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감독, 짐 캐리 외 출연 / 아이비젼엔터테인먼트(쌈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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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흔적



담벼락에 피어난 붉은 장미의 향기가 알싸한 5월의 늦은 오후, 비스켓의 향기와도 같이 달콤한 그의 체취가 꽃향기에 실려 온다. 이것이 환각일까, 현실일까. 그러나 현재만으로도 충만한 시간 속에서 왜 이런 골치 아픈 물음이 필요할까. 어떤 것도 더 필요하지 않고, 모든 것이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어떤 충만한 시간도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곽재구의 시 <사평역>의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이라는 구절처럼 모든 희로애락의 순간은 시간의 눈발 아래 묻히고 만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다. 반드시 무엇인가가 남는다. 희미하게나마 무엇인가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남기 마련이다. 희미한 시간의 얼룩, 우리는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이 흘러가 버리고 만다면 대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이란 무엇인가? 입센은 말한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만을 영원히 소유한다>라고. 입센은 ‘잃어버리다’와 ‘소유하다’와 같이 동일한 논리적 공간 안에 함께 있을 수 없는 두 명제를 결합시키는 역설적으로 결합한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을 다시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고 모든 멜로드라마의 문법이지 않은가. 현재는 미꾸라지처럼 우리의 손아귀를 빠져나가지만 우리는 잃어버린 순간을 다시 재생해낸다. 파도가 바위를 스치는 순간은 포착할 수 없지만 바위는 파도의 흔적을 제 몸에 새기는 것처럼. 특히 영화와 소설과 같은 서사 장르는 지나간 기억을 그 어떤 장르보다 강력하게 재현해낸다. 아예 서사 장르는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장르라고 해도 무방하다.


기억은 우리 안에 남겨진 시간의 무늬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버리는 허무한 것이지만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를 영속적으로 우리 안에 보관하려 한다. 그러므로 기억은 찰나에 대한 복수다. 기억은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것에 대한 항변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를 되찾고, 과거와 동거한다. 향기롭던 그의 체취는 사라져가 버린 과거의 시간이지만 기억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현재의 테이블로 불러낸다. 그러나 과거는 명료하게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것은 기억되고 어떤 것은 기억되지 않는 법. 기억의 테두리는 늘 모호하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애인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 심하게 다툰 후 사과하러 간, 조엘(짐 캐리)은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새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그녀의 변화가 '라 쿠나'라는 회사가 제공하는 기억삭제 치료의 결과임을 알게 된 조엘은 홧김에 자신도 동일한 치료를 받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기억삭제가 클레멘타인과의 씁쓸한 기억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까지 삭제한다는 사실을 조엘은 알게 된다.


사랑을 소중하게 간직한다는 것은 과거를 기억 속에 보존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 하나의 낡은 손목시계가 있다고 하자. 그 손목시계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내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해보자. 그 손목시계는 여느 손목시계와는 다르다. 그 시계를 간직한다는 것은 아버지와의 소중했던 시간을 간직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럴 때 시계는 더 이상 물질적 도구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도구는 대체가 가능하지만 존재는 대체가 불가능하다. 낡아 작동이 마비되어 버린 기계는 대체를 하면 그만이지만 아버지의 낡은 시계는 새것으로 대체가 불가능하다. 시계는 이제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사물의 유용성을 초월한다. 도구는 사용하고 폐기처분할 수 있는 사물(도구)에 불과하지만 존재는 사물 그 이상이다. 낡은 시계에는 흘러가버린 시간 속의 기억들이 배어 있다.우리는 그것을 사물의 역사성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 사물들을 폐기처분한다는 것은 그 사물과 결부된 역사를 지우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자신의 연인과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그와 관련된 사진, 선물 등을 모조리 없애기도 한다. 그와 관련된 사물을 모조리 폐기해버림으로써 그와 관련된 시간과 추억, 그와 함께 한 역사를 없애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사랑이 지워질까. 사물은 사라져도 그 사물과 연루된 추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조엘이 지우려고 했던 것은 기억 전체가 아니라 클레멘타인과 함께 했던 사랑의 시간과 추억이었다. 클레멘타인과 결부된 기억만을 조엘은 선택적으로 삭제하게 된다. 그러나 기억을 지우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가 하는 물음들이 나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세계에 대한 호오(好) 판단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에 대한 목록을 입수하는 것은 그가 누군지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구나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의 목록을 지운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기억은 선택적이다. 우리는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지나간 순간을 모두다 불러들이기에 우리의 용량은 턱없이 부족하다. 예외는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여성은 모든 것을 기억한단다.  이니셜, AJ로 알려진 이 여성은 수십년 전이라도 날짜만 대면 그날 어떤 유명인이 사망했는지, TV 드라마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국제 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어떤 비행기 추락 사고가 있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다. 또 그 시각 자신이 했던 일과 그날의 날씨까지 기억해낼 수 있다.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의 제임스 맥고우 등은 5년간 연구를 진행한 후 이 여성의 증상에 ‘초기억 신드롬 hyperthymestic syndrom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녀에게는 완벽한 기억력이 재앙이기도 하단다. 과거의 일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자신의 머리 속은 흡사 "끝나지 않는 영화" 같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또 누군가와 대화하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수십 년 전의 일을 회상하는 것이 너무 괴롭다고 하소연했다.


