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인식하는 <성숙의 시기jam maturis annis>(󰡔철학원리󰡕 1부 72항)는 정신이 과거로부터 꾸준히 탈출하는 성장의 시대 뒤에 온다. 그러나 성장은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자신에 걸맞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계도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이 계도와 훈련은 방법의 규칙들을 따라야 한다. 방법론은 성장하고 있는 정신이 따라야 하는 진리 인식의 길이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방법론은 정신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반성과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데카르트는 보편수리학을 제안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깨달아서at ego, tenuitas meae conscius 진리의 탐구에서 꾸준히 어떤 순서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 순서를 따를 때, 정신은 <항상 제일 단순하고 제일 쉬운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AT Ⅹ, 378-9).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사물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사유의 순서를 따랐다. 그리고 이 사유의 순서는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a facilioribus ad difficiliora>라는 간단한 말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는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탐구가 방법론적 격률을 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라는 이 격률은 위의 인용문이 말하고 있듯이 정신의 취약성에 대한 반성에서 연유한다.

인간이 <신적인 구석>을 가지고 있는 한에서 학문은 진리의 자연스러운 가지틀기이고 열매맺음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인 한에서, 또는 원죄의 무게를 아직 감당하고 있는 한에서, 학문은 인간 나름의 순서에 따라, 정신의 방법적 수고에 의하여 하나하나 그려가야 할 점묘화이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번의 붓질로 그림을 완성할 수 없다.” 김상환, 「스으라의 점묘화: 김수영 시에서 데카르트의 백색 존재론으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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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바르, 「국민형태: 그 역사와 이데올로기」, 󰡔이론󰡕 1993년 가을호에 수록.

 

제1부 용어법

국가는 국민으로 되는 경향이 있지만, 국민은 항상 국가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 국가 없는 국민이나 국가 이전의 국민이라는 생각은 용어 모순이다. 국민국가들의 통합성은 이를 위협하는 내적 갈등(지역갈등과 계급갈등)에 의해 위협을 받지만, 국민국가는 일단 정치적으로 실존하게 되면 국민국가 이전에 민족적(ethnique) 또는 인민적 통일성이 존재했다고 투사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기술의 역설-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부르주아적 역사기술을 재생산하며 기능주의적 논지와 역사주의적 논지 사이에서 진동. 국민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은 전부(현실적 심층) 아니면 전무(이데올로기나 환상)라는 논리적 궁지에 이른다. 마르크스주의는 국민국가의 종언을 국가 일반의 종언과 동일시.

 

사회구성체, 국민형태, 국가체계

출발점으로서 세 가지 개념.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체 개념은 정치적 제도들의 본성을 무시하고 이에 상부구조라는 파생적 지위를 부여하지만, 오히려 우리는 사회구성체를 그 통일성이 의심스런 채로 있는 한 구성물, 적대적인 계급들의 형세로 이해해야 한다. 사회구성체의 실존이 제기하는 문제는 그것의 기원이나 종말만의 문제가 아니라 재생산의 문제, 그것들의 갈등적 통일성의 유지 문제이다. 곧 프랑스, 독일 등의 이름은 정치적인 것으로 국가나 국민적 동일성을 물신화시켜서는 안 된다. 우선 모든 사회구성체가 국민적이지는 않으며, 역사적으로 수많은 정치형태들이 존재했다. 국민국가의 불균등한 발전, 국민형성을 둘러싼 모든 저항과 갈등에도 유의해야 한다. 두 번째 개념은 국민형태로서 이는 갑자기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등장한 것도 아니고 무한히 가소적인 것도 아니다. 세 번째 개념은 갈등적 균형의 불안정한 관계망으로, 국민국가들의 역사는 그 경계들의 불안정성과 부단한 재규정이라는 일반적 형태를 지닌다.

 

제2부: 역사

국민의 형성은 몇 세기에 걸친 역사로 나타나는데, 국민적 동일성에 대한 회고적 환상은 이중적인 것(투사와 운명)이다. 그러나 이를 비판하는 것이 국민의 기원이라는 신화의 힘을 은폐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부단히 모순적인 영유의 대상이 되는 프랑스 혁명을 보라. 국민의 기원이라는 신화는 효력을 갖는 이데올로기적 형태, 국민구성체의 상상적인 단일성이 일상적으로 구성되는 이데올로기적 형태이다.

