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무비 SE - 할인행사
김인식 감독, 정찬 외 출연 / 엔터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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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의 뒷맛은 그다지 좋지 않다. '올해의 수작'이라는 평가가 그다지 유쾌하게 들리지 않는다. 김인식은 그의 "영화의 초점은 동성애에 있지 않다"라며 이 영화를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사랑 이야기로 봐달라고 주문한다. 감독의 손을 이미 떠난 작품에 대한 이런 주문은 명백히 월권이다. 그러나 한 수 접고 김인식이 권하는 길을 따라가 보자.



성애고 동성애고 간에 모든 사랑은 상처에서 시작된다. 찢김에서 시작된다는 이야기다. 나의 막이, 나의 에고가 찢겨지지 않고서 너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운명이 아닌가. 무릇 사랑하려는 자는 깨닫게 된다. 찢김을 두려워하는 자의 불안 앞에서 나의 욕망이란 하나의 날카로운 비수가 될 수도 있음을. 그는 찢김을 두려워하는 자의 불안한 빗장 앞에서 망설인다.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할 뿐'이다. 나는 너를 파괴하려는 자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는 존재일 뿐이라고 외쳐 보지만 그 외침은 속절없다. 사랑하는 자의 아픔은 그 외침의 속절없음에 있다. 그는 망설인다. 열리지 않는 타인의 육체 앞에서. 그러나 사랑의 진정성이란 즉각적인 욕망의 실현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자의 그 하염없는 망설임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나의 자유란 늘 타자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그쳐야 하는 것이므로.



든 욕망은 격렬하게 충족과 보상을 요구해 온다. 사랑하려는 자는 망설임에만 붙잡혀 있을 수 없다. 그는 접근하여 대상에게 손길을 뻗친다. 그러나 타자란 욕망에 저항하는 대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대상은 움찔한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위협을 하기도 한다. 어쩔 것인가. 내 몸을 받아들이지 않는 저 완강한 타인의 빗장 앞에서 사랑하는 자의 마음은 찢긴다. 내 욕망으로 타인을 무릎 꿇리고 제압하지 않는 한,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네가 나를 받아들이기까지 그는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내가 너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를 그는 증명해보인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너의 찢김, 너의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너의 온전함임을 그는 말하고 싶어한다. 언젠가는 너를 향한 나의 진정을 너도 이해해주겠지. 이것이 사랑을 기다리는 자의 성숙한 심리학이다. 대식은 우리에게 '사랑을 기다리는 자의 성숙한 심리학'을 보여준다. 내 욕망대로라면 당장이라도 너의 몸으로 쳐들어가고 싶지만 대식은 의연하게 석원을 기다려 주었다. 기다림이 대식의 휴머니즘이다. 그 휴머니즘은 결국 석원에게 보상을 받는다. 석원이 대식의 몸뚱이를 안고 있는 라스트 씬이 그것. 파열의 상처가 환하게 꽃봉오리를 여는 순간이다.



러나 석원에게 보여주었던 대식의 휴머니즘은 그의 아내와 아이와 일주에게는 눈꼽만큼도 베풀어지지 않는다. 대식의 권위주의적 남성성이 드러나는 대목이 바로 이곳이다. 그는 가장으로서 가정을 버렸다. 아이를 버리고 아내를 버렸다. 버려서는 안 될 것을 버렸다. 신산스럽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왔을 그의 아내와 아들도 이 대목에선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김인식은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는다. 대식의 아내는 연적(?)인 석원에게 말한다. "외로운 사람이니까 잘 해주세요." 그것은 대식의 아내에게서 나올 법한 발언이 아니다. 모든 고통의 발원지인 욕망을 깡그리 지운 '성불한 여자'나 할 수 있는 발언이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대식의 아내의 욕망을 지워버렸을까. 그것은 누구의 각본이었을까. 다른 도리가 없다. 김인식에게 그 혐의를 돌릴 수밖에.



