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프랑스철학: 근대성과 주체의 지속(캐롤라인 윌리엄스) 

 

1장 문제들과 역설들을 상속하기 - 주체성과 근대철학

 

주체 개념은 매우 다른 역사적 설명을 갖는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한다(데카르트에서 후설 그리고 그 이후). 근대철학 내에서 주체 개념은 대개 subjectum으로, 인식의 객관화하는 토대로, 모든 가능한 존재들의 토대로 개념화되어왔다. 이때 주체는 우선 인식론적 기능을 하는 것으로, 대상의 재현이 사유, 지각, 주체적 의식의 앎의 결과가 되는 가지성intelligibility의 영역을 구획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체는 이러한 동질성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주체 개념에서 존재론의 영역은 인식론만큼이나 중요하다. 실상 주체의 대문자 역사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의 개념화는 철학적 스타일의 다수성만큼이나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주체에 대한 질문은 이러한 문제들의 역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 장의 목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헤겔에 의해 전개된 주체에 대한 세 가지 개념을 식별하고 정교화하는 것이다.

 

1. 데카르트와 근대적 코기토의 탄생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보였듯이 근대성과 인식의 합리주의적 정향의 탄생은 데카르트적인 사유 주체 그리고 이후의 칸트적인 초월론적 주체와 분리될 수 없다. 정신과 신체, res cogitans와 res extensa의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이후 근대의 철학적, 정치적 사유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성의 구성은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문제틀에서부터 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1)

  데카르트의 철학은 인식의 새로운 토대를 만들고, 사유하는 주체를 구성함으로써 근대를 특징짓는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검증할 수 있도록 한다. 데카르트적 형이상학은 인간 주체의 관점에서 실재의 확실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회의주의로부터 발원한다. 인식론적 불확실성은 주체의 실재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진리의 기준들까지도 회의하도록 만든다(아렌트: ‘데카르트적 회의의 특징은 그 보편성’). 만약 우리의 지성intellect이 유한하다면 어떻게 인식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제1성찰에서 나타나듯이 환상, 상상, 부정확한 감각적 지각과 실재를 분간할 수 없다는 회의와 불안은, 이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진정한 코기토의 창조로서만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인식론적 안정성과 진리의 획득은 이와 같은 주체의 경험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제거할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 또한 인식 능력의 토대를 형성하는 것은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이다. 사유 능력 및 참되고 판명한 관념을 그렇지 않은 것과 구별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은 명석 판명함의 척도로서 기능하는 기하학적 법칙과 관련된다. 사유는 환상, 정서affection, 즉각적 경험 등 신체에 의한 흔적들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데카르트 철학은 주체를 명석하거나 기만적인 사유의 저자author이자 의지하고 사유하는 주체, 진리를 형성하는 것에 책임을 지는 주체를 구성한다. 그러나 신의 권위로부터 주체의 책임으로의 이와 같은 이동은 신을 명석판명한 관념의 원인이자 보증자로 가짐으로써만 가능하다. 홉스의 경우를 보더라도 주체의 능력은 신이 부여한 것이며, 인간의 정신은 신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데카르트적 주체는 인식의 저자이자 또한 이러한 신이 부여한 명석판명한 사유 능력의 오용에 책임을 지는 주체이다. 그런데 이러한 데카르트적 주체의 존재론적 내용은 무엇인가? 그는 주체의 존재론을 본격적으로 내놓지는 않지만, 적어도 데카르트적 주체는 시간 내에서 고정된 것이어야 한다. 그에게 주체성의 본질은 자아의 인식적 능력에 의해 부여되는 것으로, 세계나 타자와의 시공간적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지성의 능력에 대한 내적 반성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순수하고, 비시간적이고, 자기-폐쇄적이며, 반성적인 의식이다.

