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오역이 많군;  어떻게 보면 취향 차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레닌보다도, 바디우를 포함하여 당대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의 마오에 대한 열광이 흥미롭고 그 배경이 궁금하다. 물론 이 글만 가지고 하는 얘기는 아니고, 그러니까 바디우의 친한 친구?인 지젝을 읽을 때도 궁금한 점이지만, 바디우의 이런 입장(실재, 사건 등의 존재론)이 오늘날 정치철학에 또는 대중정치에 어떤 식의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정치를 윤리로 환원하기. 그러고보니 아래 글에 정작 레닌 얘기는 별로 없고;; 전체 요지는 오늘날 도처에 만연한 침울한 강박증에 맞서 (니체처럼) 가치전환해라, 행위해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라 정도가 되겠다.   

 

<레닌 재장전>, 알랭 바디우, 하나는 스스로를 둘로 나눈다.  

(영어본 p. 7~10)


 오늘날 레닌의 정치적 저작들은 거의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 독재라는 고전적인canonical(국역27 ; 규범적인) 대립구도 속에서 재검토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진작 있었는데, 레닌을 비판했던 카우츠키 등 사민주의자들이 기댄 범주가 민주주의였다. 당시 반동분자들과 착취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려던 러시아 볼셰비키에 반대하여, 대의제와 의회 주도의 정치 체제를 당연히 여긴 카우츠키는 투표권을 전적으로 강조했다. 레닌은 이러한 측면에서 카우츠키의 이론적 편향deviation(국역28배신)을 보았다. 문제는 카우츠키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일반의 문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일반의 문제에 개입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원칙을 어기기 위해 러시아에 국한된 전술적 결정 운운하는 것, 원칙의 문제로 정의되는 정치 개념을 개량주의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부차적 모순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언제나 편향의 본질이다. 결국 이론은 문제의 국면을 사유 속에 통합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문제의 국면은 전술적이거나 지엽적이고 특수한 결정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승리의 원칙에 의해 규정된다. 레닌은 승리, 혁명적 정치에서 실재the real(국역29 ; 가장 실질적인 것)를 이론의 내적 조건으로 변화시킨다.


 1917년에서 70년대 말에 이르는 이 세기는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상상적인 것의 세기, 유토피아의 세기가 아니다. 이 세기의 주체적 규정은 레닌주의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직접적으로immediately(국역30즉각적으로) 실천 가능한 것에 대한, 실재에 대한 열정이다. 이 세기는 선언과 미래의 세기가 아니라 행위the act(국역30;행동)와 실행의 세기, 절대적 현재의 세기이다. 20세기는 승리의 시대, 혁명의 시대이다. 레닌에게 승리의 도구는 최종적이고 총체적인 전쟁을 준비하는 이론적, 실천적 명료성이다. 이 세기는 그래서 전쟁의 세기인데, 이는 둘 또는 적대적 분열이라는 문제 주의를 배회한다. 이 세기는 자신의 법이 둘, 즉 적대라고 선언한다. 둘은 세 항목에 따라 몰락되어야 한다. 1) 중심적 적대, 두 개의 주체성이 존재하며 이 주체성들은 생사를 건 투쟁 속에서 전지구적 차원에서 조직된다. 이 세기는 그런 적대의 무대이다. 2) 적대를 사유하는 두 방식 사이에도 폭력적 적대가 존재한다. 이것이 공산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대립이 지닌 본질이다. 공산주의자에게 최종 심급에 놓여 있는 대립은 계급들 간의 대립이다. 급진적 파시스트에게 이것은 국가nation와 인종 간의 대립이다. 이 두 번째 부분은 어쩌면 첫 번째보다 더 본질적이다. 3) 이 세기는 전쟁을 통한 생산의 세기로 규정적 통일성definite unity(국역31 ; 명확한 통일성)을 촉발시킨다. 적대는 한쪽 진영의 다른쪽 진영에 대한 승리를 통해 극복된다. 이 점에서 둘의 세기는 하나the One를 향한 근본적radical(국역32 ; 강렬한) 욕망에 의해 활성화된다. 적대의 분절과 하나의 폭력을 명명하는 것은 실재의 표지로서 승리이다.


 이는 변증법적 도식이 아니다. 종합이 아니라, 모든 것들은 두 가지 항 가운데 한쪽의 절멸을 가리킨다. 이 세기는 둘과 하나가 비-변증법적으로 병렬해 있는 형상이다. 승리를 얻기 위한 원동력은 적대 자체인가 하나를 향한 욕망인가? 레닌주의의 주요한 철학적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며,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원들이 가장 깊게 천착했던 것도 이 질문이다. 이른바 철학계의 거대한 계급투쟁. 이 결투는 변증법의 본질이 적대의 발생에 있으며, 정확한 공식은 ‘하나는 스스로를 둘로 나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좌파)과, 다른 한편으로 변증법의 본질이 모순적인 항(개념)notion들의 종합이며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공식은 ‘둘은 하나로 통합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우파) 사이의 대립이다.1)이 대립은 그러나 본질적 진리를 감춘다. 왜냐하면 이는 혁명적 주체성, 그 구성적 욕망을 식별하는 것identification(국역32;확인)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둘은 하나로 통합된다는 입장이 우파적이라면, 이 견해가 중국혁명가들에게 미숙해보였기 때문이다. 이 입장을 따르면 욕망을 산출하는 하나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종합을 빌미로 고대적인ancient(국역33고전적인) 하나, 즉 일자를 요청하도록 하게 된다. 변증법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복고주의적이다. 오늘날 혁명적인 활동가activist(33행동가)가 된다는 것은 의무적으로 분열division을 욕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새로움의 문제는 즉시 상황의 특이성 속에서 창조적 분열creative division(국역33분열을 창조)의 문제가 된다.


 1966~7년 사이 중국의 문화혁명은 하나를 지지하는 자들과 변증법적 도식의 다른 편을 옹호하는 자들이 대립했다. 진보의 깃발 아래 대중의 정치는 진정한 공산주의를 향해 가야한다는 마오 같은 이들과 경제 관리가 중요하며 대중 동원은 해로운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같은 이들의 대립. 이 대립은 정치적 풍랑 속에서 군대의 개입, 폭력적인 관료적 대립 등을 거쳐 76년 마오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 덩 샤오핑이 권좌로 돌아가는 테르미도르 반동이 뒤따랐다. 어쨌거나 문화혁명이 일련의 정치적 흐름 전체에 폐막을 고한다는 점인데, 핵심 대상은 당이고 주된 정치 개념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이다. 오늘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다시금 예속되길 갈망하는 이들 사이에는 이런 전례없는 사건을 야만적이고 잔인한 권력투쟁이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우스꽝스럽게도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고 답할 수 있다. 문화혁명의 투사들은 근본적으로 “유일한 문제는 권력의 문제”라고 말했던 레닌을 끊임없이 인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제부터 우리 정치철학자들은 위기에 몰린 정치 지도자가 다시 권력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공포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는가? 권력투쟁의 의미와 중요성은 무엇이 시급한지를 통해서 판단되어야 한다(마오; 혁명은 형식적인 디너파티가 아니다). 모든 문제점에 대해, 특히 (도시와 농촌, 지적노동과 육체노동intellectual and manual labor[국역36지식인과 수공업 노동자], 당과 대중 등의 관계처럼)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두 계급 간의 투쟁에는 두 개의 길과 두 개의 노선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사실이다.


 그렇다면 때로 극단적으로 치달았던 폭력은 어떠한가? 정치가 만일 부와 부자들, 권력과 권력가들, 과학과 과학자들(국역36; 학문과 학자들), 자본과 그 하수인들에게 사회를 종속시키고자 하는 영원한 질서를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이런 정치가 자애로우며 점진적이고progressive(국역 ; 진보적이고) 평화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무에 붙들려있다는be held for nothing, 모든 사유가 무에 매여있다는 생각을 우리가 견딜 수 없어할 때마다, 여기에는 엄청나게 가혹한 사유의 폭력이 존재한다. 총체적 해방이라는 주제는 현재 속에, 절대적 현재의 열광 속에서 실행에 옮겨지면 언제나 선과 악 너머에 위치하게 된다. 행위의 와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선은 기존 질서가 자신의 지속persistence(국역37;영속성)을 명명하는 데서 나온 귀중한 명칭인 일자the one뿐이기 때문이다. 극단적 폭력은 극단적 열광이 지닌 상대적 상관물이고, 정말로 성패가 달린 문제는, 니체 식으로 말해 모든 가치들의 가치전환이다. 실재를 향한 레닌주의적 열정은 사유를 향한 열정이며, 어떤 도덕도 알지 못한다. 니체가 알고 있던 것처럼 도덕은 단지 하나의 계보학적 지위status(국역; 상태)를 지닐 뿐이다. 설사 지식인 박해에 관한 것이라도, 실재로의 정치적 접근을 명령하는 것은 지식의 특권이 아니라는 사실이 실재를 향한 열정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랑스혁명에서 라부아지에를 사형하면서 했던 말, ‘공화국은 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 자체를 넘어서, 공리적이며 축약된 형태 ‘공화국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국역 수정)의 명목 아래에서 이를 읽는 법을 알아야 한다. 정치적인 것은, 실재와 관련해서 자신의 원칙을 세우며, 자신을 제외한 어떤 다른 필요도 가지지 않는다.


