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dohyosae > Armenia

아르메니아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먼저 그리스도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민족일 것이다. 이들은  301년 이들의 왕 티리다테스 3세가 예지자 성 그레고리우스St. Gregory  the Illuminator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서 신앙의 민족이 되었다. 그리고 303년 예레반 근처의 Etchmiadzin에 모교회인 성 그레고리우스 성당을 세움으로서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390년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에 의해 양분되었다. 그리고 430년 이들은 러시아, 아랍, 터어키, 페르시아에 의해 영토가 예속되면서 이들의 공식적인 나라는 사라졌다. 이 결과 아르메니아인들은 인종, 문학, 종교, 언어로서만 결속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들은 9세기에서 11세기 중엽까지 아르메니아에는 바그라티드왕국이 존재하였고 12세기 말엽부터 1375년까지 소아르메니아왕국이 존재하였다. 이 기간동안 아르메니아는 로마교회와 결합하게 되었다. 이 결과 소아르메니아왕국은 십자군전쟁을 경험하였고 서방교회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이들 민족이 세계사에 이름을 드러낸 것은 아주 오래되었지만 이란과 터어키 그리고 후에는 러시아까지 가담하여 이들의 영토를 탐하였다. 이들은 페르시아, 터어키, 소련에 의해 박해를 받았는데 가장 큰 박해는 1915년에 일어난 대학살이었다. 터어키는 1915년 일차세계대전의 와중에 아르메니아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당시 세계인들은 유럽에서 일어난 세계대전에 신경을 쓰고 있는 틈을 타고 터어키는 이 지역에서 독립을 획책하는 아르메니아인의 기도를 분쇄하였다. 당시 터어키의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는 당시 인구의 절반인 1백50만의 인구가 학살당한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아르메니아는 1917년 제정러시아가 붕괴되자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반 볼세비키동맹은 트란스 카프카즈동맹을 결성하였으나 이 지역에 독립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우려한 터어키의 방해로 와해되었다. 1918년 5월 아르메니아는 독립을 선포하였으나 그 댓가로 터어키에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였다. 이들이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1920년 세브르 조약에 의해 독립하였으나 11월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들의 독립은 위협받게 되었다. 이 결과 1921년 아르메니아는 강제로 그루지아와 아제르바이잔과함께 트랜스카프카즈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고, 1936년 12월 소련을 구성하는 아르메니아 연방공화국으로 되었다. 그리고 1990년 8월 주권선언을 하고 이듬해인 1991년 9월 23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독립국가연합CIS에 가입하였다.

 아르메니아에 대해 흥미를 가졌던 것은 그들의 이름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아르메니아인의 성은 -얀YAN으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자인 윌리암 사로얀은 미국인이지만 아르메니아 이민의 후손이다. 그리고 그리고 구 소련시절 부수상을 지낸 아나스타스 이바노비치 미코얀Anastas Ivanovich Mikoyan도 아르메니아인이었다. 이렇게 아르메니아인들은 인도의 시크교도처럼 자신들의 이름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이들 민족이 세계최초로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민족이란 자부심과 함게 수천년간 이민족에 의한 지배에도 민족이 사라지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던 하나의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이들은 2001년 기독교를 받아들인지 1700년을 기념하는 축제를 벌였다. 그 축제는 단순히 한 민족이 자축하는 축제가 아니라 역사의 질곡 속에서 생존한 민족의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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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2-14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로얀은 2009-10-14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적이 없습니다. -_-;
 
