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5장 민주화 이후의 국가

1. 민주화 이후 강력한 국가, 무력한 정부의 문제
민주주의와 국가: 민주화 이전 한국의 국가는 과대 성장 국가, 발전 국가, 강한 국가 등 권위주의 국가로 개념화되었다. 한국에서 국가의 지배는 냉전 반공주의나 발전주의 같은 이념적 기제를 통해 뒷받침되었으며, 권위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동질적인 지배 엘리트(관료 엘리트, 정치 엘리트, 기업 엘리트)를 형성시켰다. 그러나 이제 민주화와 더불어 국가의 이런 성격 및 구조는 변화의 압박에 직면한다. 민주화 이후 유권자의 투표는 민주 정부를 만들어내었고, 이것의 결과는 권위주의 하에서 융합되어 있던 정치 엘리트와 행정 관료 엘리트의 분리였다.

민주화와 국가의 두 수준: 국가는 두 수준에서 고찰될 수 있다. 하나는 하부구조적 수준의 국가, 대규모 공조직으로서 관료행정적 형태로 제도화된 체제이다(일반적으로 한국의 국가를 강력한 국가라 할 때는 이를 가리킴). 다른 하나는 정부적 수준에서의 국가다. 정부는 권력의 획득과 행사 과정에서 특정의 이념적, 정책적 정향을 갖는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의 수준이다. 권위주의 하에서 양자는 융합되어있었으나 민주화가 되면서 이 두 수준이 분리된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경우, 집권 초기 이들 정부는 개혁에 대한 열망을 배경으로 집권했으나, 집권 말기에 이르러서는 대통령 리더십이 최하점에 도달한 바 있다. 집권 초 정치 엘리트는 행정 관료에 압도적 우위를 가졌으나, 점차 정치 엘리트는 국정 운영의 무능력과 미숙을 드러냈다. 민주 정부의 정치 엘리트들은 그들의 권력과 개혁 의제를 실천할 능력 사이의 커다란 격차에 직면했기에, 행정 관료 엘리트의 권력은 권위주의 시기보다 커지게 되었다.

무력한 정부와 헤게모니의 문제: 민주화 이후 과거 야당이 집권하면서 대면하게 되는 문제는 정부의 무력함이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 모두 차이는 있으나 무력한 정부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헤게모니의 약함은 무력한 정부의 결정적인 요인인 것이 아니며, 이는 개혁 부진 및 정권 약화의 알리바이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거대 행정 관료 기구를 운영하는 원리로서 절차적 보편성과 개방성이 없었다는 점이다(비선 조직).

사회적 기반 없는 야당의 문제: 무력한 정부의 등장은 야당이 어떻게 집권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는 우선 이들이 기존의 발전주의적 모델을 대체할 대안적 비전이나 민주주의 모델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며, 또한 냉전 기득 세력의 이념 공세를 피하고자 그들의 대안을 보수화하려 했다는 것이다(뉴DJ플랜). 이러한 전략적 모호함의 태도로 인해 투표자의 지지와 선출된 자의 책임성 사이의 관계는 느슨하고 모호해지며, 이는 또한 집권정당의 정체성 상실로 이어진다(오도넬의 ‘위임민주주의’).

2. 무력한 정부와 관료제의 문제
관료행정 기구에 포획된 정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경우 민주주의에서 국가에 대한 대안적이고 구체적인 관념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으며, 기술 관료적 경영주의의 이념에 압도되었던 까닭에 국가 운영에 있어서는 앞선 권위주의 정부 사이에 차이는 별로 없었다. 민주적 국가 운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때 이는 과거 권위주의 하의 행정 관료 기구를 개혁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지만, 새로운 집권 엘리트들은 이를 진지하게 시도하지 않았다. 또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은 천명만 되었지 정책적으로 구체화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시장효율성, 시장 근본주의가 발전주의에 이어 새로운 헤게모니로 힘을 갖기 시작했다. 민주적 발전 모델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 정치 엘리트들은 점차 관료에 의존하고, 결국은 관료에 포획되는 관계로 바뀌게 되었다.

민주화와 무능한 관료 체제의 문제: 민주주의 하에서 한국의 관료는 복지부동, 무책임, 전문성 결여, 무능, 부패 등의 특성을 갖는다. 왜 그런가? 첫째, 박정희 정부 시기처럼 위로부터 주어진 국가 목표의 부재. 둘째, 중앙정보부, 안기부 등의 강권 기구의 역할이 사라짐(수평적 책임성의 기능 부재). 셋째, 단기적 정권 교체는 관료 개개인의 장기적 전망을 약화. 넷째, 정권 교체에 따른 연줄 관계의 변화로 관료적 위계 구조의 혼란. 결국 이러한 원인들은 관료 체제의 민주적 운용 패러다임 개발하지 못한 탓이다. 민주주의 하에서 관료의 부패가 권위주의 시기보다 심해진 것은 아니더라도, 또한 강조해야 할 것은 시장과 민간 부문의 부패, 상층 엘리트의 부패이다.

