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
조지 오웰 지음, 김병익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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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통제를 통해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



  박지원 <연암집>에서 “저 까마귀처럼 깃털이 검은 것이 없다. 그러나 홀연 유금빛으로 아롱지고, 다시 석록빛으로 반짝인다. 햇살이 비치면 자줏빛이 되었다가, 어느새 비취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까마귀는 본디 정해진 색깔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린다. 까마귀는 과연 검기는 검다. 그러나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르고 붉은 것이 그 색깔 가운데 깃든 빛깔인 줄 알겠는가? 검은 것을 일러 어둡다고 하는 자는 단지 까마귀를 알지 못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검은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라고 묻고 있다. 박지원은 있는 그대로의 까마귀를 보지 않고 언어에 의해서 굴절된 까마귀를 보고 있는 사람들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언어를 통해서 사물을 본다. 햇볕이 쨍쨍한 대낮에 하늘의 태양을 보라. 태양의 색은 분명 붉은색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태양은 붉은 색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사실 ‘해’의 어원은  ‘희다’라는 뜻을 가진 고어(古語), ‘?다’의 어간 ‘?’다. 어원만 보더라도 해는 붉은 색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붉은 해’라는 언어적 표현에 익숙한 나머지 해를 ‘붉다’라고 인식하기 일쑤다.


 독일 출신의 미국인 언어학자 에드워드 사피어와 그의 제자 벤저민 리 워프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무지개의 띠가 몇 개냐고 물었다. 대답은 제각기 달랐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사피어와 워프는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에 얽매인 채 세계를 경험한다고 판단했다. 에드워드 사피어는 『언어 Language』라는 책을 통해  "언어가 단지 의사소통하고 사고하는 것과 같은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부수적 수단이라고만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사실상 현실 세계란, 상당 부분이 집단의 언어 습관 위에 무의식적으로 쌓아 올려지는 것이다. 어떤 두 언어도 동일한 사회적 현실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 만큼 비슷하지 않다. 서로 다른 사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다른 세상들이다. 같은 세상에 이름만 다르게 붙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언어가 의식을, 사고와 세계관을 결정한다는 이 견해는 ‘사피어-워프 가설’ 또는 ‘언어결정론’이라 불리며 그 뒤 언어학과 인지과학의 논란거리가 돼 왔다. 


  대부분의 심리학자, 언어학자, 철학자들은 언어가 사고, 지각, 기억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언어가 사고양식을 결정한다는 가설에 대해서는 모두 회의적이다. 워프는 시제라는 문법범주가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호피 인디언이 시제가 있는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간 개념을 가지고 행동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가령,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지는 국민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가 매우 비슷하기도 하고,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지면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 기독교 문화권에 속하는 나라가 모두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또한 많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수 개념이 부족한데, 이들이 영어를 배울 때에 수 개념의 습득능력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조사되었다. 국어의 경우에도 남녀 성의 문법 범주가 없지만, 한국인이 성에 대해 둔감하지는 않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 가상의 제국 오세아니아 국가군은 사상통제와 과거통제를 철저하게 시행한다. 과거통제를 위해 모든 기록을 말소하고, 사상통제를 위해 신어(Newspeak)가 동원된다. 신어란 평화·자유 등 전체주의에 반하는 말은 완전히 없애버린 새 언어다. 이러한 언어정책은 언어가 인간의 의식을 구성하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만큼의 에너지를 가졌다는 ‘언어결정론’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신어는 평화나 자유, 사랑과 같은 단어는 불온한 것으로 간주한다. 불온한 단어가 불온한 사상을 싹이 되므로, 제국의 지도자들은 이런 단어들을 제국의 언어에서 강제로 삭제한다.  자유와 평등 등에 속하는 모든 어휘를 ‘죄사상(crimethink)’이라는 단어에 통합함으로써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개념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한다. 단어가 사라지면 그 단어에 어울리는 사상마저도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믿는 권력자들은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를 각 가정, 사무소의 방마다 설치하여 개인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한다. 심지어는 ‘표정죄(facecrime)’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대중들의 감정마저도 통제한다.