 확실히 실재를 향한 열정은 항상 가상semblance의 증식을 동반한다. 혁명가에게 세계는 기만과 타락으로 가득 찬 구세계이다. 실재의 정화작업이란 실재를 에워싸고 모호하게 만드는 현실reality로부터 실재를 추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기는 심오함에 반항하고 근본적인 것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전개하며, 니체를 따라 ‘배후 세계worlds behind’(국역; 세계들의 이면)라는 것을 제거해버리라고, 실재는 외양appearance과 동일하다고 말하라고 제안한다. 이 세기를 활성화하는 것은 이상이 아닌 실재이므로 사유는 외양을 외양으로 파악하거나 실재를 외양의 순수한 사건으로 파악해야 한다. 순수한 표면으로서 실재를 재발견하기 위한 투쟁에서 가상의 파괴는, 현실의 가상이 실재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순수한 파괴와 동일시된다. 이 정화과정에서 마지막 지점에서 현실의 완전한 부재인 실재는 무nothingness가 된다. 이 세기의 수많은 시도들이 취한 - 정치적이고 예술적이고 과학적인(국역;학문적인) - 이 방식은 니힐리즘적 테러리즘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 방식의 주체적 동인은 실재를 향한 열정이므로, 무가 아니라 창조에 동조하며 이 안에서 능동적 니힐리즘을 인식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든 이성적 활동은 현실의 중력에 의해 한정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악을 피하는 것, 실재와의 모든 접촉을 피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테러리즘적 요소 - 실재를 정화하려는 욕망 -를 억눌러 온 이래 니힐리즘은 그 효과를 상실하고 반동적 니힐리즘이 되어 간다. 이 세기가 그려온 또 다른 방식, 테러의 매력에 굴하지 않고 실재를 향한 열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방식을 공제의 방식the subtractive way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공제의 방식은 실재의 지점을 현실의 파괴가 아니라 최소 차이minimal difference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아주 작은 차이,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소멸 항vanishing term을 간파하기 위해 외견상의 통일성으로부터 이 항을 뽑아냄으로써 현실을 정화하는 것이지 현실의 표면 속에서 그것을 절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the affect가 위치한 곳은 바로 이 거의의 안, 내재적인 예외 안이다.


 이 두 노선과 함께, 이제 핵심 문제는 새로움에 대한 것이다. 이 세기는 스스로를 도래 또는 시작의 형상으로 제시했으며, 특히 새로운 인간으로 제시해왔다. 대부분의 이들, 특히 하이데거를 포함한 파시즘적 사유 영역에서, 새로운 인간은 일정 부분 망각되었고 타락해버린 고대인을 복권하는 것이다. 새로움이란 여기서 본래적인 것의 재생산, 비본래적인 것의 파괴를 통한 기원의 복구이다. 다른 그룹의 사상가,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영역에서 새로운 인간은 역사적 적대를 파괴하는데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존재해본 적 없는 어떤 것, 진정한 창조이다. 그것은 계급 너머, 국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다. 새로운 인간은 복권되거나 산출된다. 첫 번째 경우에서 새로운 인간에 대한 정의는 인종이나 국가, 핏줄, 토양 같은 신화적인 전체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새로운 인간은 특성들(게르만족, 아리안어, 전사 등)의 집합이다. 두 번째 경우에서 새로운 인간은 모든 범주화와 특성화에 저항한다. 특히 가족, 사적 소유, 민족-국가에 저항한다. 마르크스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 특이성은 범주화에 저항하며, 어떤 특성들도 지니지 않고, 가장 중요한 점으로 개별적 민족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새로운 인간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이고 보편적인 개념화는 모든 범주화를 거부한다. 여기서 뿌리와 전통, 기원들을 찾는데 있어 원시적이면서도 이기적인 중핵인 가족에 대한 적대심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가족들이여, 나는 너희들을 증오한다.”(앙드레 지드) 이 세기의 끄트머리에서 가족이라는 개념이 공감대를 갖고 금기에 가까운 지위를 다시 획득하는 것은 놀랍다(독일 녹색당, 동성애자들 등). 이 세기의 진짜 현재 속에서 새로운 인간은 국가주의적 독재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사적 소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이다. 오늘날 근대화는 착하고 나약한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되는 것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며, 능률적인 경영자가 되는 것, 최대한의 이윤을 얻어내고 책임감 있는 시민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슬로건은 “돈을 벌어라, 가족을 보호하라, 투표에서 승리하라”이다. 이 세기는 다음의 세 가지 테마들 주위로 이끌리고 있다. 불가능한 주체적 혁신과 안락함, 그리고 반복. 다른 말로 강박증obsession(국역42 ; 강박관념)이다. 이 세기는 안전에 대한 강박증 속에서 끝나고 있으며, 보다 더 비참한 다음의 준칙 아래서 종결되고 있다. 즉 당신이 숨쉬는 이곳은 사실상 그렇게 나쁘지 않다. 더 최악인 것들이 존재해왔으며, 또한 존재한다. 우리는 이제 너무나 널리 확산되어 버린 침울한 강박증에 맞서 이를 수행해야 한다.

 


 



1) 모순의 문제를 다룰 때 마오주의는 엥겔스나 스탈린의 시도에 비해 이점을 갖는다. 즉 마오는 동일성 전반에 대한 모순의 최우선성을 옹호한다(모순론). 종합이 가능한 것은 一分爲二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의 종합이란 단지 마오쩌둥이 비적대적 모순, 대립의 상대적인 교착 상태라고 부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빵가게재습격 2010-05-07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바라 2010-05-09 00:24   좋아요 0 | URL
책 나머지 부분도 읽어보고 재미있는 게 있으면 또 올려보겠습니다ㅎ

빵가게재습격 2010-05-09 00:56   좋아요 0 | URL
기대하겠사옵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420095324&section=03 

"삼성은 '대학생의 친구'인가 '욕망의 친구'인가?"

[삼성을 생각한다] "이 땅 젊은이에게 삼성은 무엇인가"


기사입력 2010-04-20 오후 12:12:38

삼성 반도체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참을 울었다. 20대인 그녀는, 내가 대학생이랍시고 게으르게 뒹굴대며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 반도체를 검사하기 위해 끝없이 제품을 납에 넣었다 빼며 제 자신을 죽여야 했다. 처음 직장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녀가 가졌을 꿈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러워져 나도 모르게 흐느끼게 된다. 고된 노동에도 때로는 친구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기도 했을 테지만,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될 때, 지나가버린 그 시간을 얼마나 안타깝게 그리워했을지.

대학을 아직 떠나지 못한 나는 다시 등교를 한다. 도서관 전산실에 들렀는데 내 앞에는 삼성 컴퓨터가 놓여 있다. 책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서자 삼성 에어콘이 눈에 띈다. 어떤 학생은 삼성 MP3 플레이어를 귀에 꽃은 채 강의실로 들어오고, 어떤 학생은 삼성 애니콜에 전화가 와서 강의실을 나가며, 어떤 학생은 삼성 노트북 센스에 강의노트를 작성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삼성이 없는 곳이 없다. 새삼 느낀 것이지만, 나는 삼성에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에는 나와 같은 20대의 어느 노동자의 손에서 나온 반도체가 들어있을 테지만, 학교에서는 공공물품을 거의 삼성 제품으로 구매하고, 학생들은 서비스 좋다는 삼성을 아무 생각 없이 손에 들고 있었다.


▲ 교정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대학생들. 이들은 극심한 취업 경쟁으로 지쳐 있다. 대기업 취업에 성공하면, 행복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삼성 문제를 푸는 것은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터를 보다 낫게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삼성의 제품만이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기업들이 학생들의 동아리모임 활동을 지원하곤 하는데, 너무나 프랜들리한 삼성은 그 지원에서 가장 앞서가며, 나아가 지원을 넘어 동아리를 대체하는 경지로 나아간다. 누추하게 잔디밭에 둘러 모여 기타치고 노래 부르기보다는 폼나게 해외 배낭여행을 떠나길 원하는 대학생들은 기업이 지원하는 모임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데, 삼성은 영삼성(youngsamsung)을 운영하여 대학 내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언제나 욕망과 친구한다. 삼성은 대학생들의 친구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누구라도 가리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다. 자세한 뒷사정은 알지 못하나, 작년엔 학생회와 삼성이 손을 잡으려한 일이 있었는데, 서울 지역 '한대련'과 삼성의 합작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광고지면을 내주고 지원을 받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삼성 올앳카드 회원을 학생회가 대신 모집해주고 카드 가맹점에서 할인을 받는 형태의 사업으로, 의결이 끝나고 집행을 기다리다가 몇몇 대학의 반대로 뒤집어졌다고 하는데, 그 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아직 듣지는 못했다. 욕망을 가진 누구라도 친하게 지내는 삼성은 이정도로 대학생들의 친구이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온 우리는 그래서 삼성을 멀리하지 못한다. 얼마나 좋은 친구인가. 세상과 이어주고 더위도 식혀주며 음악도 들려주고 여행도 시켜준다. 얼마나 고마운가. 삼성이 이렇게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다니.


▲ 영삼성 홈페이지.

그래서 그런지 대학생들에게 삼성은 선망의 대상이라고 한다. 나는 줄곧 '삼성맨'이라는 이름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것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보다. 그러나 조금 서글퍼지지만 거기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조심해야 될 것이 있는데, 바로 삼성은 학벌을 중시한다는 것. 얼마 전에 언론에서 삼성 사장단의 학벌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고 호들갑을 떨며 삼성 임원의 꿈을 심어주기도 했는데, 대개의 기업들이 서울대 인맥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에 이는 특이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다른 곳에 있다.

김용철 변호사에 따르면, 삼성에서 임원이 되는 것은 로비/섭외 실력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로비/섭외는 서울대 인맥이 더 수월하지 않겠는가하면 그게 아니다. 뻔히 알고 있는 자기 동창에게 큰 돈을 쥐어주며 로비하는 것은 민망하기도 하고 불편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일이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리어 아예 관계가 없는 사람이 큰 돈을 챙겨주는 것이 로비에서는 훨씬 더 편할 수 있는데, 그런 까닭에 계열사 임원 중에는 비서울대출신이 많을 수 있지만, 권력의 정점인 구조본은 모두 소위 명문대 출신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아무튼 높은 경쟁률을 뚫고 직원이 된다면 다행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역시 또한 주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누군가는 자랑스럽게 올렸을지도 모르나 그저 황당함과 경악만을 안겨주었던 동영상에서 본 매스게임을 실제로 하러 동료들과 집결해야 한다. 물론 멋진 콘도에서 삼성은 돈의 힘을 보여줄 것이고, 임원이 방문해서 삼성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임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도 심어줄 것이다. 멋진 일 아닌가. 내가 삼성맨이라니. 그러나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재미가 계속되리라는 희망은 지속되기 힘들다. 이직률이 가장 높은 기업이라는 삼성에서의 재직 기간은 보통 7~8년이라고 하는데, 3~4년차 사원들이 이직률은 30%대나 된다고 한다.