속한 누구든 보상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 성불한 또 하나의 여자가 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일주다. 대체 어떤 깨달음의 경로를 통해 일주가 성불의 과정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일체 없다. 김인식에겐 일주가 어떤 경전을 읽었는지 관심 밖이다. 오직 남성의 욕망만이 관심의 대상일 따름. 대식의 아내와 그의 아들과 일주는 비주류다. 김인식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오직 남성의 욕망, 대식의 욕망일 뿐. 이 영화가 말하지 못해 안달하는 것은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대식과 욕망의 대상인 석원일 뿐이다.



어도 이 영화가 김인식의 말대로 '동성애를 말하지 않고 사랑을 말하는' 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대식의 아내와 일주에게 더 많은 발언권을 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배려는 이 영화에 없다. 김인식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우회하기보다는 정면돌파 하는 스타일이다. 게이 캐릭터는 보통 여성성이 강하고 다소 희화화돼서 보여지는 게 사실인데, 난 반대로 굉장히 남성적이고 땀 냄새가 풍겨나는 힘있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 속에 노동현장이 많이 들어간 거고. 지금까지 많이 보여졌던 희화화된 게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마초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영화의 뼈대를 잡을 때부터 힘있는 남성적인 영화를 생각했다."



무리 마초 냄새가 나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하더라도 김인식은 대식이 어째서 석원에게만 관대하고 그의 아내와 아이와 일주에게는 냉담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하진 않았을까. 석원에게는 휴머니스트였던 그가 왜 그의 아내와 아들과 일주 앞에서는 비정한 마초가 되어야 했던가를 말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쉽지만 없다. 이런 물음에 묵묵부답인 김인식은 대식으로 하여금 쓰러진 석원을 업고 제 집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배짱을 보여준다. 가장을 버렸던 남자가 제 연인을 들쳐업고 들어올 때 그의 아내가 겪어야 했을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는 그는 언급이 없다. 이 지독한 남성주의 앞에서 이 작품을 올해의 수작이라고 평가할 마음은 싹 가신다. 그러나 김인식도 조금은 미안했던 모양이다. '외삼촌이 아빠 맞죠?" 라고 묻는 아이를 외면하고 돌아서며 대식으로 하여금 오열케 한다. 난 그 오열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오열에 진정성은 없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욕망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근육적 파워가 없는 어린아이나 여자는 대식 앞에서 슬픈 식민지일 따름이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이성애자이건 동성애자이건 길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자신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길의 휴머니즘이리라. 로드무비엔 여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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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더 - [할인행사]
마이클 만 감독, 러셀 크로우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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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이익보다는 먼 장래의 이익을
 
 
시카고 지역에서만 7명의 사망자를 낸 타이레놀 독극물 사태는 'J&J'의 회사의 사운에 큰 영향을 미칠 만큼 큰 사건이었다. J&J는 시카고뿐만 아닌 전 미국 시장에서 타이레놀을 회수했고, 전 국민에게 위험을 알렸다. 이런 일을 하는 데 모두 1억 달러의 비용과 2,500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지는 “이 사건을 통해 J&J는 비용이 들더라도 옳은 일이라면 반드시 한다는 기업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반면, 보잉은 경쟁업체 록히드 마틴의 문건을 부당 입수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10억 달러에 이르는 공군의 로켓 수주를 취소 당했고, 공군 조달 담당 책임자를 재직 중 접촉해 채용한 것으로 밝혀져 조사를 받는 등 잇단 추문으로 곤욕을 치렀다.
 
