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연어를 키우고 연어는 숲을 만든다
탁광일 지음 / 넥서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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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가 육지의 나무에게 전해주는 바다의 보물



캐나다의 서쪽 끝 밴쿠버 섬(Vancouver Ismand)에 위치한 뱀필드(Bamfield)는 인구 300 명가량의 오지 마을이다. 태평양을 마주하고 있는 뱀필드는 밴쿠버 섬 서해안의 바클리 만(灣) 남쪽에 위치한다. 밴쿠버 섬 서해안의 많은 마을들이 그렇듯, 뱀필드는 무성한 원시림으로 덮여 있다. 뱀필드에는 일 년 동안 약 3,500㎜의 비가 내린다. 우리나라 강우량의 세 배에 가까운 양의 비 덕분에 이곳에는 세계에서 키가 가장 큰 나무, 직경이 가장 굵은 나무, 수령이 가장 오래된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이곳 뱀필드에는 숲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국인이 있다. 탁광일씨가 바로 그다. 32세의 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올라 밴쿠버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UBC)에서 임학을 공부하고 있던 그는 1990년 여름 뱀필드에 도착하게 된다. 탁광일씨는 벤쿠버 섬의 거대한 숲에 반해, 이 지역 생태계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된, 미국 SFS(School For Field Studies·생태현장실습학교)의 캐나다 뱀필드 센터의 교수로 1999년부터 4년 간 지내게 된다. 그는 학교가 문을 닫은 뒤에도 이 섬의 작은 도시에서 집필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SFS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숲은 연어를 키우고, 연어는 숲을 만든다』라는 책을 엮은 바 있다. 그는 책에서 숲, 개울, 연어, 바다는 서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생명의 고리로 연결돼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2001년 미국의 <생태학지>에는 연어와 강가의 나무가 서로 이익을 주고받으며 산다는, 동화 같은 기사가 실렸다. 미국 워싱턴대의 로버트 나이만 교수팀은 알래스카에 있는 여러 강가의 나무를 조사한 결과 연어가 올라오는 강가의 나무는 그렇지 않은 나무보다 무려 3배나 빨리 자랐음을 관찰했다. 연어가 많이 올라오는 강가에서 자란 86년 수령의 가문비나무의 굵기가  50㎝를 넘었다. 보통은 30㎝ 굵기였지만 이곳의 나무들은 태평양을 거슬러 올라온 연어의 시체에 있는 질소와 인을 풍부하기 섭취하기 때문에 성장이 빠른 것이다. 연어가 바다에서 강으로 영양물질을 옮기는 컨베이어 벨트 노릇을 한 셈이다. 연구팀은 나무의 나이테를 조사하면 과거에 연어가 얼마나 많이 올라왔는지도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태평양 연어의 행동을 연구한 퀸(Thomas P. Quinn)은 태평양에 있는 질소와 인을 연어들이 강을 통해 육지로 운반해올 때 곰이 큰 몫을 담당한다고 한다. 곰들은 습성상 연어를 잡으면 다른 곰들로부터의 간섭을 따돌리기 위해 연어를 먹기 전에 냇가의 뚝으로 가지고 가든지 냇가의 숲으로 가지고 간다. 그리고 연어의 영양소가 풍부한 부분만 먹는다. 20,000 마리이상의 연어사체를 분석해본결과 곰은 연어 한 마리의 약 25 퍼센트 정도만 먹는다는 것을 알려졌다. 특히 곰은 지방성분이 많은 연어의 알 같은 부분을 선호했다. 곰들은 이렇게 좋아하는 부분만 먹은 뒤 다시연어를 잡으려고 냇가로 돌아온다. 이렇게 곰들은 자기가 먹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연어를 잡는다.


곰의 이러한 먹는 습성은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연어는 산란 후에 죽을 운명이다. 그들의 사체는 새나 냇물 속의 물고기들이나 곤충들에 의하여 소비되고 미생물들에 의해 분해되어 다시 바다로 되돌아간다. 바다로 되돌아가면 연어들의 사체에서 얻을 수 있는 영양분을 육지동물들은 이용할 수가 없다. 바로 이런 문제를 곰들이 해결해주는 것이다. 곰들은 냇가 주변으로 바다의 영양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새들과 포유류들이 곰이 먹다 남긴 연어의 사체를 먹어치운 쓰레기들이 부패할 때 남기는 질소와 인을 섭취하고 나무들은 무럭무럭 성장한다. 나무는 연어에게 고맙다는 듯이 보답을 한다. 나무는 강을 깨끗하게 하고 강가에 그늘을 만들어 연어에게 알 낳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 나무는 어린 연어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한다. 어린 연어들은 강에 떨어진 큰 나무 조각 밑에 몸을 숨겨 적을 피한다. 연어는 나무에게 바다의 보물인 질소와 인을 전해주고, 나무는 연어에게 보금자리와 은신처를 제공한다. 이렇게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물고기와 나무는 공생을 실천한다.


