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UE
장이모 감독, 이연걸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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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모우가 오바를 했다. <와호장룡>의 ‘리안’ 감독을 넘어서 명실공히 ‘장이모우’라는 브랜드가 중국영화를 대표하는 상품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지나쳤을까. 아무리 천하의 메이저리그 일급 투수라 할지라도 손목에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면 ‘똥볼’이 나오는 법. 이 글은 장이모우가 왜 ‘똥볼’을 던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하는 글이다. 글은 주관적이고 가끔 오바를 한다. 혜량하옵시기를.

안 감독은 <와호장룡>을 통해 수려한 무술의 영상을 선보인다. 미국의 자본과 홍콩영화의 전통이 어우러져 보여주는 <와호장룡>의 세계는 아름답다. 할리우드가 먼저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갈채를 보낸다. 장이모우 또한 이 박수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결심한다. 리안이 한 일을 왜 나라고 못하겠는가. 더구나 나는 미국의 자본이 아닌 중국의 자본으로 리안이 해낸 그 이상을 해내리라. 그 결의는 비장하다.

렇다면 리안은 무엇을 해냈는가. 장이모우는 섶에 누워 쓸개를 핥으며 리안 그 너머를 고찰해야 해야 옳았다.

안은 환상적 무술 속에, 느리면서도 애잔한 첼로의 선율 속에, 광활한 고원의 사막의 풍경 속에 얽히고 설킨 욕망의 지형도를 그려내었다. 귀족의 딸로서 낮에는 범절 있는 아가씨로 행세하지만 밤에는 변복을 하고 웅크린 욕망을 발산하는 용. 그녀는 자신을 납치했다 풀어준 호를 늘 그리워하면서도 막상 그가 찾아오자 함께 도망가지는 않는다. 용 속에 꿈틀거리는 욕망은 중국인만의 욕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류(類)로서의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보편적인 욕망이었다. 친구와의 의리로 평생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욕망을 숨긴 채로 살아가는 리무바이와 슈리엔의 억압된 욕망 또한 중국인들만의 욕망이 아니었다. <와호장룡>이 보여주었던 세계는 인간이면 누구나 지닐 법한 보편적인 욕망의 지형도였다.

드웨어로서의 무(武)만을 보여주어선 안 된다. 그것은 이미 홍콩영화가 신물이 날 만큼 보여주지 않았던가. 자본의 어시스트를 받은 할리우드의 액션은 이미 족탈불급, 가히 신출귀몰의 수준이 아닌가. 세계 시장에서 구매력을 획득하기 위해선 익사이팅한 것 그 이상의 ‘물컹한 그 무엇’이 필요하다. 보편적인 무언가를 보여주어야만 한단 말이다. 옳다. 영화에 동양적인 정신성을 가미하면 어떨까. 이런 장이모우의 강박관념이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천하’. 대의를 위하여 개인의 사리사욕을 버릴 줄 아는 사신취의(捨身取義)의 경지가 그것, 장이모우는 '협(俠)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문화일보 기자 도올의 질문에 장황하게 답한다. (수사의 정확함을 고려한다면 그 대답은 영화 이전에 준비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대의를 위하여 개인의 사리사욕을 버릴 줄 아는 사신취의(捨身取義)의 정신이다.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金庸)선생도 협지대자(俠之大者)는 위국위민(爲國爲民)이라고 말했다. 협이란 삶의 큰 목표가 있는 사람이다. 그 목표란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하고,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 천하의 기쁨은 나중에 기뻐한다)하는 동방인의 보편관념이다. 이러한 보편관념이 <영웅>에서는 천하(天下)라는 두 글자로 표현된 것이다."

중들의 끝없는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해 진시황의 천하통일의 논리를 받아들인다는 파검(破劍)의 논리는 매우 그럴싸한 평화주의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런 장이모우식의 평화주의는 제국의 참회와 반성으로서 얻어지는 평화주의가 아니라 주변부(파검과 무명)의 반성과 그에 따른 투항의 결과라는 데 점화의 소지가 있다. (재밌게 놀자는 영화를 가지고 뭘 어렵게 제국주의론을 들먹이냐는 항변에 대꾸하는 것은 나의 임무가 아니다.) 진정한 ‘천하’는 주변부의 반성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는 것임은 독립을 갈망하는 작금의 ‘티벳사태’가 잘 말해주지 않던가. 딜라이 라마를 따르는 인민들은 칼을 놓았다. 그들에겐 제국과 싸울 무기도 없고, 제국에 대한 증오도 없다. 그러나 중국이란 제국은 그들에게 여전히 냉담하다. ‘천하’의 논리란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세계사가 요구하는 천하의 논리는 주변부의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엄밀히 그것은 제국의 중심에서 깊이 있게 말해져야 한다. <영웅>에는 중심의 반성, 그것이 빠져 있다. 단지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자본의 시장에서 헤게모니를 쥐어야 한다는 장이모우의 제국주의가 화면을 칠갑한다.

론 보편적인 것만을 장이모우는 강조하지 않는다. 무술과 서예와 음악 등 중국 문화를 전시하는 데도 장이모우는 바쁘다. 보편과 특수 사이를 오락가락하려니 서사는 서사대로 엉성해지고 스타일을 뽐내려는 화면은 멋은 있지만 대신 깊이를 잃는다.

성할 줄 모르는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시스템 속의 구성분자들만 열심히 반성해봐야 말짱 헛일이 아닌가. 적어도 그런 반성이 헛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매우 불공평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렇지 않아도 주변국에서는 ‘9.11 테러사건’이다, ‘촛불시위’다, 자본으로 세계를 석권하려는 맥도날드식의 일방적인 세계화다 해서 뒤숭숭한 판국이다. 이런 판국에 ‘천하’를 위해 반항을 포기하라는 식의 평화주의는 찜찜한 정도를 넘어서 허탈하기까지 하다. 이미 중국이 주변국의 지위를 벗어나 중심국의 반열에 올랐다는 장이모우의 영웅적인 중화주의가 이 영화의 저변에 깔린 것은 아닐까를 생각하면 그 허탈감은 분노로까지 기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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