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접시 위에 놓인 이야기 5
헬렌 니어링 지음, 공경희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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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 자리가 잦아서 지난 한 달 동안은 고역이었다. 술도 술이지만 무엇보다 고역은 기름진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 고기에 젓가락을 잘 대지 않으니 동료들은 언제부터 채식주의자 되었느냐고 묻는다. 물론 난 헬렌 니어링 부부와 같은 엄격한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잘 차린 진수성찬보다는 아무래도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디자인 하우스 간)에 더욱 끌리는 편이다. 지나치게 사적인 고백이긴 하지만 나는 시레기국, 고구마 줄기를 벗겨 된장에 살짝 버무린 무침과, 약간 매콤한 맛이 감도는 풋고추, 고추장과 초에 버무린 미역 무침과 호박잎 삶은 것을 좋아한다. 나의 생일상에 고구마줄기 무침과 풋고추를 놓으시는 것을 어머니는 항상 잊지 않으셨다.

  내 미각마저 어떤 거창한 세계관에 영향을 받을 만큼 나는 이념지향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저 그런 것들이 좋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육식을 멀리했던 것도 아니다. 단지 육식보다는 채식을 즐겼다는 정도. 그런데 채식에 기우는 정도가 요즘에 와서 심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언젠가 고백한 적이 있지만 농비신감 비진미, 진미 지시담 (膿肥辛甘 非眞味, 眞味 只是淡)- 진한 술, 기름진 고기 맵고 단 것은 참맛이 아니요, 참맛은 오직 담백하다, 라는 홍자성의 채근담 구절이 채식 경향을 가속화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름진 음식에 통통 불어난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느끼하게 느껴졌다는 사실이 채식 경향을 가속화했다는 것이 옳다. ‘징글징글’하게 먹어대는 내 탐욕에도 어느 정도 넌더리가 났던 것도 사실이다. 둘러보면 지나치게 소유가 많았다. 빼곡이 쌓여있는 책들과 음반들이 허겁지겁 두뇌를 채우려 했던 내 과도한 욕망의 산물인 것 같아 흉물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허리 둘레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면에서 다이어트가 필요했다.

  
‘독자들이여, 요리를 많이 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책을 읽으시길’ 이라고 말한 사람은 『소박한 밥상』의 헬렌 니어링이다.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즐기고, 자연과 대화하고, 친구를 만나는 데 쓰자’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렇게 쉬운 말도 아무나 하지는 못 한다. 여자는 집에서 요리하고 집 청소하라는 전통적 성역할론을 조금도 수정하고 싶지 않은 보수주의자라면 헬렌 니어링의 이런 주장이 ‘똑똑한 여자’들의 자기주장처럼 비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식사를 간단히 하자는 헬렌 니어링의 주장에 동조할 사람들도 많다. 간단히 먹고 한푼이라도 더 벌자고 말하는 소위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 그들. 그런 사람들이라면 간단히 햄버거 하나와 콜라로 한끼를 가볍게 때울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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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푸드의 제국
에릭 슐로서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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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번쩍거리고 행복해 보이기 하는 패스트푸드의 표면 밑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 사람들이 알아야만 한다는 신념에서 이 책을 썼다. 참깨가 송송 박힌 두 개의 햄버거 빵 사이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당신이 무얼 먹는지를 말해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맞힐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은 『패스트푸드의 제국』(김은령 역, 에코리브르 간)의 저자 에릭 슐로서다. 이 책은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 세계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1993년 햄버거를 먹고 복통을 호소하던 700여 명 중 4명이 숨진 '잭인 더 박스' 사건 이후 50만여 명의 미국인들이 치명적인 이콜리(E-coli) O-157균 때문에 고생했고 수백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패티 한 조각은 수십, 수백 마리로부터 모은 쇠고기로 만들어지는데, 이콜리 균에 감염된 소 한 마리는 3만 2,000파운드의 다진 쇠고기를 오염시킨다.’는 슐로서의 주장은 다소 과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경청할 만한 주장임엔 틀림이 없다.

