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가드 여사의 모습(1952~)   

 


일종의 윤리학사이기도 한 이 책은 규범성의 근원을 다룬다. 코스가드는 주의주의자(홉스, 푸펜도르프) 등 규범성의 근원을 입법자에게서 찾는 입장, 실재론자들처럼 어떤 도덕적 실재에서 찾는 입장, 흄 등 반성적 승인(reflective endorsement)론자처럼 특정한 인간적 본성에서 찾는 입장 등을 차례로 개괄, 반박하고 자율로서의 자유(칸트)에서 비로소 규범성의 근원이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책 후반부에는 버나드 윌리엄스나 레이몬드 게스 등 동료 학자들의 비판 및 코스가드의 답변 등이 실려있다. 현재 하버드에서 가르치고 있고 또 롤즈의 학생이기도 했던 그녀의 책은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책보다 훨씬 유익하고 깊이가 있는 것 같다..

Christine Korsgaard, The Sources of Normativit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 145-166.   


가치의 기원과 삶의 가치

4.3.1 고통은 앞서 논의한 것들에 대한 반론이 된다. 첫째로 고통은 우리의 심적 삶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데에 장애물이 된다. 그가 사적이라고 부른 바로 그러한 의미의 고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고통은 규범성에 관한 자연주의적 실재론의 어떤 형태에 대한 큰 유혹이다. 쾌락과 달리 고통은 규범적 사실의 한 종류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고통은 칸트적 윤리학 또는 인간성의 가치를 모든 가치의 토대로 만드는 윤리학에 대한 반론이 되는데, 다른 동물들도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4.3.2 처음 두 반론은 연관된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에 반한 논증은 규범적 자연주의- 결코 틀릴 수 없는 -에 대한 반대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고통이 어떤 토대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공리주의자들은 쾌락과 고통이 가치이기도 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이것이 자연적 세계에서 윤리학이 토대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감각을 지식의 토대로 놓는 인식론적 주장과 유비적이다.
4.3.3 정말 그런가? ‘나는 빨간 감각을 갖는다’의 경우, 그것을 보는 것은 우리 마음 속의 작은 인간인가?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모든 심적 행위를 감각과 관념의 관조로 환원시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그림을 지지하는 ‘가짐’이라는 언어에 대해 공격한다. 그런데 누군가 고통스럽다고 말할 때 그는 그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에 대해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조건을 바꿔야 할 아주 강한 충동을 갖고 있다고 알리는 것이다.
4.3.4 고통은 단순히 특정한 감각이 아닌데, 고통의 고통스러움은 이러한 감각이 우리가 맞서 싸우도록 이끌리는 감각이라는 사실에 있다(고통의 생물학적 역할). 감정적 고통과 물리적 고통이 공유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감각이 아니라 세계에 대해 맞서 싸우도록 한다는 것이다. 고통은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 자체인 조건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의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를 갖는다는 지각perception이다.
4.3.5 공감sympathy은 단순히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한 불편한 느낌이 아니라, 덜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그들의 곤란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각이다(흄, 허치슨). 동정pity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한 지각, 그의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가 있다는 지각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4.3.6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살아있는 것은 자신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생명에 있어서 이 자기-유지적인 형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 살아있는 것이 동물이고 의식적이라면, 정체성을 보존하는 방식은 감각, 고통을 통한 것이다. 동물은 자신의 물리적 실존을 위협하는 것을 지각하고 그것에 맞서 싸우려 한다.
4.3.7 비교: 인간과 실천적 정체성. 살아있는 것과 물리적 정체성. 의무는 당신의 실천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반성적 거부이며 고통은 물리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비반성적 거부이다. 고통은 이유의 지각이며 이는 규범적인 것으로 보인다.
