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감독, 짐 캐리 외 출연 / 아이비젼엔터테인먼트(쌈지)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기억,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흔적
담벼락에 피어난 붉은 장미의 향기가 알싸한 5월의 늦은 오후, 비스켓의 향기와도 같이 달콤한 그의 체취가 꽃향기에 실려 온다. 이것이 환각일까, 현실일까. 그러나 현재만으로도 충만한 시간 속에서 왜 이런 골치 아픈 물음이 필요할까. 어떤 것도 더 필요하지 않고, 모든 것이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어떤 충만한 시간도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곽재구의 시 <사평역>의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이라는 구절처럼 모든 희로애락의 순간은 시간의 눈발 아래 묻히고 만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다. 반드시 무엇인가가 남는다. 희미하게나마 무엇인가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남기 마련이다. 희미한 시간의 얼룩, 우리는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이 흘러가 버리고 만다면 대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이란 무엇인가? 입센은 말한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만을 영원히 소유한다>라고. 입센은 ‘잃어버리다’와 ‘소유하다’와 같이 동일한 논리적 공간 안에 함께 있을 수 없는 두 명제를 결합시키는 역설적으로 결합한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을 다시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고 모든 멜로드라마의 문법이지 않은가. 현재는 미꾸라지처럼 우리의 손아귀를 빠져나가지만 우리는 잃어버린 순간을 다시 재생해낸다. 파도가 바위를 스치는 순간은 포착할 수 없지만 바위는 파도의 흔적을 제 몸에 새기는 것처럼. 특히 영화와 소설과 같은 서사 장르는 지나간 기억을 그 어떤 장르보다 강력하게 재현해낸다. 아예 서사 장르는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장르라고 해도 무방하다.
기억은 우리 안에 남겨진 시간의 무늬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버리는 허무한 것이지만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를 영속적으로 우리 안에 보관하려 한다. 그러므로 기억은 찰나에 대한 복수다. 기억은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것에 대한 항변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를 되찾고, 과거와 동거한다. 향기롭던 그의 체취는 사라져가 버린 과거의 시간이지만 기억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현재의 테이블로 불러낸다. 그러나 과거는 명료하게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것은 기억되고 어떤 것은 기억되지 않는 법. 기억의 테두리는 늘 모호하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애인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 심하게 다툰 후 사과하러 간, 조엘(짐 캐리)은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새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그녀의 변화가 '라 쿠나'라는 회사가 제공하는 기억삭제 치료의 결과임을 알게 된 조엘은 홧김에 자신도 동일한 치료를 받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기억삭제가 클레멘타인과의 씁쓸한 기억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까지 삭제한다는 사실을 조엘은 알게 된다.
사랑을 소중하게 간직한다는 것은 과거를 기억 속에 보존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 하나의 낡은 손목시계가 있다고 하자. 그 손목시계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내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해보자. 그 손목시계는 여느 손목시계와는 다르다. 그 시계를 간직한다는 것은 아버지와의 소중했던 시간을 간직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럴 때 시계는 더 이상 물질적 도구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도구는 대체가 가능하지만 존재는 대체가 불가능하다. 낡아 작동이 마비되어 버린 기계는 대체를 하면 그만이지만 아버지의 낡은 시계는 새것으로 대체가 불가능하다. 시계는 이제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사물의 유용성을 초월한다. 도구는 사용하고 폐기처분할 수 있는 사물(도구)에 불과하지만 존재는 사물 그 이상이다. 낡은 시계에는 흘러가버린 시간 속의 기억들이 배어 있다.우리는 그것을 사물의 역사성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 사물들을 폐기처분한다는 것은 그 사물과 결부된 역사를 지우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자신의 연인과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그와 관련된 사진, 선물 등을 모조리 없애기도 한다. 그와 관련된 사물을 모조리 폐기해버림으로써 그와 관련된 시간과 추억, 그와 함께 한 역사를 없애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사랑이 지워질까. 사물은 사라져도 그 사물과 연루된 추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조엘이 지우려고 했던 것은 기억 전체가 아니라 클레멘타인과 함께 했던 사랑의 시간과 추억이었다. 클레멘타인과 결부된 기억만을 조엘은 선택적으로 삭제하게 된다. 그러나 기억을 지우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가 하는 물음들이 나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세계에 대한 호오(好) 판단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에 대한 목록을 입수하는 것은 그가 누군지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구나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의 목록을 지운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기억은 선택적이다. 우리는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지나간 순간을 모두다 불러들이기에 우리의 용량은 턱없이 부족하다. 예외는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여성은 모든 것을 기억한단다. 이니셜, AJ로 알려진 이 여성은 수십년 전이라도 날짜만 대면 그날 어떤 유명인이 사망했는지, TV 드라마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국제 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어떤 비행기 추락 사고가 있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다. 또 그 시각 자신이 했던 일과 그날의 날씨까지 기억해낼 수 있다.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의 제임스 맥고우 등은 5년간 연구를 진행한 후 이 여성의 증상에 ‘초기억 신드롬 hyperthymestic syndrom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녀에게는 완벽한 기억력이 재앙이기도 하단다. 과거의 일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자신의 머리 속은 흡사 "끝나지 않는 영화" 같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또 누군가와 대화하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수십 년 전의 일을 회상하는 것이 너무 괴롭다고 하소연했다.
그렇다 완벽한 기억력은 고통일 뿐이다. 망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 지나간 시절의 고통스런 추억에 얽매여 있는 한 우리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과거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존재다. 과거의 경험의 총체적 기억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앞으로 내 스스로 쌓아 가야할 내 실천과 행동이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결정하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