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고별 강연
고전의 학문 정신은 데이터에서 출발한다. 반면 신화에는 데이터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what it is? 라고 물을 때 it이 데이터이다. 철학은 모든 이론에 앞서서 데이터에서 출발하여, 데이터를 학문적으로 정리해보고 그것을 다시 반성해보는 작업이다. 철학적 데이터는 개별 과학적 데이터와 달리 모든 데이터의 총체이다. 대화편을 보면 플라톤에게 사람은 항상 어떤 나이이고, 이름이 누구며, 어디에서 무엇 하러 왔으며 등등 고유 명사의 입장에서 데이터가 주어지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람은 그냥 사람,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의해 추상화된 데이터로 나타난다. 이처럼 고유 명사의 극한에서 본다는 것이 플라톤의 데이터의 특색이다. 가령 플라톤에서 형상이 무엇인지 말하려면, 대화편에서 형상이라는 말을 전부 찾아내고 이를 전부 분류해서 각 대목의 의미를 밝혀야하지 형상 일반이란 의미가 없다. 구체적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밝혀야 하며, 그렇지 않고 그저 추상적인 형상은 플라톤에게는 없다. 그런데 플라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 특징 중 하나는 잰다는 점이다. 왜 재느냐? 데이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연장성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직접적인 것은 연장성 속에 있는 질quality이다. 만약 데이터를 재지 않는다면 모든 사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없으며 주관적임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사물을 정량적으로 재야하며, 잰다는 것은 또한 그것이 되풀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재어진 것과 재어진 것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고 그것이 되풀이될 때 이것을 법칙이라 부를 수 있다. 희랍 당시에 이를 탐구하던 학문이 기하학(geometry 땅을 잰다는 뜻)이다. 반면 질의 경우 잴 때 문제되는 것은 정도degree이다.
데이터는 시간과 공간에서 주어진다. 시간은 운동이 있고 이때 문제되는 것은 질이다. 이른바 제1성질은 공간이 가지고 있는 질이다. 반면 공간은 항상 정지해 있는 것, 구별되는 것, 이것은 여기에 저것은 저기에 있다고 구별될 수 있는 것을 일컫는다. 질이라는 것은 각각 서로 다른 것이며 이것들이 같을 경우 양이 된다. 그런데 질이 각각 자기 동일성을 갖고 있기만 할 경우 운동은 성립하지 않는다. 운동은 질이 연결되고 묶여야 성립한다. 시간, 운동이라는 것은 질의 연속 과정이며 서로 연결되는 과정이다. 플라톤에서 데이터는 시공간 속에 있는데 만약 운동이 빠져버린다면, 질들은 모조리 이전의 연결에서 떠나 흩어지게 된다. 질들이 흩어져서 그 자체 전부 有로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분석analysis(ana위로, 되돌려서, lyô 풀어놓는다)이다. 이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분석의 기본 의미는 풀어서 돌려준다 또는 자기 본성대로 놓는다는 뜻이다. 분석되기 이전의 운동에 있어서는 우리 인식 대상인 질이 전부 묶여져서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즉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서 운동을 빼버릴 경우, 그 속의 질은 전부 풀어져서 자신의 동일성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있는 사물은 운동과 결합되어 있고 공간 또한 마찬가지로 유동flux 상태에 있다. 이러한 유동에서는 운동과 공간 모두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다. 유동 속에서 운동과 공간이 뭉쳐져서 서로 분간이 안 되는 상태에서, 공간과 시간은 점점 분리되어 나가고 형상 자체에 이르면 운동은 완전히 빠지게 된다. 즉 운동이 공간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운동이 완전히 나가서 운동과 공간이 딱 구별되어 나올 경우, 비로소 형상eidos이 나온다. 형상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유클리드 기하학도 모든 운동을 빼는 데서 성립한다. 운동이나 시간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인식이 안 되는 것이며 학문에서 문제는 사물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는 형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또한 문제는 모든 데이터가 동일 공간 속에 들어갈 때 그 일반적 성격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플라톤에게 데이터는 무가 아니라는 것. 