 전출처 : dohyosae > 러시아, 그 반역의 역사

러시아인들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고 부른다. 이런 경향이 나타난 것은 표토르 대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는 중세적인 모습을 탈피하고 근대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되는 표토르 대제 이후의 시대를 하나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가 됨으로서 러시아는 본질적으로 신성한 땅이 되었으며 모스크바는 로마, 비잔티움을 잇는 성스런 땅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로마라는 지명과 그 제국의 지도자라는 명칭의 함수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제국의 최고 일인자는 아우구스투스 캐사르였다. 그리고 제2의 로마가 된 비잔티움의 최고 권력자는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 캐사르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콘스탄티누스라는 인명이 아니라 그 뒤에 붙은 아우구스투수 캐사르라는 칭호였다. 이 칭호로 인해 비잔티움은 제2의 로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비잔티움의 특징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융합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종교의 우두머리는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것이고 정치는 로마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비잔티움이 예루살렘과 로마를 대표하는 도시, 권력이란 의미였다. 일찍부터 비잔티움과 교류를 하고 있던 러시아의 황제들은 비잔티움이 멸망하자 곧바로 자신의 제국을 제3의 로마로 확정하였다. 이는 모스크바가 비잔티움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과 로마를 계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모스크바는 새로운 예루살렘이면서 새로운 로마인 것이다. 이것은 모스크바가 예루살렘을 현재의 역사 속에서 실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이 이교도인 이슬람 세력에 의해 장악됨으로서 더욱더 힘을 얻게 되었다.

러시아가 이런 의식을 갖게된 것은 역사적으로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이 이슬람에 의해 함락된 시기(1453)가 러시아에서 타타르의 지배가 종식된 시기(1480)과 시기적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인들에게 이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신의 계시로 이해하였다. 즉 제2의 로마가 사그러지는 순간 러시아가 이교도의 사슬에서 풀려났다는 그 사실은 러시아의 역사적 임무가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으로서 세르비아 이북의 세계에서 러시아는 그루지아를 제외하고 정교회 세계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군주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루지아는 역사적 기원이 오래 되었지만 러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지리적, 정치적인 독립국가라기 보다는 전설의 왕국에 불과한 것이었다. 중세의 입장에서 볼 때 진정한 신앙의 추종자들만이 존재권리를 갖는 것으로 인정되었으므로 러시아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플의 계승자가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결과 러시아는 일반적인 제국 혹은 왕국과는 구별되는 제국이 되었다. 이 제국은 신의 섭리에 의해 세워진 신정국가였던 것이다. 이제 짜르는 단순한 황제가 아니라 신의 대리자가 됨으로서 종교와 정치의 최고자로서 통합적인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유럽의 세계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는 시점에 이르자 러시아 역시 정치와 종교의 칭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즉 모스크바는 예루살렘과 로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표토르 대제는 과감하게 예루살렘을 버리고 로마를 선택하였다. 개혁을 원하던 표토르 대제는 새로운 수도를 신성의 중심지로 할 것인가, 권력의 중심지로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택하였다. 표토르 대제가 예루살렘을 배제함으로서 자연히 러시아는 로마 가톨릭과의 경쟁적인 관계에 있음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즉 표토르는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기 보다는 러시아의 황제 아니 세계의 황제가 되기를 열망하였던 것이다. 그는 인민들을 위해 내세의 낙원의 문을 열기 위해 베드로의 열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구원과 신앙을 선택하였다. 그래서 표토르 대제는 새로운 수도인 페테르부르그의 문장을 바티칸의 교황의 문장과 대치되는 것을 택하였는지도 모른다. 바티칸의 교황 문장은 베드로의 열쇠를 교차시킨 것이지만 표토르 대제의 페테르부르그의 문장은 닻을 교차시킨 문장이었다. 교황청의 열쇠꼬리가 위로 향해 있듯이 표토르의 닻가지 역시 위로 향해 있다. 천국의 문이 열쇠로 열린다면 러시아의 미래의 문은 닻으로 상징되는 개혁과 개방이라는 표토르의 열망이 담기 문장은 하나의 동일한 이념에 대한 시각적, 언어적인 표현인 것이다.