삼성을 발판으로 더 나은 곳으로 가려는 것일 텐데, 삼성에 계속 충성하다간 너무 일찍 묘비를 세워야 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을지 모른다. 물론 잘 견뎌낼 수도 있다. 경쟁과 성과주의는 한국에서 익숙한 것이니까. 삼성 안에서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못 보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최근 삼성에 취직한 친구의 말로는 인터넷 포털 DAUM도 눈치가 보여 접속을 못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견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노예가 아닌 한, 무작정 견디는 것은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인간은 의미를 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막연히 긍정하며, 그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보지 않으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멈춰서있어서는 안 된다. 함석헌은 사람의 사람된 점은 생각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즉 "사람은 할 뿐만 아니라 하는 줄을 아는 것이요, 알 뿐만 아니라 아는 줄을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 수 있어야만 하며, 그러할 때 우리의 삶은 질적으로 도약한다.

사람들은 삼성의 세련된 사무실에서 잘나가는 현대인이 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이미 인천 송도하수처리 시설 사업권을 차지한 '삼성 베올리아 인천환경주식회사'에 취직해서 물 사유화 사업에 앞장설 수도 있다. 또는 삼성생명에 취직해서 삼성이 추진하고 있는 "정부 보험을 대체하는 포괄적 (민간 의료)보험", 즉 지금의 건강보험을 통째로 사적 의료보험으로 대체하려는 계획에 뛰어들 수도 있다.

또는 삼성캐피탈에 취직해서 부실 규모를 줄이기 위해 고객 도장을 몰래 만들어 불법 대환 대출을 할 수도 있다.(걱정 마시라. 금융감독원은 알고서도 처벌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니.)

혹은 운이 좋은 사람은, 분식 회계 장부가 법원에 넘어가면 서류를 빼돌린 다음 어두운 밤 해운대 백사장에서 불태워버리는 낭만을 즐길 수도 있고, 2005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 토탈(주)에 대한 가격 담합 조사를 했을 때처럼 공정위 조사관이 확보한 자료를 가로채 도망가면서 찢어버리는 액션을 즐겨볼 수도 있으며, 더 운이 좋아 압수수색과 같은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검찰이 주는 충분한 시간동안 내부자료와 파일을 파기하는 스릴을 맛보는 기회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너무 걱정 마시라. 저런 일들은 가벼운 과태료만 내면 끝날 테니.)

더 화끈한 일을 할 수도 있는데, 만일 사무직 노동자와는 다른 대우를 받는 생산직 노동자들이, 컨베이어 벨트의 조립라인 노동자나 반도체 노동자가 처해 있는 그런 열악한 환경과 고된 노동을 개선하려 노조라도 만들라치면, "너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끌어 묻을 수 있다"는 영화 같은 대사를 내뱉고 집단 폭행을 가하는 활극을 연출할 수도 있다. 이런 일로 삼성 이미지가 나빠질까봐 걱정이 되면, 지뢰 제거 활동 홍보처럼 '글로벌 사회 공헌' 광고를 제작할 수도 있다.

물론 뒤에서는 삼성이 F15-K 전투기를 수출하고 공격형 아파치 헬기를 만들고 있겠지만, 어차피 이미지는 이미지니까. 아쉽게 이런 일을 몸소 하지는 못하더라도, 옆에서 구경할 기회는 얻을 수도 있으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한국사회, 삼성을 묻는다>에 나오는 일들이다. 더 많은 일들을 알기 원하시는 분은 이 책을 보시기를.)

이런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하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두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삼성이 보여주는 기술의 눈부심이다. 영화 아바타에 세계가 열광한 것은 그것이 구현하고 있는 테크놀로지 때문이겠거니와, 삼성이 생산해내는 최첨단의 반도체와 LED TV, 휴대폰 등은 우리를 매혹시키고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잠시 시선을 거두어보자. 빛에 빼앗겨버린 시선을 조금만 돌려본다면, 그것이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더 크게 만드는 일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쓰는 애니콜, 컴퓨터나 노트북 센스에는 백혈병으로 숨져간 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눈물이 스며있고, 손 닦는 수건도 없는 화장실에 그나마 맘대로 가지도 못하고 두 시간에 10분씩 쉬는 시간 외에는 꼼짝 없이 컨베이어 벨트에 묶여 있어야 하는(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122쪽) 생산직 노동자의 한숨이 녹아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으로 삼성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유일무이한 권력이 지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청년들이여, 만일 새로운 시대가 요청하는 교양을 원한다면, 제품의 월등함 때문도 노동자들 임금 때문도 아닌, 임원들 보너스 때문에 비싼 애니콜이나 센스는 더 이상 아니라고 말하자. 한국 사회의 문제가 집약된 그 곳은, 정의를 위한 발걸음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이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우리를 옥죄어 노예로 만드는 권력에 저항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이 시대에 새롭게 노동자와 연대할 수 있는 창구이기도 하다.

얼마 전 한 친구가 삼성 센스 노트북을 샀다. 자본과 노동에 대한 거대담론을 자주 말하는 그는 이러한 불매와 같은 사소한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사소한 문제인가? 아니다. 여기 사회의 모순이 있다. 여기 눈물이 있다. 여기 피맺힌 울음이 있고, 여기 한숨과 아우성이 있다. 자, 그러니 이제 여기를 떠나라. 그것이 교양이다.

 



/지훈 학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 

 

 

 

 

 

 

1. 정치는 권력 행사가 아니다. 정치는 그 자체로, 즉 고유한 주체 때문에 현실화되며, 고유한 합리성에서 유래하는 특정한 행위 양식으로서 정의해야 한다. 정치적 주체를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정치적 관계이지, 그 역이 아니다.


- 정치는 권력 행사나 권력을 소유하기 위한 투쟁, 정당성의 토대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정치는 고유한 주체, 정치를 고유하게 정의하는 특정한 관계 속에, 참여/몫을 가짐avoir part에 있다. 순수 정치 혹은 정치철학의 회귀(아렌트, 레오 스트라우스)는 공공선,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를 주장하지만 이는 정치를 통치적 과두정으로 이끌 뿐이며 국가적인 것으로 단순히 환원시켜버린다. 정치를 특정한 체험세계로 생각한다면 정치의 고유함은 사라지며, 정치에 고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체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주체가 정의되는 모순적인 두 항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다.





2. 정치의 고유함은 대립되는 것들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주체의 실존이다. 정치는 역설적인 행위 유형이다.


- 정치는 평등한 자들에 대한 지배이며, 시민은 지배한다는 사실과 지배받는다는 사실에 참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식의 역설. 삶과 좋은 삶의 대립을 이어받는 행위의 두 양식(포이에시스-프락시스)이라는 고전적 대립으로는 이 역설을 극복할 수 없다. 아렌트에게 프락시스는 archein(시작하다 = 지배하다 = 자유롭다 = 도시국가에 살다)의 힘에 있어서 평등한 자들의 질서이다. 그러나 archein, 즉 앞장서서 걷는 자가 있으면 다른 자들은 반드시 뒤에서 걷기 마련이다. 아르케의 논리는 한정된 열등에 대해 행사되는 한정된 우월을 전제하는데, 정치의 주체 그리고 정치가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논리와 단절해야 한다.





3. 정치는 아르케 논리와의 특정한 단절이다. 그것은 사실 힘을 행사하는 자와 그것을 감수하는 자 사이의 ‘정상적인’ 위치 분배와 단절하는 것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이 위치들에 ‘고유하게’ 만드는 자질들에 대한 관념과 단절하는 것이다.


- 플라톤은 통치할 자격들과 통치받을 자격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다(법률 3권). 그가 고려하는 일곱가지 자격들 중 네 가지는 본성의 차이, 출생의 차이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권위의 자격들(부모, 연장자, 주인, 귀족)이다. 다섯 번 째 자격은 우월한 본성의 권력, 더 약한 자들에 대한 더 강한 자들의 권력이며, 여섯 번 째 자격은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아는 자들의 권력이다. 즉 본성상의 우위와 앎의 지배가 있다. 하지만 일곱 번 째 자격이 있는데 이는 신의 선택에 속하는 것으로, 누구에게 아르케의 행사가 돌아갈지 지정해주는 제비뽑기의 사용이다.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제비뽑기, 즉 통치할 자격의 부재다. 민주주의는 자격의 부재가 아르케를 행사할 자격을 부여하는 특정한 상황이다. 민주주의는 시작 없는 시작이며, 지배하지 않는 자의 지배이다.





4.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르케 논리와의 단절, 곧 아르케의 자질로 지배를 예견하는 것과 단절하는 것이며, 특정한 주체를 정의하는 관계 형태로서 정치 체제 자체이다.


- 민주주의의 공리를 구성하는 인민의 자유의 실질적 내용은 지배의 공리계(지배할 능력과 지배받을 능력의 상관관계)와 단절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어느 특수한 정체를 뜻하는 정치 체제가 아니라, 정치를 설립하는 것institution, 정치의 주체와 그것의 관계 형태를 설립하는 것이다. 데모스의 통치는 통치할 자격을 갖지 않았음을 유일한 공통의 특성으로 갖는 자들의 통치이다. 데모스는 셈 바깥에 있는 자, 말하지 않아야 하는데 말하는 자, 몫이 없는 것에 몫을 갖는 자이다.