  전체주의 권력의 유지를 위해 혁명이나 반항을 연상시킬 수 있는 모든 어휘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에게 언어는, 사피어와 워프가 생각했듯, 사고와 행동을 주조하는 틀이었고, 자유로운 사고를 가두는 감옥이었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진리성의 기록국에서 일한다. 진리성의 건물엔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슬로건이 붙어있다. 스미스는 과거의 신문을 다시 써서 역사를 조작하는 일을 한다. 역사는 대중들의 기억이다. 역사를 조작함으로써 대중들의 기억을 조작하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선 전쟁을 수행하는 곳이 평화성이고, 풍부성은 빈곤을 다스리는 곳이고, 애정성에서는 법과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고문과 반체제 인사 제거를 도맡는다. 개인의 연애도 이곳에서 통제된다. 주인공 윈스턴은 사랑 때문에 체포된다. 연애는 개인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것은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 전체주의 사회의 법이다. 결혼은 단지 자식을 만드는 수단으로서만 인정된다. 연애는 범법이다. 이 사회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조차 범법으로 간주된다.


  이 사회에서 정부는 인간의 사고를 단순화시키기 위해 ‘단어 줄이기’ 방법까지 사용한다.  영국사회주의(England Socialism)는 영사(INGSOC)로 줄여진다. 이런 식으로 언어는 점차 암호가 되고 기호가 된다. 말의 뿌리를 추적하는 과정에는 비판적 의식이 개입한다. 그런데 언어가 암호가 되어 언어의 뿌리를 추적할 수 없게 되면 사람들은 언어의 뿌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약어화하면 그 뜻이 한정되면서 교묘하게 변화하여 거기에 달라붙은 다른 연상작용을 제거시켜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가령, 진리성(Minister of Truth)을 진성(Miniture)라고 하면 연상작용이 훨씬 적으면서 의미가 더욱 뚜렷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다. 언어에서 비판적 사고의 도구로 기능을 박탈하겠다는 의미다.


  소설에는 신어 사전을 만드는 일을 하는, 두뇌가 명석한 당원, 사임이 등장한다. 그는 점심식사를 하며 윈스턴에게 이렇게 말한다. “2050년까지는, 아마 그전이 되겠지만, 구어(舊語)에 대한 지식은 모두 사라질 걸세. 모든 과거의 문학도 없어지고, 초서, 셰익스피어, 밀턴, 바이런, 이들은 다만 신어역(新語譯)으로만 남을 거네. 그것도 다른 말로 바뀐다는 정도를 지나, 원래의 의미와 반대되는 것으로 변할 거야. 당의 문학까지 변할 거야. 슬로건까지 변할 거야. 자유의 개념이 없어졌는데, ‘자유는 예속’이란 슬로건이 있을 수 있겠나? 모든 사상적 분위기도 변할 걸세. 실상,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란 없어져 버릴 걸세. 정통주의는 생각하는 것, 생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야. 무의식 바로 그거야.”


  사임의 말은 『국제어시대의 민족어』의 저자, 복거일의 발언을 연상시킨다. 복거일은 이 책에서 현재 날로 강화되는 국제어로서의 영어의 비중으로 볼 때 머잖아 각 민족마다 불가불 영어와 민족어를 함께 사용하게 될 것이며, 끝내는 민족어들이 쇠퇴하고 말 것이라는 단언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상황을 수동적으로 맞이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좀더 능동적인 자세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복거일은 말한다. 이른바 ‘영어공용화론’이 바로 그것이다.


   <1984년>에서 주인공 윈스턴은 일기를 적는다. 일기는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일기를 통해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그의 저항이다. 그의 저항은 곧 그의 자유를 말해준다. 정부가 일기 쓰기를 금하는 이유도 그 자유를 봉쇄하자는 데 있었다. 과연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기록한다면 우리는 어떤 언어를 선택해야 할까.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언어로 기록하는 것은 자유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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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이해
마샬 맥루한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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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 출신의 미디어 비평학자인 마샬 맥루한은 '인간의 확장(Extension of Man)'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미디어의 이해』를 통해서 “모든 미디어는 인간이 지닌 재능의 심리적, 물리적 확장이다. 바퀴는 발의 확장이다. 책은 눈의 확장이다. 옷은 피부의 확장이다. 전자회로는 중추신경의 확장이다.”라고 말한다. 천체망원경은 토성의 띠를 관찰할 수 있게 해주고, 전자현미경은 극미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모든 도구는 인간과 세계를 연결해주는 감각의 확장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 오감을 이용해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도구[미디어]의 발명으로 오감 사이에는 균형이 깨진다. 인쇄기와 같은 미디어의 등장은 인간의 의사소통을 시각 하나에 의존하게 만들고, 라디오의 등장으로 인간은 청각에 의존하게 된다. 이렇게 미디어는 인간의 감각형태를 변화시킨다. 가령, 표음문자인 알파벳이라는 미디어의 발명은 입과 귀에 의존하던 구어적 인간을 눈에 의존하는 활자적 인간으로 변화시켰다. 미디어에 대한 이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맥루한은 미디어의 변화에 따라 인류 역사를 4단계로 구분한다. 직접적인 언어에 의해 정보 교류가 이뤄지던 구전(口傳)시대, 한자나 알파벳의 등장 이후 전개되는 문자시대, 15세기 구텐베르크 활판인쇄술 이후의 인쇄시대, 그리고 20세기 전기매체 시대가 그것이다.