 이후의 철학은 데카르트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데, 인식론적 회의는 주체성의 모든 담론의 어떤 틈fissure이 된다. 회의나 불안의 억압이 곧 주체를 위한 새로운 토대주의적 이론을 만드는 것은 아닌데, 예컨대 정신분석 이론에서는 바로 이러한 억압이 바로 주체의 토대주의적 이론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캉이 주장하듯이 주체에 의한 대상의 재현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며, 의심은 진리를 보장하려는 시도들을 영원히 방해하게 된다. 코기토는 언어 내에서 그 자체로 경험될 수 없으며, 그 동일성은 영원히 분열된 채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적 주체는 또한 정신분석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서구 철학의 담론, 특히 칸트 철학은 추상적이고 초월론적인 주체성과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주체성 사이의 이율배반을 화해시키려 시도한다. 흄의 회의주의가 주체의 동일성을 그 굳건한 토대가 결여된 연속적인 흐름flux으로 간주했다면, 칸트는 주체성을 주체와 객체의 구별 위에 정초함으로써 데카르트적 문제틀을 발본화했다. 인식 주체는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존재,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이며, 이러한 주체는 인식 가능성의 조건이다(‘경험 일반의 가능성의 조건이 동시에 경험 대상의 가능성이다’).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칸트는 인간 경험의 한계를 인정했으며, 이 점에서 초월론적 주체성은 경험적, 실천적 의식과 일치할 수 없는 이상적 개념화이다. 오류, 환상, 혼동은 데카르트에서처럼 여전히 인식의 자기확실성에 대한 잠재적 방해요인으로 남는다.

  이상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객체성보다 특권적인 주체성 개념은 서구의 정치적, 철학적 사유의 지배적 패러다임을 구성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비판자인 하이데거에게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철학을 인간학anthropology으로 변형시키고 세계를 주체에게 표상(Vor-stellen)되는 것으로 만든다(<세계상의 시대>). 흔들릴 수 없는 확실성의 토대로서 주체의 개념화는 근대적 사유 형태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반-의인론anti-anthropomorphism이 데카르트에서 헤겔의 주체 개념 사이에서 이례적인 것anomaly으로 나타나게 한다.

 

2. 스피노자의 실체 철학: 주체의 분해와 재구성

  스피노자가 현대철학에 미친 영향력은 심대한데, 그는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우선성을 대체하는 주체성의 설명을 제공한다. 주체는 욕망, 의지, 자기이해 등이 실체의 체계적, 합리적 질서의 결과로 간주되는 상호연관된 복잡한 관계 도식 속에 위치한다. 이때 실체란 절대적인 신적 실체와 등치될 수 없으며, 범신론으로도 해석될 수 없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은유적인 의미와 실재적real(구체적) 의미로 사용한다. 이때 은유적인 까닭은 실체가 그것의 가능한 속성들의 무한성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고, 실재적인 까닭은 그것이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천상의 무엇이 아니라 자연적, 물질적인 것, 또한 생life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데카르트적 이원론, 주체를 두 가지 모순적인 영역으로 분열시키는 이원론과 대립된다. 그에게 주체성의 형태 및 인식의 구조에 대한 이해는 오직 신체와 정신, 정념과 지성 사이의 상호연관성interconnectedness을 인지함으로써만 달성되는 것이다. 그는 주체와 인식 사이의 관계를 구현embody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는 헤겔과 같지만, 헤겔과 달리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최초의initial 분리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실 헤겔에 의한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주요 비판은 스피노자의 실체 일원론이 주체성을 역사적인 생성 하에서 파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 헤겔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모두 수학적 모델을 준수하면서 사유의 추상적 개념화를 추구했다고 보았다. 반면 피에르 마슈레는 스피노자의 실체 및 속성 이론이 존재와 인식의 무제한적 가능성을 가진 구체적인 체계라고 기술한다. 사실 스피노자의 경험주의 비판, 인식과 주체성의 상상적 토대에 대한 설명, (개체적이고 집단적인) 정신과 신체의 역량potentia을 구획하고, 규율하고, 포함하는 정념에 관한 성찰 등은 알튀세르와 라캉의 주체 이론을 중요한 점에서 예상하는 것이었다.