5. 민주주의의 주체인, 따라서 정치의 모체가 되는 주체인 인민은 공동체 성원들의 모임도 노동하는 주민 계급도 아니다. 인민이란 주민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과 비교하여 보충이 되는 부분으로서 셈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셈을 공동체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 인민(데모스)은 인종과 다르고, 주민의 한 부분이나 부분들의 합계와 다르다. 인민은 정당한 지배 논리들을 중단시킴으로써 주민을 그 자체로부터 탈구시키는 보충이다. 인민이란 출생의 원칙을 이어가기 위해 부의 원칙을 부여하는 논리를 가로막은 고안물artifice이다(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인민은 셈해지지 않은 것을 셈하기 혹은 몫 없는 자들의 몫, 최종심급에서 말하는 자들의 평등을 기입하는 보충적인 존재이다. 민주주의는 공동체를 사회체의 부분들의 합에서 분리하는 텅 빈 보충적 부분을 공동체 전체와 동일시한다. 이 근본적 분리는 정치를 사회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과 비교하여 잉여로서 스스로를 기입하는 보충적 주체들의 행위로 정초한다. 정치 문제의 모든 핵심은 공백과 잉여를 해석하는 것에 달려 있다. 클로드 르포르의 민주주의론에 대한 두 가지 해석(공백은 아나키, 공백은 왕의 인간적이고 신적인 이중 신체를 해체함으로써 나오는 산물). 그러나 인민의 이중적 신체는 주권자의 신체를 희생시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치를 구성하는 것으로 원래 주어져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더불어 정치를 정초하는 아르케의 분할은 어떤 정초적 희생이 아니라 모든 희생적 신체의 중화이다.





6. 만일 정치가 사회적 부분들과 몫들의 분배와 함께 사라져가는 차이에 대한 설계도라면, 그로부터 정치의 실존은 조금도 필연적이지 않으며, 지배 형식들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잠정적인 우연적 사건으로서 도래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또한 마찬가지로 정치적 계쟁은 정치의 실존 자체를 그 본질적인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이 따라 나온다.


- 인민이 셈해지지 않은 것을 셈하는 특정한 형상이나 몫 없는 자들의 특정한 형상을 사회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보충으로 기입하는 주체일 때 정치는 존재한다. 이러한 몫이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바로 정치의 쟁점이며 정치적 계쟁의 대상이다. 부자들과 빈자들의 싸움은 단어들이 나눠질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싸움이며, 공동체를 다른 식으로 셈하는 범주들을 설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싸움이다. 공동체의 부분들을 셈하는 두 가지 방식. 첫 번째 것(치안)은 사회체를 구성하는 출생, 직무, 자리, 이해의 차이들로 정의되는 실제 부분들을 셈하며 모든 보충을 제외한다. 두 번째 것(정치)은 몫이 없는 자들의 몫을 더 셈한다.





7. 정치는 특정하게 치안과 대립한다. 치안은 공백과 보충의 부재를 원리로 하는 하나의 감각적인 나눔이다.


- 치안은 사회적인 것의 상징적 구성이다. 치안의 본질은 억압이 아니며 생명체에 대한 통제(예컨대 푸코)도 아니고,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다. 이는 지각 방식들을 규정함으로써 참여/몫을 가짐의 형식들을 규정한다. 치안의 본질은 공백과 보충의 부재로 특징지어진다. 없는 것에 대한 배제야말로 치안 원리이다. 정치의 본질은 공동체 전체와 동일시되는 몫 없는 자들의 몫을 보충하면서 이 타협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치안은 정치의 논리를 부정하지만, 정치의 본질은 가시적인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개입이며 치안으로부터 정치를 분리하는 것이다.





8. 정치의 중대한 작업은 그것의 고유한 공간을 짜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의 주체들의 세계 그리고 정치가 작동하는 세계를 보이게 만드는 데 있다. 정치의 본질은 두 세계가 하나의 유일한 세계 안에 현존하는 불일치를 현시하는 것이다.


- 공적 공간에 치안이 개입하는 것은 시위자들을 호명(알튀세르)하는 것이 아니라 해산시키는 것으로 이뤄진다. 치안은 도로를 그저 통행 공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이 통행 공간을 한 주체의 현시/시위 공간으로 변형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정치는 공간의 모양을 바꾸는 것, 거기서 할 것이 있고 볼 것이 있으며 명명할 것이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뤄진다. 정치는 공동체의 모든 nomos를 정초하는 나눔nemein 위에 설립되는 계쟁이다. 정치란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것,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었던 것을 말로서 듣게 만드는 것, 쾌나 고통의 표현으로 나타난 것을 공통의 선과 악에 대한 느낌으로 나타나게 만드는 데 있다. 정치의 본질은 불일치, 감각적인 것과 그 자체 사이의 틈을 현시하는 것이다. 정치적 현시는 보일 이유가 없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것, 한 세계를 다른 세계 안에 놓는 것이다. 정치적 불일치의 고유함은 대화 상대자들나 토론의 대상 또는 무대가 미리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기에 정치는 의사소통 행위 모델(예컨대 하버마스)과 동일시될 수 없다. 정치적 논증이란 분리된 세계들을 한데 모아놓는 역설적인 세계의 구성이다. 정치적 주체는 계쟁이라는 특수한 주체화 장치를 작동시키는 자이다. 정치적 현시는 늘 일시적이고 그 주체들은 늘 불안정하다. 정치적 차이는 언제나 소멸의 가장자리에 있다.





9. 정치철학의 고유함이라는 것이 고유한 존재 방식 속에서 정치행위를 정초하는 것인 한, 정치철학의 고유함은 정치를 구성하는 계쟁을 삭제하는 것이다. 정치 세계를 묘사하는 가운데 철학은 이 계쟁 삭제를 실행한다. 또한 그것의 실효성은 이 세계에 대한 철학적이지 않은 반철학적 묘사들 속에서까지 이어진다.


- 정치철학이라는 용어로 아르케 법의 비호 아래 정치를 재위치시키려는 철학의 노력이 은폐된다. 플라톤은 아르케-정치를 도시국가의 에토스와 노모스 사이의 단일성의 법칙으로 세우고 정치와 치안을 동일시한다. 그는 또한 정치 형태들에 대한 사회학적 혹은 정치학적 분석과 철학적 선험주의 사이의 대립형태들을 발명한다.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회-론(토크빌), 정치적 삶의 순수성에 대한 주장, 공화주의적 재정초의 선험주의(아마도 아렌트). 이러한 정치와 정치철학의 회귀는 정치를 망각하는 것으로 향한다.  





10. 정치의 종언과 정치의 회귀는 사회적인 것의 상태와 국가 장치의 상태 사이의 단순한 관계 속에서 정치를 제거하는 상호 보완적인 두 방식들이다. 합의는 이러한 제거를 가리키는 통속적인 이름이다.


- 정치의 본질은 사회가 사회 자체에 대해 갖는 차이를 현시하는 불일치하는 주체화 양식들에 있다. 합의는 정치를 치안으로 환원한다. 정치의 회귀와 정치의 종언은 같은 효과를 내는 대칭적인 두 해석들이다. 순수 정치로의 회귀는 사회적인 것이 정치의 계쟁 대상 자체라는 사실을 감추며 정치를 국가적 실천과 동일시한다. 정치의 종언에 대한 사회론적 테제(헤겔-후쿠야마 또는 하이데거-상황주의자 식의 비의적 판본) 역시 사회적인 것의 상태를 제시함으로써 정치의 존재 이유를 없앤다. 이 테제는 자본주의가 정치의 소권 소멸을 이끈다는 것으로 요약되는데 이 역시 정치를 국가적 실천과 동일시한다. 정치의 회귀를 주장하는 철학자와 정치의 종언을 주장하는 사회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정치를 취소하는 합의의 실천을 해석하기 위해 정치철학이라는 전제를 취해야만 하는 질서 위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 형상, 인식, 상기, 무한정자 등등에 대한 해설.   

박홍규 교수는 그러니까 선생님들의 선생님인 셈인데.. 요새는 

이런 강의가 없다는 게 아쉽다.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2권

철학이란 무엇인가? 1988. 12. 11

능력은 희랍어로 dynamis야. dynamis라는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인데, 가능성에는 될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두 가지가 있어. 가능성은 항상 존재에 대한 가능성이야. 그것은 동시에 그렇게 안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지. 그게 항상 따라다니는데, 그러한 부정의 가능성을 우리는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서 우연성이라고 해, 우연성. (79)


기독교에서 신은 전지전능이라고 하거든? 왜 그러냐 하면, 희랍의 신은 어떤 재료나 질료matter가 있어야 가공한다는 점에서 제약이 있는데, 기독교에서의 신은 허무에서 만들어내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지 않느냐는 거야. 그런데, 희랍 철학에서는 존재와 무 사이에는 가능성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 가능성에는 연속성이 들어가야 돼. 개연성probability에는 연속성이 들어가. 한순간에 탁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존재와 무 사이에는 한 순간에 탁 창조돼. 가능성은 죽 연속적으로 이뤄져. 그러다가 어디서 빗나갈 수도 있고, 이렇게 갈 수도 있고 저렇게 갈 수도 있어 (...) 지식은 요컨대 일정한 능력인데, 능력은 연속적으로 그 힘이 발휘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실현돼.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 (81)


우리의 인식 주관, 영혼에는 기본적이고 선험적a priori인 성격으로서 능력이 들어 있어. 능력이 들어 있으니까 영혼은 항상 선험적으로 과오에 빠질 수 있어. 따라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지능은 허위에 빠질 수도 있고 빠지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서 허위에 빠지지 않도록 끌고 나가야 돼. 능력을 발휘하도록 옆에서 도와줘야 돼. 능력은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이 있어야 발휘되니까. 그것이 대화야. 소크라테스가 산파 역할을 해서 이끌어줘. 도와주는 거야. 그럼 누가 인식을 하느냐? 소크라테스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화자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인식을 해. (...) 기계는 인과법칙으로 가지만, 능력은 자기운동autokinēsis의 그 자기auto에서 나왔기 때문에 기계가 될 수 없어. 타고난 본성에서 나온거야. 기계는 외부에서 힘이 주어진 것이야. (82~3)