4.3.8 의무와 고통 모두 부정적인 도덕 감정과 관련된다. 고통은 현재, 과거, 미래 모두에 적용되는 이유에 대한 지각이다. 마음의 권위는 부정적인 도덕 감정의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감정을 절대적으로 함축한다. 이때 자신의 이유를 지각할 수 없는 마음은 마음으로서 전혀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칸트에서 도덕적 이유의 활동에 대한 자각으로서 존경respect).
4.3.9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갖는 것처럼, 동물도 감각적이며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갖고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생명이 가치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동어반복이다. 살아있는 것은 그 정체성의 보존이 정언명령인 것으로, 생명은 도덕성의 한 형태이며 도덕성은 인간적 삶이 갖는 그 형태이다.
4.3.10 우리의 동물적 본성은 인간적, 도덕적 정체성이 의존하는 근본적 형태의 정체성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의 동물적 본성을 가치롭게 여기지 못하면, 당신은 아무 것도 가치롭게 여길 수 없다. 동물적 정체성이 만드는 이유와 의무는 단지 사적인 이유가 아니며, 다른 동물들에 대한 이유는 또한 당신에 대한 이유도 되는 것이다. 고통받는 동물을 당신이 동정하는 것은, 이유를 지각하기 때문이다. 즉 동물은 울부짖음으로써 고통을 표현하고, 이는 그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이 울부짖음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며, 다른 동물들도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당신에게 의무를 부여할 수 있다.
4.3.11 이전에 우리는 동물들은 반성적 의식, 즉 자기의식을 갖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럼에도 고통과 이유는 반성적 구조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유는 충동에 대한 승인이고 고통은 감각에 대한 거부이다. 이러한 이중 구조 또는 자기지시를 가진다는 점에서 고통은 재귀적인recursive 것이다. 고통 속에 있는 동물은 그 조건을 반대하는 것이지만 또한 반대하는 그 조건에 있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고통 속에 있는 것은 고통이다. 이것이 고통이 거의 언제나 나쁜 이유인데, 고통받는 피조물은 그 고통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고통이 내생적으로 나쁜 감각이라는 것은 아닌데 어떤 맥락에서는 고통이 환영받기도 하기 때문이다(장례식에서의 애도). 이때 고통이 내생적으로 나쁜 감각이라 생각하도록 하는 충동은 가치가 단순히 의식과 관련된다는 근본적인 오류로부터 나온다. 고통은 단순히 의식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의식과 무관한 외부 세계에서 오는 정보에 대한 것도 아니다. 가령 스너프 무비 등을 우리가 편안하게 볼 수 없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우리의 고통이 지각하는 악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4.3.12 우리는 식물에게도 의무를 갖는가? 식물은 의식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지 않다. 식물을 존중하지 않는 이는 모든 가치의 토대인 생명에 대한 숭배가 부족함을 보여줄 뿐이지 그가 잘못 되었다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4.3.13 동물과 인간은 서로에게 의무를 갖는가? 개를 길들이는 경우 이는 의무가 아니라 지배 관계 아닌가? 이는 틀린 의견은 아니겠지만 외재적인 기술, 3인칭적 기술이다. 동물 또는 인간의 1인칭에서 압력과 지배는 어떤 규범성의 형태, 형상을 갖는다.
4.3.14 두 동물이 지배를 위해 싸울 때조차 이는 고도로 의례화되며, 의지의 싸움이 된다. 도덕성의 기원에 관해서, 니체와 프로이트는 도덕성과 특수한 인간적 의식성이 우리 종의 진화와 동시에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도덕성은 지배 충동(권력의지, 공격본능)이 출구를 박탈당하고 자아에로 돌아섰을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능을 안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법을 배웠다. 고통, 처벌은 동물이 자신의 정체성에 반역하도록 강제하며 이것이 규범성의 근원이다.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은 자연적 충동을 가질 때조차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이는 자기증오와 허무주의로까지 나아간다. 물론 니체나 프로이트의 계보학적 탐구가 우리가 이전상태로 단순히 회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초인). 아마도 반성적 거리가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통제하도록 했던 것처럼, 아마 또한 자기통제에 대한 반성적 거리가 또한 이를 극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회의주의와 자살