영화 <인사이더>에서는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는 담배회사의 내부비리를 폭로한다. 유명한 미국 담배회사의 연구개발부 책임자 겸 부사장인 제프리 와이갠드(러셀 크로우)가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쫓겨난다. `의사소통 능력 부족'이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진짜 해고 사유는 다른 데 있었다. 니코틴 효과를 높여 판매를 촉진시킬 목적으로 담배 속에 인체에 유해한 암모니아 화합물을 첨가하는 데 대한 부당성을 지적한 것이 최고경영자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해고당한 와이갠드 박사는 마침내 입사 때 서명한 `비밀엄수 서약서'를 무시하고 방송에 나가 담배산업의 비리를 폭로하기로 결심한다. 이 때부터 그와 가족을 죽여버리겠다는 전자메일이 날아드는가 하면, 집 우편함에서 권총실탄이 발견되는 등 줄곧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한국 기업에서도 이제는 자율적인 정화운동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 전국경제인연합회가 30개사를 대상으로 기업윤리·기업가치와 성과의 관계를 분석,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윤리헌장을 제정하고 전담 부서를 두는 등 윤리경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주가 상승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장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단 음식은 건강을 망친다. 같은 이치다. 눈 앞의 이익만을 생각해서 불법을 저지르다가 기업의 이미지를 손상당하고, 손상당한 기업의 이미지는 기업의 발전에 큰 장애 요인이 된다. 윤리경영은 기업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제고된 기업의 이미지는 기업의 발전에 밑거름이 된다. 눈앞의 이익보다는 먼 장래의 이익을 생각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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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SE (2disc)
이준익 감독, 박중훈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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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웃자고 한 얘기를 정색하고 따지고 들면 결례다. 따지는 사람만 머쓱할 뿐이다. <황산벌>의 이준익 감독이 선택한 전략이 ‘머쓱하게 하기’는 아닐지. 그렇다면 <황산벌>이 골머리 앓을 필요가 없는 가볍고 상큼한 코미디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비장과 해학 사이에, 아(雅)와 속(俗) 사이에, 역사와 드라마 사이에 영화는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그것을 두고 ‘퓨전역사코미디’다 어쩐다 하는지 모르겠다. 논박은 미루고 일단 텍스트로 가자.

당나라 황제는 백제와 고구려를 천하의 안정과 질서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선포한다. 어디서 익히 들어 본 말이다. 옳다. 부시의 팽창적 패권주의가 북한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현실에 대한 절묘한 패러디로 읽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패러디는 얕다. 재치, 그 이상은 아니다. 코미디니까, 라고 작가는 항변한다. 영화의 텍스트가 수용자 안의 대뇌 혈관으로 침투해 내파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결국 웃으라는 이야기다. 코미디니까. 그럼 역사는? 하기는 비판의식을 앙양할 목적이라면 애초에 영화관을 선택한 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신라와 백제가 싸울 때 사투리를 썼을 것이라는 점, 계백의 아내가 죽을 때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진 않았을 거라는 점, 계백을 충신의 귀감으로 삼지만 이데올로기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일 수 있다는 점 등 진짜 역사적 사실은 어땠을까, 라는 점에 주목했다.” 라는 것이 <황산벌>의 기획자 조철현씨의 말이다. 기획의 변은 비장하지만 텍스트는 기획의 의도와 자꾸 엇갈린다. 허긴 기획자의 의도가 곧바로 텍스트의 미학적 완성도를 보장해주는 행복한 영화를 만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사투리를 썼느냐 말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모든 텍스트는 결국 ‘현재’의 텍스트일 뿐이다. 엄밀한 고증을 통해 당시의 문체를 복원해서 영화 텍스트를 만들었다면 리얼리티가 역동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을까. 천만에다. 사실의 충실한 재현에 리얼리티의 완성도가 있는 것이라면 고증에만 수억을 썼어야 옳다. 하지만 사실의 완벽한 재현은 죽었다 깨도 달성할 수 없거니와 설령 달성할 수 있다 치더라도 달성할 이유도 없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다지 부가가치가 없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가령, 늙은이 젊은이 가릴 것 없이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반말을 내뱉는 성경 속의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겨, 아무리 성인이라지만 법도가 있는 법, 예의범절을 갖추신 성인께서 어찌 아래와 위를 분간치 못하겠느냐, 고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예수보다는 겸손하고 자상하신 예수가 실상에 부합하지 않겠느냐며 정중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모든 성경 속의 예수의 어투를 존댓말로 고쳤다고 해서 성경 속의 진실이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 하기는 성경 속의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예수의 어투를 좀더 겸손한 어투로 바꿔보자는 번역가들의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가 사용했다는 고대 앗시리아 언어를 오늘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도 녹록치 않은 작업일 것이다. 게다가 번역은 반역이라던가. 번역은 파일을 복사하듯 순순히 진행되는 작업이 아니다. 그런 작업에 대한 천착 없이 ‘진짜 역사’ 운운하는 것은 듣기에 다소 민망스럽다.