공생의 세계는 거대한 그물망에 비유할 수 있다. 그물코 하나하나는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그물코는 다른 그물코에 의존해 있다. 만약 하나의 그물코가 풀리면 다른 그물코도 온전할 수 없다. 강으로 회귀하는 연어의 숫자가 줄면 나무들뿐만 아니라 육지의 동물들도 영향을 받는다. 생명의 그물망은 하나하나의 그물코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거대한 체계다.


불교가 말하는 연기론(緣起論)의 핵심은 '상의상관(相依相關)'이다. 상의상관은 일체의 존재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뜻한다. '너'가 없이는 '내'가 없고, '내'가 없이는 '너'가 없다는 말이다. 뭇 생명체들이 서로 의지하고 서로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사물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다 실증적으로 말한 이는 『침묵의 봄』의 저자, 레이첼 카슨이다. 1907년 미국에서 태어나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한 카슨은 수산국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작가로 나선다. 그는 1957년 친구로부터 정부의 ‘모기 박멸 프로그램' 때문에 새와 곤충이 DDT에 죽어간다는 편지를 받자, 만사를 제쳐놓고 『침묵의 봄』을 쓰는 데 매달린다.


느릅나무를 죽이는 곤충을 박멸할 목적으로 뿌려진 DDT는 그 곤충을 잡아먹는 종달새와 참새와 제비들을 거의 전멸시켰다. 그러나 느릅나무 해충은 오히려 DDT에 대한 강력한 적응력을 지닌 종으로서 다시 나타난다. 더 강력해진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 더 많은 살충제가 뿌려진다. 소나무 벌레를 없애기 위해 미라미치강가에 뿌려진 약제는 플랑크톤과 수중곤충을 박멸시키고 이들을 먹고사는 송어와 연어를 또한 멸종시켰다. 곤충의 죽음은 곤충을 먹이로 하는 새들의 죽음을 야기하고, 송어와 연어의 죽음은 그것을 먹고사는 야생동물의 죽음을 가져온다. 결국 미라미치강은 죽음의 강이 되었다. 생태계의 파괴는 곧 인간에게도 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 인간이 곤충에게 겨눈 화살이 바로 인간 자신의 가슴을 향해 돌아 온 것이다.


레이첼 카슨은 농업용 화학약품이 토양과 지표수, 농작물에 스며들면 먹이사슬을 거쳐 새와 물고기를 멸종시키고, 사람을 암과 신경계 질환에 걸리게 하며, 해충의 천적까지 죽일 뿐만 아니라, 해충에게 살충제에 대한 내성을 길러준다고 논증했다. 인간 자신만을 위해 뿌려진 살충제가 봄이 와도 새 하나 울지 않는 '침묵하는 봄'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레이첼 카슨의 경고다.


카슨이 말한 대로 해충은 새와 연관되어 있고, 숲은 새와 연관이 되어 있으며, 물고기는 물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물고기들은 물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야생동물들과 연관되어 있다. 생명들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인간과 해충은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의 세계는 거대한 고리로 묶여 있는 공생의 세계다. 인간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자연의 고리를 파괴하면서 탁광일씨가 뱀필드의 체험에서 깨달은 상의상관(相依相關)의 지혜, 곧 공생의 지혜를 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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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전쟁 - 미래 전쟁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존 에드워즈 지음, 류동완 옮김, 김민석 감수 / 플래닛미디어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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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무기에 싸움의 정의는 없다.



날카로운 발톱이 있나, 송곳니가 있나. 독수리와 사자와 같은 공격무기라도 없다면 거북과 같은 천연의 방어무기가가 있나, 스컹크와 같은 하늘이 내려준 화학무기가 있나, 인간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그나마 인간이 자연계의 강자들과 한판 붙어볼 수 있는 것은 도구 덕택이었다. 도구가 없다면 인간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존재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도 돌멩이라는 든든한 우군의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다. 원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돌멩이와 몽둥이의 지원 없이는 맹수들에게 가까이 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도구는 인간에게 자연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킨다. 미래의 상황을 내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다면 과거의 사냥꾼들은 섣불리 사냥에 나설 수 없었을 것이다. 병법서인 <손자>에서도 상대가 너무 강해서 맞서 싸우기가 어려울 때는 달아나는 것이 가장 나은 계책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승산이 없는 게임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사냥꾼들이 맹수와 한판 붙을 수 있었던 것은 승산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들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바로 그 믿는 구석이 무기임을 눈치 채셨을 것이다.