없다는 것은 데이터가 될 수 없고, 데이터는 있는데 이것이 바로 존재ousia라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무와 존재 사이에는 단절이 있고 양자는 모순 관계에 있다(존재와 무는 서로 접촉contact하며 이 경계선에서 어느 쪽으로 떨어지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contingency이라는 것). 학문의 원칙은 데이터를 취급할 때 모순을 회피하라는 것, 모순율이다. 즉 데이터 속에 모순이 있으나 그 모순을 회피해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항상 존재론은 원인론aitiology이며, 모든 데이터들은 차이difference를 가지고 있는데 이 차이의 원인은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이는 모순이 아닌 것, 즉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다. 학문은 모순율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헤겔처럼 존재와 무가 합쳐진 것이라는 식의 얘기는 하지 않고 존재도 무도 아닌 제3의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때 다름의 원인은 존재도 무도 아닌 무한정자apeiron이다. 무한정자는 모순율에서처럼 단절이 없으므로 연속이 있고 무규정적indefinite인 것이다. 반대로 존재는 한정적definite이며 비연속성을 가진다. 동일성은 되풀이되는 것인 반면 차이는 모순하고 달리 차이의 정도를 극대화시키면 반대적opposite인 것이 되고 반대인 것은 또한 모순으로 간다. 그러나 차이는 반대가 아니며, 다름difference은 공존과 비공존의 양면을 지닌다. 이러한 다름이 비공존에서 나타날 때는 시간이라 하고 공존에서 나타날 때는 공간이라고 한다. 요컨대 어떤 것이 무한정자에서 나타나는 것은 항상 시간과 공간이 함께 나오며, 차이를 통해 나올 때는 항상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다 나온다.
플라톤은 이러한 형식적 존재론을 가지고 다른 사물들의 질서를 찾으려고 시도한다. 동일성과 차이 사이에는 정도 차가 있는데 이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우주의 질서를 정리하는 것(<티마이오스>)이다. 문제는 시간과 공간은 반대되는 것이어서 동시에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플라톤 철학의 난점이다. 사물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동시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물의 동일성이 나와야 하지만 두 개의 동일성이 반대되기 때문에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경험적인 세계로 내려가서 양자가 관계를 맺으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다. 이런 까닭에 플라톤은 자신의 우주론을 우화fable, 이야기mythos라고 부른다. 반면 형상의 일반적 척도만 가지고 설명하자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질료form-matter theory 이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운동은 움직이지 않는 것에 종속되며, 이 구도가 목적론의 전제이다. 이들의 존재론은 우주의 각 사물의 기본적인 자리매김classification을 가능하게 하고 우주 내에서 각 사물의 위치를 정의definition의 차원에서 정하려는 것이다. 정의의 차원에서 각 개별 과학이 완성될 때 존재론은 완성되며, 그래서 철학은 백과사전이 된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든 플라톤이든 철학은 all-wissen을 궁극 목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계승하는 것이 플로티누스 학파 및 스콜라 철학이다. 서유럽의 침입 이전의 이들은 미개인으로서 스스로 데이터를 다루지 못했다. 중세 초에 철학은 학교서 가르치듯 희랍이나 로마의 학문을 가르쳤다. 스콜라 철학은 데이터를 직접 다루지 않으며 주입식(폐쇄적, 세뇌식) 성격을 지녔다. 예컨대 스콜라 철학자는 말 이빨이 몇 개냐는 질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책을 보라고 답한다. 중세기 문화가 발달하고 데이터 취급 능력 및 기구들이 발달하면 스콜라 철학의 결론이 의문시된다(ex 천체의 운동). 결정적인 예가 갈릴레오의 피사의 사탑에서의 실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단적으로 질의 물리학이다. 존재가 운동하는 한에 있어서의 운동을 다루는 학이 바로 물리학이다. 갈릴레오의 실험과 더불어 스콜라 철학은 붕괴하며, 이런 의미에서 근대 학문의 개조자는 갈릴레오이다. 반면 데카르트의 경우 유동 이론에서 출발하여 모든 것을 회의한다. 플라톤도 유동 이론에서 출발하여 경험을 내부에서 정리해서 다시 검증해보자는 것이며, 이 점에서 데카르트는 플라톤의 후예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의심스러운 것이 인식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문제를 회피하고, 결국 데이터로부터 도피한다. 