  슐로서는 아예 햄버거로부터 소비자들의 입맛을 떼어놓겠다는 투로 패스트 푸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열거한다. 패스트푸드에 포함된 지방질과 고칼로리, 그리고 이들과 불가분의 소비관계를 가진 청량음료-코카콜라에 포함된 과다한 칼로리가 비만 등 상당한 문제점을 야기한다는 것, 패스트푸드의 주요 원료인 육우 도축 기업들이 정부규제 완화를 위해 정치권에 상당한 로비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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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혁명
존 로빈스 지음, 안의정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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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이스크림 속에서 태어났다’라고 책의 서두를 쓰고 있는『음식혁명』(안의정 역, 시공사 간)의 지은이 존 로빈스는 세계적인 아이스크림회사 '배스킨 로빈스'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그는 그 거대한 유제품 기업을 이어받으라던 아버지의 희망을 뿌리치고 환경주의자가 되었다. 이 책에서 로빈스는 육식이 가져오는 육체적 정신적 문제점과 현대의 육가공 산업, 축산업 등이 지구 환경에 끼치는 각종 해악을 방대한 데이터와 사례들을 통해 폭로한다.

  로빈스에 따르면 잘 도정된 백밀과 백설탕 등은 독약이라고 한다. 미국인의 하루 설탕 소비량은 티스푼으로 53숟가락에 달한다. 두뇌와 골격발달에 우유와 고기가 최고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한가지만 예를 들자면 미국 어린이의 평균 IQ가 99인데 반해 채식주의자는 116이었다고 한다. 또 세계에서 유제품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는 핀란드․스웨덴․미국․영국 순인데 이 순위는 골다공증이 가장 많은 나라의 순서와 일치한다고 한다. 사례는 계속된다. 미국흑인의 하루 칼슘 섭취량은 1,000㎎인데 반해 남아공 흑인들의 하루 칼슘량은 196㎎에 불과하다. 그런데 미국흑인의 골절률은 남아공 흑인들보다 9배나 높다는 것이다.

  못 먹던 시절에는 없어서 못 먹었는데 이거 저거 따지는 거 다 배부른 소리라며 이런 책들이 경고하는 사실들을 애써 일축할 수도 있고, 뭐든 잘 먹으면 그만이라고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얼마전 구운 소금, 죽염 일부에서 다이옥신이 검출됐다는 식약청의 발표가 있었다. '베트남전에 뿌려진 고엽제'나 '쓰레기 소각장' 등에서나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다이옥신이 식탁위 소금에 포함돼 있을지 모른다니 씁쓸하다. 미국에서는 패스트푸드에서도 기준치 이상의 다이옥신이 검출됐다고 한다.

  
은 불고 혈압은 올라가고, 안 되겠다 싶은지 서양인들이 열심히 동양인들의 식탁을 기웃거리고 있는 요즘, 호박잎에 보리밥과 된장을 얹어 풋고추와 함께 썸벅썸벅 베어 물던 식탁을 다시 기대해 본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돈 드는 일도 아니다.

  
식은 그런 소박한 식탁의 기쁨을 앗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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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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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신현승 역, 시공사 간)에서 저자, 제레미 레프킨은 그 특유의 해박한 지식으로 육식주의자의 입맛을 공격한다.

  지방이 촘촘히 박힌 깊은 맛의 쇠고기를 만들기 위해 소에 기름진 옥수수 등 곡류를 먹이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3분의1,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70%가 바로 가축이 먹는 사료가 되었다고 한다. 매년 가축에게 먹이는 6억t의 곡식을 인간이 직접 먹는다면 10억명의 기아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뭐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 더구나 중남미의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열대우림, 오스트레일리아 반건조지대 등이 소 방목용 목초지로 개간되면서 열대우림은 파괴되고 지구사막화는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사육장에서 흘러나온 축산 폐기물은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소가 내뿜는 메탄은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힌다고 하니 문제는 심각하다.