돌멩이를 가짐으로써 인간은 비교적 먼 거리에서 맹수들에게 전략적 우위를 가졌을 것이고, 가까운 거리에서는 몽둥이를 통해서 전략적 우위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돌멩이와 몽둥이만으로는 부족했다. 뗀석기에서 간석기로, 간석기에서 다시 청동기와 철제로 도구가 발달하면서 인간은 보다 든든한 우군의 지원에 힘입어 맹수들과 당당하게 한판 붙어볼 수 있었다.


동물의 입장에서도 역시 인간과의 싸움은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해 볼만하다는 것은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다는 ‘결과의 불확정성’을 의미한다. 인간이 이길 수도 있고, 맹수가 이길 수도 있는 결과의 불확정성 때문에 사냥은 흥미로운 게임이 된다. 맹수가 항상 이기는 싸움이나 인간이 항상 이기는 싸움은 맥이 빠진다.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 게임에 흥미를 불어넣는다.


과거의 사냥꾼들은 자신이 동물에게 희생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사냥에 나가기에 앞서 자신들의 수호신에게 자신의 안전을 기원했다. 맹수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자기 쪽으로 확실히 가져올 수 있도록 그들은 화살촉을 정교하게 다듬고 칼날을 예리하게 갈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과녁에 화살을 쏘아 날리며 자신의 사냥 능력을 연마했다. 연마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사냥꾼들은 자신의 운명을 조절할 수 있는 권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인간의 사냥 능력이 향상됨으로써 인간과 맹수와의 싸움은 흥미진진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인간과 맹수와의 싸움이 흥미를 잃게 되었다. 문제는 월등한 무기의 출현이었다. 고성능무기로 무장한 인간은 엄청난 힘을 보유하게 된다. 조자룡이 아무리 창을 질 쓰더라도, 아킬레스가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졌다 해도, 김두한이 아무리 센 주먹을 가졌다 해도, 성능 좋은 자동소통 한 정이면 게임은 간단하게 끝난다. 이런 무기 앞에서는 용맹과 지혜도 통하지 않는다. 다윗의 돌멩이는 이런 무기 앞에서는 새 발의 피다. 있으나마나한 무기라는 것이다.


‘JDAM’이라고 하는 폭탄은 일반 폭탄에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시스템인 위성항법장치 (GPS: Global Positioning System])의 유도를 받게 만들어졌다. 이 폭탄은 정확도가 엄청나서 오차가 3 미터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이런 무기 앞에 제갈량의 지혜도 장비의 용맹도 조자룡의 날렵함도 통할 리가 없다.


현재 개발 중인 ‘e-폭탄’이라고 하는 무기는 극초단파를 쏴서 모든 전자제품을 파괴하는 무기라고 한다. 번개의 수백 배에 달하는 강력한 초단파를 방출함으로서 적의 모든 전자기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니 현대전이 전자전이라고 해도 이 무기만 잘만 사용하면 적의 전략시스템을 단박에 무력화시킬 수 있다.


미국은 2003년 이라크전 개전 당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은신할 것으로 예상되는 6m 깊이의 지하벙커를 타격하여 폭파할 수 있는 ‘벙커버스터(GBU-37) 폭탄’과 ‘모든 폭탄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모아브(MOAB: Mother Of All Bomb의 이니셜)’ 라는 신형 살상무기를 도입하려다가 인권단체와 국제사회의 반대로 포기한 바 있다. 대체 왜 인권단체는 이 무기의 도입을 반대했을까. 대체 얼마나 비인도적 무기이길래.


MOAB는 위성을 통한 유도시스템과 목표물 13m내로 떨어지게 만드는 꼬리 부분을 가지고 있다. 이 폭탄은 무게가 9천 513㎏에 달해, 수송기나 대형 폭격기에서 공중투하되면 지상 3m위에서 공기와 결합하면서 폭발하여 직경 500m 이내의 지역을 순식간에 무산소 상태로 만드는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다. 이 폭탄을 맞으면 불에 데 죽든지 산소부족으로 죽든지 둘 중의 하나다. 현재 핵폭탄이 아닌 비핵무기로서는 이 폭탄이 가장 강력하다고 한다. MOAB의 폭발시 충격은 얼마나 엄청난지 상대에게 엄청난 심리적 공포를 안겨준다고 한다. 이런 무기로 무장한다면 백만대군의 적도 두려울 게 없다.