3. 민주화와 대통령제의 문제
무력한 정부와 강력한 대통령: 한국은 건국 이후 1987년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무려 아홉 차례나 헌법을 개정했는데, 이는 정치체제의 불안정성과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 제도화를 보여주며, 한국 헌정사의 불안정은 거의 대통령에 관련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슈의 중요성에 비해 광범위한 토론과 논쟁이 없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제는 권위주의와 친화적인가?: 민주주의 하의 대통령은 정당을 매개로,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적 리더십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대통령은 당선되는 순간부터 물리적 환경의 변화에 압도된다(경호, 공관과 집무실, 비서실). 이는 대통령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이 권위주의와 매우 친화적임을 보여준다.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 제왕적 대통령을 제기하는 담론은 그러나 그 속에 내장된 보수적 파당성으로 인해 진실을 왜곡하는 측면도 있다. 제왕적 대통령을 비판하는 이들은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CEO 대통령이라는 새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CEO 대통령 논의에는 근본적 문제, 즉 이것이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경제로부터 정치의 분리)와 상충되기 때문이다. 기업 구조는 기본적으로 권위주의적이며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국가는 한 사회의 통합 및 시민권의 원리, 공공복리 실현 등을 위한 공공조직이다. CEO 대통령 논의는 정치를 경제적 힘에 종속시키려 하는 신자유주의 내지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시장지향적이고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더구나 애초에 제왕적 대통령 논의가 기원한 미국의 경우 이는 본래 대외 정책 이슈에 관련된 것이었으며 자유주의파의 파당적 비판을 표현한 것이었다. 반면 한국의 경우 이 논의는 권위주의 세력들이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 비판의 일환으로 제기한 것이었으며, 헤게모니를 갖지 못한 김대중 정부에 대한 거대 언론과 보수 야당의 동맹에 의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들은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않아서 만들어진 문제의 원인을 특정 대통령, 정부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을 뿐이다.

대통령의 민주적 리더십: 대통령의 권위주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여러 문제들의 결과물이다. 대통령을 권위주의적으로 만드는 것은 투표자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고 구속되지 않는 상황의 결과인 것이며 또한 정당의 허약함 때문이다. 핵심은 오히려 정당과 정당 체제를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는 것, 즉 정당을 사회의 갈등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본 것처럼 냉전 반공주의는 한국의 정당 체제를 이념적으로 극히 협애한 틀에 가두어 놓았다. 정치는 갈등과 이 때문에 분열된 사회를 전제로 경쟁과 타협을 통해 갈등을 민주적으로 표출하고 정당을 매개로 이를 민주적으로 해소하는 과정인데(립셋-갈등과 컨센서스가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 한국에서 갈등은 대표될 수 있는 여지가 극히 좁다. 갈등의 부재는 사회의 특정 집단이 공공의 집합적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음을 보여주며, 따라서 냉전 반공주의와 접맥된 낡은 정당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갈등 구조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4. 민주화와 중앙집권화의 문제
초집중화 = 지리적 집중+엘리트의 동심원적 중첩: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중요 동인 중 하나는 중앙 집중화로, 이를 가져온 역사적 계기는 권위주의적 산업화이다. 중앙 집중화의 구조는 대규모의 정치와 경제를 지향하는 것으로, 정치에 있어서는 국가 중심적, 경제와 시장에 있어서는 재벌 중심적 구조를 강화하는 성격을 지닌다. 한국의 지역당 구조는 지역에 기반을 갖는 다원적 정치 세력 간의 경쟁이 아니라 중앙 집중화의 구조에서 엘리트 간 경쟁의 산물이다. 이는 정치 경쟁, 교육의 경쟁 등을 생사 투쟁처럼 격화시키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정부들은 집중화를 완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화시켰다. 지금까지 중앙 집중화에 대한 대책은 대체로 수도권 개발 억제, 지방 분산 등이 그 대안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사회 각 분야의 엘리트 집중도가 여전히 강하고 그 충원 구조가 동심원적 구조를 갖는 상황에서 이런 지방 분산이 초집중화를 얼마나 완화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리적 분산 역시 시도되어야 하지만, 그보다 엘리트의 동심원적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사회 주요 영역의 독자성을 강화하고 다원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정치 영역에 있어서는 정당들이 넓은 이념적 공간에서 경쟁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한 사회집단들, 특히 노동자계급이 정치의 중요 행위자로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치의 다원주의는 교육 개혁, 재벌 개혁 등 여타 영역으로 다원주의를 확산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6장 민주화 이후의 시장