본래 science는 라틴어의 scire, scientia에서 나온 말로 주관적인 견해나 생각, 자의적인 사고는 다 빼버리라는 것이며, 희랍어의 epistêmê 역시 의견doxa과 항상 대립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반대되는 사상이 오귀스트 콩트의 사상으로서, 콩트 역시 중세기 신학과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그의 주장은 현상이나 사실fait 등 데이터로 주어진 것, 실증적positive인 것(<-> 허구적인 것)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콩트는 갈릴레오 물리학 같은 엄격한 학을 모든 학문에 적용하자고 한다. 가령 콩트는 사회학을 사회적 물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콩트에게서 학문은 수학, 무기물, 유기물, 사회학 순으로 전개되며 이를 모두 종합하는 것이 철학이 된다. 이 점에서 불란서 철학에서 근대 학문의 기초를 준 것은 오귀스트 콩트가 최초이다. 콩트가 낳은 실증주의는 후에 물리학, 화학, 레비-브륄 등의 인류학, 뒤르켐의 사회학, 병리학 등으로 발전된다. 우리 내면 세계는 실증적으로 증명해야지 데카르트의 코기토 등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불란서 심리학에서는 병리학, 최면술, 실어증 연구 등이 발달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콩트가 환원론자는 아닌데, 그는 모든 학문이 각 데이터에 따라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콩트의 실증주의와 관련하여 우연과 필연에 대한 결정론에 대한 논쟁이 등장하고 많은 메타과학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사유denken를 통한 현상학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란서 철학자 대부분은 수학자이자 실증과학자였다.
베르그송은 결정론에 관한 논쟁 이전에 생명 현상과 무생물 현상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생물은 자신의 기능을 그 어머니인 생물에서 받는데 이것이 유전(파스퇴르 실험)이다. 이때 유전되는 것은 형질이 아니라 기능이다. 유전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근대 물리학처럼 기계적mechanical인 원인은 항상 결과의 밖에 있으므로 유전을 설명하지 못한다. 기계론은 생명체가 갖는 물질적 부분에 있어서만 설명을 하지 생명 자체의 유전은 설명 못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 이론 역시 형상이 밖에서 질료에 주어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유전을 설명하지 못한다. 운동에 있어 운동의 존재는 일정한 성격을 갖는데, 운동이 운동 아닌 것으로 될 수 있는 측면이 바로 수동성passivity으로서 이것의 극한치가 정지이다. 운동이 일정하다는 것은 운동의 자기 동일성이고, 운동이 운동 이외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운동은 항상 지속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운동이 자기 밖에서 운동의 원인을 얻으면 그것은 양화되는 것이며 언제나 수동성을 요구한다.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운동은 그 운동을 타자로부터 받아들일 수 없기에 자기 운동자이다. 자발성spontanéité은 능동성의 근원이다. 베르그송은 물질이 엔트로피라고 일차적으로 정의한다. 베르그송은 생물과 무생물을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정의하려고 하는 까닭에 플라톤으로 간다. 플라톤도 운동을 중심으로 우주를 분류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질이 엔트로피라도 어느 기간이 걸려서 변하는 것이지 그냥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질도 어떤 의미에서는 지속하며, 따라서 물질과 생명체를 동일 차원에 놓고 다룰 수 있다는 이론이 나올 수 있다. 물질의 세계는 모든 것이 유동이고 모든 것은 변칙, 질quality 뿐이다. 물질과 달리 생명체는 反엔트로피이며 자발성과 자기 운동을 갖는다. 생명체의 자발성, 기능은 반엔트로피이며, 생명체는 언제든 변칙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존existence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여러 기능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현대 분자생물학에 의하면 분자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는 자신의 내부에 정보를 갖고 자신의 외부에 대해 그 정보를 조절해 가면서 자기 내부의 여러 기능을 분화시켜나간다고 한다. 