 

前국민국가에서 국민국가로

국민형성의 기원은 국가어의 제도(군주권력의 자율화와 신성화)나 절대군주제의 전진적 형성(통화독점, 행정적 재정적 집중화),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등 경계와 영토 제도의 혁명화 등 다수의 제도들을 갖는다. 국민형성은 오랜 전사의 결과이지만, 이는 단선적이지 않다. 이는 장기에 걸친 상이한 여러 사건들로 구성되고, 특정한 한 국민의 역사에 속하지 않으며, 제국과 같은 다른 경쟁적 형태에 속한다. 어떤 사건을 국민형태의 전사 속에 자리잡게 한 것은 하나의 필연적인 진화의 선이 아니라 일련의 정세적 관계들이다. 다시 말해 전혀 다른 목표를 갖는 비국민적 국가장치들이 점진적으로 국민국가의 요소를 생산했다.

한편 모든 인간사회에 전진적으로 확산된 국민형태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조응한다는 테제는 두 가지 정정을 필요로 한다. 1) 우선 자본주의 생산관계들로부터 국민형태를 연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자본주의 세계시장은 모든 국민적 제한을 넘어서는 내적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국민의 형성을 여전히 ‘부르주아적 기획’으로 부를 수 있는가? 오히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유주의 역사철학으로부터 넘겨받은 정식으로 일종의 역사적 신화이다. 국민의 형성은 자본주의 시장의 역사적 형태로서 항상 중심부와 주변부로 불균등하게 위계화된 세계경제(브로델, 월러스틴)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정정은 마르크스의 이념적 자본주의를 ‘역사적 자본주의’로 대체한다. 어떤 점에서 근대의 모든 국민은 ‘식민화’의 산물이다. 2) 자본주의 역사에서 국민국가 형태와는 다른 국가 형태들이 출현했으며 일정기간 국민국가와 경쟁하면서 존재했다(제국형태, 초국민적 정치-산업 복합체, 한자동맹 등). 부르주아 정치형태는 한 가지가 아니라 몇 가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갓 태어난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는 헤게모니의 몇 개의 형태 사이에서 주저했던 것이다. 요컨대 각자의 역사를 지닌 국민국가들의 형성과 이에 조응하여 사회구성체들이 국민구성체들로 전화한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순수 경제논리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구체적 형세이다.

 

사회의 국민화

국민형태의 특권적 지위는 그것이 국지적으로 이질적인 계급들의 투쟁이 통제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자본가계급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고 이것의 산물이기도 한 국가 부르주아지가 출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에 있다. 지배적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사회구성체는 국가를 국민형태로 재구성하고 다른 모든 계급들의 지위를 수정함으로써, ‘주체없는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 이때 국민형태의 구성 및 진화 과정은 비규정적인 것으로서, 생산양식들뿐 아니라 정치적 형태들의 단선적 진화의 도식들은 기각되어야 한다.

국민형태는 오늘날 누구에게 너무 늦은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신생국민들 편에서뿐 아니라 구국민들 편에서도 제기되는데, 가령 구 중심부의 경우 국민적 구조들이 해체되는 국면에 들어서기도 했다. 국민구성체들의 역사의 또 다른 특성으로서 ‘사회의 지체한 국민화’. 가령 프랑스의 경우 자본주의가 초래한 모순들과 계급투쟁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해주고 국민형태가 완성되기 전에 이를 다시 만들기 시작하도록 해준 것은 국민적-사회적 국가라는 제도, 경제의 재생산 및 개인의 형성, 가족구조, 사생활의 모든 공간에 개입하는 국민사회국가라는 제도이다. 국민형태의 기원에서부터 현존했으나 19~20세기에 걸쳐 지배적이게 된 이 경향은 모든 계급 개인들의 생존을 전적으로 국민국가의 시민이라는 지위, 국민성원이라는 그들의 자격에 복속시킨다.

 

인민의 생산

한 사회구성체는 장치들의 망과 일상적 실천을 통해 국민적 인간(homo nationalis)으로 형성되는 정도만큼 재생산된다. 이때 제도들의 기능작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모든 사회적 공동체는 상상적이다. 곧 공동체는 개인적 실존을 집합적 서사의 맥락 안에 투사하고 공통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과거의 흔적으로 체험되는 전통들에 기초를 둔다. 오직 상상적 공동체들만이 현실적이다. 국민구성체의 경우 실재적인 것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상적인 것은 인민이다. 이는 국가적 제도 안에서 스스로를 인지하는 공동체, 그 국가를 다른 국가에 대하여 자기 국가로 인지하여 자신의 계급투쟁을 그 지평 안에 기입하는 공동체이다. 인민은 자연적으로 존재하거나 단번에 구성되어 영속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어떤 국민도 타고난 민족적 기초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모든 근대 국민은 아무리 평등주의적이라 할지라도 계급 갈등의 소멸에 조응하지 않는다. 본질적 문제는 인민을 생산하는 것, 인민이 자신을 국민적 공동체로서 부단히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민은 정치권력의 토대와 기원으로서 통일성 효과를 산출한다. 루소는 이 문제를 ‘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용어로 제기했으며, 이는 개인들이 어떻게 국민화되는가, 곧 국민적 소속이라는 지배적 형태로 사회화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모든 동일성은 개인적이지만 고립적 동일성이란 내재적으로 모순적인 관념이다. 개인적 동일성은 사회적 가치, 행위와 집합적 상징의 규범의 장에서 구성되는 집단적인 것이자 역사적인 것이다. 인민의 역사적 생산이라는 질문에서 인민의 통일성의 모델은 종별적인 이데올로기적 형태의 구성,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하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피히테-외적 경계는 또한 내적 경계가 되어야 한다). 이 이데올로기적 형태는 애국주의 또는 국민주의이다.