『진화하는 전쟁』의 저자, 존 에드워즈가 소개하는 첨단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가 소개하는 하이테크 군인은 레이저 무기를 능가하는 강력한 자유전자레이저로 무장했다.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의 경계를 무너뜨린 고에너지 감마선을 이용한 폭탄, 탄환을 막는 세라믹 무기, 곤충의 눈을 모방해 만든 시각 시스템을 장착한 차세대 스마트 무기, 벌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미래 전투 로봇, 소형 정찰 로봇, 세계 최초의 전술용 자가 형성 다중입출력 이동 네트워크인 패킷 BLAST, 출혈과다를 막아주는 퀵클랏, 버클리 하체 능력 극대화 엑소스켈레톤, 생물학 작용제와 화학 작용제를 탐지하는 스마트 더스트, 정찰 및 무기 유도 시스템인 미니 SAR, 지뢰탐지 로봇 등 가히 ‘어지러운’ 이름을 가진 최첨단 전쟁 무기 정보가 이 책에 집대성되어 있다.


사냥꾼이 이런 초강력무기로 무장한다면 굳이 신에게 보호를 요청하지 않아도 된다. 악어건 득대건 두려울 게 없다. 싸움은 백전백승이 될 확률이 거의 100 프로다. 멀게는 원시시대 사냥꾼의 싸움이나 조자룡 시대의 싸움, 가깝게는 김두한 시대의 싸움은 누가 이길지,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 게임의 흥미를 높여주었지만 첨단무기를 등에 업고 겨루는 싸움은 누가 이길지 결과가 뻔한 싸움이다. 월등한 도구를 손에 쥔 자, 기술이 월등한 자가 반드시 이기는 싸움이다.


심리학자와 낚시꾼으로 평생을 살아온 폴 퀸네트는 『다윈은 어떻게 프로이트에게 낚시를 가르쳤는가』라는 책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이 던지면 되돌아오는 부메랑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물고기를 기절시켜 잡는 낚시법에 뒤이어 ‘듀퐁 스피너’라고 하는 작은 다이너마이트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소개한다. 이 폭탄을 개울에 던지면 폭발의 충격으로 물고기들이 물 위로 떠오른다. 인간은 물고기들을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된다. 아주 손쉬운 낚시법이다. 터키의 흑해의 낚시꾼들도 종이와 삼실을 가지고 만든 달걀 모양의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서 물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약과다. 머리만 잘 쓰면 더 쉽게 물고기를 포획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독을 이용한 낚시다. 유럽에서 사용되는 ‘물고기의 알’이라고 불리는 코켈시드를 동그란 반죽형태로 만들어 연못에 뿌려놓으면, 그것을 먹고 사지가 마비된 물고기들을 떠오른다. 이것으로 낚시는 상황 끝이다. 수중음파탐지기와 같은 첨단기술의 도움을 받아 이보다 효과적인 낚시법을 개발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마음만 먹으면 물고기의 씨를 말려버릴 수도 있다.


<논어>에서 공자는 “낚시는 하되 그물을 던지지는 말고, 화살을 겨누되 잠자는 새를 쏘지는 말라."고 했다. 그물을 던져 씨알이 작은 새끼붕어들까지 싹쓸이를 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잠자는 새를 잡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새에게도 도망갈 여지를 남겨주라는 것이 공자님이 우리에게 주는 충고다. 그러나 현대의 기술은 어떤가. MOAB 폭탄은 도망갈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다. 한방이면 말 그대로 끝장이다. 여기에 더 이상의 정의는 없다.


정의는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결과의 불확정성 속에 있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팔씨름을 할 때, 아버지가 아들의 팔목을 잡는 것도 그 결과의 불확정성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고, 장기를 둘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차를 떼고 두는 것도 역시 결과의 불확정성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다. 모든 게임의 기획자들은 결과의 불확정성을 높임으로써 관객들의 게임에 대한 기대를 이끌어낸다. 미국의 프로농구팀과 한국의 고등학교 농구팀과의 게임의 흥행결과는 보나마나다. 재미있는 게임, 정의로운 게임은 누가 이길지 모르는 손에 땀을 쥐는 경기다. 가진 사람, 힘 있는 자가 일방적으로 이기는 게임은 정의로운 게임이 아니다. 못 가진 자, 힘 없는 자도 한번쯤은 이겨볼 수 있는 싸움만이 정의로운 싸움이다.


첨단의 기술은 인간의 파워를 한껏 부풀려 놓았는지는 몰라도 인간의 자존심은 한없이 떨어뜨렸다.  ”저런, 인간의 품위는 인간의 기술이 다 망치는구나.“ 청새치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죽음을 건 사투를 벌였던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이 무덤 속에서 한탄할 노릇이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기는 싸움에 정의는 없다. 과학이 가는 길, 기술이 가는 길이 항상 정의의 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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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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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라는 무기를 버린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의 대형 포유류의 비극




공포는 분명 부정적인 감정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공포를 즐긴다. 놀이시설에서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고, 호러무비를 즐기는 매니아들도 있다. 대체 무엇이 공포를 즐기게 하는 것일까.