1. 민주화와 시장의 개혁
권위주의 산업화는 어떤 시장을 만들었나: 한국의 시장은 서구의 시장과 상이한 경로로, 즉 민간 부문에서 생성, 발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권위주의 산업화 과정에 의해 만들어졌다. 권위주의 산업화에서 형성된 시장은 강한 국가 주도성, 재벌 경제체제, 노동의 배제라는 세 가지 특성을 갖는다. 곧 경제 시장에서도 독점과 배제가 지배적 원리가 됨으로써 투명성과 공정 경쟁과 같은 시장경제의 본래적 특징이 발휘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시장에 대한 강한 개입주의 국가의 역할은 한국 사회에 관료적 권위주의를 뿌리내리게 했다. 또한 권위주의적 노동 배제는 재벌 편향적 성장 제일주의의 다른 한 축이었다. 노동자의 참여가 배제된 정책 결정의 조건에서, 정치는 결국 사회 상층 엘리트 간의 게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의 경제적 의미: 한국의 민주화가 갖는 사회경제적 내용은 기존의 권위주의 시장구조를 개혁하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과 재벌 간의 연합이 주도하는 시장 구조는 재벌, 중소기업 간, 지역 간, 부문 간, 계층 간 불균등성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또한 노동의 배제는 갈등을 만들어 내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권위주의적 국가 기제를 필요로 하는 악순환도 일어난다. 이런 구조를 해체하고 정치와 경제 간의 관계를 투명하게 만드는 개혁없이는 어떤 민주개혁도 실효성을 갖지 못한다.

개혁의 두 계기: 민주화와 세계화: 권위주의 하의 시장구조가 개혁의 의제로 제기된 계기는 두 가지, 민주화와 세계화였다. 먼저 민주화가 기존의 시장구조에 변화를 요구하는 힘으로 작용한 것은 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한다. 현실 정치 세력이 얼마나 민주적인가의 평가 기준으로 재벌 문제와 노동문제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게 고려된 것이다(노태우 정부의 업종전문화 정책, 김영삼 정부의 금융실명제). 다음으로 세계화는 80년대 초반부터 수용되어 IMF 당시 급진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의 세계화의 실제 내용은 신자유주의 또는 워싱턴 콘센서스라 불리는 특정 정책 내용의 수용이었다. 가령 IMF 이전까지 세계화는 대체로 친재벌적, 반노동적 정책 함의를 가진 것이었다면, IMF 이후 세계화는 반노동적인 동시에 반재벌적인 효과를 갖게 되었다.

2. 민주화는 권위주의 시장구조를 변화시켰는가?
재벌 개혁에 취약한 민주화: 주목할 것은 민주화 이후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권위주의 시기보다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새 정부들은 재벌 개혁을 약속했으나, 이는 집권 초기를 지나면서 구두선에 그쳤다(심지어 노무현 정부에서는 삼성과의 유착이 더 심화). 과거 권위주의 국가에 의해 통제되던 언론과 대학은 이제 재벌의 영향력에 의해 압도되고 있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 87년 6월 이전 노동운동은 직접적인 억압 하에 있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민주화에 핵심적으로 기여했다. 당시 노조의 입지는 강했는데, 이 시기 노동운동은 고성장, 소득분배 구조의 개선, 저실업률, 노동력 부족과 구인난 등 현대사에서 가장 노동에 유리한 조건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김영삼 정부 시기 초기에는 노동정책에 대한 민주적 개선의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중립적 태도와 노조 활동의 자율성 보장은 93년 현총련 연대 파업을 계기로 과거로 후퇴했으며, 이후 개혁적 노동 정책은 반전되었다. 동시에 주류 언론과 경제계의 반격(무노동무임금, 경영권 수호)도 강화되었다. 96년의 총파업은 김영삼 정부의 노동 정책이 갖는 배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이어서 금융 위기와 더불어 강제된 IMF 개혁 패키지의 핵심은 노동시장 유연화였다. 고용불안정이 일반화되고, 소득 불평등도 심화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노동정책은 복지정책과 연계되는 사회정책적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김대중 정부 시기에 새로운 갈등 유형이 나타나게 된다. 즉 노사관계 차원보다도 노사관계의 틀에 영향을 미치는 노동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등장했다. 김대중 정부 역시 정부 정책은 시장경제 우선의 방향으로 기울었으며, 복지, 노동 등 사회정책은 경제정책의 하위 정책으로 간주되었다. 노사정위원회 역시 서구의 코포라티즘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이마저도 민노총의 탈퇴로 지속되지 못했다. 요컨대 전체적으로 보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노동은 여전히 배제되었던 사회집단이었다. 과거 고도성장기에는 권위주의 정부에서라 할지라도 완전고용과 소득 증가를 내용으로 노동자를 통합하는 거시경제적 틀이 존재했다면, 금융 위기와 더불어 이 틀은 사라지고(저성장, 고실업) 노동시장 유연화는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결국 주류 노동운동세력은 정부와 대립하게 되었고, 이에 정부의 대응은 과거 권위주의 노동정책으로 후퇴하는 것이 되었다(정치의 붕괴와 항의의 일상화). 결국 민주화 이후에도 노동정책에 있어서는 담론 수준을 넘어서는 정책 전환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3. IMF 세계화와 경제개혁
새로운 사회 균열로서의 세계화: 담론의 측면에서만 보면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 추진의 정점을 이루는 듯 보이지만, IMF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세계화의 충격은 정치적 수준에서 새로운 균열을 만들지 못했다. 대체로 그 전까지 세계화는 정부와 기득 세력이 민주화와 개혁 요구를 회피하는 논리로 동원된 것이다. 그러나 IMF 이후 세계화는 달랐다. 정부는 세계화의 규범에 맞는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추구했고, 재벌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시장의 자율성은 허용하길 바라면서도, 기존의 특혜를 없앨 수 있는 세계화 규범의 적용에 반대했다. 노동의 경우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요구하는 세계화 규범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노동시장 보호 정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분명한 정치 균열 라인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더욱 혼란스러운 양태로 나타났다. 금융 위기 이후 균열의 축과 동맹의 양태가 더욱 분열적이고 혼란스러워진 것은 사회적 갈등이 정치적으로 동원되고 대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갈등의 축과 동맹의 축을 명료하게 하며, 경쟁적 대안을 발전시켜야 할 정당의 역할이 존재하지 않았다.