사실과 리얼리티는 별개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이 곧바로 리얼리티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예수의 진정성은 예수의 언어를 얼마나 사실대로 복원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듯 드라마의 진정성 또한 얼마만큼의 사실성을 충실하게 재현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드라마는 사실의 죽음 위에 설 수밖에 없다. 사실을 버리고도 드라마는 가능하다. 사실을 뛰어넘는 어떤 것, 허구는 사실보다 위대하다. 굳이 사실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황산벌>의 사투리는 분명 리얼리티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의도’에서 동원되었음이 틀림없다. 기획자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솔직하게 코미디다 하면 될 것을.

코미디에 웬 비장? 계백의 눈빛 어디에서도 가벼운 해학을 읽을 수 없다. 순교자의 비장함이 번득인다. ‘거시기’와 ‘머시기’가 남발되면서 극장은 시시깔깔 질펀한 난장이지만 박중훈은 여간해선 웃지 않을 태세다. 웃으면 비장은 끝장이다. 모든 순교자는 시종일관 엄숙한 표정을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로답게 박중훈은 표정을 제대로 관리한다. 런닝타임 동안 한번도 얼굴근육을 함부로 이완시키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제작진의 주문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영화를 코미디라고 우겨도 중훈아, 너의 비장한 얼굴만이 이 영화를 비루한 코미디에서 구제해줄 수 있는 거야. 이런 제작진의 의도는 그런 대로 성공적이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그럴 듯해보이지만 실상은 파시즘의 위장된 논리에 불과하다는 것.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란 따지고 보면 개죽음일 수도 있다는 것, 거창한 이념의 구현을 위해 개인의 생명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 무거운 주제를 그럴싸하고도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배우는 주연급의 박중훈이 아니라 까메오로 출연한 김선아다. 이데올로기고 나발이고 목숨보다 중한 것은 없다는 메시지가 김선아의 전라도 사투리에 실린다.(이 한 대목으로 해서 김선아는 비로소 우리 영화의 김선아가 되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후로 이렇게 묵직한 메시지가 전라도 사투리에 실린 적이 있을까.

"호랭이는 가죽 땜시 디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디지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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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4-10-19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느라고 헉헉대고 있습니다. 갑자기 이 많은 영화 리뷰의 회오리는 무엇입니까^^

감각의 박물학 2004-10-19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이씨네와 서울신문에 연재한 것을 한꺼번에 올렸습니다. (도배는 안 좋은 건데...죄송합니다)

깍두기 2004-10-1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럼 위 두곳에 가면 님의 글을 볼 수 있다는 말씀?? 그럼 님은 영화 평론가시군요? 오, 영광이어요^^

깍두기 2004-10-19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저는 님께 인사도 안드리고 불쑥 이러고 있는 것 같은데.....제가 방명록에 인사한 걸로 착각하고 이런 실례를 저질렀네요. 죄송합니다. 즐찾을 하면 인사부터 해야 하는데 몰래 훔쳐보다 민망한 짓을 해버렸네요. 죄송해요^^

감각의 박물학 2004-10-19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안녕하셔요 조이씨네Jocine.co.kr에서 코드로 보는 영화 쓰고 있습니다. 서울신문에는 청소년섹션에 쓰고 있구요..평론가는 아니구요 아마추어입니다
 
존 말코비치 되기 - 할인행사
스파이크 존즈 감독, 카메론 디아즈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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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생을 바꿔봐

