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해방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 인간사랑 / 199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피터 싱어는 세계화가 대세가 된 시대에 어떤 윤리를 세우고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학자다. 그는 『세계화의 윤리』를 통해 다. 오늘날 세계가 안고 있는 여러 난제들의 해결책은 오직 '공동체적 세계윤리'뿐이라고 역설한다. 그의 저서 『동물해방』도 세계윤리의 차원에서 집필된 책이다. 피터 싱어가  29세이던 1975년에 쓴 이 책은 동물들이 마치 공산품처럼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며 고통 받는 처참한 사육환경을  고발하고 있다. 동물들이 처참한 사육환경을 묘사함으로써 이 책이 고발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 이른바 ‘인간중심주의’다.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을 한낱 도구로 보는 세계관이다. 그러나 예전 사람들은 자연을 한낱 도구나 사물로 보지 않았다. 사물에는 반드시 어떤 정신성, 영성(靈性)이 깃들어 있었다고 믿었다. 동네 어귀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함부로 자르지 않았던 것도 나무에 깃들어 있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해치면 마을에 ‘동티’(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잘못 건드려서 생기는 불행)‘가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물에 영성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은 오늘날의 사로고 보면 미신이나 원시적 사고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물을 자신의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보는 인간중심주의와 사물의 질서를 오직 차가운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밖에 파악하지 않는 과학주의가 얼마나 큰 재앙을 몰고 왔는지를 생각해보자.


l7세기에 데카르트는 동물기계론을 제창하여, 동물체를 태엽을 감은 기계와 같이 생각한 바 있다. 그는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보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을 남긴 데카르트는 사유 능력이 없는 동물은 살아 있기는 하지만 기계나 마찬가지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물을 상대로 실험을 하거나 도축할 때 동물이 내는 비명은 기계에서 나는 삐걱거림이나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본능에 끌려 다니는 동물의 행동은 그저 생리적인 반응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동물해방』의 저자 피터싱어는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말한다. 먼저 행위 방식에서, 인간이 고통을 느낄 때 나타내는 몸짓을 동물들도 분명히 나타낸다. 가령 동물들은 아픔을 느낄 때 몸을 뒤튼다든가 안면이 일그러지며 이들이 고통을 못 견뎌 내는 고함소리나 신음소리 등은 인간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또 동물과 인간은 신경체계가 유사하므로 동물들도 일정한 자극에 대하여 인간과 유사한 신경학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가령 동물들은 긴장상태에서 혈압이 올라가고, 동공이 팽창하며, 땀을 흘리고, 맥박이 빨리 뛴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과 유사한 반응을 일으키는 신경체계가 주관적으로는 동물들에게 상이한 느낌을 산출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합리적이지 못하다. 또 동물들의 신경체계는 우리와 유사한 진화 과정을 거쳤으며, 그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분명 진화적인 이점이 있었을 것이므로 동물들도 고통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동물도 인간과 같이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므로 동물의 이익을 인간의 이익처럼 고려해야 한다고 피터 싱어는 주장한다. 동물의 이익이 윤리적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할 이유는 그들이 이성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있는가, 대화를 할 능력이 있는가에 있지 않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의 유무에 달려 있다는 공리주의자 벤담의 말을 인용하면서, 동물들이 과거를 기리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나 공동체를 구성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이익이 고려되지 않아야 할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피터싱어는 말한다. 피터 싱어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기본적 원리가 인간의 지성과 능력이 동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익에 대한 동등한 배려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고통과 쾌락을 감지할 능력이 있는 존재라면 마땅히 그들의 이익이 고려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피터 싱어의 견해다.


『동물해방』에서 피터가 고발하는 동물들의 상황은 실로 섬뜩하다. 가령, 축산업자는 송아지 축사를 항상 따뜻하게 해두는데, 이는 송아지의 열량 손실을 막는 동시에 땀을 흘리게 하여 더욱 갈증을 느껴 식사를 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또 운동량을 줄여야 빨리 살이 찌기 때문에 축산업자는 송아지가 어떤 운동도 할 수 없게 감금한다. 그렇게 해서 송아지는 하루 종일 먹는 일 이외에는 아무 짓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비육된다. 우리가 자주 마시는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서 젖소는 임신 가능해진 그때부터 5~6년 뒤 햄버거나 개 사료가 되기 위해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그날까지 줄곧 강제로 임신하게 되고 또 출산 후에는 즉시 새끼를 박탈당한다.