  가축 방목용 목초지로 인한 최대의 피해 국가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 중국의 경제형편이 나아짐에 따라 고기, 달걀, 유제품 등 축산품 수요가 증가하는데,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육류소비를 충당하기 위해 중국의 북서부 지역에서는 대규모 벌채와 방목이 진행되어, 방목된 소와 양들이 풀을 모두 먹어치우고, 그 결과로 토양은 보호막을 잃어버린 채 빗물과 바람에 맥없이 씻겨나가 사막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봄이면 바람을 타고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다는 중국 사막의 먼지들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호흡기와 눈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다.

  소가 사육되는 상황을 보면 고기맛이 더 떨어진다. 소를 좀더 빨리 살찌우기 위해 항생제 살충제 제초제 등이 동원되고, 체중을 불리기 위해 마분지나 신문 톱밥이 사료에 첨가되기도 한단다. 전미 과학아카데미 연구위원회(NRC)에 따르면 쇠고기는 살균제 오염으로 인한 암 유발식품으로 토마토에 이어 2위이고, 제초제 오염으로는 가장 위험한 식품이고, 살충제 오염으로는 세번째로 위험한 식품이란다. 또 미국에서 사용되는 항생제들 중 95%를 농장 동물들에게 투여하고 있는데, 이는 감염된 병의 치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동물들이 적은 사료로도 더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한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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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3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길과 풍경과 시
허만하 지음 / 솔출판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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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의 풍경, 모든 길의 끝


길과 풍경과 시  7번 국도가 그 동쪽 끝에 동해의 풍경을 거느리듯 모든 길은 풍경을 거느린다, 아니다. 이 말은 옳지 않다. 정확히 길은 풍경 속에 있다. 어떤 풍경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길의 외연과 내포는 사뭇 달라진다. 모든 길이 나의 길일 수는 없다. 길은 어떤 풍경 속에 놓여있을 때만 비로소 나의 길이 된다. 길을 가는 자는 풍경을 본다. 그러나 내 눈 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풍경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풍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풍경은 반드시 마음으로 흘러 들어오는 저 바깥의 풍경들이다. 마음이 읽어내는 풍경은 내 안에 들어와, 지울 수 없는 내 존재의 일부가 된다. ‘영혼이란 낯선 풍경을 만나 깨어나는 자기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이는 『길과 풍경과 시』의 시인 허만하이다. ‘교만함이 안주(安住)를 부르면 예술가에게 치명적인 해가 될까 싶어’ 또 길을 나선다는 이런 시인만이 풍경을 가슴에 담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천박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제 내부에 풍경을 간직하기 마련이다. 그 풍경들로 해서 그는 비로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시의 세밑 풍경, 어디에서도 어둠을 찾아보기 힘들다. 캐롤이 울려퍼지고 나무엔 좁쌀 같은 별들이 무수히 뜬다. 교회당 꼭대기엔 커다란 별이 걸리고 도시는 디즈니의 애니매이션처럼 밝고 환하고 아름답다. 거기에 어둠은 없다. 어둠이 있다면 밝음을 더욱 밝음답게 하는 장식으로서의 어둠일 뿐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이 도시를 벗어나면 어둠은 안데르센의 동화에서처럼 도처에 있다. 스산한 밤의 풍경들, 검은 산과 검은 들, 어디론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밤의 검은 구름들, 그 구름들을 배경으로 하염없이 가지를 뻗고 있는 기괴한 나무들, 이런 풍경들을 거느리고 있는 길 위에 서있으면 내 안에 혹처럼 만져지는 불안을 감지하게 된다. 그 이상으로 당당할 수 없었던 사람도 이런 불안의 심연 앞에서 <허무한 삶을 사는 하찮은 달팽이>처럼 위축되고야 만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는 존재론적 질문 앞에서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대체 나의 삶은 무엇이었는가, 라는 물음 앞에서 일상은 하찮은 무게로 전락할 수도 있다. 어둠과 불안 속에서 비로소 나란 존재가 각성된다. 도시의 불빛 속에서 드러나지 않던 내가 어둠 속에서 비로소 보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도르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은 일찍이 우리의 존재론적 토대가 어둠이었음을 말해준다. 앙겔로풀로스는 이 영화에서 정오의 햇빛 속에 대리석 몸체를 빛내고 있는 그리스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여지없이 배반한다. 신선한 공기, 눈부신 태양 아래 빛나는 정오의 풍경은 없다. 하늘은 흐리고 겨울비는 차갑다. 모든 것이 뿌옇고 무겁고 차갑다. 그 영상 속에는 희망도 없고, 목적도 없다. 있다면 오직 길을 가는 자의 피로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막연한 기대가 이 아이들을 사나운 길 속으로 내몬다.