할리우드에서 가장 기상천외한 데뷔작이라고 평가받는 <존 말코비치 되기>는 그 평가에 합당할 만큼의 유쾌한 코미디다. 어떤 할리우드의 영화문법에도 묶이지 않고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발랄하게 논다. 엉뚱하고 기괴하지만 스파이크 존즈의 장난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크레이그(존 쿠삭)는 똑 부러지는 직업도 없다. 거리에서 인형을 다루는 '퍼펫티어'로 일을 하며 빌빌거린다. 아내 라티(카메론 디아즈)는 일에만 파묻혀서 사는 애완가게 점원. 야망도 사랑도 없이 밋밋하기 짝이 없는 나날을 보내던 크레이그 드디어 그 특유의 민첩한 손놀림으로 맨하탄에 위치한 별난 건물인 7과 1/2층의 레스터 회사에 서류 정리 사원으로 일자리를 얻게 된다. 그는 오리엔테이션에서 여직원인 멕신(캐서린 키너)에게 정열적인 사랑을 느끼게 되지만 그녀는 냉담하기 짝이 없다. 멕신에게는 꼭두각시 조종술사는 암만해도 매력적인 직업이 아니었나 보다. 낙심한 그는 서류 정리 중, 캐비닛 뒤의 작은 문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존 말코비치의 뇌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바로 존 말코비치가 되는 것이다. 존 말코비치, 난다긴다하는 걸출한 스타는 아니지만 할리우드의 스타반열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사람 아닌가. 때론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욕망을 크레이그는 체현한 셈. 크레이그는 15분 동안 존 말코비치의 뇌 속에 머물다가 뉴저지의 고속도로 진입로에 떨어진다. 크레이그는 이 사실을 부인과 멕신에게 알린다. 사업적 수완이 좋은 멕신은 이를 이용해 사업을 하자고 제안하고 이 사업은 나날이 번창해 간다. 한편 남편의 소개로 말코비치 안에 들어간 라티는 말코비치를 통해 멕신과 사랑을 나눈다. 두 여자는 사랑에 빠지지만, 오직 라티가 말코비치 안에 있을 때만 정사를 나눈다. 이에 크레이그는 멕신을 감금하고 인형극 연출 경험을 살려 말코비치를 장악, 그를 유명한 인형극 연출가로 변신시키고 멕신을 차지한다. 레스터사 사장인 레스터 박사는 라티에게 말코비치는 사람들의 몸을 옮겨 다니며 영생을 즐기는 사람들의 비밀 조직이 이용하는 여러 ‘배관’들 중 하나임을 알려 준다. 그들의 꾐에 빠진 크레이그는 말코비치 밖으로 나오게 되고, 그들은 다시 말코비치를 차지한다. 몇 년 뒤, 라티와 멕신은 커플이 되어 귀여운 딸을 키운다. 크레이그는 아직도 멕신을 그리며 그 딸 안에 들어 있다.

왜 꼭두각시 조종술사인가

대체 뭐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세상. 변변한 학력도, 먹히는 배경 하나 없는 삼류들에게 세상은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꼭두각시를 내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IMF 이후 갈 데 없는 이 땅의 가장들이 PC방으로 출퇴근을 했다던데, 되는 게 없는 세상에서 게임 속의 캐릭터만이라도 마음대로 조종해보겠다는 저 가장들의 마음엔 세상의 변두리를 빌빌거리던 크레이그의 심정이 투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꼭두각시 조종술사, 퍼펫티어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이머나. 클릭을 하는 서퍼를 닮았다. 꼭두각시들이나 게임 속의 케릭터들은 손과 손가락이 가자는 데로 간다. 세상 속에서 빌빌거리던 자가 가상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눈치볼 것도 없고 굽신거릴 것도 없다. 골치 아픈 미래는 잊어도 좋다. 캐릭터들의 운명은 철저하게 내 의지에 달려있다. 민첩하게 놀리는 내 손가락에 달려있다. 현실의 패배자, 크레이그가 버츄얼 리얼리티의 승리자가 되는 순간이다.

왜 7과 2분의 1인가?

반쪽짜리 건물, 이곳에선 등을 잔뜩 굽혀야 한다. 큰 키를 자랑하려다간 자칫 목뼈를 다칠 수 있다. 폼 나게 생긴 사람도 일단 굽히면 스타일을 구긴다. 적어도 이 건물에서는 그렇다. 일단 앉을 필요가 있다. 이 건물은 앉으면 자연스러워지는 공간이다. 앉으면 자연스러워지는 공간? 게임룸이 그런 곳은 아닐까. 게임룸은 버츄얼 리얼리티, 가상현실의 세계, 그 동화와 판타지의 세계로 우릴 인도하는 곳이 아닌가. 우린 가상의 현실 속에서 존 말코비치도 되고 WWE의 레슬러도 되고 툼레이더의 여전사도 되고, 페르시안 왕자도 될 수 있다. 당신의 삶이 누추한가. 그렇다면 이곳, 버츄얼 리얼리티에서 당신은 당신의 삶을 갈아치울 수도 있다. 누추한 현실의 의상을 벗고 언제라도 판타지의 의상으로 갈아입을 수 있다.