그렇다 완벽한 기억력은 고통일 뿐이다. 망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 지나간 시절의 고통스런 추억에 얽매여 있는 한 우리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과거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존재다. 과거의 경험의 총체적 기억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앞으로 내 스스로 쌓아 가야할 내 실천과 행동이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결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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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새는 종마다 제 둥지의 내실을 장식하는 형태가 다르다고 한다.

같은 종에 속한 정자새의 수컷은 기본적으로 모두 비슷한 형태의 내실을 만든단다.

거미도 종에 따라 거미줄의 모양이 다르듯 말이다.

결국 새의 외모는 물론이고 행동이나 그 행동의 결과물인 구조물까지도 유전한다는 뜻이다.

'표현형'이 새의 눈색깔과, 머리카락 색깔, 체형 등을 말하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정자새의 내실과 같은 행동의 결과물을 "확장된 표현형"이라 이름했다.

 

내 외모뿐만 아니라 내 행동의 결과물까지도 유전된다는 사실을 두고 마냥 비애감에 젖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어쩐지 씁쓸하다.

나의 글들은, 나의 독서는, 나의 달리기는 어떤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일까.

 




Gilbert O'Sullivan - Alone Again (Natur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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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생명의 그물 - 생물 다양성은 어떻게 우리를 지탱하는가
이본 배스킨 지음, 이한음 옮김 / 돌베개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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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연어들의 호소, 우리를 가만 “내버려 둬”



물건의 틈에 박아서 맞물리는 부분이 물러나지 못하게 하거나 물건들의 사이를 벌리는 데 쓰는 돌을 쐐깃돌이라 한다. 아치의 맨 위에 끼워지는 쐐깃돌은 전체구조를 안정시킨다. 만약 이 쐐깃돌을 빼내면 전체구조는 매우 불안정해지고 외부의 충격이 가해지면 급기야 전체의 구조는 붕괴되고 만다. 이본 배스킨의 저서, 『아름다운 생명의 그물』은 생태계에서  쐐깃돌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쐐깃돌 종들을 소개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한 종이 공동체의 다양성과 안정성의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쐐깃돌’의 개념을 1996년에 처음으로 소개한 이는 워싱턴 대학의 생태학자 로버트 페인이다. 그는 워싱턴의 해안에서 바위들에 달라붙어 있는 종들을 관찰하면서 생물체들의 다양성을 설명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페인이 본 해변에는 조수가 닿는 위쪽 바위에는 홍합과 거위목따개비, 그 아래쪽에는 말미잘과 딱지조개, 삿갓조개, 해면, 갯민숭달팽이와 다양한 해조류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중 가장 센 놈은 피사스테르 오크라케우스(Pisaster dchraceus)였다. 이 동물은 홍합에서부터 고둥, 따개비, 딱지조개, 삿갓조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척추 동물을 먹어치웠다.


페인은 이 불가사리가 게걸스럽게 홍합을 먹어치움으로써 경쟁력이 뛰어난 홍합들이 바위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해안선의 한곳을 골라 불가사리들을 모두 제거해보았다. 그 결과 다른 무척추동물들이 번성할 것이라는 그의 예측은 빗나갔다. 오히려 홍합들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다른 생물들을 몰아내고 바위를 점령해 생물의 다양성이 급격하게 낮아졌다. 불가사리가 사라지자 이 해안의 생물의 종수는 15에서 8로 줄어들었다. 페인은 이 불가사리가 생태계를 다양하게 하고 안정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 종을 ‘쐐깃돌’ 종이라 불렀다.