물질에는 인식이 없다. 왜냐하면 물질의 운동은 자기 동일성identity을 가질 때에는 인과율의 법칙을 따라가니까. 요컨대 선택이 없어, 선택. 그래서 하나야. 힘이 외부에서 주어져. 영혼은 자기 내재적인 것이고. 물질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지만, 요컨대 신체sōma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신kath'hautēn, 즉 우리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을 방해하고 제한하더라는거야. (85)


후기 자연철학은 항상 끊어져 있어. 그런데 초기 자연철학은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물활론이라든지, 헤라클레이토스가 그 대표적인 것인데, 만물은 흐른다는 거야. 끊어져 있지 않아, 이게. 만물은 흐른다는 것은 정적인 공간이 나와 있지 않다는 거야. 지능 발달은 처음에는 정적인 공간이 나오지 않는 동적인 우주에서 정적인 우주로 간다는 거야. (89)


그러니까 자신kath'hautēn이라는 것은 인식의 주체자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우리의 상상력이든지 우리의 인식 속에 들어 있는 것이든지 뭐든지 간에,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는 얘기야. 완전히 독립했다. 그래야 그것이 자기 인식의 주체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 타자에 따라 다닌다면 인식의 주체자가 될 수 없어. 그것에 종속되니까. (92)


그러니까 사물 그 자체를 그것으로서 인식하는 능력은 이런 순수사고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이야. 가령 행동에서 관심이 들어간다는 것을 우리가 부정하는 것이 아니야. 그런데 그것에만 국한시키려는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답변해야 하냐면, 관심이 들어간다는 그 사실을 사실로서 자기 동일성을 주면서 인식할 수 있는 그 능력은 무엇이냐를 물어야 돼. (...) 요컨대 인간이 물리적 세계에 있을 적에는 관심도 나오고, 상호 주관성도 나오고, 모조리 다 나와. 상대성도 나오고 의미 부여도 나오고 (93)


요는 비물리적 세계에서 이뤄져야만 학문적입 합의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학문적인 합의가 아니라 단순히 사상에서의 합의야. 그런건 의견doxa이라 그래. 사회사상과 사회학은 달라. 사회사상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견해이고, 내가 거기에 따라가느냐 아니냐, 그것뿐이야, 검증이 필요없어. (95)


신체, 물리적 세계에서 벗어난 영역에서 주어진 형상eidos을 갖고, 인식 내용을 갖고 반성해야 돼. 그래야 내포implication를 가지고, 그것이 들어 있는 사물의 자기 동일성이 확정돼. (...) 감각적인 대상은 우리의 감각적인 오관에 대상Gegenstand으로서 나와야 돼. 그런 것만 인식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인식이 되지 않아. 운동 자체니 뭐 그런 것은 다 되질 않아. 그러나 물리적 세계를 벗어난 세계에선 모든 것에 자기 동일성이 주어진다면 - 이것이 대단히 중요해 - , 그것이 어떤 성질이든지 간에 인식의 대상이 된다, 그 말이야. (100)


요컨대 동일성에 입각한 정의를 내리면 뭐든지 인식 대상이 돼. 그러한 인식 대상은 어느 차원에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이 물리적 세계에서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야. 동일성을 부여하는 우리의 영혼 속에서... (103)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으뜸 되게 탁월하게 사물을 취급하는거니까, 가능한 한 하나라도 남겨놓지 않고 취급해야 탁월하지, 그렇지 않으면 탁월하다고 말 못하지. 그러니까 탁월함의 극한치는 그때그때 주어진 지식 내용의 전부를 총체적으로 연관지어서 그것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을 따져야 돼. 한 사물이 주어질 때 그것만 취급하면 안 돼. 모든 사물과의 총체적인 연관 하에서 취급해야 탁월해. 알아들었지? 철학의 의미는 그거야. (110)


철학이란 것은 탁월한 지식인데, 탁월하다는 것은 정도차가 있어. 그런데 어떤 것이 탁월한 지식이냐 하면 요컨대 그것이 연속적으로 우리의 실증 과학에 탁월하게 일치하는 것이어야만 돼. 그래야 탁월한 형이상학이 돼. 탁월하게 검증될 수 있는 것, 탁월하게 실증 과학과 합치해야만 탁월한 철학이 되지, 검증될 수 없는 것은 플라톤에 의하면 억견doxa이야. 허구적fictive인 것이야. (116)


이 세상에 완전한 철학은 없고, 어느 철학이든지 간에 문제가 있어. 베르그송 같은 철학은 생물과 무생물을 설명하는 데에는 참 좋은데, 그렇게 하면 공간의 자립성이 없어져. 실제 실증 과학하고 실질적으로 이론상 차이가 없어. 무생물만이 형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베르그송 이론이 옳아. 왜냐하면 그것은 정지해 있으니까, 운동하지 않으니까. 만약에 완전한 철학이 있다면 하나의 철학만 있을 것 아냐? 그러니까 우리가 정의definition할 때부터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 이것 자체가 문제거든. 그래서 그것을 가정hypothesis이라고 하는 거야. 완전한 정의가 나오면 사람들이 이 우주를 다 알게? 곤란하지? 그러니까, 플라톤 존재론의 기본적 성격은 전체pan를 찾으려는 것인데, 전체라는 것이 다 극한적인 일부분에서만 성립하더라는 거야. (117)




<플라톤과 허무주의 극복> 1989. 12

테아이테토스 편에서 하는 얘기가 인식은 인식한다고 해서 외부 대상에 대해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거야. 그러면서도 그 내용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그대로 있다가 다시 외부로 그 대상을 찾아가서 일치해. 그동안 하나도 안 변해. 변해 버리면 인식이라고 하지 않아. 변해버리면 재인이 되지 않으니까. (139~140)


감각하는 그 인식 기능의 속의, 속의, 속에는 순수pure하게 어떤 것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주체성이 있는데 그때 파악되는 것이 형상eidos이야, 사유물noēton이야. 거기서는 사물의 순수한 자기 동일성identity이 나와. 감각 세계 속에서는 그것이 운동과 더불어 나타나. 운동은 생성과 소멸을 가지고 와. (...) 형상이 존재적인 존재자라는 것은 무슨 얘기냐? 그것은 단순히 거기서 사물의 본질이 명료clear하게 드러났다는 얘기가 아니라, 형상은 그 자체로서 모든 생성과 소멸로부터 벗어났다는 얘기야. (142)


요컨대 형상 학설은 허무주의가 극복되지 않는 한, 우리의 인식 능력이 사실을 사실대로 그리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허무주의의 완전한 극복이 선행되어야만 우리의 인식이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한다describe는 것이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바로 형상에서 이루어지더라는 얘기야, 간단히 얘기하면. 알아들었나? 형상에 대한 기술, 인식은 언제든지 재인이 가능해.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건강한 한, 항상 재인이 가능해. (143)


모순은 언제 성립하느냐 하면 존재와 무가 부딪치는 그 한계선에서 성립해. 무엇인가를 구별하려면, 가령 이것은 존재고, 이것은 무라는 그 한계가 꼭 드러나야 해. 애매하면 무엇인지 몰라. 그런데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느냐? 한계를 잘라야하는데, 그 자르는 곳에는 연속성이 있더라, 연속성이 한계를 자르더라, 다시 말해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연속성이더라는 말이야. (...) 무한정자apeiron는 모순으로 빠지는 것을 방해하는 방파제야. 무한정자, 연속성이라는 것은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야. 항상 과정process으로서만 주어져. 한번에 주어지지 않아. 그러니까 연속성에는 항상 과정이 들어가. 과정이나 연속성이나 철학적으로 보면 똑같은 것의 양면이야. 그런데 과정은 그 자체 연속성의 원인으로서 한정되어definite 있지 않기 때문에 한정적인 것의 보충을 받아야 되는데, 그렇게 보충해주는 것이 형상과 제작자dēmiourgos야. 다시 말하면 무한정자 속에서 드러나는 한에 있어서만 존재가 드러나고 그럼으로써 모순은 극복된다는 말이야. 이것이 플라톤의 입장이야. 그러니까 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무한정자는 존재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지만, 동적인 측면에서 보면 모순을 극복하는 방파제야. 제삼자야. 밖에 있어. (...) 그러니까 존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한에 있어서만 파악이 된다는 말이야. 아무리 이론적으로 따져도 그것을 벗어날 수가 없어. 그러면 우리 학문이라는 것은 뭐냐. 간단히 말해 그것은 연속성의 법칙에 따라가는 것이야. (148)


우리의 지능이라는 것은 발달하면 할수록 분화되거든. 그래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 무엇이든 이렇게 딱딱 구분해서 정의를 내려. 그렇게 구분하고 정의 내리기 시작한 사람이 누구냐면 플라톤이야. 희랍에서는 기독교와 같은 종교가 없어. (151)


종교는 종교고, 학문은 학문이고 서로 달라. 존재가 무와 직접적인 관계에 있을 때는 신앙의 문제이고, 그것을 연속성의 관계로 나타내려고 할 때는 학문의 문제야. 연속성은 무엇이냐 하면 무한정자, 다시 말해 존재와 무에 대해 제삼자, 존재와 무 어느 것도 아닌 것이야. (...) 존재와 무의 관계 속에는 두 번이라든지, 세 번이라든지, 그런 것은 없어. 되풀이되는 것은 연속성에서만 있어. 부활을 교리로 따져보면 그것은 학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신학이나 교리라고 하는 것은 학문과 기독교의 한계선에서 성립해. (152~3)


고르기아스 같은 허무주의는 왜 나오는가를 좀 생각해봐.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존재론에서 나와.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oder에서. 이 세상에 나타난 허무주의 중에서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처럼 극한적인 허무주의는 없어 (...) 왜 그런 생사의 문제가 하나의 시대적인, 커다란 철학의 동인motivation이 되었느냐 하는거야. 왜 그럴까? 반드시 전쟁 중에는 허무주의가 나오게 마련이야. (...)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사고는 전쟁 때 나와. (154~5)