 

의제적 민족체와 이상적 국민

국민국가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는 의제적 민족체(ethnicité fictive)라는 용어를 통해 지칭될 수 있다. 의제라는 용어는 순수한 환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법률적 전통에서의 의인(persona ficta)에 유비함으로써 제도적 효과, 즉 제작(fabrication)의 의미로 사용된다. 어떤 국민도 자연적으로 민족적 기초를 갖지 않으며, 단지 마치 그들이 스스로 기원과 문화, 이해관계의 동일성을 지닌 자연적 공동체를 형성한 것처럼 표상하는 것이다. 의제적 민족체는 애국주의의 대상이 되는 이상적 국민에 불가결하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국민은 다만 이념이나 자의적인 추상으로 나타나고 애국주의의 호소는 누구에게도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민족체는 언어와 인종을 통해 산출된다. 양자 모두 국민의 성격이 인민에 내재한다는 관념을 표출하여 역사적 인구들을 자연이라는 사실에 뿌리박도록 하며, 이것들의 지속적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언어적 공동체는 최근에 와서야 정착되었는데, 국민어(langue nationale)는 일반화된 학교기능을 통해 주입된다. 이 때문에 국민형성과 인민적 제도로서 학교의 발전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다. 학교는 국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장소이자 민족체를 언어적 공동체로 산출하는 일차적 제도이다. 모국어 또는 공통의 기원이라는 이상은 국민성원들이 서로 느끼는 애정의 은유가 된다. 그런데 언어적 공동체는 민족체의 생산에 불충분한 것으로, 이는 언어적 기표의 역설적 본성에 관련된다. 모든 호명은 언어의 수준에서 일어나고, 모든 개인은 언어라는 요소 속에서 호명된다. 동일성의 언어적 구성은 정의상 열려 있는 것으로 (누구도 모국어를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지만) 여러 언어를 영유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 언어적 공동체는 가공할 정도로 제약적인 민족적 기억을 이끌어내지만 또한 동시에 이상한 가소성을 지닌다. 모국어는 반드시 실제 어머니의 언어는 아니다(이민 2세대의 예). 언어적 공동체는 이 공동체가 항상 존재했다는 감정을 주는 그러나 후속 세대들에게 숙명적으로 해당 언어를 사용하도록 강제하지는 않는 현재의 공동체이다. 이상적으로 그것은 누구라도 동화하지만 누구도 붙잡지 않는다. 따라서 특정 인민의 경계 안에 고착되기 위해서 언어적 공동체는 비상한 특수성 또는 폐쇄 내지 배제의 원리를 갖춰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인종공동체의 원리이다. 문제는 (언어적 공동체와 다르게) 정치적 단위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들에게 공통적인 실천일 수 없다. 언어적 공동체가 언어적 실천의 사회적 불평등을 자연화함으로써만 개인들의 평등을 창출할 수 있는 반면, 인종공동체는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양가적인 유사성 속으로 해소한다. 이는 사회적 차이에 진짜로 국민적인 것과 가짜로 국민적인 것 사이의 분할의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차이를 민족화한다. 인종 관념의 상징적 핵심은 혈통의 도식, 즉 개인들의 친자관계는 세대에서 세대로 생물학적이고 정신적인 실체를 전달하고 그럼으로써 친족이라 불리는 시간적 공동체 속에 기입된다는 관념이다. 이 관념은 사적 족보들의 경향적 소멸과 상관적인 것으로, 인종공동체 관념은 친족의 경계가 상상적으로 국민의 문턱으로 이전될 때 출현한다. 즉 인종공동체는 자신을 하나의 거대가족 또는 가족관계로서 표상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와 가족