  입으로 말하는 구전시대에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부족민들은 모두 비슷한 지식을 향유했다. 따라서 구전시대에서는 개인주의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자가 생겨나면서는 양상이 달라진다. 시각적 인식을 중요시하는 문자 미디어는 인간을 신체적 접촉, 즉각적 반응 등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문자는 인간을 내성적이고, 이성적이며, 개인적으로 변모시켰다. 문자로 씌어진 글줄을 따라서 내용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사람들은 순차적이고, 선형적인 사고에 점차 익숙해졌다. 사람들이 말을 통해서 타인과 직접 대화하기보다는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부족사회가 와해하는 탈부족화 현상도 나타났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문자문화는 폭발적으로 팽창된다. 독서를 통해서 혼자서 읽고 생각하는 개인주의적 인간이 생겨났고, 분석적, 순차적, 단계적 공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인쇄는 조립라인과 산업사회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또한 인쇄물들이 퍼져감에 따라 지방어들이 하나의 모국어로 통합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주의가 탄생되었다.

  19세기말 전신의 발명과 함께 인쇄문화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를 두고 맥루한은 ‘마르코니의 전신이 구텐베르크의 은하를 침식’했다고 표현한다. 텔레비전이 시민들의 건전한 비판의식을 마비시키는 ‘바보상자’라는 비판론자들도 있지만 맥루한은 텔레비전의 긍정적 가능성에 주목한다. 텔레비전은 거의 모든 감각기관의 연장이어서 시각 위주였던 문자시대의 과도한 분석적 사고, 개인주의, 합리주의의 병폐에서 벗어나 총체적인 사고능력을 가진 균형 잡힌 인간형으로 유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고 맥루한은 생각했다. 게다가 텔레비전, 전신, 전화는 인간의 감각기관을 전 세계, 우주 공간의 구석구석까지 연장시켜 주어 전지구적 차원의 연대가 가능하게 했다. 텔레비전, 전신, 전화 등 미디어로 통합된 세계를 맥루한은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 명명한다.


  이처럼 인류의 삶은 미디어를 통해서 입수하는 정보 형태에 따라서 다르게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 맥루한의 주장이다. 그런데 맥루한은 미디어가 담고 있는 내용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미디어가 인간의 감각형태를 변화시키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문은 그 지면이 모자이크적, 불연속적이므로 그것을 수용하는 독자도 기사의 내용에 관계없이 세계를 모자이크적, 불연속적 방식으로 인지한다. 다시 말해 미디어는 단순히 의미의 중립적인 전달자가 아니라 미디어 자체가 인간의 의식과 사고를 형성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이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어구가 맥루한만큼이나 유명해진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문장이다. 이는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보다 미디어의 특성이 우리 사회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으로 해서 기존의 미디어가 당장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문자가 말을 몰아내지 못했고, 전화가 등장했다고 해서 편지가 사라진 것도 아니며,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 책과 신문을 대치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미디어는 사람들의 의식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 가령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경우와 이메일을 쓰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이메일로 편지를 쓰는 경우는 편지 내용이 가볍게 안부를 묻는 정도에서 그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편지지에 직접 글씨로 편지를 쓸 때는 그 내용이 단순히 안부를 묻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메일이냐 편지냐에 따라서, 즉 미디어에 따라서 메시지의 내용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맥루한은 모든 미디어를 매체의 정세도(精細度:정보량)와 수용자의 참여도에 따라서 핫(hot)미디어와 쿨(cool)미디어로 나눈다. 정세도가 높아서 수용자의 참여도가 낮은 것은 핫미디어, 반대로 정세도가 낮아서 수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것은 쿨미디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라디오와 같은 '핫 미디어'와 전화와 같은'쿨 미디어, 혹은 또는 영화와 같은 핫 미디어와  텔레비전과 같은 쿨미디어가 이렇게 구별되는 데는 근본원리가 있다. 핫 미디어란 단일 감각을 높은 정세도(精細度)에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높은 정세도라는 것은, 자료가 충족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를테면 사진은 시각적으로 높은 정세도를 갖는다. 만화는 극히 적은 시각적 정보가 제시되는데 지나지 않으므로 낮은 정세도를 갖는다. 전화는 귀에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기 때문에 쿨미디어, 혹은 낮은 정세도의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이미 시시콜콜히 다 말해버렸기 때문에 수신자가 참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라디오나 신문과 같은 핫미디어의 특성이다. 반면 쿨미디어는 직관적이며 감성적으로 관여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정보의 양이 빈약하며 불분명하여 수용자의 적극적 참여가 필요하다.

