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과 풍경과 시
허만하 지음 / 솔출판사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안개 속의 풍경, 모든 길의 끝


길과 풍경과 시  7번 국도가 그 동쪽 끝에 동해의 풍경을 거느리듯 모든 길은 풍경을 거느린다, 아니다. 이 말은 옳지 않다. 정확히 길은 풍경 속에 있다. 어떤 풍경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길의 외연과 내포는 사뭇 달라진다. 모든 길이 나의 길일 수는 없다. 길은 어떤 풍경 속에 놓여있을 때만 비로소 나의 길이 된다. 길을 가는 자는 풍경을 본다. 그러나 내 눈 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풍경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풍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풍경은 반드시 마음으로 흘러 들어오는 저 바깥의 풍경들이다. 마음이 읽어내는 풍경은 내 안에 들어와, 지울 수 없는 내 존재의 일부가 된다. ‘영혼이란 낯선 풍경을 만나 깨어나는 자기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한 이는 『길과 풍경과 시』의 시인 허만하이다. ‘교만함이 안주(安住)를 부르면 예술가에게 치명적인 해가 될까 싶어’ 또 길을 나선다는 이런 시인만이 풍경을 가슴에 담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천박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제 내부에 풍경을 간직하기 마련이다. 그 풍경들로 해서 그는 비로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시의 세밑 풍경, 어디에서도 어둠을 찾아보기 힘들다. 캐롤이 울려퍼지고 나무엔 좁쌀 같은 별들이 무수히 뜬다. 교회당 꼭대기엔 커다란 별이 걸리고 도시는 디즈니의 애니매이션처럼 밝고 환하고 아름답다. 거기에 어둠은 없다. 어둠이 있다면 밝음을 더욱 밝음답게 하는 장식으로서의 어둠일 뿐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이 도시를 벗어나면 어둠은 안데르센의 동화에서처럼 도처에 있다. 스산한 밤의 풍경들, 검은 산과 검은 들, 어디론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밤의 검은 구름들, 그 구름들을 배경으로 하염없이 가지를 뻗고 있는 기괴한 나무들, 이런 풍경들을 거느리고 있는 길 위에 서있으면 내 안에 혹처럼 만져지는 불안을 감지하게 된다. 그 이상으로 당당할 수 없었던 사람도 이런 불안의 심연 앞에서 <허무한 삶을 사는 하찮은 달팽이>처럼 위축되고야 만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는 존재론적 질문 앞에서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대체 나의 삶은 무엇이었는가, 라는 물음 앞에서 일상은 하찮은 무게로 전락할 수도 있다. 어둠과 불안 속에서 비로소 나란 존재가 각성된다. 도시의 불빛 속에서 드러나지 않던 내가 어둠 속에서 비로소 보여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도르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은 일찍이 우리의 존재론적 토대가 어둠이었음을 말해준다. 앙겔로풀로스는 이 영화에서 정오의 햇빛 속에 대리석 몸체를 빛내고 있는 그리스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여지없이 배반한다. 신선한 공기, 눈부신 태양 아래 빛나는 정오의 풍경은 없다. 하늘은 흐리고 겨울비는 차갑다. 모든 것이 뿌옇고 무겁고 차갑다. 그 영상 속에는 희망도 없고, 목적도 없다. 있다면 오직 길을 가는 자의 피로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막연한 기대가 이 아이들을 사나운 길 속으로 내몬다.

  을 뛰쳐나온 볼라와 알렉산드로스는 '독일에 살고 있는' 미지의 아버지를 찾아 아테네를 떠나는 기차를 타게 된다.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고행의 순례길이 열린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 ‘존재하지도 않는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 그 끝이 텅 비어있을지도 모르는 여행, 그 여행은 따스한 곳을 찾아가는 여유있는 자의 여행이 아니다. 남쪽 그리스에서 북쪽 독일로 가는 고행이다. 추운 곳으로 한발짝 한발짝 다가서는 순례의 여정이다. 피로와 곤고함이 예정되어 있는 길. 무임승차단속에 걸려 거리로 내던져진 아이들의 눈에 비치는 황량한 겨울 풍경을 보자.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발전소의 기괴한 실루엣, 산업사회의 표상인 거대한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소음, 질주하는 차량들이 뱉어내는 굉음, 하얗게 얼어붙은 도시의 푸르스름한 야경, 입김을 내뿜으며 겨울의 밤 공기속에 버려져 죽어 가는 말, 본능적으로 제 운명을 예감해서일까,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마음을 파고드는 저 스산한 풍경들이 아니었다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여행을 하고 있어요,’ 라는 아이의 독백이 장식적 수사 이상의 절실함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의 행운은 동반자를 만나는 데 있다. 유랑극단의 버스 운전사, 오레스테스. 유랑극단은 떠도는 자의 표상이며, 산업시대의 속도를 따라붙지 못하고 시대에 뒤쳐진 자의 표상이다. 그런 그였기에 오레스테스는 아이들을 ‘알아본다.’ 곤고한 자는 곤고한 자의 피로를 알아보는 법이 아닌가. 오레스테스는 아이들에게 줄 것이 없다. 대체로 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줄 것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그것은 희망이다. 안개 저 너머에 있을 한 그루의 나무. 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줄 것이란 또 무엇인가. 위로이며 사랑이며 눈길이다. 길과 풍경은 도처에서 이들의 남루함을 감싸 안는다.

  게손가락이 잘려나간 거대한 손이 바다에서 건져진다. 앙겔로풀로스의 롱테이크는 헬기가 이 손을 매달고 점이 되어 사라지는 광경을 오래도록 보여준다. 이런 손을 가진 존재였다면 한 시대를 군림했던 존재였음이 틀림이 없다. 그런 손을 가진 존재였다면 새시대의 도래를 예언하며 뭇 대중들에게 희망을 역설했던 존재였음이 틀림이 없다. 풍요를 약속하는 이데올로기가 희망을 주었던 시대는 갔다. 안개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없는 아버지?

  쩌면 아버지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때론 아이들을 엄습한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에 성숙함이 필요하다. 『결혼, 여름』(책세상)의 까뮈는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온갖 악들이 우글거리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그리스인들은 다른 모든 악들을 쏟아놓고 난 후에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악인 희망을 쏟아냈다. 이보다 더 감동적인 상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희망은 체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성숙함의 지혜란 희망의 헛됨을 깨닫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길뿐이다. 끝없는 길,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그 길 위에서 따스한 심장을 가진 오레스테스와 같은 동반자와 이별을 하기도 한다. 영원히 같이 있어주었으면 하는 선한 마음의 살붙이들과도 길을 달리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를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풍경뿐인지도 모르겠다. 끝까지 추운 마음을 보듬는 풍경들.

  누이는 강 하나만 건너면 독일인 땅에 도착한다. 어둠 속, 총성이 울린다. 국경수비대의 총소리였을까. 모든 희망의 끝, 모든 길의 끝, 모든 흐느낌의 끝을 이 영화는 간결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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