이와 같은 분자생물학의 생각은 발생론적genetisch 측면에서 베르그송 이론과 유사하다. 베르그송은 물질이 분화되는 측면에서 시작하여 성인이 되는 과정으로, 다시 종으로 진행한다. 다음으로 능동성activity의 문제 발생한다. 운동은 A에서 B로 가는 것, 즉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인데 어떻게 운동의 자기 동일성이 유지되는가? 즉 운동 그 자체의 과거 상태의 지금에 있어서의 보존이 문제가 된다. 이 보존이 바로 기억이며, 불란서 심리학자들은 유전도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기억이라고 본다. <물질과 기억>이라는 책을 베르그송이 쓴 까닭이 바로 이 기억 때문인데, 생물과 물질의 차이는 바로 조절 능력과 기억에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하나의 모범형ideal Typus으로서 인간(어린아이나 장애인이 아니라 정상적인 성인)이 나오지만 베르그송에서는 종에서 성인이 되어 다시 종으로 가는 모든 순환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나오지 않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연속되어 나오는가도 보아야 한다. 인간은 생명체의 하나의 생태학적 어떤 외형aspect에 불과하다. 이렇게 보면 철학도 인간 생활의 하나의 생태학적 형태일 뿐이다. 왜 새가 되고 사람이 되는가? 그 상황에서 삶을 유지하려고 조절한 결과이다. 사람 형태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지 가령 바닷속에 살면 물고기 같은 형태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베르그송과 더불어 철학은 본질essentia의 입장에서 실존existentia의 입장으로 간다. 실제 생물학을 볼 경우 식물만이 자기 영양 섭취 능력을 지니지 다른 모든 동물은 가지고 있지 않다. 전부 식물의 기생충이자 일종의 불구자인데 이것을 메우기 위해 여러 가지 기구가 나온다. 인간의 대상화하는 능력도 이것의 일종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 공부하고, 학교도 아니고 복잡한 도구를 만들어내는 등 아주 복잡한 존재이다. 인간이 대상화시키는 능력이나 신경 계통이 나오는 것도 식물이 갖고 있는 능력을 보충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여기서 과거의 homo sapiens지성인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어지며, 베르그송의 입장에서 종에서 성인이 되어 종으로 가는 전 과정을 볼 때 그 밑에 공통치를 빼면 조절 능력, 즉 무의식이 나온다. 즉 무의식이 중심이며 대상화된 인식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실증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 근대의 인식론과 달리 베르그송의 인식론은 단순한 사변이 아니라 동물생태학, 식물학, 분자생물학 등 데이터를 모집해서 공통치를 논해야 나오는 것이다. 동물은 대상화하는 능력이 없어도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가령 병아리는 알에서 막 깨어나도 먹을 것, 못 먹을 것을 본능적으로 다 알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으면 안 되는지 배워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인간 중심의 경험론이나 합리론 등 인식론은 동물의 영역까지 보자면 재고해야 한다. 또한 베르그송에서 실증과학의 문제는 가령 이런 것이다. 앞서 본 것처럼 과학은 재는 데부터 시작한다. 플라톤은 질을 재는데서, 공간에 있는 것을 재는데서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대개념, 중개념, 소개념, 보편자, 특수자 등의 범주를 통해 질을 재어 양화시킨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질은 서로 다른 것인데 이를 어떻게 재느냐고 질문한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운동, 과정process은 잴 수 없는 것이고 기존의 실증과학은 운동이 지나간 그림자, 스쳐간 공간을 쟀을 뿐이다. 이처럼 실제 운동이 스쳐간 공간을 측정함으로써 모든 이론이 생기는 것이고 모든 학문은 실제 있는 변치로서의 세계를 단지 스쳐갈 따름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세계를 잴 수 없다는 것이다. 물질과 달리 생명 현상의 기본은 자발성이고, 자발성은 자기 조절하는 능력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척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척도를 받아들이면 인과 법칙에 빠지게 되지만 생명의 자율적인 측면은 잴 수 없는 것이다. 심리 현상은 어느 한계 이상으로 잴 수 없으며 이를 재려고 하면 물질 현상처럼 수학적 공간에 넣어야 하는데 이렇게 될 경우 실제 심리현상은 죽어버리고 만다. 베르그송에서 세계는 모두 변칙뿐이며 질로 가득 찬 상황situation이다.