 신문은 책이나 여타의 인쇄미디어와는 달리 빠르게 정보를 전달한다. 책은 한 사람의 고백형식이지만 신문은 집단적 고백형식이다. 신문은 독자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개입시킨다. 신문은 텔레비전처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스포츠 등 서로 전혀 관계가 없는 기사내용으로 구성되어 모자이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맥루한은 “서적지향형의 사람들이 신문이 사회의 더러운 이면을 언제까지나 기사로 사고 있다고 개탄하는 것도 신문의 집합적인 모자이크 형태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맥루한의 주장대로 전자미디어는 인간의 인지 능력, 사회관계 등에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정보기기가 대중들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기술이 될 수도 있다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첨단의 정보테크놀로지가 속속 등장하고 있는 현실에서 『미디어의 이해』는 책이 처음 출간된 1964년 당시보다 오늘의 우리에게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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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water 2008-01-1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저 책, 한글을 번역하며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ㅎ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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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 성장하는 곳에 행복의 건축은 있다

 



건축에 관련한 에세이집,『행복의 건축』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건축의 의미를 믿을 때 그 전제는 장소가 달라지면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사람도 달라진다는 관념이다.”라고. 장소는 단순한 3차원적 공간만은 아니다. 우리가 여행을 꿈꾸는 것도 여행지라는 공간이 우리에게 새로운 느낌을 약속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장소는 사람의 기분을 바꾸고 나아가 심성을 바꾼다. 전라남도 담양에 있는 소쇄원(瀟灑園)에 들어서 보라. '소쇄(瀟灑)'는 ‘맑고 깨끗하다’라는 의미요, 식영정(息影亭)이란 이름은 그림자마저 쉬게 하는 집이라는 의미다. 그 장소는 우리에게 무욕의 삶, 유유자적의 삶을 권한다. 


풍수학에는 ‘지령인걸(地靈人傑)’이란 말이 있다. ‘땅은 영묘(靈妙)하고 사람은 빼어나다’는 뜻이다. 산천이 수려하고 지세가 빼어나서, 그 땅의 기운을 띠고 태어난 사람들도 한결 뛰어나다는 의미다. 인간은 자신의 지식과 노동의 에너지를 빌어 공간을 창조해내지만, 공간 역시 공간이 지니는 에너지로 인간을 만들어 낸다. 땅이라는 공간이 지니는 에너지가 곧 지령(地靈)이다. 풍수학은 이 에너지를 보유한 공간, 이른바 '명당(明堂)을 찾기 위한 인간의 총체적인 노력이었다. 좋은 목수는 좋은 집터를 잡아 좋은 집을 짓기를 꿈꾼다. 과연 좋은 집이란 어떤 집일까. <어린왕자>의 작가 쌩떽쥐베리는 소설의 인물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문에 제라니움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 고 말하면, 그 분들은 이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 내질 못한다.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 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거 참 굉장하구나!"하고 감탄한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오늘날 집은 수량화할 수 있는 상품이다. 그 이름도 거창하게 ‘OO캐슬’이다. 집이 아니라 차라리 castle, 즉 성(城)이다. 군사적 개념으로서의 성(城)은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긴장과 대결의 공간이다. 과연 이런 이름을 가진 곳에 안락함이 깃들 수 있을까. 그러나 건축주는 복잡하게 따지지 않는다. 고객들이 건물을 구입함으로써 성주(城主)로서의 위엄을 만끽하면 그만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완당(阮堂)으로, 정약용 선생이 여유당(與猶堂)으로 호를 정한 것은 집을 자신의 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당(堂)’은 곧 ‘집’이라는 뜻이다.) 집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집으로부터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몰아냈다. 그리고 거대한 규모를 사양했다. 보들레르도 말하지 않았던가. “궁전에는 친밀의 공간이 없다”라고.  한 도시락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이면 족하다는 안분지족의 삶을 담아내면 그만이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집이라는 물질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기는 삶이었다.