아프리카 남서부 해안을 따라 있는 나미브 사막의 헐벗은 모래 언덕에는 나라덩굴(nara vine)이라는 쐐깃돌 종이 있다. 나라덩굴 개체는 수명이 100년 이상이며, 비가 내릴 때 일시적으로 생기는 강 언저리에 붙어 있으면서 뿌리를 50미터나 뻗어 지하수를 빨아들인다. 잎 없이 가시만 달려 있는 이 식물은 곤충에서부터 타조와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물들에게 먹이와 물을 제공한다. 이 덩굴의 열매는 ‘사막의 물통’이라 불리는데, 총 무게의 80퍼센트가 물이다. 이 열매들은 자칼이나 하이에나 같은 동물들이 즐겨 먹는다. 타조나 도마뱀은 줄기 끝을 씹어 먹는다. 덩굴 밑에는 황무지쥐가 둥지를 틀고 산다. 이렇게 나라덩굴은 수많은 종들에게 생태학적인 피난처를 제공한다. 이러한 쐐깃돌 종을 인위적으로 제거하면 생태계는 안정성을 잃는다. 쐐깃돌을 빼내면 전체의 구조가 흔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동물계의 공학자라 비유할 수 있는, 댐을 쌓는 기술자, 비버도 쐐깃돌 종이라 할 수 있다.   비버가 만든 댐은 생들이 무너지면 하천의 흐름이 빨라져 수로가 좁게 파이고수위가 낮아져  둑을 따라 자라던 활엽수는 큰 타격을 입는다. 또 하천의 흐름이 빨라지면 물고기들이 낳은 알들이 떠내려가기 때문에 물고기들은 산란에 어려움을 겪는다. 비버는 연간 1톤의 나무를 잘라 댐으로 운반하기 때문에, 연못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곳의 숲을 빈약하게 만든다. 그러나 전체 생태계는 결코 비버 때문에 약해지지 않는다. 비버가 만든 댐으로 수면적이 늘어나면 원앙과 물오리 등이 먹이를 찾아 물 위로 내려오고, 사슴들도 물가에 자주 찾아온다. 하천을 따라 내려와 연못에 닿은 침전물들과 썩어가는 식물들은 풍부한 유기물질 창고가 되어준다. 그리고 비버가 잘라내 마든 통나무댐들은 물의 흐름을 늦추고, 갈라놓고, 물결과 소용돌이를 형성하여, 연어가 산란을 하고 송어들이 여름의 열기를 식히게 하는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렇게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쐐깃돌 종을 노리는 자들은 바로 비버의 모피를 노리는 사냥꾼들이다. 그들은 생태계의 활력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그들의 주머니뿐이다.


미국과 캐나다 경계에 있는 글레이셔 국립공원 계곡에 가을이 오면 장관이 연출된다. 홍연어를 잡기 위해 수많은 새들과 동물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1989년부터 이 장관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독수리들도 곰들도 찾아오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홍연어의 숫자가 줄어든 것일까? 이유는 주 어업당국이 외국에서 들여온 민물곤쟁이를 유역상류에 방류했기 때문이다. 주 어업당국은 홍연어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먹이로 곤쟁이들을 방류했다. 그러나 주 어업당국의 선행의 결과는 오히려 비극을 불러왔다.


홍연어는 낮 동안에 수면 가까이에서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는다. 하지만 곤쟁이는 낮에 홍연어가 거의 가지 않는 바닥쪽에서 지내다가 밤이 되면 수면 쪽으로 올라와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는다. 그런데 바로 그 동물성 플랑크톤이 문제였다. 그 동물성 플랑크톤이 바로 홍연어의 먹이였던 것이다. 인간들은 어리석게도 홍연어의 먹이를 풀어준 게 아니라 경쟁자를 풀어주었던 것이다. 먹이를 풀어줌으로써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던 인간의 의지는 오히려 반대의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노자(老子)가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동양학자인 김용옥 교수는 영어로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Let It Be"로 번역한 바 있다. “Let It Be"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내버려둬”쯤 된다. 자연은 인간의 도움이 없이 저절로 돌아가는 시스템인 만큼 인위적 손길을 가하지 말라는 것이 노자가 인간에게 주는 충고다. 그 충고를 무시하고 쐐깃돌 종들을 건드리면 자연은 활력을 잃고 만다. 자연에 친절을 베풀 것도 없고 무례를 베풀 것도 없다. 가만 두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자연에 손을 대야겠다면 자연의 질서를 세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생태학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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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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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은 자신의 책의 속날개에 ‘자전거 레이서’라고만 적는다. 자전거 레이서라? 스스로를 소설가라 자처하지 않는 그의 속내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는 소설가로 분류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소설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자신을 종속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훈은 한 인터뷰에서 문학의 엄숙주의에 대해 거의 원색에 가까운 쓴소리를 던진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을 신비화하지 말라는 것,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를 알아달라는 주문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 들이다겠다는 점에서 그는 여느 이상주의적 소설가와 구별된다.
 