왜 하필 <존 말코비치 되기>인가?

리처드 기어 되기? 이상하다. 숀 코넬리 되기, 로버트 드니로 되기, 숀 펜 되기? 역시 이상하다. 왜일까? 어감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그들은 너무 알려졌다. 익숙한 것은 신선도가 떨어진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이미지의 시대, 연계의 시대가 아닌가.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뭔가 폼 나는 느낌, 새롭다는 느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다. 더 폼 나고 새롭다는 느낌을 주는 배우의 이름이 있다면 존 말코비치가 굳이 아니라도 좋았을 것이다. 이 영화는 세상이 이미 이미지 시대로 깊숙하게 진입했음을 말해준다.

왜 하필 뉴저지의 고속도로 입구인가

버츄얼 리얼리티의 삶은 잠시뿐이다. 15분이거나 그 이상, 또는 그 이하의 시간일 뿐이다. 현실은 피할 수 없다. 당신은 뉴저지의 고속도로 변에 다시 내팽겨쳐진다. 고속도로? 대단한 은유 아닌가? 그곳에는 광속의 속도로 차들이 질주한다. 속도엔 인정이나 자비가 없다. 게임의 법칙이란 '빨리빨리'. 조금이라도 지체하는 자는 뒤쳐지게 마련이다. 이 고속도로에서 인간은 기계의 리듬을 배워야 한다. 가끔은 '느림'의 미덕을 찬양하는 얼빠진 인문주의자도 있는가 보다. 하지만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먹고 먹히는 승부의 세계다. 비정성시의 한복판이다. 이곳에서 적응할 수 없다면 다시 그 개구멍으로 기어들 수밖에 없다. 그 입구는 음침하지만 그 끝에서 우린 다른 인생을 살아볼 수 있다. 가난뱅이는 가난뱅이의 옷을 벗고 부자의 의상으로 갈아입고, 여자는 여자의 의상을 벗고 남자의 의상으로 갈아입을 수 있다. 존 말코비치는 할리우드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버츄얼 리얼리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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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UE
장이모 감독, 이연걸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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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우가 오바를 했다. <와호장룡>의 ‘리안’ 감독을 넘어서 명실공히 ‘장이모우’라는 브랜드가 중국영화를 대표하는 상품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지나쳤을까. 아무리 천하의 메이저리그 일급 투수라 할지라도 손목에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면 ‘똥볼’이 나오는 법. 이 글은 장이모우가 왜 ‘똥볼’을 던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하는 글이다. 글은 주관적이고 가끔 오바를 한다. 혜량하옵시기를.

안 감독은 <와호장룡>을 통해 수려한 무술의 영상을 선보인다. 미국의 자본과 홍콩영화의 전통이 어우러져 보여주는 <와호장룡>의 세계는 아름답다. 할리우드가 먼저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갈채를 보낸다. 장이모우 또한 이 박수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결심한다. 리안이 한 일을 왜 나라고 못하겠는가. 더구나 나는 미국의 자본이 아닌 중국의 자본으로 리안이 해낸 그 이상을 해내리라. 그 결의는 비장하다.

렇다면 리안은 무엇을 해냈는가. 장이모우는 섶에 누워 쓸개를 핥으며 리안 그 너머를 고찰해야 해야 옳았다.

안은 환상적 무술 속에, 느리면서도 애잔한 첼로의 선율 속에, 광활한 고원의 사막의 풍경 속에 얽히고 설킨 욕망의 지형도를 그려내었다. 귀족의 딸로서 낮에는 범절 있는 아가씨로 행세하지만 밤에는 변복을 하고 웅크린 욕망을 발산하는 용. 그녀는 자신을 납치했다 풀어준 호를 늘 그리워하면서도 막상 그가 찾아오자 함께 도망가지는 않는다. 용 속에 꿈틀거리는 욕망은 중국인만의 욕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류(類)로서의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보편적인 욕망이었다. 친구와의 의리로 평생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욕망을 숨긴 채로 살아가는 리무바이와 슈리엔의 억압된 욕망 또한 중국인들만의 욕망이 아니었다. <와호장룡>이 보여주었던 세계는 인간이면 누구나 지닐 법한 보편적인 욕망의 지형도였다.