알랭 드 보통이 그의 책 이름을 ‘행복의 건축’이라고 붙인 것은 건축물은 행복[삶]을 담아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가 있는 장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승려라는 정체성은 고독한 산사(山寺)라는 공간과 연결되어 있고, 학자의 정체성은 연구실이라는 공간과 연결되어 있지 않던가. 공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러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라. 거기에서 과연 어떻게 주거자의 정체성을 읽어낼 수 있을까.


스위스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꾸밈과 장식을 거부하고, 절제를 미덕으로 아는 ‘수도사의 방’을 건축적 이상으로 생각했다. 이는 건축물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기존 건축가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르코르뷔지에와는 달리 건축의 본질은 아름다움이며, 우리는 집이 우리를 보호해주길 바랄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말을 걸어 주길 바란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 건축물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해준다. 고전주의 건축물들은 독창성을 추구하기보다는 표준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은 장식을 혐오하고 검약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모더니스트의 건축들은 건물이 순수하게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며, 히틀러 시대에 지어진 독일의 건물들은 높이와 부피, 그림자 등 시각적 비유들을 이용해 전체주의 시대의 욕망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주고,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의 대리석으로 치장된 건물들은 졸부의 욕망이 얼마나 천박한가를 말해준다.


물론 건축물만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모든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소설이나 시, 한편의 유행가도 나름대로의 사연과 곡절을 우리에게 전한다. 문제는 소설이나 시, 유행가가 전하는 이야기가 마뜩찮을 경우, 책장을 덮어버리든지, 오디오 기기의 전원을 끄면 그만이지만 건축물이 전하는 이야기가 마뜩찮을 경우에는 고스란히 눈을 뜨고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혐오스런 건물이 주는 시각적 폭력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이를 간명하게 표현했다. “나쁜 건축은 커다랗게 써놓은, 지우기도 어려운 잘못이다.”라고. 덧붙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더 나은 쪽으로 환경을 조정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믿음을 버려야 할 이유는 없다.” 더 아름다운 건축을 지울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비전을 버리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대체 건축물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사실 아름다움에는 만인의 합의로부터 도출된 절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아름다움을 보는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건축의 역사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시대와 따라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며, 세계 건축의 다양함은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의 지역적 편차를 확인시켜준다. 알랭 드 보통이 드는 예가 재밌다. 1900년 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영국으로 여행을 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에 영국 사람들이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 나는 스코틀랜드에 초대를 받아 궁궐 같은 집에 머물게 되었다. 어느 날 주인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다가 줄지어선 나무들 사이의 작은 길에 이끼가 두텁게 덮인 것을 보았다. 나는 칭찬을 하면서, 그 길들이 멋지게 나이를 먹은 듯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그러자 주인은 곧 정원사에게 이끼를 모두 긁어내게 할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인간의 인위를 배격하고 자연을 그대로 둘 것을 말하고 있는 ‘무위자연’의 동양의 세계관과 야생적 자연은 그 자체로 미가 될 수 없는 혼돈에 불과하다는 서양의 세계관이 부딪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스탕달이 말하듯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만큼이나 아름다움의 스타일도 다양하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의 졸부의 건물이든 부석사의 무량수전이든 모든 건물은 다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해야 하고, 아무리 추한 건물이라도 나름대로의 미학적 타당성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미학적 상대주의에 대해서 알랭 드 보통은 우리들의 미의식, 미를 분별해내는 취향은 발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단맛에 길든 어린아이의 키가 크고 지혜가 성장하면서 입맛이 달라지듯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도 인간의 지적 성장과 함께 얼마든지 발전해간다. 한 사람의 미적 취향이 속물스런 예술, 소위 ‘키치’에 못 박혀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더 많이 사색하고 더 많이 성찰할수록 우리가 사는 곳은 얼마든지 아름다워질 수 있다. 우리의 지성이 성장하는 곳, 우리의 미학적 취향과 감수성이 고양되는 곳에 ‘행복의 건축’이 있다. 전체 가구에서 아파트의 비율이 60퍼센트에 육박하는 현실에서도 우리는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대로 아름다움에 대한 가능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아름다움의 가능성은 우리의 지성이 성장할 것이라는 희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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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감독, 짐 캐리 외 출연 / 아이비젼엔터테인먼트(쌈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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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흔적



