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 SE (2disc)
이준익 감독, 박중훈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한 번 웃자고 한 얘기를 정색하고 따지고 들면 결례다. 따지는 사람만 머쓱할 뿐이다. <황산벌>의 이준익 감독이 선택한 전략이 ‘머쓱하게 하기’는 아닐지. 그렇다면 <황산벌>이 골머리 앓을 필요가 없는 가볍고 상큼한 코미디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비장과 해학 사이에, 아(雅)와 속(俗) 사이에, 역사와 드라마 사이에 영화는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그것을 두고 ‘퓨전역사코미디’다 어쩐다 하는지 모르겠다. 논박은 미루고 일단 텍스트로 가자.

당나라 황제는 백제와 고구려를 천하의 안정과 질서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선포한다. 어디서 익히 들어 본 말이다. 옳다. 부시의 팽창적 패권주의가 북한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현실에 대한 절묘한 패러디로 읽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패러디는 얕다. 재치, 그 이상은 아니다. 코미디니까, 라고 작가는 항변한다. 영화의 텍스트가 수용자 안의 대뇌 혈관으로 침투해 내파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결국 웃으라는 이야기다. 코미디니까. 그럼 역사는? 하기는 비판의식을 앙양할 목적이라면 애초에 영화관을 선택한 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신라와 백제가 싸울 때 사투리를 썼을 것이라는 점, 계백의 아내가 죽을 때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진 않았을 거라는 점, 계백을 충신의 귀감으로 삼지만 이데올로기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일 수 있다는 점 등 진짜 역사적 사실은 어땠을까, 라는 점에 주목했다.” 라는 것이 <황산벌>의 기획자 조철현씨의 말이다. 기획의 변은 비장하지만 텍스트는 기획의 의도와 자꾸 엇갈린다. 허긴 기획자의 의도가 곧바로 텍스트의 미학적 완성도를 보장해주는 행복한 영화를 만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사투리를 썼느냐 말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모든 텍스트는 결국 ‘현재’의 텍스트일 뿐이다. 엄밀한 고증을 통해 당시의 문체를 복원해서 영화 텍스트를 만들었다면 리얼리티가 역동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을까. 천만에다. 사실의 충실한 재현에 리얼리티의 완성도가 있는 것이라면 고증에만 수억을 썼어야 옳다. 하지만 사실의 완벽한 재현은 죽었다 깨도 달성할 수 없거니와 설령 달성할 수 있다 치더라도 달성할 이유도 없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다지 부가가치가 없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가령, 늙은이 젊은이 가릴 것 없이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반말을 내뱉는 성경 속의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겨, 아무리 성인이라지만 법도가 있는 법, 예의범절을 갖추신 성인께서 어찌 아래와 위를 분간치 못하겠느냐, 고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예수보다는 겸손하고 자상하신 예수가 실상에 부합하지 않겠느냐며 정중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모든 성경 속의 예수의 어투를 존댓말로 고쳤다고 해서 성경 속의 진실이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 하기는 성경 속의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예수의 어투를 좀더 겸손한 어투로 바꿔보자는 번역가들의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가 사용했다는 고대 앗시리아 언어를 오늘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도 녹록치 않은 작업일 것이다. 게다가 번역은 반역이라던가. 번역은 파일을 복사하듯 순순히 진행되는 작업이 아니다. 그런 작업에 대한 천착 없이 ‘진짜 역사’ 운운하는 것은 듣기에 다소 민망스럽다.

사실과 리얼리티는 별개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이 곧바로 리얼리티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예수의 진정성은 예수의 언어를 얼마나 사실대로 복원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듯 드라마의 진정성 또한 얼마만큼의 사실성을 충실하게 재현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드라마는 사실의 죽음 위에 설 수밖에 없다. 사실을 버리고도 드라마는 가능하다. 사실을 뛰어넘는 어떤 것, 허구는 사실보다 위대하다. 굳이 사실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황산벌>의 사투리는 분명 리얼리티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의도’에서 동원되었음이 틀림없다. 기획자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솔직하게 코미디다 하면 될 것을.

코미디에 웬 비장? 계백의 눈빛 어디에서도 가벼운 해학을 읽을 수 없다. 순교자의 비장함이 번득인다. ‘거시기’와 ‘머시기’가 남발되면서 극장은 시시깔깔 질펀한 난장이지만 박중훈은 여간해선 웃지 않을 태세다. 웃으면 비장은 끝장이다. 모든 순교자는 시종일관 엄숙한 표정을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로답게 박중훈은 표정을 제대로 관리한다. 런닝타임 동안 한번도 얼굴근육을 함부로 이완시키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제작진의 주문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영화를 코미디라고 우겨도 중훈아, 너의 비장한 얼굴만이 이 영화를 비루한 코미디에서 구제해줄 수 있는 거야. 이런 제작진의 의도는 그런 대로 성공적이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그럴 듯해보이지만 실상은 파시즘의 위장된 논리에 불과하다는 것.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란 따지고 보면 개죽음일 수도 있다는 것, 거창한 이념의 구현을 위해 개인의 생명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 무거운 주제를 그럴싸하고도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배우는 주연급의 박중훈이 아니라 까메오로 출연한 김선아다. 이데올로기고 나발이고 목숨보다 중한 것은 없다는 메시지가 김선아의 전라도 사투리에 실린다.(이 한 대목으로 해서 김선아는 비로소 우리 영화의 김선아가 되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후로 이렇게 묵직한 메시지가 전라도 사투리에 실린 적이 있을까.

"호랭이는 가죽 땜시 디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디지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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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4-10-19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느라고 헉헉대고 있습니다. 갑자기 이 많은 영화 리뷰의 회오리는 무엇입니까^^

감각의 박물학 2004-10-19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이씨네와 서울신문에 연재한 것을 한꺼번에 올렸습니다. (도배는 안 좋은 건데...죄송합니다)

깍두기 2004-10-1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럼 위 두곳에 가면 님의 글을 볼 수 있다는 말씀?? 그럼 님은 영화 평론가시군요? 오, 영광이어요^^

깍두기 2004-10-19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저는 님께 인사도 안드리고 불쑥 이러고 있는 것 같은데.....제가 방명록에 인사한 걸로 착각하고 이런 실례를 저질렀네요. 죄송합니다. 즐찾을 하면 인사부터 해야 하는데 몰래 훔쳐보다 민망한 짓을 해버렸네요. 죄송해요^^

감각의 박물학 2004-10-19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안녕하셔요 조이씨네Jocine.co.kr에서 코드로 보는 영화 쓰고 있습니다. 서울신문에는 청소년섹션에 쓰고 있구요..평론가는 아니구요 아마추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