공포감은 인간에게 충분히 쾌감 내지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공포의 순간에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맞서 싸우느냐 아니면 달아나느냐’를 결정해야 한다. 이때 아드레날린의 분비로 심장 박동 수는 늘고 호흡을 빨라지면서 근육은 긴장한다. 그런데 실제 위험이 크지 않다는 사실을 뇌가 알고 있다면, 이런 아드레날린의 ‘분출’은 즐길 만한 것으로 해석된다. 공포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실제 위험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공포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공포는 끔찍한 심리적 체험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끔찍한 경험을 환영할 리 없을 것이다.


가혹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절망을 안겨다 준다. 파산자의 자살은 이를 말해준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끔찍한 현재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사람들도 조만간 이 공포로부터 탈출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이 탈출에 대한 기대가 공포를 즐기게 한다. 


원시 시대 독거미가 우글거리고 맹수들이 도사리고 있는 정글 지역은 분명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새로운 먹거리들이 있는 매혹적인 공간이기도 하였다. 이 먹거리들을 즐기기 위해서는 공포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무릇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 법이라 했다. 먹이감도 마찬가지였다. 정글로 과감하게 뛰어들 수 있는 담력의 소유자만이 맛난 열매에 입맞춤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공포를 지불하고 인류는 새로운 거처와 먹거리를 구할 수 있었다.


유럽이나 아시아에는 대형 포유류가 많은데 왜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에는 대형 포유류가 없을까. 『총균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 답을 공포심에서 찾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는 육지에서 배를 타고 건너간 사람들이 살게 됨으로써 문명이 시작된 곳이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화석들은 사람들이 문명을 시작하기 전에는 대형 포유류들이 살았었음을 말해준다.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의 동물들은 인간사냥꾼이 없는 곳에서 수백만 년 동안이나 진화했다. 갈라파고스섬과 남극대륙의 조류와 포유류도 인간이 없는 곳에서 진화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보지 못하고 산다. 이렇게 인간을 보지 못하고 진화한 동물들의 특징은 인간에게 공포심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뜨거운 맛’을 보지 못했으니 인간이 얼마나 영리한 사냥꾼인지 모르는 것이다. 최근에 발견된 섬들 중에서도 신속한 보호대책이 마련되지 동물들이 전멸하는 사태를 빚었다는 것이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설명이다. 모리셔스섬의 도도새의 멸종도 인간의 무서움을 간파하지 못한 도도새들의 순진성에 있다고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설명한다.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의 거대동물의 최후도 모리셔스섬의 도도새와 같았다. 거대동물들은 진화의 측면에서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갑자기 잘 발달된 사냥 기술을 지니고 쳐들어 온 현생 인류와 맞닥뜨리는 불운을 당했으며, 이 불운이 멸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몰랐던 순진함이 멸종을 불러온 셈이다.


그 경우와는 달리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대형 포유류는 수십만 또는 수백만 년 동안 인간들과 함께 진화되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공포심을 진화시킬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영리한 사냥꾼인가를 오랜 진화의 시간 동안에 간파했다. 인간을 보면 튀어라. 공포가 그들을 살린 셈이다.


공포심이라는 무기로 무장한 개체와 공포심이란 무기를 해제해버린 개체, 둘 중의 어느 개체가 진화에 유리했을까. 그 답을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의 사라진 대형 포유류들이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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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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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는 현재 수많은 생물 종(種)과 문화, 소수의 민족 언어의 대량 멸종 현상이 진행 중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대량멸종은 자연재앙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멸종의 속도 또한 엄청나다. 인간이 존재하기 전의 생물 멸종 속도는 매년 100만종 가운데 하나 정도였으나 현재는 그 1,000배에 달한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분석이다. 사라지는 것은 자연뿐이 아니다. 언어와 문화 역시 시시각각 사멸의 위기를 겪고 있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의 저자 다니엘 네틀은 언어의 소멸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는 "각 언어마다 세계를 보는 자신만의 창이 있다. 모든 언어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언어가 스스로 일구어 낸 모든 문화의 기념비와도 같다."며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도구를 잃는 것이요, 살아 있는 박물관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개탄하고 있다.