플라톤은 허무주의가 무한정자의 영향이라고 해. 그러나 그것은 정적인 차원에서 보니까 그렇지, 동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래도 무한정자가 허무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주는 방파제라는 거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허무로 돌아가지 않아. 실재는 객관적이고. (157)


중요한 것은 인식 기능은 하나의 활동인데, 수동성passivity이 빠져. 수동성이 빠지지 않으면 영향을 받고, 그때그때 변질해버려. 그러면 인식의 주체자가 될 수 없어. 변하지 않아야지. 그래야 순수한 활동이라고 해. 불사적athanaton이야. 그것을 자발성이라고 하지. 그것은 내용이 하나도 없어. (...) 그것에 의해서 파악이 되는 것이 형상eidos인데, 거기서는 생성과 소멸이 빠져나가. 빠져나가니까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잖아. 형상은 없어지지 않잖아. 항상 그대로 있어. 항상 존재existence해. 그러니까 형상은 허무주의의 극복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는 얘기야. 플라톤은 본성 속에physei 형상이 있다는 거야. 자체적인 것으로kath'hauto으로, 참된 존재ontōs on로. (158) 
 



<플라톤과 전쟁> 1990. 6. 17

종교문제를 플라톤은 어떻게 풀었느냐? 그게 파이돈 편이거든. 죽음의 문제가 나올 수 밖에 없어. (...) 그러면 플라톤의 죽음의 문제는 무엇이냐? 어떤 해결책이냐? 윤회설이야. (...) 그러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관계는 어떤 것이냐? 일자의 타자와의 관계야. 영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야. 있는 데서 없어졌다는 것은 플라톤 철학에서는 성립되지 않아. 기독교에서는 있는 데서 없어진다는 모순을 보장하기 위해서, 없는 것이 생긴다는 역기능에 의해서 그것을 보충하지만, 플라톤에서는 그러지 않는단 말이야. 죽는다, 없어진다는 것은 플라톤에서 성립이 되지 않아. 영혼이 없어진다는 것은 성립이 안 돼. 이 세상은 항상 타자의 세계야. 다만 분리되어서 영혼이 타자의 세계로 간다. 그것뿐이야. 일자에서 타자로 넘어간다, 타자에서 일자로 넘어온다, 생겨나는 것은 그것뿐이야. 영혼은 그전부터 있었고, 저쪽에 있는 생은 이쪽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야. 여기서 철학자처럼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오는 모든 신체적인 요소에서 쾌락이나 감각 같은 것에 매달리지 않고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기서 영혼 자체가 완전히 분리될 수 있고, 자체적인 것kath'hauto이 되어서 저쪽에 있는 존재자의 세계의 진상을 자체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 존재와 무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란 것이 무엇이냐? 아무리 잘한 사람이나 못한 사람이나 죽으면 모두 허무로 돌아간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며, 부정은 모든 것에 대해서 똑같아. 다 없어지고 죽어버리면 그만이야. 죽음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똑같아. 플라톤은 다 같지 않아.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져. (187~9)


객관적인 것이 무너질 때는 어떻게 되느냐, 윤리적 허무주의가 나와. nomos는 우리 인간의 능력, 힘을 조절해 주는 기능을 해. 그것이 없어지면 조절받지 않은 힘이 나와. 최후에 가서는 힘 자체가 나와. 그래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these이 나와. 힘이 나와. 또 인식론적 허무주의가 나와. (192)


상기설뿐만 아니라, 테아이테토스 편에서는 자기는 대화에서 상대방에게 산파술만 행한다는 거야. 그게 무슨 얘기냐? 평화 시대에는 객관적인 규칙 이있어서 정보를 전달하면 돼. 그러나 여기서는 내 주관적인 견해거든. 그러니까 진리의 인식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의 바탕에서는 성립할 수 없고, 신체 - 사회에 들어가려면 신체, 일종의 연장성이 필요해 -에서 벗어난 영혼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거야. (1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해도 어김없이 환절기 감기가 ㅠ 어서 육신을 벗고 혼을 순수하게 하는 활동을.. 

 

파이돈  

recollection argument(72e~77d)





 

 

 

 

 

 

 

1. 상기 논증의 도입(72e~73a)


 베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주 말해왔던 배움(learning/Lernen/instruction)이란 상기함(recollection/Wiedererinnerung/ressouvenir)이라는 주장을 환기시킨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상기하게 되는 것들을 이전에 어느 때인가 우리가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는 만일 우리의 혼이 지금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태어나기 이전에 어딘가에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혼은 죽지 않는 어떤 것이다. 케베스가 설명하길 사람들이 질문을 받을 때, 만약 누군가가 훌륭하게 질문을 할 경우, 모든 것을 진실 그대로 스스로 말한다. 그러나 이는, 이 사람들에게 앎(knowledge/Erkenntnis/science)과 바른 추론 능력(correct account/richtige Einsicht/jugement droit)이 이들 안에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상기의 과정은, 누군가가 그들을 도형이나 그런 유의 다른 어떤 것으로 인도할 때 명확하게 증명된다.1)





2. 소크라테스의 상기 논증 개시(73c1~74a8)


 케베스의 설명을 듣고 난 뒤에도, 시미아스는 배움이 왜 상기인지 의아스러워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논증을 시작한다.


2-1. 상기의 일반적 조건 제시(73c1~74a7)


명제 : 만일 y에 의해 x를 상기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우리는 x를 사전에 알고 있어야만 한다(73c1~c3). 2) 우리는 감각적 지각(sense-perception/wahrnehmen/sensation)을 통해 y를 알아볼(recognize/erkennt/connaître) 뿐만 아니라 또한 x에 대해 생각하게(think of/vorstellt/a l'idée de) 된다(73c6~c8).2)3) x는 y와 같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앎의 대상이다(73c8~c9). 4) x가 y를 닮았을 때, 우리는 x에 대해 y가 부족하지 않은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 필연적이다(74a5~a7).


2-2. 상기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예시(73d~73e) : 1) 리라를 보고 리라의 임자인 소년의 모습(form/Bild/image)을 떠올리는 경우 2) 누군가가 시미아스를 보고 케베스를 상기하는 경우  3) 그린 말들이나 그린 리라를 본 이가 어떤 사람을 상기하는 경우 4) 그린 시미아스를 본 이가 케베스를 상기할 경우 5) 그린 시미아스를 본 이가 시미아스 자신을 상기하게 될 경우


 


☞ 요컨대, 상기란 감각적 지각을 통해 알게 되는 개별자를 혼이 이전에 인식하고 기억하는 보편자인 형상에 비추어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2-1에서 4)의 조건, 즉 닮음에 의해 상기를 할 때, 상기함의 실마리가 된 것이 그 유사성에 있어서 어떤 점에서 부족한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과연 필연적인가? 가령 사람들이 그림을 부족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이미지인 탓으로 그림의 원본이 되는 것이 갖는 특성들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어떤 초상화를 보고서 그것이 어떤 인물보다 부족하다고 늘 말하는가? 그것은 매번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판단이 아니라 실제로는 당연시되고 무시되는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 2-2의 사례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기되는 것이 같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앎의 대상이라고 하는 문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이다. 가령 리라에 대한 앎과 사람에 대한 앎이 다르다는 것은 리라의 개념과 사람의 개념이 다르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때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시미아스와 케베스의 경우는 동일한 방식으로 간주될 수 없다. 케베스나 시미아스나 수적으로 구분되는 것이지 인간이라는 종적 개념에 의해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라를 보고 그 주인을 상기하는 경우 양자는 원본과 복사본을 따질 필요가 없이 동등한 존재의 질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을 보고 그림에 그려진 원래의 대상을 상기하는 경우는 양자가 원본과 복사본의 관계인 경우이다. 따라서 위에서 제시된 사례들 중 형상과 감각적 개별자의 구분에 가장 적합한 것은 시미아스와 그림 시미아스의 경우일 것이다. 위 논변의 요점은 우리가 그림 시미아스를 시미아스와 연관시키는 것은, 시미아스에 대한 선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제시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상기함은 닮은 것들로 또는 닮지 않은 것들로 해서도 성립하는 것이지만(74a2~a3), 닮은 것으로부터의 상기와 닮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상기는 대칭적이지 않다. 그림을 보고 시미아스를 떠올리는 사람은 그림이 시미아스를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러나 리라를 보고 그 주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리라와 그 주인이 닮지 않아서 상기하는 것이 아니다(Gallop, 118).


 


3. 같음 자체의 도입과 본격적인 상기 논증


 3-1. 우리는 같음 자체가 무엇인지 안다(74a9~d3).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1) 우리는 같은 무엇인가, 같음 자체(the equal itself/das Gleiche selbst/l'Égal en soi-même)가 있다고 본다(74a9~b1). (2)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도(what it is/was es ist/que c'est quelque chose) 알고 있다(74b2~3). (3) 우리는 주위에 있는 같은 사물들, 예컨대 나무토막이나 돌들 같은 사물을 보고서 이것들과는 다른 같음 자체를 생각하게 된다(74b4~b6). (4) 같은 나무토막들이나 돌들은 똑같은 것들이면서도, 때로 어떤 이에게는 같아 보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같아 보이지 않는다. 같은 것들 자체(the equal themselves/die gleichen Dinge selbst/L'Égal en soi)는 때로는 같지 않은 것들로 보이는 것이 아니며 또는 같음(equality/Gleichheit/lÉgalité)이 같지 않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같음 자체와 같은 것들은 다르다(74b7~c6). (5) 이들 같은 것들은 같음 자체와는 다른 것들인데도, 어쨌든 이것들로 해서 같음 자체를 생각할 수 있게 되고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얻는다(74c6~c10). 같음 자체는 같은 것들을 닮은 것이건 아니건 간에 상관없다. (6) 어떤 것을 보고서, 이 봄으로 인해 다른 것에 생각이 미치게 되는 한, 그것이 닮은 것이건 닮지 않은 것이건 간에, 이게 상기함이라는 것은 필연적이다(74c13~d3).





