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존 말코비치 되기 - 할인행사
스파이크 존즈 감독, 카메론 디아즈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당신의 생을 바꿔봐
할리우드에서 가장 기상천외한 데뷔작이라고 평가받는 <존 말코비치 되기>는 그 평가에 합당할 만큼의 유쾌한 코미디다. 어떤 할리우드의 영화문법에도 묶이지 않고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발랄하게 논다. 엉뚱하고 기괴하지만 스파이크 존즈의 장난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크레이그(존 쿠삭)는 똑 부러지는 직업도 없다. 거리에서 인형을 다루는 '퍼펫티어'로 일을 하며 빌빌거린다. 아내 라티(카메론 디아즈)는 일에만 파묻혀서 사는 애완가게 점원. 야망도 사랑도 없이 밋밋하기 짝이 없는 나날을 보내던 크레이그 드디어 그 특유의 민첩한 손놀림으로 맨하탄에 위치한 별난 건물인 7과 1/2층의 레스터 회사에 서류 정리 사원으로 일자리를 얻게 된다. 그는 오리엔테이션에서 여직원인 멕신(캐서린 키너)에게 정열적인 사랑을 느끼게 되지만 그녀는 냉담하기 짝이 없다. 멕신에게는 꼭두각시 조종술사는 암만해도 매력적인 직업이 아니었나 보다. 낙심한 그는 서류 정리 중, 캐비닛 뒤의 작은 문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존 말코비치의 뇌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바로 존 말코비치가 되는 것이다. 존 말코비치, 난다긴다하는 걸출한 스타는 아니지만 할리우드의 스타반열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사람 아닌가. 때론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욕망을 크레이그는 체현한 셈. 크레이그는 15분 동안 존 말코비치의 뇌 속에 머물다가 뉴저지의 고속도로 진입로에 떨어진다. 크레이그는 이 사실을 부인과 멕신에게 알린다. 사업적 수완이 좋은 멕신은 이를 이용해 사업을 하자고 제안하고 이 사업은 나날이 번창해 간다. 한편 남편의 소개로 말코비치 안에 들어간 라티는 말코비치를 통해 멕신과 사랑을 나눈다. 두 여자는 사랑에 빠지지만, 오직 라티가 말코비치 안에 있을 때만 정사를 나눈다. 이에 크레이그는 멕신을 감금하고 인형극 연출 경험을 살려 말코비치를 장악, 그를 유명한 인형극 연출가로 변신시키고 멕신을 차지한다. 레스터사 사장인 레스터 박사는 라티에게 말코비치는 사람들의 몸을 옮겨 다니며 영생을 즐기는 사람들의 비밀 조직이 이용하는 여러 ‘배관’들 중 하나임을 알려 준다. 그들의 꾐에 빠진 크레이그는 말코비치 밖으로 나오게 되고, 그들은 다시 말코비치를 차지한다. 몇 년 뒤, 라티와 멕신은 커플이 되어 귀여운 딸을 키운다. 크레이그는 아직도 멕신을 그리며 그 딸 안에 들어 있다.
왜 꼭두각시 조종술사인가
대체 뭐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세상. 변변한 학력도, 먹히는 배경 하나 없는 삼류들에게 세상은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꼭두각시를 내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IMF 이후 갈 데 없는 이 땅의 가장들이 PC방으로 출퇴근을 했다던데, 되는 게 없는 세상에서 게임 속의 캐릭터만이라도 마음대로 조종해보겠다는 저 가장들의 마음엔 세상의 변두리를 빌빌거리던 크레이그의 심정이 투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꼭두각시 조종술사, 퍼펫티어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이머나. 클릭을 하는 서퍼를 닮았다. 꼭두각시들이나 게임 속의 케릭터들은 손과 손가락이 가자는 데로 간다. 세상 속에서 빌빌거리던 자가 가상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눈치볼 것도 없고 굽신거릴 것도 없다. 골치 아픈 미래는 잊어도 좋다. 캐릭터들의 운명은 철저하게 내 의지에 달려있다. 민첩하게 놀리는 내 손가락에 달려있다. 현실의 패배자, 크레이그가 버츄얼 리얼리티의 승리자가 되는 순간이다.
왜 7과 2분의 1인가?
반쪽짜리 건물, 이곳에선 등을 잔뜩 굽혀야 한다. 큰 키를 자랑하려다간 자칫 목뼈를 다칠 수 있다. 폼 나게 생긴 사람도 일단 굽히면 스타일을 구긴다. 적어도 이 건물에서는 그렇다. 일단 앉을 필요가 있다. 이 건물은 앉으면 자연스러워지는 공간이다. 앉으면 자연스러워지는 공간? 게임룸이 그런 곳은 아닐까. 게임룸은 버츄얼 리얼리티, 가상현실의 세계, 그 동화와 판타지의 세계로 우릴 인도하는 곳이 아닌가. 우린 가상의 현실 속에서 존 말코비치도 되고 WWE의 레슬러도 되고 툼레이더의 여전사도 되고, 페르시안 왕자도 될 수 있다. 당신의 삶이 누추한가. 그렇다면 이곳, 버츄얼 리얼리티에서 당신은 당신의 삶을 갈아치울 수도 있다. 누추한 현실의 의상을 벗고 언제라도 판타지의 의상으로 갈아입을 수 있다.
왜 하필 <존 말코비치 되기>인가?
리처드 기어 되기? 이상하다. 숀 코넬리 되기, 로버트 드니로 되기, 숀 펜 되기? 역시 이상하다. 왜일까? 어감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그들은 너무 알려졌다. 익숙한 것은 신선도가 떨어진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이미지의 시대, 연계의 시대가 아닌가.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뭔가 폼 나는 느낌, 새롭다는 느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다. 더 폼 나고 새롭다는 느낌을 주는 배우의 이름이 있다면 존 말코비치가 굳이 아니라도 좋았을 것이다. 이 영화는 세상이 이미 이미지 시대로 깊숙하게 진입했음을 말해준다.
왜 하필 뉴저지의 고속도로 입구인가
버츄얼 리얼리티의 삶은 잠시뿐이다. 15분이거나 그 이상, 또는 그 이하의 시간일 뿐이다. 현실은 피할 수 없다. 당신은 뉴저지의 고속도로 변에 다시 내팽겨쳐진다. 고속도로? 대단한 은유 아닌가? 그곳에는 광속의 속도로 차들이 질주한다. 속도엔 인정이나 자비가 없다. 게임의 법칙이란 '빨리빨리'. 조금이라도 지체하는 자는 뒤쳐지게 마련이다. 이 고속도로에서 인간은 기계의 리듬을 배워야 한다. 가끔은 '느림'의 미덕을 찬양하는 얼빠진 인문주의자도 있는가 보다. 하지만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먹고 먹히는 승부의 세계다. 비정성시의 한복판이다. 이곳에서 적응할 수 없다면 다시 그 개구멍으로 기어들 수밖에 없다. 그 입구는 음침하지만 그 끝에서 우린 다른 인생을 살아볼 수 있다. 가난뱅이는 가난뱅이의 옷을 벗고 부자의 의상으로 갈아입고, 여자는 여자의 의상을 벗고 남자의 의상으로 갈아입을 수 있다. 존 말코비치는 할리우드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버츄얼 리얼리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