이제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는 등식은 페테르부르그가 새로운 수도가 됨으로서 페테르부르그가 제3의 로마가 되었다. 이제 러시아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변모된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는 자신들의 수호성인 역시 신중하게 선택하였다. 로마가 베드로를 선택하였다면 그들은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아-안드레이-를 자신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즉 안드레이는 사도 베드로의 러시아적 변형체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러시아는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로마의 계승자가 됨으로서 서구와의 경쟁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변형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유리 미하일로비치 로트만, 보리스 안드레에비치 우스펜스키, 드미트리 세르게에비치 리하쵸프 공저 <러시아 기호학의 이해>를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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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대안세계화와 한국사회운동-사회화와 노동

 

대안세계화와 한국 사회운동

 

- 2005년 <사회화와노동>의 기치를 밝히며

 


 

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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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화는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며 새로운 제국주의다. 극단적인 착취와 강탈, 전쟁의 폭력,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에 대한 폭력은 세계 민중에게 유례가 없는 도전이다. 이에 저항하는 세계의 사회운동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지배세력의 온정주의나 보수적■퇴행적 ‘반세계화’를 넘어서 ‘대안세계화’의 이름으로 이념과 운동을 발견하고 있다. 인민의 권리의 자율적 실현, 사회적■경제적 변혁, 사회운동과 공동체 간 교통과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지배세력의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미망과 새로운 파퓰리즘적인 정치행태 속에서 심각한 동요를 경험하고 있으며, 동시에 ‘대안세계화’ 운동의 전진적인 요소들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에 사회진보연대는 한국 사회운동의 긴급한 과제와 앞으로 <사회화와 노동>이 주목하고자 하는 바를 이 지면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

미국 경제의 위기와 이와 날카롭게 대비되는 미국 군사력의 압도적인 우위는 세계 인민들에게 진정한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은 해외직접투자와 포트폴리오투자를 통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로 엄청난 양의 소득을 빨아들였다. 미국의 부유계급은 미국 내 신자유주의 개혁의 흥청거림 속에서 풍요한 소비를 향유했다. 하지만 이제 미국은 저축률의 감소, 경상수지 적자로 외채증가, 외국으로의 거대한 소득유출, 국내 자본소득의 감소라는 악순환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은 달러화 약세라는 궤도로 돌아섰고, '글로벌한 정책협조'라는 미명으로 그 부담을 타국에게 분산시키려 하고 있다. 미국 경제가 짧은 시간 내에 대파국을 맞으리라 예상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경향이 장기적으로 미국의 금융적 지배와 제국주의 권력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모순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미국은 이라크를 군사력으로 강점한 후 신속한 신자유주의 개혁을 위한 발걸음을 걷고 있다. 2004년 말 19개 나라로 구성된 ‘파리클럽’(주요채권국회의)은 이라크의 1200억 달러에 이르는 외채 가운데 파리클럽에 지고 있는 400억 달러 중 80%에 대한 부채탕감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초기 30%를 탕감한 후에는 IMF 프로그램이 승인된 후 30%를 탕감하고 마지막은 20%는 IMF 조사위원회가 프로그램의 이행 여부를 판단하여 탕감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점이다. 이라크 인민의 시각에서 볼 때, 전쟁을 감행한 당사자들에게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아가 앞으로 진행될 IMF 프로그램은 이라크 인민의 민주적 결정 과정을 배제한 철저한 중심부 국가의 이익을 위한 개혁이 될 터이므로 심각한 저항을 야기할 수 있다. 이미 정통성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이라크 임시정부가 이를 감당한 능력을 과연 조금이라도 보여줄 수 있을까?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과 점령은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한 사회를 한순간에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은 지녔지만 그것을 재건할 수 있는 정치적■경제적 능력은 결핍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부시의 대통령 재선은 도덕심, 애국주의 등 어떤 치장을 하더라도 미국 사회가 종교적 이데올로기나 전쟁의 폭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야말로 미국 스스로가 주도한 금융세계화의 부메랑 효과에 대한 퇴행적, 반동적 대응의 한 측면이다.
이는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가 착취와 강탈, 이데올로기적 맹신과 전쟁의 폭력이라는 첨예한 국면으로 이미 진입하였을 보여준다.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는 세계화의 새로운 국면이자 ‘새로운 제국주의’라고 부를 만하다. 세계 민중에게는 유례가 없는 도전이자 투쟁의 대상이다.