최근의 가족의 역사에 관한 논쟁들이 놓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결정적인 문제, 확대된 친족의 해소와 국민국가의 개입에 의한 가족관계의 침투 사이의 상관관계라는 문제이다. 오늘날 친척관계, 인척관계에 대한 기록을 구성하고 보관하는 것은 국가이다. 국가의 가족정책, 인구학적 기법들, 공중보건, 사회보장 등의 등장은 가족의 국민화, 곧 국민적 공동체를 상징적 친족으로 만드는 것이다. 부르주아 가족과 국민형태를 취하는 사회의 상호관계 속에 우생학이라는 관념이 잠재해 있는 것이나 국민주의가 성차별주의와 은밀한 근친성을 갖는 것, 또한 국민주의를 부족주의(traibalisme)로 표상하는 것이 기만적인 동시에 폭로적(revealing)인 것도 이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중심이 가족-교회 쌍에서 가족-학교 쌍으로 이전했다고 했을 때 옳았다. 이에 두 가지 교정이 필요하다: 특정의 한 제도가 자체로서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것은 ‘몇몇’ 지배적 제도들의 결합된 기능수행이다. 또한 학교교육과 가족의 중요성은 단지 노동력 재생산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이 재생산을 의제적 민족체의 구성, 즉 인구정책(푸코가 생명권력이라고 부르는 것)에 함축된 언어적 공동체와 인종공동체의 절합에 복속시킨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부르주아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국민주의의 헤게모니를 갖는다.

소견: 언어와 인종 사이의 절합이나 상호보완성이 조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적 민족체와 인종적 민족체는 어떤 의미에서 배타적인데, 언어적 공동체는 열려 있는 반면 인종적 공동체는 원리상 닫혀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건설은 의제적 민족체의 산출과 관련하여 공언어주의(colinguisme)의 확립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유럽적인 인구학적 동일성을 이상화하는 방식을 지향할 것인가. 민족화의 국민적 과정의 산물인 모든 인민은 관국민적으로 교통이 이루어지는 세계 속에서 배타주의나 동일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길을 찾도록 요구되고 있다. 모든 개인은 자기 인민이라는 상상이 변형되어가는 과정에서 다른 인민들에 속하는 개인들과 교통하기 위해 이 상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들을 찾도록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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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지도위원은 <소금꽃나무>의 저자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난 아직도 세상을 바꾸고 싶다.
인간이 돈에 왕따당하는 이 지리멸렬의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 이 땅 이 강산 공장마다, 사무실마다 울울창창 흐드러지게 소금꽃을 피우며 서 있는 나무들. 그 나무들이 500년 전 남해 바다를 주름잡던 거북선을 만들었다. 배를 만들고, 차를 만들고, 길을 만들고, 집을 만들고, 기름을 만들고 ... 그야말로 세상을 만들어 온 것도 그들이고,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것도 그들이고, 온갖 재화를 생산하는 것도 그들이고, 그 재화를 지켜주는 것 또한 그들이다. 바다 위를 달리고, 길 위를 달리고, 하늘을 가르는 것도 그들이다. 아픈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도 그들이고,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것도 그들이다."  

김진숙 위원을 생각하면 참 속이 끓는다. 조남호나 경찰들을 보며 분노를 느끼다가도, 또 슬픔과 부끄러움 때문에 스스로가 밥버러지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김진숙 위원의 저 강인한 모습을 보면서는 얼마나 인간의 영혼이 크고 숭고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도 한다. 김진숙 지도위원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안티고네, 비극적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숭고나 영웅이라는 말로 나 스스로는 저 싸움을 그저 사물화시키고 마는 것은 아닌가. 그녀는 영웅이 싫다고, 가장 경계하는 것이 영웅 놀이라고, 오직 대중과 역사만을 믿는다고 말한다. 또 한번 부끄러울 따름이다. 또 희망버스라는 기획은 또 얼마나 새로운, 엄청난 기획인지. 여태 희망버스도 타지 못했고, 두렵고 소심한 마음에 키보드나 두드리고 있지만 부디 건강하시고 크레인에서 몸소 내려오실 날이 왔으면 좋겠다. 어제로서 고공농성 200일 째라고 한다....   

한진중공업 파업 아카이브에 가면 관련된 여러 글들을 볼 수 있다. 

http://www.jinsuk85.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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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5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상봉 선생님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의 마지막 대목(382~4쪽)을 옮겨온다.   