담벼락에 피어난 붉은 장미의 향기가 알싸한 5월의 늦은 오후, 비스켓의 향기와도 같이 달콤한 그의 체취가 꽃향기에 실려 온다. 이것이 환각일까, 현실일까. 그러나 현재만으로도 충만한 시간 속에서 왜 이런 골치 아픈 물음이 필요할까. 어떤 것도 더 필요하지 않고, 모든 것이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어떤 충만한 시간도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곽재구의 시 <사평역>의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이라는 구절처럼 모든 희로애락의 순간은 시간의 눈발 아래 묻히고 만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다. 반드시 무엇인가가 남는다. 희미하게나마 무엇인가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남기 마련이다. 희미한 시간의 얼룩, 우리는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이 흘러가 버리고 만다면 대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이란 무엇인가? 입센은 말한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만을 영원히 소유한다>라고. 입센은 ‘잃어버리다’와 ‘소유하다’와 같이 동일한 논리적 공간 안에 함께 있을 수 없는 두 명제를 결합시키는 역설적으로 결합한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을 다시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고 모든 멜로드라마의 문법이지 않은가. 현재는 미꾸라지처럼 우리의 손아귀를 빠져나가지만 우리는 잃어버린 순간을 다시 재생해낸다. 파도가 바위를 스치는 순간은 포착할 수 없지만 바위는 파도의 흔적을 제 몸에 새기는 것처럼. 특히 영화와 소설과 같은 서사 장르는 지나간 기억을 그 어떤 장르보다 강력하게 재현해낸다. 아예 서사 장르는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장르라고 해도 무방하다.


기억은 우리 안에 남겨진 시간의 무늬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버리는 허무한 것이지만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를 영속적으로 우리 안에 보관하려 한다. 그러므로 기억은 찰나에 대한 복수다. 기억은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것에 대한 항변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를 되찾고, 과거와 동거한다. 향기롭던 그의 체취는 사라져가 버린 과거의 시간이지만 기억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현재의 테이블로 불러낸다. 그러나 과거는 명료하게 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것은 기억되고 어떤 것은 기억되지 않는 법. 기억의 테두리는 늘 모호하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애인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 심하게 다툰 후 사과하러 간, 조엘(짐 캐리)은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새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그녀의 변화가 '라 쿠나'라는 회사가 제공하는 기억삭제 치료의 결과임을 알게 된 조엘은 홧김에 자신도 동일한 치료를 받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기억삭제가 클레멘타인과의 씁쓸한 기억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까지 삭제한다는 사실을 조엘은 알게 된다.