세계화에 대한 불만들

오늘의 세계 자본주의의는 18-19세기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의 ‘원시적 축적’ 과정과 비견할 만하다. 마르크스는 ‘원시적 축적’을 광범위하게 관찰했다. 토지의 상품화와 사유화, 농민 인구의 강제적인 구축, 다양한 형태의 소유권(공공소유, 집단소유, 국가소유)의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으로 전환, 공공의 권리의 억압, 노동력의 상품화와 생산과 소비의 대안적■ 토착적 형태의 억압, 자연자원을 포함하는 자산의 식민지적■신식민지적■제국주의적 영유과정, 교환과 납세의 화폐화(특히 토지), 노예무역, 고리대금■국채■신용체계 등등.
마르크스가 언급한 이러한 특징들은 현재에도 강력하게 남아 있으며, 어떤 것은 과거보다 더 강력한 역할을 한다. 신용체계와 금융자본은 약탈, 사기, 도둑질의 중요한 수단이다. 주식부양, 인플레이션을 통한 구조적인 자산파괴, 인수합병을 통한 자산약탈, 한 나라의 모든 인민을 부채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채무부담의 증대, 신용과 주식 조작을 통한 기업의 사기와 자산 강탈(연금 기금의 유용과 주식과 기업의 붕괴를 통한 대규모 피해) 등등.
또한 강탈에 의한 축적은 완전히 새로운 메커니즘이 열고 있다. WTO 협상에서 지적소유권에 대한 협상(TRIPS 협정)의 강조는 중요한 사례다. 지적재산권은 지배세력이 주장하는 자유무역의 유용성, 즉 지식과 기술, 사상의 자유로운 교통이라는 이념이 무색한 대표적인 보호무역의 사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유전물질의 세계저장량에 대한 약탈이 소수의 거대 초민족기업의 이득을 위해 진행 중이다. 세계의 환경 공유물(토지, 대기, 물)의 점증하는 고갈과 생물서식지의 하락은 자연의 대대적인 상품화의 결과며 자본집약적 농업생산 양식을 제외한 모든 농업을 제약한다. 문화적 형태, 역사, 지적 활동의 상품화는 대대적인 강탈을 동반한다.
이러한 강탈의 과정은 세계화에 대한 불만들을 누적시키고 있으며, 광범위한 저항을 야기하고 있다.

반세계화인가, 대안세계화인가?

그러나 세계화에 대항하는 운동은 다양한 경향들을 포함하고 있다. 1999년 미국 시애틀 WTO 각료회담 반대투쟁은 그러한 요소들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예컨대 당시 미국노총이 보여준 입장은 중요한 사례다. 그들이 시애틀투쟁에 참가한 중요한 동기의 하나는 중국의 WTO 가입 반대였다. ‘중국의 가입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임금제공을 통해 중국의 엘리트들이 대중을 억압하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담론은 사실상 국수주의■보호무역주의, 그리고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것이었다. 금융세계화가 동반하는 생산과 고용의 파괴라는 현실의 원인을 외부의 국가 또는 인민에게 돌리는 매우 위험스러운 주장이다. 또한 외부의 국가 또는 인민을 적으로 삼는 이데올로기는 곧바로 내부의 적 - 이주자, 여성, 실업자 등등 - 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국민 중에 기생충이 있다”는 대처의 발언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미국말고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의 범죄화를 주장하는 극우세력에게도 ‘반세계화’는 중심 구호가 되고 있다. 나아가 시민권의 '민족 우선‘ 원칙을 세운 유럽연합은 배타적인 권리부여를 체계화한다. 세계화가 낳은 혼돈으로부터 또는 ’미국화‘의 물결로부터 자기 민족에게 고유한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는 ’반세계화‘의 논리는 이처럼 보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도 이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세계화에 대한 불만이 보수주의로만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 반대’의 코포라티즘 경향도 분명히 존재한다 (민족경제의 재건, 국유화나 ‘투자의 사회화’를 통한 산업의 균형발전, 노동자 전체의 고용증진과 복지개선 등등).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금융세계화의 현실에서 이미 ‘미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배세력 중 일부는 이러한 경향을 대중조작을 위한 간판으로 간혹 활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이후 먼 훗날의 신기루로 한없이 지연된다.