 ‘그 많던 언어가 어디로 갔을까’란 부제가 붙은 책은 소수 언어의 현황을 보여준다. 저자에 의하면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언어는 5,000~6,700개 정도이지만 언어 사멸의 추세가 계속될 경우, 21세기를 지나는 동안 최소한 절반, 많으면 90% 정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한다. 200년전, 제임스 쿡 선장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한 이후 지금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250개 토착어가 대부분 사라졌으며, 미국의 서부 개척이 시작된 이래,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사용되던 100여종의 토착어가 모두 소멸했다.  지난 5백 년 동안 세계의 언어 중 거의 절반이 사라졌다.


저자는 생물다양성이라는 맥락에서 언어의 소멸의 문제를 살핀다.(저자의 시각은 ‘언어적 다양성의 감소를 생물학적 다양성의 감소와 연결지어 논하라’라는 문제의 시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언어적 다양성과 생물학적 다양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파푸아 뉴기니, 서부 아프리카, 인도네시아 등 세계 언어의 대부분을 사용하고 있는 열대지역은 지구상 전체 생물종의 50~90%가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언어가 소멸한다는 것은 생태계가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어 다양성은 문화적 다양성의 척도이며 한 언어가 사멸하면 그 생활양식도 사라진다는 점에서 언어의 소멸은 문화 소멸의 징후”라고 말하고 있는 저자는 언어가 사라지면서 그 언어에 담긴 토착적 지식과 문화와 예술이 사라진다고 우려하고 있다. 책의 내용을 요약해보자.


해양 생물학자인 요하네스는 1894년에 태어난 서태평양 팔라우 어부를 인터뷰했는데 이 어부는 300개 이상의 서로 다른 어종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 어부는 수백 종의 물고기 이름과 서식지, 어로 관습, 어로 기술 등과 전 세계의 과학 문헌에 기재되어 있는 것의 몇 곱절이나 되는 어종들의 음력 산란 주기를 알고 있었다. 북극 지역에 거주하는 이누이트족은 어떤 종류의 얼음과 눈이 사람과 개, 또는 카약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얼음과 눈의 강도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을 붙였다. 또한 필리핀의 민도로 섬에 만 2천 명 정도가 모여 사는 하우누족은 450종 이상의 동물과 천 5백 종의 식물을 구별할 수 있으며 그 중 1천 종 이상의 식물을 야생에서 채취하고 약 430종의 식물을 재배한다. 토지에 대해서도 10종의 기본 토질과 30종의 아종 토질을 구분하며 토양의 굳은 정도에 따라 네 가지의 다른 용어를 쓴다. 이들은 서로 다른 토질을 아홉 가지의 색깔로 구별하며, 땅의 지형을 다섯 가지로 분류할 뿐 아니라 땅이 경사진 정도를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낸다.


토착민들의 이러한 지식 중 상당 부분은 수천 년 동안 이들의 언어 속에서 구전으로 전해져 왔으며 이들의 언어가 사라짐과 동시에 이러한 지식도 잊혀져 가고 있다. 불행하게도, 언어 속에 담긴 독특한 문화적 요소의 상당 부분이 언어의 사멸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다양한 언어가 포진하고 있는 지역인 아프리카 적도 인근 지역, 인도 남부와 동남아, 태평양 등 열대지역 언어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는 것은 이 지역의 생물다양성이 감소하는 현상과 일치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제레미 리프킨의 『바이오테크』라는 책을 보면 아시아에는 쌀의 변종이 14만종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들은 그중 다섯 내지 여섯 개 변종들에 대해서만 유전자를 조작해 그것들을 쌀을 주로 재배하는 지역에 집중 재배하는 모델로 강요했다. 아시아 국가에서는 이 대여섯 가지 변종 쌀들이 전체 논의 60~70%에서 재배된다고 한다. 다국적 기업에 의해서 유전자 조작된 종자들이 각국의 고유한 종자들을 몰아내고 있다. 농민들은 단지 유전자 조작된 종자가 수익성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토착 종자를 포기한다.