사랑을 소중하게 간직한다는 것은 과거를 기억 속에 보존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기 하나의 낡은 손목시계가 있다고 하자. 그 손목시계는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내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해보자. 그 손목시계는 여느 손목시계와는 다르다. 그 시계를 간직한다는 것은 아버지와의 소중했던 시간을 간직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럴 때 시계는 더 이상 물질적 도구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도구는 대체가 가능하지만 존재는 대체가 불가능하다. 낡아 작동이 마비되어 버린 기계는 대체를 하면 그만이지만 아버지의 낡은 시계는 새것으로 대체가 불가능하다. 시계는 이제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사물의 유용성을 초월한다. 도구는 사용하고 폐기처분할 수 있는 사물(도구)에 불과하지만 존재는 사물 그 이상이다. 낡은 시계에는 흘러가버린 시간 속의 기억들이 배어 있다.우리는 그것을 사물의 역사성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 사물들을 폐기처분한다는 것은 그 사물과 결부된 역사를 지우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자신의 연인과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그와 관련된 사진, 선물 등을 모조리 없애기도 한다. 그와 관련된 사물을 모조리 폐기해버림으로써 그와 관련된 시간과 추억, 그와 함께 한 역사를 없애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사랑이 지워질까. 사물은 사라져도 그 사물과 연루된 추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조엘이 지우려고 했던 것은 기억 전체가 아니라 클레멘타인과 함께 했던 사랑의 시간과 추억이었다. 클레멘타인과 결부된 기억만을 조엘은 선택적으로 삭제하게 된다. 그러나 기억을 지우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가 하는 물음들이 나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세계에 대한 호오(好) 판단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에 대한 목록을 입수하는 것은 그가 누군지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구나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의 목록을 지운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기억은 선택적이다. 우리는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지나간 순간을 모두다 불러들이기에 우리의 용량은 턱없이 부족하다. 예외는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여성은 모든 것을 기억한단다.  이니셜, AJ로 알려진 이 여성은 수십년 전이라도 날짜만 대면 그날 어떤 유명인이 사망했는지, TV 드라마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국제 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어떤 비행기 추락 사고가 있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다. 또 그 시각 자신이 했던 일과 그날의 날씨까지 기억해낼 수 있다.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의 제임스 맥고우 등은 5년간 연구를 진행한 후 이 여성의 증상에 ‘초기억 신드롬 hyperthymestic syndrom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녀에게는 완벽한 기억력이 재앙이기도 하단다. 과거의 일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자신의 머리 속은 흡사 "끝나지 않는 영화" 같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또 누군가와 대화하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수십 년 전의 일을 회상하는 것이 너무 괴롭다고 하소연했다.


그렇다 완벽한 기억력은 고통일 뿐이다. 망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다. 지나간 시절의 고통스런 추억에 얽매여 있는 한 우리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과거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존재다. 과거의 경험의 총체적 기억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앞으로 내 스스로 쌓아 가야할 내 실천과 행동이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결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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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생명의 그물 - 생물 다양성은 어떻게 우리를 지탱하는가
이본 배스킨 지음, 이한음 옮김 / 돌베개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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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연어들의 호소, 우리를 가만 “내버려 둬”



물건의 틈에 박아서 맞물리는 부분이 물러나지 못하게 하거나 물건들의 사이를 벌리는 데 쓰는 돌을 쐐깃돌이라 한다. 아치의 맨 위에 끼워지는 쐐깃돌은 전체구조를 안정시킨다. 만약 이 쐐깃돌을 빼내면 전체구조는 매우 불안정해지고 외부의 충격이 가해지면 급기야 전체의 구조는 붕괴되고 만다. 이본 배스킨의 저서, 『아름다운 생명의 그물』은 생태계에서  쐐깃돌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쐐깃돌 종들을 소개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한 종이 공동체의 다양성과 안정성의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쐐깃돌’의 개념을 1996년에 처음으로 소개한 이는 워싱턴 대학의 생태학자 로버트 페인이다. 그는 워싱턴의 해안에서 바위들에 달라붙어 있는 종들을 관찰하면서 생물체들의 다양성을 설명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페인이 본 해변에는 조수가 닿는 위쪽 바위에는 홍합과 거위목따개비, 그 아래쪽에는 말미잘과 딱지조개, 삿갓조개, 해면, 갯민숭달팽이와 다양한 해조류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중 가장 센 놈은 피사스테르 오크라케우스(Pisaster dchraceus)였다. 이 동물은 홍합에서부터 고둥, 따개비, 딱지조개, 삿갓조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척추 동물을 먹어치웠다.


페인은 이 불가사리가 게걸스럽게 홍합을 먹어치움으로써 경쟁력이 뛰어난 홍합들이 바위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해안선의 한곳을 골라 불가사리들을 모두 제거해보았다. 그 결과 다른 무척추동물들이 번성할 것이라는 그의 예측은 빗나갔다. 오히려 홍합들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다른 생물들을 몰아내고 바위를 점령해 생물의 다양성이 급격하게 낮아졌다. 불가사리가 사라지자 이 해안의 생물의 종수는 15에서 8로 줄어들었다. 페인은 이 불가사리가 생태계를 다양하게 하고 안정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 종을 ‘쐐깃돌’ 종이라 불렀다.