피터싱어가 『동물해방』에서 인간중심주의를 통렬하게 고발함으로써 동물에 대한 인간들의 사고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동물을 인간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동물에게도 스스로 존재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런 사고의 변화가 요즈음은 보다 구체성을 띄고 있다. 물고기를 실험동물로 이용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변화의 한 가지다. 어류는 포유류에 비해 고통을 기억하는 시간이 극히 짧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고통을 최소화하는 이른바 ‘3R’ 원칙에 다가서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물고기를 실험에 이용하게 된 것이다.


3R 원칙은 영국의 과학자 러셀과 버크가 제시한, 동물실험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윤리다. 3R이란 동물실험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대체(replacement)하고,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동물실험 횟수를 줄이고(reduction),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refinement)해야 한다는 대안 원칙이다. 고등동물 대신 하등동물을 써서 동물이 지각할 수 있는 고통을 줄이거나, 통계적 기법이나 새로운 실험환경을 도입해 실험 횟수를 줄이는 방식, 세포·조직 연구로 대신하는 노력 등이 모두 3R 원칙에 따라 행하는 대안 연구다.


우리 속담에도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병을 알아본 사람만이 그 병에 걸린 사람을 이해한다는 이야기다. 이 때 고통받는 사람과 그를 지켜보는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고통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다. 공감이란 타인의 처지와 감정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감정이다. 그것은 타자의 처지와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일체화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타인의 기쁨과 고통을 내것처럼 생각하는 공감의 정서는 단순히 개별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이는 철학자 흄이었다. 그는 덕에 포함된 성질들은 즐거움을 주거나 유용한 것으로, 악덕에 속하는 성질들은 혐오감을 주거나 무용한 것으로 느껴지는데, 이같은 구별은 인간들에게 대부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쾌락과 고통에 대한 반응은 개별적이지만, 그 반응 능력인 도덕적 정서 자체는 인간에게 보편적이라고 보았다. 흄은 이러한 보편적인 인간의 도덕적 정서를 공감(sympathy)이라고 생각했다. 공감은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한 위대한 유사성”에 근거하고 있어서, 도덕성의 보편적 성향이나 원리로서 작용한다고 본 것이다. 나는 나이고 타인은 타인에 불과하다는 데서는 어떤 도덕이나 형제애도 생겨나지 않는다. 타인도 나와 같이 고통을 느낄 것이라는 데서 도덕과 형제애가 생겨난다. 타인과 내가 같을 것이라는 유사성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도덕과 형제에의 바탕이 된다.


이 공감의 원리가 없다면 우리는 수천 년 전에 행해졌던 전제군주의 악덕에 대해서 도덕적 비난을 할 수 없고, 먼 나라에서 행해지는 독재자들의 횡포를 비판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흄에 있어서 공감은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가장 강력한 도덕적 인식 능력이며, 도덕적 구별이나 판단의 보편적 원리가 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 특히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은 이타행동을 촉발시키는 경향이 있다. 2004년 12월 지진으로 인한 해일 '쓰나미'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을 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피해국가를 돕겠다고 나선 지방자치 단체는 마산시였다. 예산이 많아서도 아니고, 다른 행정구역보다 마산시가 종교 활동이 두드러져서도 아니다. 마산시 역시 2003년 태풍 '매미'로 큰 피해를 입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아픔과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동남 아시아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마산시민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는 시민의 행위에는 높은 수준의 윤리 의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불우한 이웃의 불행한 삶에 대한 공감이 있다. 공감이 있기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며, 그 결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타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공감능력을 극대화시킨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도 결국 공감의 능력을 확대하라는 주문이고,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불교의 불살계(不殺戒)는 자연계의 뭇생명들에게로 인간의 공감능력을 확대시킨 결과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죽는 동물의 수는 1년에 약 5억마리로 추산된다. 1초당 약 16마리꼴로 죽어가는 셈이다. 약품과 화장품 개발, 유해물질 독성 검사, 스트레스 실험, 생활용품 안전검사 등을 위해 병원과 제약업체, 대학 실험실, 제조업체 등에서 수많은 동물들이 죽어간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마땅히 동물의 고통에도 공감한다. 인간의 고통과 동물의 고통은 다르므로 인간의 고통에는 연민을 느끼지만 동물의 고통에는 연민을 느끼지 않겠다는 태도가 피터 싱어가 말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다. 바로 이  ‘종차별주의(speciesism)’가 초래한 것이 오늘날의 생태계 파괴로 집약되는 환경문제다. 생태계 파괴는 어떤 한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문제다. 더이상의 환경 파괴를 막고 건강한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의 마련도 시급한 문제지만 종차별주의를 넘어서 인간과 동물, 더 나아가 식물에게까지 배려의 차원을 넓히는 인식의 전환 역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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