 

 

 

 

 

 

 

"슬픔의 의미와 고통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리고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그것이 오랫동안 내가 생각한 철학의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플라톤이 걸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그는 빛을 찾아 어둠의 동굴을 빠져나와 위로 올라가려 했지만, 나는 도리어 슬픔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철학이 걸어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진리가 오직 슬픔 속에서만 계시된다고 내가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빌라도처럼 묻고 싶으시겠지요. 진리란 무엇이냐고. 진리는 만남입니다. 만남이야말로 모든 일치, 즉 모든 진리의 원형인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나는 너를 온전히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우리가 서로의 슬픔에 참여할 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슬픔 속에서만 우리에게 도래합니다. 그리고 철학이 진리를 갈망한다면, 철학은 먼저 슬픔의 해석학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 내가 그리스 비극을 이야기한 것은 그것을 사다리로 삼아 할 수 있는 한 깊은 슬픔의 심연 아래로 내려가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편지를 다 쓰고 난 지금 나는 내가 얼마나 깊은 슬픔의 어둠에까지 내려간 것인지, 내가 깊은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의 탄식을 올바로 들은 것인지 그리고 과연 내가 들었던 그 많은 말들을 온전히 표현한 것인지, 아무것도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 말은 아직 슬픔과 고통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경박한 정신의 한가한 유희처럼 보이지나 않을지 나는 적이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뿐입니다. 끝없는 슬픔의 바다에서 얼마나 더 싶은 심연으로 낮아져야 나는 당신의 슬픔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요?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의 깊이 앞에서 나는 내 모든 말이 참된 슬픔을 알지 못하는 자의 치기가 아닐까 하여 깊이 저어하고 또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 때문에 내가 걷는 길을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더 낮아지고 낮아져 당신이 있는 가장 깊은 슬픔의 심연까지 내려가겠습니다. 어떻게 가장 깊은 슬픔 속에 참된 기쁨이 깃들이고, 어떻게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희망의 무지개가 떠오르는지 그 신비를 깨달을 때까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갈 것입니다.  

이제 정말 작별할 시간입니다. 긴 편지 끝가지 읽어주신 것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다시 소식드릴 때까지, 사랑하는 그대, 부디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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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4 0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4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먼 2011-11-10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슬픔의 의미와 고통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리고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그것이 오랫동안 내가 생각한 철학의 길이었습니다.
- 이 구절 참으로 좋습니다 ^^ 가슴이 짠 하네요, 나도 그런 철학의 길을 가고싶네요.

바라 2011-11-11 01:46   좋아요 0 | URL
요먼, 나중에 이 책 빌려드릴게요ㅎㅎ 꼭 읽어봐요
 


 
John Sallis, "Nietzsche's platonism", Platonic legacy, New York: SUNY, 2004의 요약.

 

 


 

  니체의 플라톤주의. 니체와 플라톤 양자 사이에는 형이상학의 역사 전체가 놓여있다는 점에서 거대한 간격이 존재한다. 하이데거의 경우 니체를 최후의 형이상학자라고 해석한 바 있다. 문제는 이들 사이의 간격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간격을 가로지르는 운동의 다양한 형상들이다. 플라톤주의의 첫 번째 형상은 결정적으로 니체의 사유를 규정하는데, 니체 자신도 인정하듯이 그의 사유는 플라톤주의의 일종으로 생각될 수 있다. 두 번째 형상은 니체가 플라톤 이후에도 존속하는 플라톤주의라고 간주하는 것으로, 철학적 전통으로서 플라톤주의이다. 세 번째 형상은 이러한 간격을 가로지르는 니체 자신의 해석, 문헌학적 전통에 의해 매개된 것이 아닌 플라톤의 텍스트 자체로의 회귀이다. 네 번째 형상은 플라톤의 은폐된 역사로의 회귀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형상은 ‘니체의 플라톤주의’의 다양한 의미를 규정한다.

 

1.

  첫 번째 형상은 결정적으로 니체의 사유를 규정한 것으로 니체의 사유를 플라톤주의의 일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니체가 그의 사유 초기부터 후기까지 인정하고 긍정했던 유대관계로서, 가령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철학은 전도된 플라톤주의이다. (...) 목표로서 가상Schein 속에서 살기.”(Ⅲ 3:207) 여기서 가상이라는 말은 플라톤주의가 ‘진정한 존재’로부터 구별하는 유사성 또는 현상/외관appearance를 명명하기 위한 것이다. 니체의 전략은 플라톤주의가 설정한 위계적 대립을 전도시키고, 가상을 보다 순수하고 더 아름다우며, 더 나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플라톤주의가 ‘진정한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더 열등한 것으로 강등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우상의 황혼>에서 또한 보여주는 것인데, 이는 역사의 형태, 오류의 역사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어떻게 참된 세계가 마침내 우화가 되었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플라톤주의가 전도되는 과정의 연속을 보여준다. 이 구절은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서 결정적인 것이며, 데리다 등의 해석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다. 이 구절은 참된 세계가 점점 더 획득할 수 없는 것이 되는 단계를 추적하면서, 참된 세계의 제거로 끝맺는다. 니체는 플라톤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전도의 순간이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주의의 그림자가 물러나는 순간, 플라톤주의의 근본적 전도가 빛 속으로 나타나게 되는 순간이 바로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이르는 순간인 정오이다. 이는 여전히 전도된 플라톤주의로 남아있다.  

