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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식 감독, 정찬 외 출연 / 엔터원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의 뒷맛은 그다지 좋지 않다. '올해의 수작'이라는 평가가 그다지 유쾌하게 들리지 않는다. 김인식은 그의 "영화의 초점은 동성애에 있지 않다"라며 이 영화를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사랑 이야기로 봐달라고 주문한다. 감독의 손을 이미 떠난 작품에 대한 이런 주문은 명백히 월권이다. 그러나 한 수 접고 김인식이 권하는 길을 따라가 보자.



성애고 동성애고 간에 모든 사랑은 상처에서 시작된다. 찢김에서 시작된다는 이야기다. 나의 막이, 나의 에고가 찢겨지지 않고서 너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운명이 아닌가. 무릇 사랑하려는 자는 깨닫게 된다. 찢김을 두려워하는 자의 불안 앞에서 나의 욕망이란 하나의 날카로운 비수가 될 수도 있음을. 그는 찢김을 두려워하는 자의 불안한 빗장 앞에서 망설인다. '미안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할 뿐'이다. 나는 너를 파괴하려는 자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는 존재일 뿐이라고 외쳐 보지만 그 외침은 속절없다. 사랑하는 자의 아픔은 그 외침의 속절없음에 있다. 그는 망설인다. 열리지 않는 타인의 육체 앞에서. 그러나 사랑의 진정성이란 즉각적인 욕망의 실현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자의 그 하염없는 망설임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나의 자유란 늘 타자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그쳐야 하는 것이므로.



든 욕망은 격렬하게 충족과 보상을 요구해 온다. 사랑하려는 자는 망설임에만 붙잡혀 있을 수 없다. 그는 접근하여 대상에게 손길을 뻗친다. 그러나 타자란 욕망에 저항하는 대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대상은 움찔한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위협을 하기도 한다. 어쩔 것인가. 내 몸을 받아들이지 않는 저 완강한 타인의 빗장 앞에서 사랑하는 자의 마음은 찢긴다. 내 욕망으로 타인을 무릎 꿇리고 제압하지 않는 한,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네가 나를 받아들이기까지 그는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내가 너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를 그는 증명해보인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너의 찢김, 너의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너의 온전함임을 그는 말하고 싶어한다. 언젠가는 너를 향한 나의 진정을 너도 이해해주겠지. 이것이 사랑을 기다리는 자의 성숙한 심리학이다. 대식은 우리에게 '사랑을 기다리는 자의 성숙한 심리학'을 보여준다. 내 욕망대로라면 당장이라도 너의 몸으로 쳐들어가고 싶지만 대식은 의연하게 석원을 기다려 주었다. 기다림이 대식의 휴머니즘이다. 그 휴머니즘은 결국 석원에게 보상을 받는다. 석원이 대식의 몸뚱이를 안고 있는 라스트 씬이 그것. 파열의 상처가 환하게 꽃봉오리를 여는 순간이다.



러나 석원에게 보여주었던 대식의 휴머니즘은 그의 아내와 아이와 일주에게는 눈꼽만큼도 베풀어지지 않는다. 대식의 권위주의적 남성성이 드러나는 대목이 바로 이곳이다. 그는 가장으로서 가정을 버렸다. 아이를 버리고 아내를 버렸다. 버려서는 안 될 것을 버렸다. 신산스럽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왔을 그의 아내와 아들도 이 대목에선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김인식은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는다. 대식의 아내는 연적(?)인 석원에게 말한다. "외로운 사람이니까 잘 해주세요." 그것은 대식의 아내에게서 나올 법한 발언이 아니다. 모든 고통의 발원지인 욕망을 깡그리 지운 '성불한 여자'나 할 수 있는 발언이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대식의 아내의 욕망을 지워버렸을까. 그것은 누구의 각본이었을까. 다른 도리가 없다. 김인식에게 그 혐의를 돌릴 수밖에.



속한 누구든 보상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 성불한 또 하나의 여자가 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일주다. 대체 어떤 깨달음의 경로를 통해 일주가 성불의 과정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일체 없다. 김인식에겐 일주가 어떤 경전을 읽었는지 관심 밖이다. 오직 남성의 욕망만이 관심의 대상일 따름. 대식의 아내와 그의 아들과 일주는 비주류다. 김인식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오직 남성의 욕망, 대식의 욕망일 뿐. 이 영화가 말하지 못해 안달하는 것은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대식과 욕망의 대상인 석원일 뿐이다.



어도 이 영화가 김인식의 말대로 '동성애를 말하지 않고 사랑을 말하는' 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대식의 아내와 일주에게 더 많은 발언권을 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배려는 이 영화에 없다. 김인식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우회하기보다는 정면돌파 하는 스타일이다. 게이 캐릭터는 보통 여성성이 강하고 다소 희화화돼서 보여지는 게 사실인데, 난 반대로 굉장히 남성적이고 땀 냄새가 풍겨나는 힘있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 속에 노동현장이 많이 들어간 거고. 지금까지 많이 보여졌던 희화화된 게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마초들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영화의 뼈대를 잡을 때부터 힘있는 남성적인 영화를 생각했다."



무리 마초 냄새가 나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하더라도 김인식은 대식이 어째서 석원에게만 관대하고 그의 아내와 아이와 일주에게는 냉담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하진 않았을까. 석원에게는 휴머니스트였던 그가 왜 그의 아내와 아들과 일주 앞에서는 비정한 마초가 되어야 했던가를 말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쉽지만 없다. 이런 물음에 묵묵부답인 김인식은 대식으로 하여금 쓰러진 석원을 업고 제 집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배짱을 보여준다. 가장을 버렸던 남자가 제 연인을 들쳐업고 들어올 때 그의 아내가 겪어야 했을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는 그는 언급이 없다. 이 지독한 남성주의 앞에서 이 작품을 올해의 수작이라고 평가할 마음은 싹 가신다. 그러나 김인식도 조금은 미안했던 모양이다. '외삼촌이 아빠 맞죠?" 라고 묻는 아이를 외면하고 돌아서며 대식으로 하여금 오열케 한다. 난 그 오열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오열에 진정성은 없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욕망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근육적 파워가 없는 어린아이나 여자는 대식 앞에서 슬픈 식민지일 따름이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이성애자이건 동성애자이건 길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자신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길의 휴머니즘이리라. 로드무비엔 여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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