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와 뽕브라 - 어떻게 나의 꿈을 찾을 수 있을까? 나를 나로 만드는 것 1
캐시 홉킨스 지음, 박슬라 옮김 / 오즈북스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줄창 헤르만 헷세를 읽었다. 데미안, 지와 사랑, 싯달타....
문학을 합네 하던 시절에는 줄창 고상한 작가들만 들먹였다.
가스똥 바슐라르(이릅도 고상했다.) 패트릭 모디아노, 알베르트 까뮈, 르끌레지오(발음도 멋지다.),
가르시아 마르께스, 보르헤스,파스칼 키냐르, 폴오스터......
깊고 묵직하고, 뭔가 좀 있어 보이는 작가에 대한 독서취향이 요즘은 오쿠타 히데오, 가네스로 가즈키 같은 가벼운 풍으로 입맛을 확장한다.
문학적 퇴행이라고 따진다고 해도 변명할 거리가 궁색하다.
그러나 어쨌든 시정잡배들의 입담도 그 재미가 솔깃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던 10대의 이야기들도 재밌다.
그들의 섬세함과 갈피없음, 그들의 좌충우돌과 변덕을 우리는 너무 빨리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루시와 뽕브라>는 먼 영국의 일, 그것도 15살의 영국 계집애들에 관한 것이지만
나는 거기에서 나의 10대를 읽는다.

<둘 중의 하나,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키 10센티미터를 더 크고 싶니, 전교 1등이 되고싶니?>
그때의 내게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했다면
나는 주저없이 키 10센티미터를 요구했을 것이다.
전교1등이 키 10센티미터보다 얼마나 더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애써 설명하려고 하는 인간들
우리는 그 인간들을 어른이라고 부른다.
전교1등이 키 10센티미터보다 얼마나 더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아는 것
우리는 그것을 성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어른들은 알아야 한다.
성숙이 미성숙보다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좋은 성장소설에는 미성숙의 싱그런 민트향이 난다.
인생을 성숙의 과정으로만 아는 사람들은 재미없다.
삶은 숙성의 결과물인 치즈랑은 다르니까.
훨씬 복잡하고,훨씬 미묘하다.
미성숙,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예뻐보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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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벌루션 No.3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가네시로 가즈키의 작품은 처음이다.
문체는 책날개에 적혀있듯 '날아갈 듯 가볍고 유쾌하다."
마음만 먹는다면 만화 한권을 뚝닥 해치우듯 가볍게 읽을 수 있다.
거품 경제가 꺼진 일본의 넘버쓰리들이 전혀 음울하지 않게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들에겐 혁명의 열정도, 면학의 의지도 없다.
절망이랍시고 약(drug)에 빠지고, 쾌락 속에 허우적거리지도 않는다.
이 음울한 군상들은 좀비스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단체로 짝짓기를 감행하려 여학교에 난입한다.
주먹질과 발차기는 기본이다.
왜,라고 묻는다면 "재밌잖아"라고 대답할 게 뻔하다.

"달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멍하니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 나를 잡아당기라구. 달의 인력을 빌어 간신히 일어났다. 몇 가지 할 일이 있어서였다. 쓰러지는 건 그 다음 일이다."

이런 문체는 마음에 든다.

여학교 옥상 난입에 성공한 '나'는 백혈병을 앓고 있는 친구 히로시가 있는 병원 쪽을 확인하고 폭죽을 쏘아올린다.
거짓말처럼 나는 이 대목에서 눈물이 났다.

파란 불똥이 어둠을 찢었다. 다음은 빨강, 다음은 초록, 다음은 오렌지, 다음은 노랑.... 나는 폭죽의 굵직한 동체에서 전해지는 기분 좋은 충격을 느끼면서, 여자 몸에 사정하는 게 이런 느낌이려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병원 옥상에서 본, 히로시의 거의 신품이나 다름없는 고추를 떠올렸다.
히로시 보고 있냐?
우리 해냈어.
네가 죽는다고? 어림없지.
너 보고 있지?

죽음을 앞둔 친구에게 기껏 해줄 수 있는 것이 여학교 난입이다.
거창한 대의명분도 없고, 근사하게 언어를 구사할 수도 없는 싼마이들이 보여주는 이런 우정이 눈물겹다.

삶이란 그런 불꽃이다.
양아치 새끼라도 좋으니
누군가가 내 죽음을 향해서도 폭죽을 쏘아올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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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 양장본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가브리엘 루아의 <내 생애의 아이들>
예전에 초반부를 읽다 말았는데 그때와는 느낌이 판이했다.
어떤 영화에선가 왕가위는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는데,
사랑은 몰라도 적어도 책에서만큼은 왕가위의 말이 옳다.
좋은 타이밍에 이 책이 나에게 와주었다.
책꽂이 손닿는 곳에 놓아두고 자주 꺼내봐야겠다.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교사로서의 초심을 회복하게 해줄 수 있는 책이다.

"나는 또한 그때 세상 구석구석으로부터 그들이 나를 향하여, 따지고 보면 그들에게 한낱 이방인에 불과한 나를 향하여, 길을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알지도 못하는 그 누군가에게, 나의 경우처럼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경험없는 풋내기 여교사에게, 사람들은 이 지상에서 가장 새롭고 가장 섬세하고 가장 쉽게 부서지는 것을 위탁한다는 것을 느낄 때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 구절만으로도 이 책은 그 값을 충분히 했다.
<찬물 속의 송어>는 그 감동이 서늘하다.
가히 절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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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테러리스트
애니 최 지음, 정경옥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애니최의 <패션테러리스트>는 한 이민 가정의 자잘한 일상을 말한다.
매일 투닥거리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인간은 본질적으로 파파라치의 근성을 타고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 모녀의 투닥거림을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시로 출몰하는 애니최의 유머덕분이다.

유머는 어디에 갖다놔도 제 이름값을 한다.
세 명의 친구를 고르라고 한다면 반드시 그 셋 중에 유머를 끼워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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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게 한걸음 -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서유미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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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쿨하게 한 걸음>은 묵지근하다.
너절한 삶, 시들시들한 삶을 서유미는 조근조근 말한다.
과장도 없고, 위악도 없다.
멋스러워 보이려는 제스쳐도 없다.
30대 노처녀의 일상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창비장편소설상은 그 담담함에 대한 마땅한 보상이다.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책이다.
<쿨하게 한걸음>의 cool은 도시의 댄디들의 무책임한 쾌락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녀의 cool은 담담하게 삶을 껴안으려는 건강한 90년대 학번들의 처세술이다.
IMF에 깨지고 세계화에 치인 88만원 세대들의 치열한 생존법을
호들갑스럽지 않는 문체로 책은 말한다.
후생이 가외라고도 했고, 불치하문이라고도 했다.
선배들도 모자라면 후배들에게 배워야지.
학번, 나이, 학력, 쓸데없는 것 들이댈 때가 아니다.

서사가 죽은 시대라고, 천만에 모르는 소리다.
서사가 왜 죽어?
삶이 서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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