 

2.

  플라톤주의의 두 번째 형상은 니체가 플라톤 이후로도 서양의 사유와 실천의 역사 속에서 존속해왔다고 간주하는 플라톤주의이다. 이는 니체가 기독교를 “인민을 위한 플라톤주의”(Ⅵ 3: 74)라고 부를 때의 플라톤주의이다. 이는 참된 세계는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약속되어있다는 생각의 가장 오래된 형태이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플라톤을 ‘이미 존재했던preexistently 기독교인’(Ⅴ 3: 149)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플라톤의 이름을 기독교와 결합시키면서 니체는 만약 신이 오류, 맹목, 거짓말이라면 어찌하겠는가라고 묻는다.

 

3.

  니체의 플라톤 강의 텍스트 전체는 1995년 간행되었다(Ⅱ 4: 1~88). 이는 바질대학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쳤던 시기 니체의 강의를 담고 있다. 최초의 제목은 ‘플라톤 대화편 연구 입문’이었는데, 이는 다양한 제목으로 1873~4년 겨울 학기, 1876년 여름 학기, 1878~9년 겨울 학기의 강의에서 반복되었다. 이 강의는 바질 대학에서의 시기에서부터, <비극의 탄생>, 그리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첫 번째 권이 출간될 때까지의 시기를 포괄한다. 이 강의는 최근의 플라톤 문헌과 플라톤의 생애를 다루고, 각 대화편의 요약 설명을 제공하며, 플라톤 사상의 주제를 제시한다. 입문적인 문단에서 니체는 전체 강의를 정향하는 일반적인 언급을 준다. 무엇보다도, 그는 플라톤이 항상 젊은이를 위한 진정한 철학적인 지도자 또는 가이드로 고려되어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미 명백하듯이, 니체가 여기서 플라톤의 이름으로 지시하는 것은 나중에 그가 때때로 언급하는 ‘인민을 위한 플라톤주의’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플라톤이다. 다른 한편, 니체는 플라톤적 사유와 칸트의 관념론과의 연관성을 지적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칸트적 관념론에 대한 준비 과정이었던 것으로 말해지는데, 이데아론이 이미 사물 자체와 현상 사이의 대립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니체는 플라톤적 사유를 형이상학의 이후 역사와 연결시킨다.

  그러나 <비극의 탄생>의 맥락에서, 칸트와 쇼펜하우어가 정확히 진리에의 충동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예술의 재탄생을 준비한 인물임을 고려한다면, 플라톤적 사유와 칸트적 관념론 사이의 연관성은 마찬가지로 플라톤을 형이상학의 한계에 위치시키는 것, 니체적 전도에 가깝게 플라톤의 사유를 간주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니체는 플라톤의 산문 작가로서의 재능을 강조하며, 또한 플라톤이 위대한 극작의 재능을 지녔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니체는 플라톤에게 주요한 것은 작가 플라톤이 아니라 선생 플라톤이라고 주장한다. 작가는 단지 선생의 유령일 뿐이며, 그의 작품은 단지 아카데미에서 행해졌던 말의 상기rememberance일 뿐이다.

  니체는 당대의 플라톤 문헌에 의지한다. 다양한 학자들 가운데 니체의 플라톤 독해에 중요성을 갖는 학자는 두 명인데, 그 중 한 명은 텐느만Tennemann으로, 희랍 철학을 연구하는 칸트주의자이다. 니체는 특히 플라톤이 ‘이중의 철학’, 명백한 철학과 은밀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텐느만의 관점에 대해 언급한다. 또 다른 학자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마허로, 그가 강조한 것은 플라톤의 작품에서 형식과 내용은 분리불가능하다는 것, 철학자 플라톤 곁에는 또한 예술가 플라톤이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플라톤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편에서 예술적 요소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슐라이어마허와 의견을 달리 한다.

  니체는 예술작품으로서의 대화편과 예술가 플라톤에게 단지 이차적인 중요성을 돌릴 뿐이다. 니체는 “대화편은 어떤 극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상기의 형태로, 변증술의 과정으로서 간주되도록 의도된 것이다”(Ⅱ 4:14)라고 말한다. 이후의 강의에서 니체는 “플라톤의 극이 가진 힘은 놀랍게도 과대평가되었다”(Ⅱ 4:161)면서 플라톤의 작품에서 극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제한해야 한다고 더욱 강하게 주장하게 된다.