  스피노자의 목적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존재론적 이원론으로 서술되지 않는 인식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신이 모든 세계의 행위를 고정되고 미리 주어진 목적에 따라 이끈다는) 종교적 목적telos의 교설을 받아들이도록 인간들을 기만하는 신학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실재에 대한 목적론적이고 선험적인a priori 개념화는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그릇된 설명이며, 신에 대한 이해를 무지하도록 고정시키는 공상에 불과하다. 세계에 대한 잘못된 지각과 오해는, 의지에 대한 합리적 이해와 우리가 자연과 갖는 정념적 교환 사이의 원초적 간극chasm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이 우리의 앎의 형태 속에 존재할 때, 스피노자는 오류의 원인을 보여주려고 한다.

  반성적 자기의식의 역할은 실체를 구성하는 힘과 변용affect의 구조에 의해 엄격히 제한된다. 의식은 이러한 구조 밖으로 연장될 수 없으며, 주체는 관념의 창조적 작인agency이나 인식 가능성 조건을 만드는 자율적인 경험의 주체가 아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의 일정한 변양definite modification에 의해 구성된다’(<윤리학> 2부 명제 10 따름정리corollary). 유사하게, 정신 속에는 절대적인 자유의지란 없으며, 정신은 원인에 의한 이러저러한 의지에 의해 규정되며, 이 원인은 마찬가지로 다른 원인에 의해 규정되고 이렇게 무한히 계속된다(ad infinitum).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를 공통의 실체의 속성의 무한함 가운데서 두 가지 속성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사유와 연장은 이러한 일차적primary 실체의 변용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유, 지성, 의지, 지각, 관념, 대상, 인식의 형태 등은 모두 이러한 실체와의 내재적이고 필연적인 관계로부터 나온다. 주체는 이러한 합리적 총체 내에 위치해야 하며, 실체의 존재 또는 변용의 양태mode로 이해되어야 한다.

 

관념들과 이미지들, 신체들과 정신들

  ‘관념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2부 48번 명제). 스피노자에게 정신은 그것이 신체의 특수한 관념이기 때문에 개별적 주체이다. 신체는 다수성multiplicity의 장소이자 경험에 의해 많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과 신체 속에서 관념의 질서는 적합하고, 명석 판명한 표상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은 혼잡하고, 부분적인 것이 된다. 명석함과 곡해distortion 사이의 구별. 스피노자에서 정신은 사유 내에서 신체의 관념으로서, 신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사유하는 신체이다. 이러한 신체와 정신 사이의 중요한 상호연관성, 관념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material 장소로서 신체를 고려할 때, 스피노자는 어떻게 순수 인식의 이론을 전개할 수 있는가?

  그는 3종의 인식을 구별한다. 각각의 인식은 실체에 대한 각각의 관계 및 존재양태에 대응한다. 1종의 인식은 ‘개별 대상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지성적 질서도 없이 단편적이고 혼잡한 방식으로 감각을 통해 드러나는’(2부 명제 40 sch. 2) 인과적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부적합한 관념을 낳는데, 이는 오직 정념, 감정, 신체적 변용들bodily affects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1종의 인식은 신체적 경험의 다수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취해진 이미지들, 상징symbol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어떠한 표상 대상도 필요로 하지 않는 스스로에게 적합한 관념과, 이미지나 기호sign에 결부된 관념을 구별한다. 상상imaginatio은 관념과 이미지의 관계를 혼동할 수 있고,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 인식의 상상적 형태에 관한 연구에서 스피노자는 언어의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언어는 재현과 진리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없으며, 기만, 왜곡, 환상 등에 종속되어 있다. 그에게 언어는 반동적인 것이며, 상상력에 결부되어 있고, 신체적 변용에 밀접히 결부된 부적합한 관념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관념의 물질성 및 그 언어적 형태와의 구체적 연관성을 지적한다. 언어와 주체성은 밀접히 연관되어있다.