드웨어로서의 무(武)만을 보여주어선 안 된다. 그것은 이미 홍콩영화가 신물이 날 만큼 보여주지 않았던가. 자본의 어시스트를 받은 할리우드의 액션은 이미 족탈불급, 가히 신출귀몰의 수준이 아닌가. 세계 시장에서 구매력을 획득하기 위해선 익사이팅한 것 그 이상의 ‘물컹한 그 무엇’이 필요하다. 보편적인 무언가를 보여주어야만 한단 말이다. 옳다. 영화에 동양적인 정신성을 가미하면 어떨까. 이런 장이모우의 강박관념이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천하’. 대의를 위하여 개인의 사리사욕을 버릴 줄 아는 사신취의(捨身取義)의 경지가 그것, 장이모우는 '협(俠)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문화일보 기자 도올의 질문에 장황하게 답한다. (수사의 정확함을 고려한다면 그 대답은 영화 이전에 준비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대의를 위하여 개인의 사리사욕을 버릴 줄 아는 사신취의(捨身取義)의 정신이다.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金庸)선생도 협지대자(俠之大者)는 위국위민(爲國爲民)이라고 말했다. 협이란 삶의 큰 목표가 있는 사람이다. 그 목표란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하고,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 천하의 기쁨은 나중에 기뻐한다)하는 동방인의 보편관념이다. 이러한 보편관념이 <영웅>에서는 천하(天下)라는 두 글자로 표현된 것이다."

중들의 끝없는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해 진시황의 천하통일의 논리를 받아들인다는 파검(破劍)의 논리는 매우 그럴싸한 평화주의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런 장이모우식의 평화주의는 제국의 참회와 반성으로서 얻어지는 평화주의가 아니라 주변부(파검과 무명)의 반성과 그에 따른 투항의 결과라는 데 점화의 소지가 있다. (재밌게 놀자는 영화를 가지고 뭘 어렵게 제국주의론을 들먹이냐는 항변에 대꾸하는 것은 나의 임무가 아니다.) 진정한 ‘천하’는 주변부의 반성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는 것임은 독립을 갈망하는 작금의 ‘티벳사태’가 잘 말해주지 않던가. 딜라이 라마를 따르는 인민들은 칼을 놓았다. 그들에겐 제국과 싸울 무기도 없고, 제국에 대한 증오도 없다. 그러나 중국이란 제국은 그들에게 여전히 냉담하다. ‘천하’의 논리란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세계사가 요구하는 천하의 논리는 주변부의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엄밀히 그것은 제국의 중심에서 깊이 있게 말해져야 한다. <영웅>에는 중심의 반성, 그것이 빠져 있다. 단지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자본의 시장에서 헤게모니를 쥐어야 한다는 장이모우의 제국주의가 화면을 칠갑한다.

론 보편적인 것만을 장이모우는 강조하지 않는다. 무술과 서예와 음악 등 중국 문화를 전시하는 데도 장이모우는 바쁘다. 보편과 특수 사이를 오락가락하려니 서사는 서사대로 엉성해지고 스타일을 뽐내려는 화면은 멋은 있지만 대신 깊이를 잃는다.

성할 줄 모르는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시스템 속의 구성분자들만 열심히 반성해봐야 말짱 헛일이 아닌가. 적어도 그런 반성이 헛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매우 불공평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렇지 않아도 주변국에서는 ‘9.11 테러사건’이다, ‘촛불시위’다, 자본으로 세계를 석권하려는 맥도날드식의 일방적인 세계화다 해서 뒤숭숭한 판국이다. 이런 판국에 ‘천하’를 위해 반항을 포기하라는 식의 평화주의는 찜찜한 정도를 넘어서 허탈하기까지 하다. 이미 중국이 주변국의 지위를 벗어나 중심국의 반열에 올랐다는 장이모우의 영웅적인 중화주의가 이 영화의 저변에 깔린 것은 아닐까를 생각하면 그 허탈감은 분노로까지 기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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