  인 황지우는 ‘몸 있을 때까지만 세상이므로/있을 때/이 세상 곳곳/소요하다 가거라’(「피크닉1」)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관념은 이상이고 몸은 현실이다. 그의 소설을 펴보라. 몸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각별함을 넘어선다. ‘새벽에 술을 토했다. 노란 위액이 콧구멍으로 쏟아졌다. 종이 달려와 등을 두들기고 토사물을 치웠다.. 몸은 무력했고, 무력한 몸은 무거웠다.’(『칼의 노래』) 그는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수필집에서 그가 소설을 쓰는 이유가 밥벌이에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밥은 결국 몸을 위한 것이다. ‘몸의 사람’이기보다는 ‘정신의 사람’이기를 원하는 여느 관념적 소설가와 김훈이 구별되는 대목이다.
 
   는 사건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는 기자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에서 그의 묘사와 서술은 결코 얼렁뚱땅 넘어가는 법이 없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세세한 사실들로 소설은 채워진다. 대개의 작가들이 ‘그는 진료를 받았다’라고 간단하게 썼을 대목을 그는 혈액검사, 소변검사, 허파 MRI 촬영, 위 내시경 검사, 양전자방출단층촬영 등 전문용어를 동원한다. 그의 첫 번째 소설집인 『강산무진』 어디를 펴보아도 디테일에 충실한 그의 기자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소설이 소설가의 머리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소설가의 발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그는 여타의 관념적 소설가와는 구별된다.
 
  렇다고 그를 세속적인 작가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 그는 무엇보다 미에 탐닉한다. 그의 문장은 결코 허술하지 않다. 미적으로나 관념적으로 꽉 짜여져 있다는 이야기다. 흡사 잘 벼린 칼과도 같다. 소설이라는 서사갈래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사건의 전개에 있는 것이지 문장의 갈고 다듬에 있는 것이 아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은 그의 문장을 탐탁치 않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의 문장은 어떠해야 한다는 공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문단의 주류적 문체 공식을 따르지 않고 독창적인 문체의 미학을 만들어간다는 점도 김훈을 여타의 소설가와 구별짓게 만든다..

   로 벼린 듯한 시적인 문장, 하면 마루야마 겐지를 빼놓을 수 없다.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에 있어서, 도도하게 굽이치는 장강대하의 유장함과 대나무가 쪼개지는 듯한 스타카토식의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마루야마 겐지의 문체는 김훈의 문체와 그 우열에 있어서 한 치의 양보가 없다. 마루야마 겐지의 문장은 비정하리만치 미학적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오토바이가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 『봐라 달이 뒤쫓는다』의 한 페이지를 보라.  ‘똑같은 마을을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고뇌에 찬, 굴욕의 나날이라면, 이제는 지겹다. 부근을 한 바퀴 달려보고 다시 같은 둥지로 의기소침해져 되돌아가는 삶 따위, 이제는 사양하겠다.’ 그의 소설은 산문시에 육박한다. 문장 하나하나를 다듬는 작가의 고통이 느껴질 정도다. 『납장미』에서 사랑에 빠진 한 소녀를 묘사하는 한 킬러의 넋두리를 읽어보라. ‘떠돌이개는 쓰레기를 헤집던 입질을 멈추고 갈매기들은 하늘에서 날개를 접고 그녀를 주시했다. 그 순간에는 인간과 동물의 벽이 무너지고 온갖 차별이 소멸되어 방파제 주위에 자리를 함께한 생물 모두가 그녀로 인해 마음이 진정되었고, 그녀가 지나간 다음까지도 오래도록 환희를 느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동물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공간, 마루야마 겐지의 문체가 빛을 발하는 공간은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신화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의 문체는 김훈의 문장과 대조된다.
 