  2종의 인식은 ‘우리가 갖는 사물들의 특성의 적합한 관념과 공통통념common notions이라는 사실로부터'(2부 명제 40 sch. 2) 나온다. 2종의 인식은 1종과 3종의 인식 사이를 매개한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공통통념은 사유가 신체의 직접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일반성generalities을 드러낼 수 있다는 증거이다. 공통통념은 정신이 여러 신체들의 변용의 통일성unity을 추론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나온 상호연관성, 필연적 통합integration 등을 보여준다. <윤리학> 3부와 4부3)에서 스피노자는 신체적 변용을 표상하기 위한 정념의 복잡한 도식을 만드는데, 이는 상상력이 가상illusion, 부적합한 관념 및 상상적 동일화를 낳을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4부에서 특히 그는 대중들multitude이 신학적이거나 정치적인 권위에 의해 묶일 수 있는 방식에 대해 토론한다. 그는 특히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공포 사이의 정념의 동요와 인간 사이의 갈등과 불안정성의 항구적인 원천을 추적한다.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에게 다중은 상호적 인정mutual recognition 과정에 의해 형성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모방과 동일시는 주체를 대중의 한 부분으로 구성하고, 복종적이고 예속적인 사회적 유대를 창조한다. 정서적 모방(affectuum imitatio)에 대한 연구는 많은 부분에서 정신분석학과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관행practice에 의한 신체의 규율(알튀세르) 등을 예상하는 것이다. ‘신체의 물리학’은 다른 정치적 형태에 따라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정념의 취약함과 항구적 진동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독해는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 이론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이성은 체화된 이성embodied reason의 한 종류로, 단지 매우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변증법적이다.

  사유의 자율적 능력을 보여주는 오성understanding의 단계는 스피노자가 지성intellec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성은 사유 속성의 한 양태로, 무시간적이고 무한하며 실체에 속하는 것이다. 실체의 속성들로서 유한한 신체와 정신은 모두 지성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지성은 본질과 실존이 하나의 것인 비판적이거나 순수한 사유의 형태이다. 이때 인식의 구성은 대상의 실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관념은 대상 이전에before 오는 것이다. 관념은 사유 속성의 효과로, 그것에 내재적인 것이며 관념의 대상ideatum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주체의 감각 지각에 의해 생산된 대상의 관념과, 유한한 신체 및 정신에 의해 동요되기 이전의 사유 내의in thought 대상의 관념은 구분되는 것이다.4) 의인론 및 의식의 주체 이론을 거부하면서,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은 의식을, 관념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의 질서와 연관과 동일한 실체의 반성된 실체reflected substance로 정립한다. 3종의 인식은 내재성immanence에 근거하는 것이지 구체적-특수한 것의 초재성transcendence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두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내재적이다. 첫째로 스피노자의 인식 이론은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에 근거하지 않으며, 양자는 모두 실체의 속성들이자 재귀적reflexive(내재적) 인식의 조건을 (양태적으로modally) 포함하고 있다. 둘째로 내재적 인식은 관념의 점증하는 적합성과 신체 및 정신의 관념들의 일반화 위에 기초한다. 이때 신체와 정신 사이에는 평행론, 즉 인식의 상호연관성 및 이성에서 지성으로의 이행이 변용된 사물로서 신체에 대한 자각과 평행됨 모두를 요구하는 평행론이 존재한다. 실체와 그 양태 사이에는 동일성이 존재하며, 이는 원본적인, 존재론적 차이나 헤겔적인 단절적인ruptural 부정성 같은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인식의 발전은 유한한 사유와 무한한 지성 내에서 내재적이지만, 이는 실체에 대한 선험적 개념화를 의미하거나 어떤 목적인final cause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는 코기토의 철학이나 절대적 주체성의 철학을 표상하지 않으며, 그에게서 우리는 ‘구조’에 관한 첫 번째 이론을 발견한다. 그는 존재 양태를 실존의 매우 다양한 평면plan 위로 분배한다. 타자로부터 분리되고, 자기-함량적인self-contained 동일성으로 주체를 재구성하는 것은 오직 부적합한, 인식의 상상적 형태일 뿐이다. 주체성이 결여된 스피노자의 구조화된 총체성structured totality 개념은 현대 비판 사상의 반인간주의적 입장과 중요한 관계를 가지며, 또한 알튀세르의 인식론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주체와 객체는 모두 실존의 실재적 평면에 대해 무지한 인식의 상상적 형태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인식의 모든 상상적 형태는 이데올로기적이며 참된 인식의 지위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라캉에게도 상상적인 것은, 코기토가 항상 준거해야 하는 주체의 자아ego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3. 헤겔적 현상학: 역사의 주체를 구성하기