플라톤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순율, 무가 아니라는 것은 모든 학문과 모든 데이터의 기본이다. 실재하는 사물은 언제나 일정한definite 것이다. 무한정적인 것과 자기동일성을 가진 것 중 존재에 가까운 것은 자기 동일성을 가진 것이다. 이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것은 일정한 것이다. 일정한 것의 극한치는 고유 명사이며 이것이 양화될 경우 보통 명사가 된다. 그러나 질, 운동, 되풀이되지 않는 내용은 잴 수 없는데 이럴 경우 모든 것이 변칙이 되고 만다. 법칙이 성립하려면 운동은 양화해야만 하고, 확정되어definite 있는 질을 빼버려야 하는데 질은 베르그송이 보였듯이 양화되지 않는다. 우주는 질로 차 있으며 일정한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법칙은 한정적 세계에서 무한정적 세계, 양적인 세계로 자꾸 내려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특정한 존재가 아닌 그냥 사람 일반을 말하는 것은 그가 질을 양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질은 양화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형상의 세계는 다 고유한 것이며 고유명사로서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본다. 어떤 형상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은 선험적a priori으로 주어질 수는 없다. 형상, 다가 성립하려면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사건으로서, 법칙도 사건으로서 성립한다. 만약 2+3=5가 성립하는 공간을 수학적 공간이라 하면 왜 수학적 공간이 성립하는지가 우선 문제이며, 그 공간에서 2가 성립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추상적 공간에 대해서는 순전한 우연이다. 우리에게는 모순율이 최고인데 이는 그것이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2가 성립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우연(2가 그 자체 무가 아닌 것으로서 무에 대비되어 단적으로 존재, 즉 모순율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2라는 그 존재의 까닭을 설명할 수는 없음)이다. 또한 2는 정적static이며 보탠다는 것은 동작, 운동인데 2를 보탠다는 것은 2에 대해 밖에서 주어진 운동이다. 2에 보탠다는 운동이 주어지냐 아니냐는 2에 대해 또한 순전히 우연적이다. 추상적 법칙이란 추상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따라서 어떤 영원한 법칙이 미리 선험적으로 있다는 것은 얘기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학문은 데이터에서 출발하지 어떤 이론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을 전부 구체적인 고유 명사로 썼는데, 이 점에서 베르그송은 플라톤의 한 특수한 계승자로 간주될 수 있다. 구체적 데이터는 어떤 추상적 사고도 안 들어간 데이터지만 또한 존재론적으로 실재reality이다. 항상 확정된definite 것의 극한치까지 가야하며 확정성의 극한치에서 무한정성의 극한치까지 모두 보자는 것이 플라톤의 철학이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서양철학의 주류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다. 플라톤과 유클리드 기하학 같은 정량적인 학은 이탈리아에서 오며, 형이상학도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서 온다(파르메니데스). 그리고 서유럽에서 불란서는 로마 문화의 맏딸로서, 희랍 철학 이후 서양 철학의 정수는 불란서로 간다. 오귀스트 콩트가 실증 과학의 배열, 분류, 분할 등을 시작하고 베르그송은 이에 대해 또 질문하고 대답한다. 결국 서양의 실증 과학에 대응할 수 있는 이론은 베르그송에서 끝난다. 요컨대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나 공간 둘 뿐인데, 플라톤은 둘 다를 놓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에서 형상 이론을 놓았으며 베르그송은 이를 시간에서 정리했다. 반복한 바와 같이 서양 철학의 주류는 데이터에서, 대상화된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예컨대 헤겔 같은 경우이다. 헤겔은 대상화된 세계에서의 모순율을 부정하기 때문에, 모순의 변증법을 다루는 <논리학> 같은 저서는 비합리주의적이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 그 주어진 상황에서 대상화된 세계를 조절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성립하는 자기의 동일성의 조절 능력이 주제라고 볼 수도 있다. 결국 단순히 어떤 철학이 좋냐 아니냐 하는 식의 논의는 무의미한 것이며, 모든 철학을 그 모든 측면에서 다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