대안세계화: 세계 민중운동의 저항의 전진적 요소들

이처럼 ‘반세계화’이라는 명칭이 우리의 운동을 지칭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세계농민운동조직인 비아캄페시나(소농의 길)는 ‘투쟁을 세계화하자, 희망을 세계화하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민족적■인종적 분할, 성적 억압과 배제라는 현실의 조건을 지양하는 보편적인 이념과 그에 적합한 운동을 건설하는 것만이 능동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사회운동의 흐름에서 어떤 전진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계발해야 하는가?
첫째, 인민들의 권리의 자율적인 실현이라는 원칙을 발전시켜야 한다. 세계경제기구나 글로벌 NGO가 내세우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미망이나 ‘반세계화’ 운동의 보수적, 퇴행적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안세계화 운동은 모든 인민들의 권리의 목록을 재작성하려는 노력을 펼치고 있다. 세계화의 고통 속에서 인민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요소를 제거하고 상호확장적인 권리를 발견하며, 또한 인민들의 자율적인 운동을 통해 쟁취하고자 하는 원칙이다.
둘째, 금융세계화의 현실에 공통으로 대응하기 위한 사회적■경제적 전화의 전략과 요구를 계발해야 한다. 예컨대 세계 자본주의 주변부와 신흥공업국을 휩쓴 외채위기를 겪으며, ‘국제금융■무역기구’ 반대(또는 전화), 제3세계 외채탕감, 금융거래과세를 통한 자본통제 등의 요구를 제시했다. 현재 세계사회운동의 가장 활동적인 세력의 하나인 농민운동은 식량주권(단순한 민족적 식량자급이 아닌 토지, 생명종과 유전자원, 농업지식에 대한 농민의 권리), 토지개혁과 대안적 농업모델을 두고 활발한 모색과 투쟁을 펼치고 있다. 거대한 사유화■상품화의 물결 속에서 지식에 대한 소유권과 자연 공유물에 대한 소유권에 반대하는 투쟁도 성장하고 있다. 세계화가 낳은 여성의 빈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여성운동의 모색과 투쟁도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기된 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세계화는 복합적인 현실의 변화를 낳고 있으며, 대안세계화 운동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몇몇 제한적 요구의 제기로 단순화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금융세계화에 조응하기 위해 화폐통합을 매개로 신자유주의 경제통합을 단행하고 유럽헌법을 제정하고자 하는 유럽연합의 현실은 이 문제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참조점이다. 현재 유럽연합의 건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긴급한 과제로 떠오르게 한다. 예컨대 유럽의 입법■사법■행정기구의 민주화 (특히 유럽연합의 사법체계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율화되면서 전횡을 휘두르게 된다), 사회적 노동의 재조직화(‘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이라는 목표의 갱신), 국경의 민주화 (인민들의 순환과 거주의 보편적 권리), 교육의 일반화 (특히 획일적인 민족적 교육체계에 의해 억압되는 익명의 이주자들 사이에서) 등등. 이는 세계화가 억압하는 인권■시민권의 재건을 위해 필수적인 과제이자 사회의 변혁을 위한 출발점일 수 있다. 대안세계화 운동은 세계적■지역적 시민권(노동권, 여성권)의 재건을 위한 경로들을 발견해야 한다.
셋째, 사회운동은 (앞서의 목표를 위해서도)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분리된 민족 또는 공동체 간 교통과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특히 ‘문명의 충돌’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갈등과 전쟁을 불변으로 간주하거나 이를 진압■순치하는 게 ‘성스러운’ 임무라고 주장하는 세력과 대결하는 게 긴급한 과제다. 오늘 세계에서 전쟁과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발호는 세계화가 낳은 가장 극단적인 결과이자 인민운동의 진정한 무능력을 표현한다. 현재 움터나고 있는 반전운동은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감행되는 ‘인도주의’ 전쟁이나 침략전쟁을 거부하며, 전쟁과 폭력의 전장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바라는 사회운동들간의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 전쟁이 벌어지는 곳은 곧 저발전 지역이며 곧 퇴행적인 사회이며, ‘인도주의’ 개입을 통한 민주주의의 이식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서구 제국주의가 제공하는 시각을 거부하고, 인민운동 차원의 교통과 연대의 틀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대안세계화와 한국의 사회운동