  헤겔로의 회귀는 프랑스철학에서 193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데카르트적이거나 스피노자적인 합리주의 형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다. 헤겔에 관한 논쟁은 이폴리트, 코제브, 장 발, 메를로-퐁티, 사르트르, 루카치 등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된다. 이는 또한 의식의 역사성historicity의 이론으로의 회귀였다. 헤겔적 의미에서 현상학은 의식의 역사적 경험과 관련된다. 그의 사변 철학은 사유와 경험의 여정을 의미와 진리 추구의 과정으로 본다. 헤겔에게 주체성은 보편성, 특수성(specificity or particularity), 개별성(singularity) 등을 통해 분석될 수 있다. 변증법이란 지양의 과정을 통해서 대립물, 모순 그리고 차이를 극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관계이다. 변증법의 논리는 인식과 역사 모두에서 대립되는 운동들을 종합할 수 있게 해준다.

  헤겔의 현상학은 철학적 주체의 역사에 관한 변증법적 분석으로, 정신Geist으로서 자기의식의 점진적인 전개로 간주될 수 있다. 그에게 진리, 합리성, 그리고 절대자 모두는 역사적이고 주체적인 생성 과정을 통한 성취achievement이자 결과로서 간주된다. 요컨대 운동과 자아의 시간성temporality없이 사유와 존재는 그 자신들을 정립하거나 넘어설 수 없다. 헤겔의 체계는 정적이지 않고 동적이며 변혁적이다. 운동, 생성 등에 대한 그의 관심은 주체를 운동 자체의 원리로 간주하도록 한다. 주체는 어떤 고정점에 포섭되거나 시공간 상에서 유예될 수 없다. 헤겔에게 철학의 업무는 규정적인 사유를 그 고정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반정립의 운동을 보는 것이다. 데카르트적 이원론, 그리고 헤겔이 ‘단조로운monochromatic 형식주의’라 부르는 칸트 철학 등은 타자성과 모순을 배제하고, 변증법적 사유만이 종합할 수 있는 본질과 실존 사이의 근본적 관계를 간과하는 주체성의 한 예이다. 헤겔은 그의 실체와 주체 개념을 근원적 차이 또는 틈, 그가 부정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표시한다. 그 자기 운동이 주체를 존재로 만드는 힘이며, 그 본질에 존재를 부여하는 힘은 부정성이다. 실체와 주체 모두 그 자신의 부정을 포함한다. 자아와 주체(의식과 자기의식) 사이의 구별은 인정과 자기의식, 절대지에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고된 자기 외화의 과정을 하도록 이끈다. 의식은 절대자 안에서 그 자신의 완전한 의미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의 동일성을 거듭해서 상실하며 강제된 망명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이러한 욕망하는 주체 개념은 이폴리트, 코제브, 라캉 등에 의해 보다 상세히 전개된다.

