 모순율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2라는 그 존재의 까닭을 설명할 수는 없음)이다. 또한 2는 정적static이며 보탠다는 것은 동작, 운동인데 2를 보탠다는 것은 2에 대해 밖에서 주어진 운동이다. 2에 보탠다는 운동이 주어지냐 아니냐는 2에 대해 또한 순전히 우연적이다. 추상적 법칙이란 추상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따라서 어떤 영원한 법칙이 미리 선험적으로 있다는 것은 얘기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학문은 데이터에서 출발하지 어떤 이론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을 전부 구체적인 고유 명사로 썼는데, 이 점에서 베르그송은 플라톤의 한 특수한 계승자로 간주될 수 있다. 구체적 데이터는 어떤 추상적 사고도 안 들어간 데이터지만 또한 존재론적으로 실재reality이다. 항상 확정된definite 것의 극한치까지 가야하며 확정성의 극한치에서 무한정성의 극한치까지 모두 보자는 것이 플라톤의 철학이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서양철학의 주류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다. 플라톤과 유클리드 기하학 같은 정량적인 학은 이탈리아에서 오며, 형이상학도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서 온다(파르메니데스). 그리고 서유럽에서 불란서는 로마 문화의 맏딸로서, 희랍 철학 이후 서양 철학의 정수는 불란서로 간다. 오귀스트 콩트가 실증 과학의 배열, 분류, 분할 등을 시작하고 베르그송은 이에 대해 또 질문하고 대답한다. 결국 서양의 실증 과학에 대응할 수 있는 이론은 베르그송에서 끝난다. 요컨대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나 공간 둘 뿐인데, 플라톤은 둘 다를 놓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에서 형상 이론을 놓았으며 베르그송은 이를 시간에서 정리했다. 반복한 바와 같이 서양 철학의 주류는 데이터에서, 대상화된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예컨대 헤겔 같은 경우이다. 헤겔은 대상화된 세계에서의 모순율을 부정하기 때문에, 모순의 변증법을 다루는 <논리학> 같은 저서는 비합리주의적이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 그 주어진 상황에서 대상화된 세계를 조절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성립하는 자기의 동일성의 조절 능력이 주제라고 볼 수도 있다. 결국 단순히 어떤 철학이 좋냐 아니냐 하는 식의 논의는 무의미한 것이며, 모든 철학을 그 모든 측면에서 다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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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11-0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박홍규 선생님께서 고별강연을 하셨나요? 생각해보니 박홍규선생님 책은 다른 책에서만 엿보고 실제로 읽어 본 것이 없네요.--;;; 글 잘 읽고 갑니당.(소화불량으로 남아있는 <철학을 위한 선언>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바라 2010-11-07 23:48   좋아요 0 | URL
아 고별강연은 <형이상학 강의> 1권에 실린 글입니다. 강연문이 너무 압축적이라 상당히 어려운데, 위 책 후반부에 네 차례에 걸쳐서 고별강연을 검토하고 토론하는 부분도 나오죠. 박홍규 전집 중 좀 더 재미있고 쉽게(?) 읽히는 책은 <형이상학 강의> 2권이더라구요. 일관되게 데이터에 근거한 철학을 강조하고 그런 의미에서 서양 형이상학의 두 축을 플라톤과 베르그손으로 보는.. 칸트, 헤겔 같은 독일 근대철학이나 현상학 등을 암체어 철학이라고 비판하고 프랑스철학의 실증주의적 측면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지요. 저는 바디우를 잘 모르지만 그가 보는 플라톤하고 어떤 차이를 보일지도 궁금하네요. 바디우는 수학 박사이기도 하다던데..(뭐 일단 플라톤 자체를 보는 게 제일 중요하겠습니다만ㅋ)

빵가게재습격 2010-11-08 13:50   좋아요 0 | URL
암체어 철학...이거 웃으면 안되는데, 웃음이 나오네요.^^ 저는... 바디우에 대해 '아예' 모릅니다. 처음에는 <사도 바울>을 뒤적도적 하다가, 이해가 안 되니 그럼...하면서 <철학을 위한 선언>을 뒤적도적....아픔이 크더군요.--; <철학을...>에는 플라톤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데, 위 글과 겹치는 것이 많은 것 같아요.

바라 2010-11-09 01:38   좋아요 0 | URL
사실 한국의 서양철학 수용에서 현상학 등 독일 철학이 상당히 우세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박홍규 교수 식의 관점이 상당히 소수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의 철학이 순전히 소설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형이상학이라면 자고로 실증 과학과 대결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인식론에 대해 논하고 싶으면 데카르트처럼 난로 근처 의자에 앉아 공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박홍규 교수는 피아제 같은 발달심리학 등을 자주 언급하더라구요. 현대철학에서 형이상학이 퇴조한 까닭이 자연과학의 발달 수준을 철학자들이 흡수하기 버거워진 것하고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11-09 09:22   좋아요 0 | URL
넵!^^

쟁쟁 2010-11-23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군....ㅠㅠ

바라 2010-11-24 00:06   좋아요 0 | URL
난 이미 망한 듯 ㅠ

2010-12-08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09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3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6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