4.4.1 여기서 이야기한 의무에 대한 설명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주의적이다. 규범성은 어떤 자연적 - 심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 사실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이는 자연주의적이지 않다. 자연주의적 관점은 규범적 진리를 사실적 진리와 동일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반성적 승인이 행위를 올바르게 만드는 데에 충분하다는 것이 아닌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든 행위는 올바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규범적 자연주의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결코 틀릴 수 없는 그런 류의 규범성이란 없다. 만약 우리가 쾌락, 고통, 반성적 승인 또는 거부를 의식 바깥에서, 3인칭으로 본다면 그것들은 단순히 가치의 사실들일 뿐이지 가치 자체를 인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치의 사실은 가치 자체가 아니라 단지 사실일 뿐이다. 그러나 이는 삶의 사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가치를 갖도록 하는 자연적 조건이다.
4.4.2 만약 가치가 삶의 사실이라면, 모든 가치에 대한 거부는 삶의 거부의 형태를 갖는다. 따라서 실천적인 규범적 회의주의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는 자살이 될 것이다. 물론 모든 자살이 그런 회의주의의 표현은 아니지만, 단지 자신들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해서, 삶이 아무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저지르는 자살은 문제가 된다. 이때 자살의 부도덕성immorality은 이러저러한 가치의 거부가 아니라 가치 자체에 대한 거부이다. 칸트는 자살하지 않을 의무가 가장 근본적이고 으뜸가는 의무라고 했고, 비트겐슈타인 역시 자살이 허용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라고 쓴 바 있다. 이들은 살아있음이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모든 가치의 조건이라고 보았고, 자살이 특정 가치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가치 자체에 대한 거부라고 보았다. 이 강의에서 내가 주장한 것은 도덕적 의무와 도덕적 가치는 모든 의무와 가치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인간성의 거부는 가치에 대한 거부이며 이는 완전히 실천적인 규범적 회의주의이다. 가치는 오직 우리 삶이 살 가치가 있을 때 존재하며 우리가 하는 일에 의존적인 것이다.
가령 규범적 회의주의자는 자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할 이유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욕망과 충동을 갖지만, 어떤 것을 할 이유는 갖지 않으며 그가 하는 것은 단지 순간의 욕망을 따르는 것뿐이다. 그는 정언명법도 가언명법도 갖지 않는다. 그는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데, 그의 욕망은 그에게 이유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은 가언명법에 필요한 의미에서 추구해야 할 목적을 규정해주지 않는다. 만약 목적이 지배적인 욕망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당신이 하는 어떤 것도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될 것이며, 당신은 틀릴 수 없게 된다. 결국 실천적 규범적 회의주의는 합리적 행위 같은 것이 없다는 관점이 된다. 우리는 살아가는 한에서, 인간 존재로서 합리적 행위를 해야만 하며, 동물적 행위나 비반성적 행위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아니다.

강의의 결론

1 홉스나 푸펜도르프 같은 주의주의자는 규범성이 입법자의 명령으로부터 규범성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리와 우리 자신에 대한 관계를 기술한 것일 때 참이다. 즉 사유하는 자아는 행위하는 자아에게 명령한다. 2 네이글 같은 실재론자들은 이유들이 내생적으로 규범적인 존재자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유하는 자아가 우리에게 현전하는 충동들을 평가하고 욕망이 이와 같은 규범적인 이유인지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보도록 하는 행위를 기술한 것일 때 참이다. 3 또한 사유하는 자아와 행위하는 자아의 관계는 입법적 권위의 관계이며, 우리가 자신에게 권위를 갖는만큼 우리는 우리의 법을 만들 수 있고, 이 법은 규범적이다. 이 점에서 칸트의 견해는 옳다. 자율성은 의무의 근원이다. 4 반성적 승인 이론은 다른 층위에서 또한 참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승인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규범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반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 가치의 규범성이 우리가 어떤 종류의 동물, 즉 자율적인 도덕적 동물이라는 사실에서 기원한다는 것이다. 5 이는 실재론이 또 다른 층위에서 참이라는 것을 뜻한다. 실재론을 비판하는 존 맥키의 ‘기이함으로부터의 논증’을 상기해보라. 맥키에 따르면 세계가 객관적인 규정성objective prescription을 갖는 가치, 또는 내생적으로 규범적인 존재자를 포함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그러나 맥키는 틀렸고 실재론은 옳다. 그것을 앎으로써 행위에 대한 이유와 동기를 모두 제공하는 존재자는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매우 특이한 존재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이러한 존재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맥키는 도덕적 실재론을 비판하는 위와 같은 말을 썼을 때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방에서 홀로 존재하고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존재자를 세계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가장 익숙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이고 다른 동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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