 이제 헤겔의 스피노자적인 형이상학적 일원론 비판의 토대가 명백해진다. 주체의 복잡한 구조를 실체의 단순한 변양modification으로 환원함으로써 스피노자의 논리는 주체적 생성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표현적 총체성expressive totality에 대한 헤겔의 변증법적 개념화는 부정성 개념과 더불어 주체의 작인, 의지, 행위라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응답이다. 헤겔이 보기에 표현적 총체성과 부정성은 차이와 특수성의 구체적 표현, 상호성과 인정, 역사 속에서 의식의 능동적 생성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스피노자의 추상적 실체에 대한 중요한 교정자corrective가 된다.

  헤겔의 프랑스에서의 수용에 대해 논의하기 이전에, 마르크스에 의한 헤겔적 주체 개념에 대한 변형을 먼저 다룰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관념론 대 유물론의 논변 외에도 마르크스와 헤겔 모두는 어떻게 실재와 주체성이 나타나고 형태를 갖게 되는가라는 현상학적phenomenological 질문에 흥미를 가졌다. 알튀세르에게 이는 무엇보다 이데올로기와 인식의 문제였고, 이에 그는 헤겔보다는 스피노자로 회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그 속에서 주체의 실존이 자연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매개되는 세계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에 관심을 가졌다. 마르크스에게 동일성과 차이, 부정과 모순은 언제나 그 형태에 있어 명백히 사회적이다. 그에게 헤겔의 오류는 사유와 사회적 존재를 단지 의식의 영역 안에서 파악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주체의 그 자신과 타인들로부터의 소외estrangement의 정치적 이유에 대해 논의했고, 이는 주체와 타자들 사이의 교류intercourse에 초점을 맞춤으로써만 규정될 수 있다. 헤겔처럼 순수 사유의 영역에서 주체의 실재적 실존 양태는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헤겔 모두는 주체의 대상화objectification라는 질문에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이 소외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사유의 대상화와 혼동한다고 주장한다. 소외alienation는 사유 내 대상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마르크스는 헤겔의 주-노 변증법을 취하고 노동을 통한 주체의 외화externalization를 강조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의 소외는 우선 노동 대상으로부터의 소외이며 또한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이다. 이러한 소외에는 중요한 실존적인 차원도 있는데, 대상적 존재로서 주체는 또한 고통받으며 조건지어진 제한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임무는 주체의 현실에 대한 이러한 부정을 초극하는 것이다. 이때 변증법에 대한 마르크스의 의인화anthropomorphization는 명백하며, 그의 변증법적 기초를 이루는 것은 실체의 내적 부조화가 아니라 자연적 주체, 인간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주체의 문제를 자연의 감각적 주체와 관련시키는데, 이러한 감각적 주체는 사회적 삶의 토대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과대평가하고 자아와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를 과소평가한 것은 아닌가? <정신현상학>도 주체의 복잡한 여정을 기술하면서 이 주체의 유한성과 고통을, 의식과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불균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도입부에서 이야기한 헤겔로의 회귀란 단지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으로 간주된 소외로의 회귀일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관계로의 회귀이기도 하다. 불행한 의식과 주-노 변증법은 각각 이폴리트와 코제브에 의해 주체의 실존의 존재론을 전개시키는 데에 도입되었다. 문제는 소외의 실존 양태이다. 소외는 마르크스가 <파리 수고>에서 주장한 것처럼 사회적인 것 속에서 대상화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아와 세계 사이의 내생적인 관계인가? 만약 전자라면 그 정치적 해결책은 무엇인가(코제브)? 그리고 후자라면 여전히 변증법적으로 개념화될 수 있는 실존의 구조가 존재하는가(이폴리트)? 이러한 새로운 질문방식은 헤겔의 철학을 종합이나 화해없는 반정립, 계속적으로 전복되고 분열하는 통일체 내에서 대립항들의 유희로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코제브와 이폴리트: 주체, 역사, 구조