  을 뛰쳐나온 볼라와 알렉산드로스는 '독일에 살고 있는' 미지의 아버지를 찾아 아테네를 떠나는 기차를 타게 된다.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고행의 순례길이 열린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 ‘존재하지도 않는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 그 끝이 텅 비어있을지도 모르는 여행, 그 여행은 따스한 곳을 찾아가는 여유있는 자의 여행이 아니다. 남쪽 그리스에서 북쪽 독일로 가는 고행이다. 추운 곳으로 한발짝 한발짝 다가서는 순례의 여정이다. 피로와 곤고함이 예정되어 있는 길. 무임승차단속에 걸려 거리로 내던져진 아이들의 눈에 비치는 황량한 겨울 풍경을 보자.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발전소의 기괴한 실루엣, 산업사회의 표상인 거대한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소음, 질주하는 차량들이 뱉어내는 굉음, 하얗게 얼어붙은 도시의 푸르스름한 야경, 입김을 내뿜으며 겨울의 밤 공기속에 버려져 죽어 가는 말, 본능적으로 제 운명을 예감해서일까,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마음을 파고드는 저 스산한 풍경들이 아니었다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여행을 하고 있어요,’ 라는 아이의 독백이 장식적 수사 이상의 절실함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의 행운은 동반자를 만나는 데 있다. 유랑극단의 버스 운전사, 오레스테스. 유랑극단은 떠도는 자의 표상이며, 산업시대의 속도를 따라붙지 못하고 시대에 뒤쳐진 자의 표상이다. 그런 그였기에 오레스테스는 아이들을 ‘알아본다.’ 곤고한 자는 곤고한 자의 피로를 알아보는 법이 아닌가. 오레스테스는 아이들에게 줄 것이 없다. 대체로 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줄 것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그것은 희망이다. 안개 저 너머에 있을 한 그루의 나무. 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줄 것이란 또 무엇인가. 위로이며 사랑이며 눈길이다. 길과 풍경은 도처에서 이들의 남루함을 감싸 안는다.

  게손가락이 잘려나간 거대한 손이 바다에서 건져진다. 앙겔로풀로스의 롱테이크는 헬기가 이 손을 매달고 점이 되어 사라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보여준다. 이런 손을 가진 존재였다면 한 시대를 군림했던 존재였음이 틀림이 없다. 그런 손을 가진 존재였다면 새시대의 도래를 예언하며 뭇 대중들에게 희망을 역설했던 존재였음이 틀림이 없다. 풍요를 약속하는 이데올로기가 희망을 주었던 시대는 갔다. 안개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없는 아버지?

  쩌면 아버지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때론 아이들을 엄습한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에 성숙함이 필요하다. 『결혼, 여름』(책세상)의 까뮈는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온갖 악들이 우글거리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그리스인들은 다른 모든 악들을 쏟아놓고 난 후에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악인 희망을 쏟아냈다. 이보다 더 감동적인 상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희망은 체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성숙함의 지혜란 희망의 헛됨을 깨닫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길뿐이다. 끝없는 길,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그 길 위에서 따스한 심장을 가진 오레스테스와 같은 동반자와 이별을 하기도 한다. 영원히 같이 있어주었으면 하는 선한 마음의 살붙이들과도 길을 달리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를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풍경뿐인지도 모르겠다. 끝까지 추운 마음을 보듬는 풍경들.

  누이는 강 하나만 건너면 독일인 땅에 도착한다. 어둠 속, 총성이 울린다. 국경수비대의 총소리였을까. 모든 희망의 끝, 모든 길의 끝, 모든 흐느낌의 끝을 이 영화는 간결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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