왜 한국의 민주화는 실질적 개혁에 무력했나: 한국의 민주화는 강권적 권위주의 통치 종식에 있어서는 효과적이었으나 실질적 내용, 사회경제적 측면의 개혁에 있어서는 무력했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계급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재벌은 강화되었으며 노동 배제는 지속되었다. 김영삼 정부 시기까지는 실질적 개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수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재벌 개혁이 실질적인 개혁 의제가 될 수 있었다. 이들 집권 세력은 권위주의 시기 고착된 지배 엘리트 구조에서 소외된 주변부 엘리트 집단이었으며, 당시 세계화라는 외적 충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집권 초 김대중 정부는 국내 기득 세력에 대해 이전 어느 정부도 누려보지 못한 자율성을 가졌다. 당시 개혁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구조조정으로서 금융 위기에 대처할 생존 전략으로서 기존의 거시 경제 운용 모델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수동적 의미의 개혁이며, 다른 하나는 구조개혁으로서 민주주의의 틀에 맞게 경제 발전의 대안적 모델과 사회정책적 대안을 위한 개혁이다. IMF 하에서라도 민주주의에 걸맞은 시장경제체제를 창출하거나 민주주의를 통해 시장경제의 부정적 효과를 보완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은 수사로 그쳐버렸다. IMF 개혁 패키지와 같은 수동적 개혁에 그친다면 김대중 정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구조조정을 넘어서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한 장기적이고 자율적인 구조개혁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지역 정당 체제나 보수 편향적 정치 구조를 개혁하고자 하지 않았으며, 자민련과 같은 세력과 연립 정권을 유지할 뿐이었다.

개혁 실패가 남긴 것: 민주화와 세계화라는 내외적 충격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시장구조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국가와 재벌의 힘 관계에서 국가의 일방적 우위는 사라지고 재벌은 국가에 의해 쉽게 통제되기 어렵게 되었으며, 노동 배제의 경제체제도 그대로였다. 이는 신자유주의라 할 수 있는 정치에 대한 특정 관점이 사회에 확산되도록 만들었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적, 부정적 태도를 확산시키며, 내용적으로는 재벌 체제를 안정화하는 효과를 갖는다. 정치를 폄하하고 조롱하며 정부 기능을 부정할 경우, 민주주의의 의미를 경제에 종속시킬 경우 한국 민주주의는 무력하게 되고 만다. 보수 언론을 통해 유포되는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권위주의적이며, 민주적 노사관계를 위한 인식상의 변화도 지체되었다.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노동운동 내부의 연대는 약화되는 반면, 노동운동의 리더십은 아직 관념적인 급진주의에 의해 자신의 잠재력을 소진하고 있다. 만약 민주주의의 정치적 틀에 조응하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없다면 시장의 부정적 역할을 제어할 힘은 없다. 시장은 하위 체계 중 하나일 뿐이며, 이는 전 사회의 운영 원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계급 구조화의 심화, 소득 불평등 등 한국 사회의 현실은 유능한 민주주의 국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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