  코제브의 중심 주장은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의 운동과 주체성은 무엇보다도 인간학anthropology이라는 점이다. 역사와 인식은 오직 역사를 만드는 인간 행위에 의한 시간적 운동에 의해 주어진다. 청년 마르크스처럼, 코제브는 존재와 생성, 부정과 부정성을 인간  노동 행위의 역사적 장 내부에 위치시킨다. 자연 상태에서 존재는 단지 대자존재being-for-itself일 뿐으로 자연적 의식은 고립된, 개별적인 자기-확실성을 달성하며 대상에 대한 인식은 단순히 그것과 무매개적인 동일성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타자로부터의 인정을 욕망하는 주체는 동물적-존재를 넘어선다. 인간은 주어진 존재given-being5)를 변혁하는 부정 행위 자체이다. 주체는 곧 역사의 운동으로서, 자연적 존재의 수동적이고 관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능동적이며 타자의 인정을 통해 자기인정을 추구하는 (부정성으로서) 주체의 인간화하는 욕망이다. 코제브는 욕망을 그의 인간주의적 문제틀의 중심에 놓는데, 후에 라캉은 이를 자신의 이론으로 취하기도 한다. 코제브는 특히 헤겔의 주-노 변증법을 활용한다. 이는 두 가지의 충돌하는 주체성들의 극적인 설명에다가 자아와 그 자신 사이의 내적 관계 및 자아와 타자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서 이원성을 도입하는 것이다. 주인은 의식이 그 자신에 대해 존재하는 의식을 표상한다. 반면 노예의 실재는 그에게 우연과 상실(죽음의 유령)을 주는 주인의 위엄과 우월성의 인정, 그리고 부정적인 것으로 머무는 노동 행위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나 주인은 그의 대상 욕망을 목적 자체로 보는 순수한 부정성에 고정되어 있는 반면에, 노예는 부정적인 것의 초월과 변혁을 위해 준비되어있다. 욕망, 부정성은 자연적 세계를 변용시키며 이 과정에서 노예와의 관계 또한 변용된다. 작업work은 코제브에게 무엇보다도 시간인데, 이는 시간 내에서 존재하며 시간을 요구한다. 작업을 통해서 노예는 인간적 역사로서 인간적 시간성human temporality을 만들고, 자연적 진화를 멈추며 노예적 의식을 극복한다. 이러한 주체성과 욕망에 관한 해석은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의 내적인 이원론에 근거한다. 코제브의 구분에 따르면 인식은 언제나 인간 행위 내에서 현시된다. 관념은 작업과 행위에 의해 매개된 대상 및 기투projects의 산물로 나타난다. 코제브의 인간학적 헤겔 독해는 두 가지 중요성을 가진다. 첫째, 이는 욕망이 인간화되고 주체라는 행위자에 결부되어 인간 주체가 역사의 변증법적 운동을 이끌도록 하는 것. 둘째, 진리와 절대지의 가능성의 조건을 언표의 주체enunciating subject에서 찾는 것. 코제브의 인간학적 헤겔 독해는 청년 마르크스의 인간학적 변증법 독해와 유사하다.