자연계에 어떤 변화가 닥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돈이 된다’는 이유로 경제성이 뛰어난 단일작물로 재래종을 몰아내고 유전자 조작된 종자를 심었을 때, 자연적 재앙으로 인해 벼가 전멸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전자의 다양성의 증대는 환경 변화에 유연한 대처능력의 증대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의 저자 다니엘 네틀은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에 환경보존을 위해 더이상의 개발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불공평한 처사라고 지적한다. 이제 와서 언어.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생태계의 보존을 위해 경제적 불이익을 감당하라고 한다면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더 위생적인 환경과 편안한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와 지역생태계를 보존하면서 원주민들이 경제적 혜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는 지역생태계의 자원을 통제할 권리를 원주민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언어의 사용집단이 안정적으로 유지돼 가정과 사회에서 그 언어를 사용할 때라야 언어 보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개발은 외부인에 의한, 외부인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개발은 외부인에 의한, 외부인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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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해방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 인간사랑 / 199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피터 싱어는 세계화가 대세가 된 시대에 어떤 윤리를 세우고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학자다. 그는 『세계화의 윤리』를 통해 다. 오늘날 세계가 안고 있는 여러 난제들의 해결책은 오직 '공동체적 세계윤리'뿐이라고 역설한다. 그의 저서 『동물해방』도 세계윤리의 차원에서 집필된 책이다. 피터 싱어가  29세이던 1975년에 쓴 이 책은 동물들이 마치 공산품처럼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며 고통 받는 처참한 사육환경을  고발하고 있다. 동물들이 처참한 사육환경을 묘사함으로써 이 책이 고발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인간중심주의’다.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을 한낱 도구로 보는 세계관이다. 그러나 예전 사람들은 자연을 한낱 도구나 사물로 보지 않았다. 사물에는 반드시 어떤 정신성, 영성(靈性)이 깃들어 있었다고 믿었다. 동네 어귀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함부로 자르지 않았던 것도 나무에 깃들어 있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해치면 마을에 ‘동티’(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잘못 건드려서 생기는 불행)‘가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물에 영성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은 오늘날의 사로고 보면 미신이나 원시적 사고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물을 자신의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보는 인간중심주의와 사물의 질서를 오직 차가운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밖에 파악하지 않는 과학주의가 얼마나 큰 재앙을 몰고 왔는지를 생각해보자.


l7세기에 데카르트는 동물기계론을 제창하여, 동물체를 태엽을 감은 기계와 같이 생각한 바 있다. 그는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보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을 남긴 데카르트는 사유 능력이 없는 동물은 살아 있기는 하지만 기계나 마찬가지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물을 상대로 실험을 하거나 도축할 때 동물이 내는 비명은 기계에서 나는 삐걱거림이나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본능에 끌려 다니는 동물의 행동은 그저 생리적인 반응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동물해방』의 저자 피터싱어는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말한다. 먼저 행위 방식에서, 인간이 고통을 느낄 때 나타내는 몸짓을 동물들도 분명히 나타낸다. 가령 동물들은 아픔을 느낄 때 몸을 뒤튼다든가 안면이 일그러지며 이들이 고통을 못 견뎌 내는 고함소리나 신음소리 등은 인간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또 동물과 인간은 신경체계가 유사하므로 동물들도 일정한 자극에 대하여 인간과 유사한 신경학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가령 동물들은 긴장상태에서 혈압이 올라가고, 동공이 팽창하며, 땀을 흘리고, 맥박이 빨리 뛴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과 유사한 반응을 일으키는 신경체계가 주관적으로는 동물들에게 상이한 느낌을 산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합리적이지 못하다. 또 동물들의 신경체계는 우리와 유사한 진화 과정을 거쳤으며, 그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분명 진화적인 이점이 있었을 것이므로 동물들도 고통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동물도 인간과 같이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므로 동물의 이익을 인간의 이익처럼 고려해야 한다고 피터 싱어는 주장한다. 동물의 이익이 윤리적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할 이유는 그들이 이성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있는가, 대화를 할 능력이 있는가에 있지 않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의 유무에 달려 있다는 공리주의자 벤담의 말을 인용하면서, 동물들이 과거를 기리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나 공동체를 구성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이익이 고려되지 않아야 할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피터싱어는 말한다. 피터 싱어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기본적 원리가 인간의 지성과 능력이 동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익에 대한 동등한 배려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고통과 쾌락을 감지할 능력이 있는 존재라면 마땅히 그들의 이익이 고려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피터 싱어의 견해다.


『동물해방』에서 피터가 고발하는 동물들의 상황은 실로 섬뜩하다. 가령, 축산업자는 송아지 축사를 항상 따뜻하게 해두는데, 이는 송아지의 열량 손실을 막는 동시에 땀을 흘리게 하여 더욱 갈증을 느껴 식사를 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또 운동량을 줄여야 빨리 살이 찌기 때문에 축산업자는 송아지가 어떤 운동도 할 수 없게 감금한다. 그렇게 해서 송아지는 하루 종일 먹는 일 이외에는 아무 짓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비육된다. 우리가 자주 마시는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서 젖소는 임신 가능해진 그때부터 5~6년 뒤 햄버거나 개 사료가 되기 위해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그날까지 줄곧 강제로 임신하게 되고 또 출산 후에는 즉시 새끼를 박탈당한다.