  니체는 플라톤의 편지를 비롯한 다양한 문헌을 가지고서 플라톤의 생애에 대해 확장된 논의를 펼친다. 특히 두 가지 점이 언급될 가치가 있는데, 먼저 플라톤의 교육 과정에 관한 것이다. 니체는 플라톤이 젊은 시절 주신찬가의 시들을 지었으나 나중에는 그 시들을 태워버렸다고 말하면서, 플라톤이 갖는 시적 경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둘째로, 니체는 플라톤을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에도 소크라테스적인 방식으로 존속했던 다른 소크라테스적 철학자들과 분리시키려고 한다. 한편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를 이상화했으나, 다른 한편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적 경향은 그가 가졌던 초기의 헤라클레토스주의에 의해 제한된다. 니체는 플라톤이 “애초에는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였고 결코 순수하게 소크라테스적이지 않았다”(Ⅱ 4:45)고 말한다.

  니체가 개별적인 플라톤 대화편에 관해서 하는 설명은 대개 요약적이다. 그러나 어떤 설명은 최근의 학술적 기준에서 볼 때도 매우 예리한 점이 있다. 예컨대 <티마이오스>에서 세계-영혼의 혼합blending에 관한 문단에 대한 니체의 해석은 A. E Taylor나 Serge Margel의 것과 밀접히 상응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혼합의 두 단계를 구분하고, 혼합의 첫 번째 단계에서 섞인 두 요소로부터 나오는 것이 두 번째 단계에서의 두 요소와 섞이는 세 번째 구성 요소가 됨을 인지한다.

  다른 한편 때때로 니체의 해석이, 텍스트가 말하는 것을 전통적인 공식으로 대체하면서, 플라톤 텍스트의 언어로부터 벗어나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컨대, <티마이오스>에서 그릇receptacle과 코라를 언급하는 대목을 보자. 그러나 니체가 그릇과 가지적 존재 사이의 구분을 끌어올 때, 그는 전자를 이데아 곁에 있는 원초적 물질로, 이데아의 영원성을 분유하지 않는 비존재non-being로 간주한다. 그러나 <티마이오스>에서 그릇은 결코 질료라는 말로 지시되지 않으며, 니체의 설명과는 반대로 그릇은 그것이 매우 복잡한 방식일지언정 가지적인 것에 참여하는 것으로, 명시적으로 영속적인 것으로서 간주된다(<티마이오스>, 51a-b, 52a-b).

  니체가 그의 강의의 두 번째 부분에서 제공하는 플라톤 사상의 주제적 설명은 플라톤 텍스트에 대한 최소한의 언급과 함께 전개된다. 특기할 만한 것은 니체가 빙켈만, 괴테, 독일 헬레니즘의 전체 전통으로부터 계승된 그리스 문화에 대한 관점과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단절하고 있을 바로 그 시기동안, 그의 플라톤 해석은 그처럼 좁은 경계에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다.

  니체의 설명은 우선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한다. 그는 개념 및 개념적 규정Begriffsbestimmung에서 시작하며, 무엇보다도 이데아를 개념적 규정의 대상과 동일시한다. 그는 또한 “일반적 개념적 규정의 대상은 감각적인 사물이 아니라, 존재자의 다른 종류eine andere Gattung des Seienden”라고 설명한다. “이데아를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유는 그가 감각적인 것을 영속적인 흐름과 변화 속에서 보았고 따라서 이를 지식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그는 윤리적인 것은 개념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Ⅱ 4: 149)

  니체는 우리의 개별적인 감각 지각이 개별 대상들에 상응하듯이, 우리의 일반적 개념은 개념들 자체와 마찬가지로 불변하는 대상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니체가 말하듯이 이데아론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그러한 설명이 진리가 가상이라고 주장하는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말에 관하여’와 같은 텍스트가 쓰였던 바로 그 시기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니체는 반복해서 플라톤에게 윤리적인 것이 가졌던 우선성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데아를 정립함에 있어 플라톤의 출발점은 선, 미, 정의였고, 그의 목적은 이러한 윤리적 추상물들을 감각적인 것이 갖는 영속적인 흐름, 변화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플라톤이 가시적 세계에 대한 고려를 기초로 해서 이데아를 정립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은 이러한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데아론의 생성은 가시적 세계에 대한 고려 속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론의 기원은 감성적/미학적aesthetic인 것이 아니다. 즉 이데아는 감성적 관조 또는 직관에 기초해서 정립되지 않았다.

  이에 니체는 이전에 주장했던 요점, 즉 플라톤의 예술적 충동은 이차적이며 또 다른 충동, 도덕적 충동에 의해 철저히 지배되었다는 것으로 돌아온다. 니체가 말하듯이 “그는 철저히 윤리학자이다.”(Ⅱ 4: 161) 이 지점으로부터 니체는 (신체는 영혼의 감옥이고, 철학의 과업은 감각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결론, 플라톤 사상이 ‘인민을 위한 플라톤주의’ - 이후 니체의 계보학적 비판의 주요한 표적이 될 - 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4.