 코제브와 달리 이폴리트의 헤겔 주체 개념 독해는 인간 실존의 비극적 요소를 강조하며, 역사철학에는 인간적 요소나 역사적 행위자로서 주체에 대한 해석이 없다고 본다. 이폴리트는 인간 경험의 조건을 인정투쟁에서 읽어내며, 이러한 투쟁이 타자 및 타자의 인정에 대한 욕망에 관한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절대자의 달성은 영원히 연기된다.’ 이폴리트가 주체의 실존적 곤경에 초점을 맞출 때, 이러한 존재론은 인간학적인 방식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의 가능성과 진리의 경험을 구조화하는 조건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생의 존재는 ‘자아의 불안disquiet’이고, 그 자신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타자로 남는 주체의 고통과 소외이다. 이는 부적합성, 대상의 진리에 대한 무한한 비-상응의 경험으로, 주체는 언제나 그 자신과의 통일에 이르는 데 실패한다. 자기발견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불행한 의식은 주체성의 토대이다. 이폴리트에게 부정성은 존재의 중심에 위치해있는데, 이는 모든 내용에 내재적이며 모든 주체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개체는 주어진 상태에 머물지 않는 절대적 충동이 된다. 노동/작업의 행위에서 주체는 그 자신을 부정하고 대상을 새로이 형성한다. 즉 노동은 이성을 인간적 사건으로 정초한다. 이러한 주장은 마르크스나 코제브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폴리트의 개념화는 이러한 철학적 관점과 구분된다. 이폴리트의 욕망 개념은 이원적 존재론에 의해 파악되지 않으며, 욕망의 인간화는 상상적 운동으로서 인정의 구조에 가깝다. 이폴리트는 다른 곳에서 주-노 변증법을 구조화하는 인정에 대한 욕망을 ‘거울 유희’로 파악한 바 있다. 더 나아가 이폴리트는 시간을 모든 여타의 범주들을 대체하는 것으로 정립한다. 시간은 모든 인간적 실재의 조건이자 주체의 창조적 가능성을 한계짓는 것이다. 이는 주체가 노동 대상과 갖는 마주침을 상실된missed 마주침으로 만든다. 마르크스나 코제브와 달리 자연에 대한 노동은 불행한 의식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으며, 유한성 내에서 욕망은 오직 대상에서 상상적 만족만을 찾을 뿐이다. 코제브에게 시간, 욕망, 인식은 모두 인간화된 것이지만, 이폴리트에서는 시간이 주체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시간은 생을 구조화하는 조건이고, 어떤 수단으로라도 주체에 의해 무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폴리트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자아의 불안 또는 불행한 의식이다.

                 

   

             






1) 반면 발리바르는 ‘시민 주체’에서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사물, 즉 코기토를 주체라고 명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아직 실체론과 관련된 것이었고, 주체를 주권적 존재sovereign being로 공식화한 첫 번째 이는 오히려 칸트라는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또한 이 지점이 정치적 주체, 시민이 등장한 순간이다.


2) 피에르 마슈레에게 이러한 헤겔의 비판은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1부에서 속성의 정의: 나는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파악한다)에 대한 그릇된 독해에서 기인한다. 속성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주장하듯이 속성 개념은 단지 지성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 아니며, 스피노자는 사유를 실체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사유와 연장 속성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무한한 속성이 존재하며, 유일한 실체는 실체의 절대적 무한성, 절대적 역량의 결과이다. 속성은 사유가 실체의 변양modification으로서 실체에 대해 가질 관계를 표현한다. 자세한 사항은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3부 참조.


3) 네그리는 이 점에서 <윤리학>에서 <신학-정치학 논고>의 초안으로 알려진 저작의 개입을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신학-정치학 논고>는 <윤리학>의 형이상학적 담론 내부로 도입되며, <윤리학>의 후반부에 명백한 정치적 토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례적 별종> 5장 참조.


4) <지성개선론>에서 스피노자는 이 중요한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기하학적 유비를 사용한다. ‘참된 관념은 그 대상과는 다른 것이다. 원과 원의 관념은 다른 것이다.’


5) 주어진 존재given-being란 코제브가 쓰는 용어로, 동물적 삶 속에 잠겨있는 무매개적 만족의 단순한 세계 속에 있는 주체를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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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4-23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라님 글 잘 읽었어요.^^ 일부 담아가요^^(혹시 안된다고 하시면 댓글주세요~)

바라 2011-04-23 22:08   좋아요 0 | URL
안 될리가요 ㅎㅎ 책 내용 요약인데 여러 모로 서툴러서 이해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네요(빈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