  체뿐만 아니라 작품을 창작하는 태도면에서도 김훈과 마루야마 겐지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김훈과 마루야마 겐지는 아직도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쓴다. 여타의 테크놀로지에 의존하지 않고 몸으로 글을 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더구나 자전거로 전국을 여행하는 김훈과 이미 30년 전부터 배를 타고 대양을 체험했다는 마루야마 겐지에게서는 관념보다는 몸의 감각을 중시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봐라 달이 뒤쫓는다』에서 마루야마 겐지는 오토바이를 빌어 말하다. ‘나는 기화한 가솔린을 연속적으로 폭발시켜, 배기 가스와 폭음을 세상에 내던진다. 나는 앞뒤의 두 바퀴를 마음대로 회전시켜, 세상에 넘쳐 있는 시시한 불문율을 걷어찬다.“ 나긋나긋한 감성적 문체가 아니다. 가장 날카로운 칼이 가장 아름다운 칼이라던가. 마루야마 겐지의 문체는 남성적 힘을 지양한다. 『칼의 노래』에서 보여준 김훈의 문체와 흡사하다. ’죽여야 할 것은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내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라고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말한다. 이런 남성적 미학은 "나는 여자를 풍경으로 본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는 것이나 여성을 보는 것이나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김훈의 남성우월적 태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쨌든 2000년대의 신세대작가들이 도시적 감수성으로 나긋나긋한 소설 쓰기를 하고 있다면 김훈과 마루야마 겐지는 남성적 파워를 과시하는 강건한 문체로 독특한 동아시아의 소설 미학을 구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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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치 포인트
우디 알렌 감독, 스칼렛 요한슨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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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진 문장 출판사에서 나온 책 중에 내가 가장 아끼는 책이 있다면 친구들은 대뜸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이냐고 묻겠지만 천만의 말씀. 그것은 다름 아닌 조지 하트의 『원시인 BC』다. 페이지가 닳고 닳도록 본 만화책이다. 사유는 오직 절약을 하기 위해 기성복을 입는다던가. 포복절도할 크리에이티브로 무장한 이 책은 너만의 방식으로 사유할 것을 권유했다. 가끔 친구들로부터 엉뚱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어쩌면 조지 하트의 카툰을 오래 음미한 덕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췌언이 길어졌다. 먼저 조지 하트의 카툰 하나를 소개해보자. 행인들이 지나다니는 길의 벽면에 구멍이 뚫려져 있다. 그리고 그 구멍 가장자리에 이렇게 씌어 있다. ‘들여다 보지 마시오’ 그러나 그 문구는 실제로는 ‘넌 여기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못 베길 걸’하는 강력한 유혹의 글인 셈이다. 그럼 그 구멍 속에는 어떤 풍경이 있었을까. 44-38-44의 드럼통의 몸매를 가진 여자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툰의 마지막 컷은 그 구멍을 들여다본 사람들의 혀가 가슴까지 늘어져 있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여준다. ‘들여다 보지 말라’는 금기가 ‘보고 싶다는’ 욕망을 생산해낸 셈이다. 욕망의 대상이 금기나 규율에 의해 통제되는 경우 그 대상은 더 강렬한 욕망의 목표가 된다는 죠르주 바타이유 식의 명제를 조지 하트는 명민하게 형상화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매치포인트>에서 아일랜드 출신의 가난한 청년 크리스(조너선 리스 마이어스)의 금기는 노라(스칼렛 요한슨)다. 노라는 상류층 친구 톰(매튜 굿)의 약혼녀. 그러나 크리스는 이미 톰의 여동생 클로에(에밀리 모티머)와 연인 사이다. 그러나 크리스의 마음은 클로에에게 없다. 클로에는 상류층으로 편입되고 싶다는 현실원칙이 필요로 하는 상대일 뿐이다. 크리스의 마음은 노라에게 있다. 현실이냐 욕망이냐.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냐 이수일이냐의 양자선택의 갈림에서 그는 클로에를 선택한다. 현실원칙이 쾌락원칙을 압도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삶이 있는 한 쾌락의 원칙은 잠들지 않는다. 크리스는 노라에 대한 욕망을 접을 수 없다. 전형적인 신파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이 비장한 갈등을 더욱 비장하게 하는 것은 영화 전편에 흐르는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등의 오페라 아리아다.  