☞ 소크라테스는 같음 자체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같음 자체에 대한 어떤 인식을 지닌 상태에서 그것을 준거로 대상들의 같음을 판단한다고 본다. 이때 같은 사물들과 같음, 같음 자체가 구별된다. 같음 자체는 기준이고 같은 것들은 이 기준을 통해 평가된다. 그런데 같음은 두 개 이상의 대상들에 대해서 쓰는 술어, 관계 개념이다. 그렇다면 같음 자체는 무엇과 같은 것인가? 역설적으로 같음 자체는 결국 감각적 사례들 어떤 것과도 같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같음의 형상은 비관계적인 속성(non-relational attribute)으로 간주되기 때문에(Gallop, 128), ‘같음 자체는 항상 같다’는 문장은 자기-지시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3)같지 않음 자체(Inequality itself), 부정의 자체, 나쁨 자체라는 형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이러한 형상이 범형(paradigm)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거부된다(Gallop, 125).


 『파이돈』에서 처음으로 형상 이론이 도입되는 위 대목과 이후의 논변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같음 자체를 단순히 같음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인 같음과는 구별되는 객관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같음의 개념은 인식 능력의 일부라기보다는 인식 능력과 별개로 어디엔가, 예컨대 저승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래야만 혼이 생시 이전에 이 앎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음은 우리의 개념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며 오히려 같음 덕분에 우리가 개념적인 사유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형상들은 개별자들과 전혀 다른 질서에 속하는 초월적인 것이고, 좋음 자체와 같은 형상은 추상으로부터 나온 단순한 논리적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객관적 실재이다(Bluck, 175).


 명제 (3), (4)로부터 (5)가 추론되는데, 이에 따르면 상기는 일종의 매개적 인식이다. 그러나 (6)의 주장처럼 x를 보고 y를 떠올리는 것이 상기가 되기 위해서는, y가 x를 봄과 동시에 상상된 어떤 것이나 인식 능력에 의해 고안된 허구가 아니라는 조건이 추가되어야 한다(Gallop, 126). y에 대한 생각이 상기이기 위해서는 y가 기억 속에 있다가 망각된 것이어야 하며(그러나 이것은 증명되어야 하는 사실이다), 비록 소크라테스는 양자가 닮거나 닮지 않거나 상관없다고 하지만, y와 상기의 실마리가 된 x 사이에 단순히 자의적인 연상 작용을 넘어선 긴밀한 관계(예컨대 닮음)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4)   





 3-2. 우리는 형상에 대해서 개별자들이 갖는 부족함을 안다(74d4~75a4).


  (7) 같은 것들(나무, 돌)은 같음과 같은 그런 것이 되기에는 못 미치는 것이다(74d4~d8). (8) 주위의 같은 사물을 보면서 이들이 같음 자체에 미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것이 닮기는 했으나 훨씬 모자란다고 그가 대비하여 말하고 있는 그 대상을 먼저 알고 있었을 것임이 필연적이다(74d5~e5). (9) 우리는 실제로 주변의 같은 것들을 보면서 같음 자체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74e6~e8). (10) 우리는 같은 것들이 같음과 같은 것이 되려고 하지만 훨씬 모자란다고 생각을 하기 이전에 같음(the equal/das Gleiche/l'Égal)을 먼저 알고 있는 것이 필연적이다(74e9~75a4).





☞ 우선 (7)에서 같음 자체에 비해 같은 것들이 못 미친다는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a) 어느 사람에게는 같게 보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b) 어느 때에는 같아 보이나 다른 때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으며 c) 어떤 것과는 같으나 다른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로 보더라도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같음은 완전한 형상으로서 같음 자체에는 못 미친다는 뜻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리는 판단의 배후에 형상이 있음을 환기시킨다. 즉 같음, 정의, 아름다움 등의 개념을 감각적 지각 자체에는 찾을 수 없지만, 우리는 일상적으로 어떤 사태에 대해 서술할 때 그러한 형상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으며, 이를 잣대로 사용한다. 상기 논변의 주안점은 사물에 대한 경험적 인식을 위해서는 그에 앞서 반드시 일정한 보편적 앎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기의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은 나중에 다시 문제로 등장하는데, 적어도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상기는 철학자뿐만 아니라 일상인 모두가 공통적으로 겪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8)은 이후의 논증을 위한 중요한 전제로 도입되는데, 과연 이것이 필연적인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우선 감각적 지각의 사물들이 갖는 속성이나 관계의 성격이 지닌 불완전성이 인지되기 위해서는 꼭 같음 자체라는 형상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제 판단이 언제나 완전함의 형상을 구비한 후에 이루어지는가? 반드시 비감각적인 형상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서로 다른 여러 시점이나 관찰자에 따라 달라지는 경험들을 비교함으로써 특정한 같음이 불완전하다고 판단하는 것(Gallop, 127)은 불가능할까? 또한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이 판단에 있어서 필요함을 인정한다고 해도, 어떤 사물의 같음이 불완전하다는 판단 ‘이전부터’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즉 어떤 방식으로든 그 판단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만으로도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3-3. 만약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즉 우리의 감각을 하기 이전에 형상을 이미 알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개별자들을 형상들과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75a4~75c6).


  (11) 우리가 같음 자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거나 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사물을 보거나 느끼거나 다른 감각적 지각으로 인해서이다(75a5~a10). (12) 모든 감각 대상이 같음 자체에 이르고자 하지만 그것보다 모자라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감각함(sense-perception/Wahrnehmung/sensation)으로 인해서이다(75a10~b3). (1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감각적 지각을 통해 접한 같은 것들을 같음 자체와 관련지을(refer/beziehen/rapporter) 수 있으려면, 감각적 지각을 할 수 있기 이전에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75b4~b9). (14) 우리는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as soon as we were born/gleich von unserer Geburt/dès notre naissance), 즉 태어난 뒤에 감각적 지각을 하게 된다(75b10~b12). (15) 그러므로 우리가 같음에 대한 앎을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갖고 있었음이 필연적이다(75c1~c6).





☞ 실제로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어떠한 두 사물도 같음은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같음의 기준이나 개념,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감각적 지각은 같음 자체를 생각하도록 하는 실마리를 마련해준다.5)이때 (13)은 상기 논증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텐데, “감각적 지각 이전”의 시점을 언제로 잡느냐가 논쟁거리이다. 감각 이전의 시점은 혼이 감각 지각 활동을 하기 이전일 수도 있고, 더 이전에 혼이 육체와 결합하기 이전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같음의 개념은 선험적인 것이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 초월적인 것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난 후와 감각활동 이전의 짧은 순간에 같음의 개념을 얻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까? 만약 이렇게 본다면, 같음의 형상은 생시 이전에 존재함으로서 상기되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인식의 선험적 형식으로서 범주 개념 같은 것이 될 것이다.  





3-4.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형상들에 대한 앎을 망각하며 상기에 의해 형상에 대한 앎을 재획득한다(75c7~76d6).


 (16) 만일 우리가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망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것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75c7~e1). 즉 만약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 앎을 갖게 되어 이를 가진 채로 태어났다면, 같음이나 더 큼과 더 작음뿐만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 등  ‘~인 것’이라는 표시를 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그 앎들을 갖게 되고서는 그때마다 잊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알고 있는 상태로 태어나 일생을 통해 늘 알고 있을 것이 필연적이다.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앎을 갖게 되고서는 이를 잃지 않고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앎의 잃어버림은 망각이다. (17) 만일 우리가 같음에 대한 앎을 망각했다면, 같음을 인식하기 위해 상기가 필요하다(75e2~e8). 이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갖게 되었다가 태어나면서 잃어버렸지만, 나중에 이것들과 관련하여 감각적 지각들을 이용함으로써 언젠가 우리가 갖고 있던 그 앎들을 도로 갖게 된다면, 우리가 배우는 것이라 일컫는 것은 자신의 것인 앎을 되찾아 갖는 것(regaining/Wiederaufnehmen/ressaisir), 즉 상기이다. (18) 따라서 우리 인간 모두가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지니고 태어나 일생을 통해 알고 있거나, 또는 우리가 상기에 의해서 그 앎을 획득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76a1~a8). (19) 모든 사람이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76b1~c2).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give an account/Rechenschaft geben/rendre compte). 그러나 모두가 같음 자체 등등을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0) 이때 우리의 혼이 형상에 대한 앎을 획득하는 시점은 인간으로 태어나고 난 뒤는 아니다(76c6~c7). 혼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있기에 앞서, 몸들과 떨어져 그 이전에 있었으며 지혜(wisdom/Einsicht/pensée)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21) 소크라테스는 그 앎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므로, 그 앎을 갖게 되는 순간에 잃어버린다고 한다(76d1~d4). (22) 결론 : 우리는 같음 자체를 상기한다(76c3~c4).