  니체의 플라톤주의의 네 번째 형상. 이는 니체의 바질 강의를 지배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니체는 보기 드문 능력으로 가장 결정적인 모호성과 이 모호성 내에서 일어나는 사유의 끊임없는 순환을 식별한다. 바로 이러한 독해를 통해서 니체는 플라톤의 사유를 그 독특성을 개방하는 방식으로 마주한다.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로서 플라톤은 단순히 소크라테스적인 것으로 변했다고 말해지지 않으며, 예술가 플라톤이 아무런 잔여도 없이 도덕주의자 소크라테스로 변형되어왔다고 일관적으로 제시될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니체는 그의 강의에서 플라톤의 예술적 충동이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충동에 의해 제한되었음을 강조한다. 또한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쓰듯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학생이 되었고, 그의 시를 태워버렸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의 시를 태워버렸을지라도,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소크라테스처럼 쓰지 않는 자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소크라테스의 매력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썼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매력 하에서도 플라톤은 글쓰기를 지속했고 예술가로서 남았다.

  ‘그리스 국가’라는 제목이 붙은 초기의 텍스트에서 니체는 남아있는 투쟁, 모호성에 대해서 강조한다. “그가 그의 국가에서 천재적 예술가를 배제했다는 것은 예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평결의 엄밀한 결과였는데, 이는 플라톤이 그 자신과의 싸움에서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었다.”(Ⅲ 2: 270f) 그러나 이 자신과의 싸움은 플라톤이 예술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평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도 중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는 그 싸움이 가장 강렬해졌을 때이다. 스스로와 싸우는 플라톤의 이미지, 역동적이며 또한 활발한 모호성의 이미지와 더불어, 니체는 플라톤 사유가 갖는 독특성에 대해 언급한다.

   이외에도 플라톤이 그 자신과 영속적인 싸움, 자신과의 분열 속에 있는 인물, 모호성 내부에서 순환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다른 문단들도 있다. <선악을 넘어서>에서 플라톤은 “어떤 철학자도 지금까지 그 마음대로 이용했던 가장 위대한 힘”(Ⅵ 2: 114)으로 선언된다. 또한 니체는 플라톤의 비밀, 그의 스핑크스적 본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가 그의 임종의 베개 밑에서 발견한 것은 성서도, 이집트의 책도, 피타고라스의 책도, 플라톤의 책도 아닌, - 아리스토파네스의 책이다. 플라톤 또한 삶을 - 그가 부정햇던 그리스적인 삶을 - 아리스토파네스없이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Ⅵ 2: 43) 또한 니체는 소크라테스주의가 플라톤의 것이 아니고 단지 그의 철학에서만 발견되며, 이러한 소크라테스주의를 신봉하기에는 플라톤이 너무도 고귀하다고 말한다.

  <우상의 황혼>에서의 플라톤에 대한 가혹한 비판 외에도 니체는 또한 플라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그리스인만이 지닐 수 있는 순진무구함을 가지고, 아테네에 그처럼 아름다운 청년이 없었다면 플라톤 철학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 플라톤식의 철학은 차라리 에로틱한 경쟁이라고, 옛 체육 경기와 그 전제들을 연수하고 내면화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리라. 플라톤의 철학적 에로티시즘으로부터 마침내 무엇이 나왔는가? 그리스적 경쟁의 새로운 예술적 형식인 변증법”(Ⅵ 3: 120)

  <즐거운 지식>에서도 니체는 플라톤의 건강함과 강력한 감각에 대해서 쓴다. 마지막으로 1880년 중반에 쓰인 수고에서 니체는 플라톤에 의해 행해진 전도에 대해서 쓰는데, 플라톤은 여전히 예술가로 남아있다. “기본적으로, 그가 예술가였던 것처럼 플라톤은 현상보다 존재를 선호했다.”(Ⅷ 1: 261)

  특기할 만한 것은 어떻게 플라톤적 전도의 이미지가, 형이상학의 발생조차 소크라테스적 도덕주의자 플라톤보다도 예술가 플라톤의 손에 더 많은 것을 부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극한에서, 이러한 니체의 플라톤주의의 형상은 첫 번째 형상 - 즉 존재보다 현상을 선호하는, 또는 최소한 존재와의 대립 하에서 규정되어 항상 현상이라고 불려왔던 것을 선호하는 - 니체 자신의 사유의 전도된 플라톤주의와 소통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니체가 그리스인으로 남은 이유, 또는 처음부터 그리스로 돌아오려고 시도했던 이유이다. “오 저 그리스인들!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이해했다. (...) 저 그리스인들은 피상적이었다 - 심오함이 없었다.”(Ⅴ 2: 20, 또한 Ⅵ 3: 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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