피터싱어가 『동물해방』에서 인간중심주의를 통렬하게 고발함으로써 동물에 대한 인간들의 사고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동물을 인간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동물에게도 스스로 존재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런 사고의 변화가 요즈음은 보다 구체성을 띄고 있다. 물고기를 실험동물로 이용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변화의 한 가지다. 어류는 포유류에 비해 고통을 기억하는 시간이 극히 짧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고통을 최소화하는 이른바 ‘3R’ 원칙에 다가서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물고기를 실험에 이용하게 된 것이다.


3R 원칙은 영국의 과학자 러셀과 버크가 제시한, 동물실험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윤리다. 3R이란 동물실험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대체(replacement)하고,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동물실험 횟수를 줄이고(reduction),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refinement)해야 한다는 대안 원칙이다. 고등동물 대신 하등동물을 써서 동물이 지각할 수 있는 고통을 줄이거나, 통계적 기법이나 새로운 실험환경을 도입해 실험 횟수를 줄이는 방식, 세포·조직 연구로 대신하는 노력 등이 모두 3R 원칙에 따라 행하는 대안 연구다.


우리 속담에도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병을 알아본 사람만이 그 병에 걸린 사람을 이해한다는 이야기다. 이 때 고통받는 사람과 그를 지켜보는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고통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다. 공감이란 타인의 처지와 감정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감정이다. 그것은 타자의 처지와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일체화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타인의 기쁨과 고통을 내것처럼 생각하는 공감의 정서는 단순히 개별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이는 철학자 흄이었다. 그는 덕에 포함된 성질들은 즐거움을 주거나 유용한 것으로, 악덕에 속하는 성질들은 혐오감을 주거나 무용한 것으로 느껴지는데, 이같은 구별은 인간들에게 대부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쾌락과 고통에 대한 반응은 개별적이지만, 그 반응 능력인 도덕적 정서 자체는 인간에게 보편적이라고 보았다. 흄은 이러한 보편적인 인간의 도덕적 정서를 공감(sympathy)이라고 생각했다. 공감은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한 위대한 유사성”에 근거하고 있어서, 도덕성의 보편적 성향이나 원리로서 작용한다고 본 것이다. 나는 나이고 타인은 타인에 불과하다는 데서는 어떤 도덕이나 형제애도 생겨나지 않는다. 타인도 나와 같이 고통을 느낄 것이라는 데서 도덕과 형제애가 생겨난다. 타인과 내가 같을 것이라는 유사성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도덕과 형제에의 바탕이 된다.


이 공감의 원리가 없다면 우리는 수천 년 전에 행해졌던 전제군주의 악덕에 대해서 도덕적 비난을 할 수 없고, 먼 나라에서 행해지는 독재자들의 횡포를 비판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흄에 있어서 공감은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가장 강력한 도덕적 인식 능력이며, 도덕적 구별이나 판단의 보편적 원리가 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 특히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은 이타행동을 촉발시키는 경향이 있다. 2004년 12월 지진으로 인한 해일 '쓰나미'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을 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피해국가를 돕겠다고 나선 지방자치 단체는 마산시였다. 예산이 많아서도 아니고, 다른 행정구역보다 마산시가 종교 활동이 두드러져서도 아니다. 마산시 역시 2003년 태풍 '매미'로 큰 피해를 입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아픔과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동남 아시아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마산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는 시민의 행위에는 높은 수준의 윤리 의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불우한 이웃의 불행한 삶에 대한 공감이 있다. 공감이 있기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며, 그 결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타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공감능력을 극대화시킨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도 결국 공감의 능력을 확대하라는 주문이고,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불교의 불살계(不殺戒)는 자연계의 뭇생명들에게로 인간의 공감능력을 확대시킨 결과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죽는 동물의 수는 1년에 약 5억마리로 추산된다. 1초당 약 16마리꼴로 죽어가는 셈이다. 약품과 화장품 개발, 유해물질 독성 검사, 스트레스 실험, 생활용품 안전검사 등을 위해 병원과 제약업체, 대학 실험실, 제조업체 등에서 수많은 동물들이 죽어간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마땅히 동물의 고통에도 공감한다. 인간의 고통과 동물의 고통은 다르므로 인간의 고통에는 연민을 느끼지만 동물의 고통에는 연민을 느끼지 않겠다는 태도가 피터 싱어가 말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다. 바로 이  ‘종차별주의(speciesism)’가 초래한 것이 오늘날의 생태계 파괴로 집약되는 환경문제다. 생태계 파괴는 어떤 한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문제다. 더이상의 환경 파괴를 막고 건강한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의 마련도 시급한 문제지만 종차별주의를 넘어서 인간과 동물, 더 나아가 식물에게까지 배려의 차원을 넓히는 인식의 전환 역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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