하기는 스칼렛 요한슨 앞에서 냉정함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과장을 보태자면 어지간한 수도사도 파계를 감행하게 할 용모다. 하물며 범인(凡人)들임에랴. 그만큼 그녀의 스물 두 살의 육체는 눈부시다. 그녀는 진정한 쾌락을 탐하려거든 너의 죽음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팜므 파탈이다.

이명옥의 『팜므 파탈』이란 책을 펴보라. 책은 귀스타브 모로의 ‘현현’, 빌렘 트뤼브너의 ‘살로메’, 귀도 레니의 ‘세례 요한의 머리를 받아 든 살로메’, 잠피에트리노의 ‘살로메’ 등 역사 속에 명멸해간 수많은 요부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스칼렛 요한슨의 매력도 책의 이미지에 뒤지지 않는다.)

저자는 19세기 산업화와 도시화로 전통적인 성 가치관이 무너지고 여성들이 자의식에 눈을 뜨던 시기에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욕망과 공포가 투영된 것이 ""팜므 파탈""이라는 이미지라고 설명한다. 남성들은 남자들과 동등한 성의 자유를 주장하고 해방을 부르짖는 여성들에게 두려움과 경계심을 느끼는 동시에 매혹당하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를 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형상화했다는 설명이다.

영화 속의 크리스 또한 노라에게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 그의 두려움은 노라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확신한다. 그의 두려움은 상류사회로부터 배척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소속되고 싶은 집단으로부터 배척될지도 모른다는 ‘거세공포증’이다. 구조조정에 따르는 퇴출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대한민국 사내들이 가질 법한 공포증과 다르지 않다. 현실에 고분고분 따르자면 자신의 욕망을 숨길 수밖에 없다. 넥타이도 매고, 구두도 반질반질하게 닦고, 랩이나 힙합은 아이들이나 듣는 음악이라고 치부하면서 고상하게 아리아를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매혹의 대상 앞에서 그들의 자제력은 허술하다. 누르면 솟아오르는 것이 어찌 스프링뿐이겠는가.

조물주는 애초에 크리스의 욕망의 스프링을 노라를 향해 튀어 오르도록 설계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장구한 인류의 역사에서 볼 때,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 살아온 것은 기껏 몇 천 년뿐이다. 크리스는 금기를 뛰어넘어 노라를 향해 뛰어든다. 둘의 사랑은 뜨겁다. 그 사랑의 공간에서 어떤 현실도 발붙일 곳이 없다. 『에로티즘』에서 죠르주 바타이유는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생각해보라. 사랑의 격정에 송두리째 빠진 자에게 어떤 현실이 틈입할 여지가 있겠는가.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격절, 그것이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모든 현실에 묶여 있는 자들의 운명은 사랑에 모든 것을 던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영웅들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그들은 비장하다. 그래서 섹시하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결별을 선언하는 미셸에게 “아무도 내게 이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손가락에 권총을 쏘는 알렉스, 죽은 애인을 잊지 못하는 김희애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달려오는 트럭에 뛰어들며 "나는 죽지 않아요"라고 외치는 문성근. 그들은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이런 용감한 수컷들의 행위가 호르몬 테스테스테론의 영향이라고 애써 폄하하지만 그런 그들의 영웅적(자기파괴적) 행동에 연인들은 자신의 마음과 몸의 문을 연다. 그것이 신파의 방정식이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크리스가 노라에 대한 욕망을 접고 클로에에게 투항했거나(현실원칙의 승리), 또는 클로에에 대한 욕망을 접고 노라에게 투항했다면(쾌락원칙의 승리) 영화는 뻔한 멜로드라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 현실은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의 팽팽한 긴장 속에 있다. 우디 알렌이 사랑과 배신이라는 다소 진부한 소재를 택한 것은 현실의 긴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노대가답게 우디 알렌은 영화에서는 버젓이 통용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윤리가 현실에서는 얼마나 먹히지 않는 허술한 논리인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니들은 그렇게 생각하니? 난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하는 우디 알렌의 장난기에 포인트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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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삶의비밀. 2008-07-25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글이 깊으면서도 빠져들게 만드는 설득력을 갖춘 것 같네요.
파편화 되었던 생각들이 다시 모아지는 느낌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