한국의 사회운동은 ‘반세계화’를 넘어서 ‘대안세계화’라는 이름을 찾고 있는가?
한국의 사회운동은 노무현정권의 파퓰리즘이라는 조건 위에 있다. 노무현정권은 김대중정권의 노선을 보완하며 신자유주의 개혁을 신속하게 강도 높게 추진하기 위해 새로운 파퓰리즘적인 정치행태를 창출하고 있다. 행정부 권력의 비대화, 미디어의 적극적인 활용, 대통령 개인에 대한 대중적 지지나 지역주의(실리주의)적 동원 등의 정치행태는 민중운동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되고 있다. 또한 정권과 NGO와 결탁은 위기의 순간마다 민중의 단결을 교란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게다가 노무현정권의 파퓰리즘은 기본적으로 기존 노동자운동을 배제하는 (과거 남미의 페론주의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물론 ‘참여와 대화’라는 수사는 계속 허구적으로 활용된다). 이 과정에서 사법부와 같은 억압적 국가기구가 자율화되면서 민중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을 휘두르며 사회의 위기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국가의 민주화’는 우회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이 우선 ‘국가의 민주적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세계화의 승리자(수혜자)’라는 미망을 타파하며, 전쟁의 폭력이라는 위급성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화와 노동>은 다음과 같이 우리 운동의 공동의 과제를 인식하고 분석과 입장을 마련해나갈 것이다.