☞ (16)에서 같음의 형상과 더불어 언급되는 더 큼(the larger)과 더 작음(the smaller)이라는 형상(75c10)은 문제적이다. ‘더’라는 비교급은 크기의 형상 규정을 느슨하게 만드는데(Hackforth, 71), 더군다나 우리는 같음 자체와 같은 것들을 비교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정확히 큰 것’과 큰 것들을 비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16)의 주장에서, 같음 개념에 대한 인식은 무의식 상태에서 잠재되어 있는 경우와 어떤 계기로 인해 그것을 사용하는 경우로 더 분석될 수 있을 것 같다6).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떤 앎을 잃지 않고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이는 알고 있다는 것의 규정이라기보다는 다만 망각하지 않음이라는 소극적 규정으로 보인다. 상기되는 앎과 망각된 앎이라는 양자택일 밖에 없다면, 무지(ignorance)의 상태를 제대로 규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Burger, 79). 즉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완전히 망각해서 상기해야만 경우와 그것이 사용되지는 않더라도 잠재적으로 그 앎을 지니고 있는 경우를 구분할 수 있다. 만약 망각이 아니라 추론으로 극복되어야 할 무지라면, 생시 이전의 앎에 대한 상기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라면 우리가 형상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모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앎을 망각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지니고 있을 것이고(16), 앎을 망각했다면 상기가 필요하다(17)고 주장하면서 배중률(Law of Excluded Middle)을 적용한다(Gallop, 132). 그런데 시미아스는 태어남과 동시에(at the very moment of birth/bei der Geburt/à l'heure de la naissance) 형상에 대한 앎을 갖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한다(76c14~c15). 소크라테스는 과연 태어날 때가 아니라면 언제 형상에 대한 앎을 ‘잃어버리게’ 되느냐고 반문하면서, 이 가능성을 물리친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를 일컬어 그가 태어날 때 시각을 잃어버렸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애초에 시각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잃는다는 표현은 무의미하며, 마찬가지로 나중에 그가 시각을 갖게 되더라도, 시각을 다시 얻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소크라테스가 잃어버린다는 표현을 쓴 것은 우리가 그 앎을 잃어버리기 전에 미리 알고 있으며, 혼이 생시 이전에 존재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미아스가 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가정이다(Gallop, 134).  


 위 대목에서 또한 문제가 될 만한 것은 (19)의 ‘모든 사람이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갖고 있지는 않다’라는 입장이 (2)에서 ‘우리는 같음 자체를 알고 있다’는 언명과 상충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모든 사람’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같음이라는 개념을 일상적으로 쓸 줄 안다는 말인지 아니면 같음의 철학적 정의를 제시할 수 있다는 말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우선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의를 내릴 수 있고, 근거를 대고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소박한 앎이 아닌 철학적 앎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위의 비일관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로 제시될 수 있다. 먼저 (2)에서 모두가 알고 있는 같음을 수학적인 것으로 보고, (19)에서 모두가 알지는 못하는 형상을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해서 양자의 비일관성을 해소하는 방법이 있다(Hackforth, 76). 그러나 위의 언급 속에서 과연 소크라테스가 수학적인 형상과 도덕적인 형상을 명시적으로 구별하고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다음으로 (2)에서 ‘우리’를 철학자로 보고, (19)에서의 ‘우리’를 일반 그리스인들로 보면 위 명제들을 조화시킬 수 있겠지만(Gallop, 120) 이 제안 역시 문제가 있다. (2)의 논의는 상기 논증의 범위를 처음부터 철학자의 영혼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제한시키게 되지만, 이어지는 표현에 따르면 상기는 형상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도 역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76c4). 이렇게 되면 애초에 전제로 도입하는 명제가 이미 도출하려는 결론을 선취하는 모양이 되고 마는 것 같다. 아마 이러한 상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2)에서의 모두가 아는 형상을 직관적인 형상 인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19)에서 모두가 알지는 못하는 형상을 추론적이고 논증적인 형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바로 그 대목에서 시미아스는 내일이 되어 소크라테스가 죽고 나면 적절한 설명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걱정하고 있다(76b).  


4. 논증의 요약 및 결론(76d6~77d5)


 4-1. 논증의 요약과 형상과 혼의 관계 :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 이와 같은 모든 존재(Being/Wesen/réalité)가 있고, 즉 형상이 이미 있으며, 마찬가지로 우리의 혼 또한 있으며 그것도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을 것이 필연적이다. 형상들도 있고 혼 또한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있는 것이, 그리고 형상들이 있지 않으면 우리의 혼들 또한 있지 않다는 것이 필연적이다(76d5~e8). 형상과 혼 사이에는 놀랍도록 똑같은 필연성이 있고, 결국 논의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혼과 존재도 마찬가지로 있는 것으로 귀착한다. 아름다움과 좋음 등의 것들은 모두 최대한의 의미에서(in the fullest possible way/in dem allerhöchsten Sinne/a la plus haute réalité possible) 있다(77a1~a5).





☞ 소크라테스는 형상들의 존재와 혼의 태어나기 전에 있었음이 똑같이 필연적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는 형상들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 상기 논변은 혼의 불멸성을 전제해야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즉 만약 혼이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피안의 초감각적인 형상을 정립하는 것은 그것이 결코 알려질 수 없기 까닭에 불합리한 것이며, 또 만약 형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혼이 태어나기 이전에 혼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Bluck, 64). 그러나 혼과 형상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혼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명의 근원으로서 육신을 살아있게 하는 기능과 형상을 인식하는 기능을 동시에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4-2. circular argument와 recollection argument의 결합 : 시미아스와 케베스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우리의 혼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납득하겠지만, 죽은 뒤에도 혼이 여전히 있을 것인지는 아직 증명된 것이 아니라고 답한다(77a8~b2). 즉 혼이 사후에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 추가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77c1~c5). 이에 소크라테스는 윤회 논증과 상기 논증을 합친다면 이미 혼의 불멸성은 증명되었다고 대답한다. 즉 만약에 혼이 태어나기 전에도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삶 속으로 들어와 태어나는 것이 죽음과 죽어있는 상태 외의 다른 어떤 것에서도 태어나는 것이 아님이 필연적이라면, 혼은 어쨌든 다시 태어나야만 하기 때에 죽은 뒤에도 혼이 있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77d1~d4).  


  


☞ 앞에서 언급된 것에 따르면, 순환 논변이 육화되지 않은 혼의 존재 여부만을 다룬다면, 상기 논변은 혼이 갖고 있는 힘과 지혜(70b3~4)를 다룬다는 점에서 구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미아스와 케베스의 요구는 단지 사후에도 혼이 존재할 수 있는지 증명해달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다시 풀어 말하면, 모든 산 것은 죽은 것으로부터 왔음을 주장하는 순환 논변이 “태어남 이전의 시간은 죽음 이후의 시간(the time before birth is the time after death)”임을 보장하기 때문에(Hackforth, 80), 태어나기 이전에 혼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상기 논변과 순환 논변이 결합되면 혼의 사후 존재도 증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Hackforth의 말은 다소 궤변처럼 들린다. 순환 논변은 죽음->삶->죽음의 순환을 보여주고, 상기 논변은 생시 이전에 형상을 인식하는 혼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양자의 결합에서 혼의 사후 불멸이 증명되려면 우선 두 논변의 가설이 옳아야 한다. 특히 상기 논변에서 문제되는 혼은 혼 일체가 아니라 어떤 형상에 대한 앎을 간직하는 개별적인 혼이기 때문에, 특정한 혼이 육신에서 떨어진 뒤에도 계속해서 어떤 앎을 간직한 채로 살아남으리라는 주장이 증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Gallop, 136).  


참고문헌


플라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박종현 역주, 서광사, 2003.   Plato, Phaedo, translated with notes by David Gallop, Oxford : Clarendon Press, 1988.  


Plato, Plato's Phaedo, a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notes and appendices by R. S. Bluck, London : Routledge, 2001.


Plato, Plato's Phaedo, translation with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by R. Hackforth, London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2.


Platon, Phaidon(Werke in acht Bänden : Bd. 3.), hrsg. von Gunther Eigler, Darmstad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90.


Platon, Phédon(Oeuvres complètes : Tome Ⅳ-première partie.), texte établi et traduit par Paul Vicaire, Paris : Société d'édition "Les Belles Lettres", 1983.  


Ronna Burger, The Phaedo : a Platonic labyrinth, New Haven : Yale Univ. Press, 1984.







1) 이는 특히 Meno에서의 상기에 관한 논의(81c~86c)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Phaedo에서 상기는 Meno에서처럼 기하학적 명제의 증명을 다루지 않으며, 감성적 인식의 획득을 논의한다는 차이를 가진다(Gallop, 115). 우리의 배움이란 상기라는 주장은 일견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배움이란 사실에 대한 경험적 인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 개념과 관련된 것이다(Gallop, 113).


2) 이 대목에서 감각적 지각을 통해서 알아본다recognize는 표현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어떤 것을 안다는 의미로 쓰였다. 반면 안다는 것know은 엄밀한 의미에서 형상들에 대한 앎을 가리킬 때로 구별된다.


3) 플라톤이 형상을 가리킬 때 쓰는 어법은 당시 희랍어에서 질(quality)과 실체(substance)가 명확하게 분화하지 않은 탓으로, 우리가 흔히 속성으로 간주하는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사물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같음이라는 말은 오늘날 논리적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간주되지만, 플라톤의 형상은 그 자체로 실재성을 지니는 것이다. 형상이 갖는 보편자로서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같음 자체라는 형상은 일종의 추상화(abstraction)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플라톤의 요점은 형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Bluck(63~4) 참조.  


4) 그러나 상기가, 특히 메논에서 그랬던 것처럼, 추론과 논증을 통한 인식에 관한 이론인지, 직관적인 형상 인식에 대한 이론인지는 상기 논변 전체를 두고 평가해보아야 할 점으로 남는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상기 논변 내내 반복하는 ‘같음’이라는 형상에 대한 언급은 인식의 기초적인 모델로 수학을 암묵적으로 또 명시적으로 참조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5) 형상에 대한 앎이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온다는 말도 따져볼 만하다. 그는 여러 차례 감각이 주는 부정확성에 대해 비판하지만, 이러한 감각적 지각이 없다면, 상기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감각에 의거한 탐구는 나중에 형상에 대한 추구에서 방해물이 될 뿐인 것으로 로고스에 의거한 탐구와 구별된다(99d4~e6). 한편 칸트의 다음과 같은 말은 감각적 지각과 선험적 인식의 관계에서 플라톤의 상기설을 연상시킨다.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시간상으로는 우리에게 어떠한 인식도 경험에 선행하는 것은 없고, 경험과 함께 모든 인식은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식 모두가 바로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I. Kant, 『순수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pp. 214~5(B1).


6) 다른 맥락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앎의 소유와 사용을 구분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Aristoteles, 『니코마코스 윤리학』, 강상진 외 옮김, 이제이북스, 2006, p. 241(1146b31 이하).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ice 2011-11-2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렵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