아프리카 남서부 해안을 따라 있는 나미브 사막의 헐벗은 모래 언덕에는 나라덩굴(nara vine)이라는 쐐깃돌 종이 있다. 나라덩굴 개체는 수명이 100년 이상이며, 비가 내릴 때 일시적으로 생기는 강 언저리에 붙어 있으면서 뿌리를 50미터나 뻗어 지하수를 빨아들인다. 잎 없이 가시만 달려 있는 이 식물은 곤충에서부터 타조와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물들에게 먹이와 물을 제공한다. 이 덩굴의 열매는 ‘사막의 물통’이라 불리는데, 총 무게의 80퍼센트가 물이다. 이 열매들은 자칼이나 하이에나 같은 동물들이 즐겨 먹는다. 타조나 도마뱀은 줄기 끝을 씹어 먹는다. 덩굴 밑에는 황무지쥐가 둥지를 틀고 산다. 이렇게 나라덩굴은 수많은 종들에게 생태학적인 피난처를 제공한다. 이러한 쐐깃돌 종을 인위적으로 제거하면 생태계는 안정성을 잃는다. 쐐깃돌을 빼내면 전체의 구조가 흔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동물계의 공학자라 비유할 수 있는, 댐을 쌓는 기술자, 비버도 쐐깃돌 종이라 할 수 있다.   비버가 만든 댐은 생들이 무너지면 하천의 흐름이 빨라져 수로가 좁게 파이고수위가 낮아져  둑을 따라 자라던 활엽수는 큰 타격을 입는다. 또 하천의 흐름이 빨라지면 물고기들이 낳은 알들이 떠내려가기 때문에 물고기들은 산란에 어려움을 겪는다. 비버는 연간 1톤의 나무를 잘라 댐으로 운반하기 때문에, 연못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곳의 숲을 빈약하게 만든다. 그러나 전체 생태계는 결코 비버 때문에 약해지지 않는다. 비버가 만든 댐으로 수면적이 늘어나면 원앙과 물오리 등이 먹이를 찾아 물 위로 내려오고, 사슴들도 물가에 자주 찾아온다. 하천을 따라 내려와 연못에 닿은 침전물들과 썩어가는 식물들은 풍부한 유기물질 창고가 되어준다. 그리고 비버가 잘라내 마든 통나무댐들은 물의 흐름을 늦추고, 갈라놓고, 물결과 소용돌이를 형성하여, 연어가 산란을 하고 송어들이 여름의 열기를 식히게 하는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렇게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쐐깃돌 종을 노리는 자들은 바로 비버의 모피를 노리는 사냥꾼들이다. 그들은 생태계의 활력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그들의 주머니뿐이다.


미국과 캐나다 경계에 있는 글레이셔 국립공원 계곡에 가을이 오면 장관이 연출된다. 홍연어를 잡기 위해 수많은 새들과 동물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1989년부터 이 장관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독수리들도 곰들도 찾아오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홍연어의 숫자가 줄어든 것일까? 이유는 주 어업당국이 외국에서 들여온 민물곤쟁이를 유역상류에 방류했기 때문이다. 주 어업당국은 홍연어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먹이로 곤쟁이들을 방류했다. 그러나 주 어업당국의 선행의 결과는 오히려 비극을 불러왔다.


홍연어는 낮 동안에 수면 가까이에서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는다. 하지만 곤쟁이는 낮에 홍연어가 거의 가지 않는 바닥쪽에서 지내다가 밤이 되면 수면 쪽으로 올라와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는다. 그런데 바로 그 동물성 플랑크톤이 문제였다. 그 동물성 플랑크톤이 바로 홍연어의 먹이였던 것이다. 인간들은 어리석게도 홍연어의 먹이를 풀어준 게 아니라 경쟁자를 풀어주었던 것이다. 먹이를 풀어줌으로써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던 인간의 의지는 오히려 반대의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노자(老子)가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동양학자인 김용옥 교수는 영어로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Let It Be"로 번역한 바 있다. “Let It Be"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내버려둬”쯤 된다. 자연은 인간의 도움이 없이 저절로 돌아가는 시스템인 만큼 인위적 손길을 가하지 말라는 것이 노자가 인간에게 주는 충고다. 그 충고를 무시하고 쐐깃돌 종들을 건드리면 자연은 활력을 잃고 만다. 자연에 친절을 베풀 것도 없고 무례를 베풀 것도 없다. 가만 두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자연에 손을 대야겠다면 자연의 질서를 세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생태학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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