첫째, 대안세계화운동에 적합한 노동자운동의 개조. 현재 국제노동자운동은 형성 중인 대안세계화운동에서 가장 비활동적인 부문으로 남아 있다. 이는 국제자유노련 등으로 대표되는 국제노동자운동조직의 전통적인 ‘반공주의■코포라티즘’ 지향과 그 몰락의 유산이다 (북반구 노조운동의 쇠퇴, 로비중심의 활동 행태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는 경제협력기구(OECD)나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시하는 ‘괜찮은 노동‘(decent work)이라는 슬로건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금융세계화의 현실에 대한 진정한 맹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노무현정권이 기본적으로 노동자운동을 배제하는 파퓰리즘 형태를 창출함으로써, 현존 노동조합 운동이 큰 동요를 겪고 있다. 즉 노동조합은 최소한의 코포라티즘적 지향조차 포기하며 정권의 ’위기관리‘ 파트너가 될 것인가 동요한다.
한편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면 현재 민주노총 지도부의 지향을 ’사회적 합의주의‘라고 부르기에는 부적합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최소한 ’사회적‘ 또는 ’코포라티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합의의 결과가 노동자대중의 포괄적인 부문들에게 그 결과가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현재의 지향은 노동자의 상층 일부의 현상유지를 목적으로 할 뿐이다. 한마디로 사회적 합의주의나 코포라티즘에 미달하나, 그것을 허구적으로 주장할 뿐이다. 예컨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라는 구상이 일부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으로 현실적으로 전환된 것은 코포라티즘에 미달하는 현재의 노조운동의 지향을 증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현재 ‘비정규직 철폐투쟁’도 갈림길에 있다. 비정규직권리보장 입법과 같은 ‘법제화’ 시도는 사회 전체에 걸친 ‘사회적 노동의 재조직화’ - 일례로 ‘모두에게 일자리를’이라는 구호가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정도의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이나 여성의 가사노동과 같은 광범위한 사회적 활동의 사회적 인정. 또는 이와 전혀 다른 방식의 생산관계의 전진적인 변혁 - 가 동반되지 않으면 비정규직 철폐의 현실적 경로를 발견할 수 없다. 현재의 구조에 단순히 편입되는 게 불가능하다면 현재의 구조를 변혁하는 게 유일한 경로다. 방향의 전환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실업■빈곤, 이주노동자의 권리의 문제를 동시에 사고할 길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양립. 지난 세기 노동자운동은 가족을 매개로 재생산의 부담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구조를 온존시켰다. 신자유주의 공세는 여성이 출산, 양육과 전반적인 가사노동을 책임져야 할 뿐만 아니라 생계비용을 보충하기 위해 이중적 노동을 해야만 하는 상태를 촉진했다. 이는 여성의 출혈적인 노동력 판매를 확대하고 그 결과 여성의 빈곤과 고통의 악순환이 성립했다. 여기서 남성 가장의 임금이 가족의 재생산을 담보한다는 ‘가족임금’은 하나의 맹목점이 되었고, 현실의 고통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양립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빈곤 문제에 관한 전진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만 한다. 물론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한편,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는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적 현실을 더욱 증폭한다. 먼저 전쟁은 대부분의 전쟁이 증언하듯이 ‘성별화된 폭력’을 확대한다. 전쟁은 여성에 대한 잔혹한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상징적 폭력을 동반한다. 또 한편으로 금융세계화가 강요하는 여성의 빈곤은 성매매의 문제를 더욱 증폭한다. 전쟁과 성매매라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에 직면해 여성의 권리의 견지에서 운동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셋째, 대안세계화 운동과 반전운동의 결합. 현재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침략전쟁만이 유일한 전쟁이 아니다. 현재 미국은 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중동과 같이 미국의 이해에 ‘사활적인 지역’에서는 기존의 군사동맹과 무기체계를 강화하면서 도발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거나, 콜롬비아나 베네주엘라에서 저강도전쟁(마약과의 전쟁, 정권의 전복)을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외 배제된 지역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에 대해서는 어색하게 침묵하거나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미명으로 중심부로의 분쟁확대를 저지하는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다. 세계화로부터 배제된 지역은 과거 식민주의■제국주의■신식민주의의 역사를 거치며 인간생명과 자연자원의 착취, 외채를 통한 수탈을 겪었고, 구 식민권력이 이식한 부정한 토착정권의 이중수탈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황폐화되었고, 군벌들 간 약탈전쟁마저 만연하다. 이러한 사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세계의 배제된 지역에서 반전운동과 대안세계화운동이 결합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사회운동 차원의 교통과 연대가 확장되어야 한다. 세계자본주의의 주변부에서 전쟁과 빈곤은 극단적 폭력의 지대를 공고히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또한 현재 한반도는 ‘신자유주의 경제통합’과 ‘절멸의 전쟁’의 위기에서 장기적인 미래를 내다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희망하는 한미동맹의 안정적인 분쟁관리인가 아니면 또 다른 급진화의 길인가를 두고 갈림길에 서 있는 시점이다.

역시 이 뿐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복합적인 과제들이 존재한다. 대안세계화 운동에서 가장 활력 있는 부문으로 성장하고 있는 농민운동, 식량주권과 농업개혁에 관한 요구와 분리될 수 없는 생태운동, 현재의 실업/반실업■빈곤의 문제와 깊게 연루된 대중교육의 위기 등의 문제는 우리가 공동으로 풀어나가야 할 긴급한 과제다
<사회화와 노동>은 이와 같은 한국 사회운동의 중장기적 과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공동의 전망을 세워나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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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비연 > [퍼온글] 수전손택, 나쁜 취향은 죽지 않는다(강정)

2005. 2. 1 한국일보

수전 손택

나쁜 취향은 죽지 않는다
도덕의 이름으로 예술을 범하려 하는가
"예술작품에서 내용이란 무의미한 것
형식적 스타일의 관점에서 향유해야"

‘대중문화의 퍼스트 레이디’ ‘동시대 미국 문단의 악녀’ 등 도발적인 닉네임으로 유명했던 비평가 수전 손택이 지난해 12월 28일 뉴욕의 슬론-케터링 암센터에서 별세했다.
향년 71세였다. 손택이 사망하기 1년 전 출간했던 책은 사진을 통해 전해지는 전쟁의 참상이 고통을 직접 겪지 않은 인간들로 하여금 얼마나 고통에 둔감하게 만드는지를 탐색한 ‘타인의 고통’(이재원 옮김, 이후 발행)이었다. 이 책에서 손택은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예의 탁월한 이미지 분석을 통해 설파했다.


‘예술에 온 정신이 팔린 심미가’로서 일생을 보낸 그가 ‘헤게모니 독점에 온 정신이 팔린 권력자’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일침이었다. 그럼에도 전쟁은 지속됐고, 이라크는 신자유주의 열강의 ‘공공의 밥’이 되었으며,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안타깝게도 ‘타인의 고통’은 수전 손택의 메아리 없는 ‘스완 송(Swan song)’이 돼버린 셈이다.

이산하 김남주 등 5명의 문인투옥사건을 탄원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수전 손택이지만, 그의 저술들이 우리나라에 제대로 소개된 건 불과 몇 년 전부터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가하는 복수’라는 도발적인 전언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해석에 반대한다’(이민아 옮김, 이후 발행)가 번역된 게 2002년의 일이다.

그리고 곧바로 ‘은유로서의 질병’(이재원 옮김, 이후 발행), ‘타인의 고통’ 등이 연이어 출간됐다. ‘캠프에 대한 단상’으로 그가 뉴욕 지성계의 백인 보수주의자들에게 신랄한 조소를 퍼부으며 등장한지 4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런데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2000년대에 읽는 그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고 문제적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주장들은 우리가 오래도록 긁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몸 안에 숨은 종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긁어주는 듯하다. 그 종기는 예술을 예술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의미론적 강박증의 더께가 아닐까 싶다.

수전 손택은 일생동안 ‘예술의 성애학’을 주장했다. 요컨대 예술작품을 억지로 발가벗겨 흠집을 내며 ‘강간’하지 말고, 그 ‘유혹’을 즐기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의 그런 주장은 19세기 말 오스카 와일드 등에 의해 주창된 유미주의에 기반한 것이 사실이지만, 단순한 호사취미나 정신의 허영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

수전 손택이 궁극적으로 주장했던 건 예술을 인간의 이념과 도덕에 복무시키거나 문화를 좋은 것과 나쁜 것, 고상한 것과 천박한 것, 진지한 것과 가벼운 것 등으로 나누는 이분법에 대한 반발이었다.

소위 지식인들에 의해 ‘좋은 취향’이라 장려되는 것들이 실상은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훼손하고 도덕률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손택은 예술을 내용이 아닌 형식, 즉 스타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즐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손택에 의하면 예술작품의 내용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무의미하다.

이런 주장은 오스카 와일드가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서문에서 ‘예술이 반영하는 것은, 예술을 보는 인간이지, 인생 그 자체가 아니다. 어떤 예술 작품에 관한 의견이 여러가지인 것은 바로 그 작품이 참신한 동시에 복잡하고 생명력에 넘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손택은 실제로 자신의 글에서 오스카 와일드와 장 콕토의 예술관을 상당부분 인용하고 있다.

손택이 뉴욕 지성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1964년 발표한 ‘캠프에 대한 단상’이란 글을 통해서 였다. ‘캠프’란 소위 나쁜 것, 조잡한 것, 싸구려 같은 것에 열광하는 것을 지칭하는 일종의 은어다.

한국문단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키치’나 ‘컬트’ 등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지만, 단순한 엽기 취향보다는 스타일에 열광한다는 점에서 좀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손택은 양성애와 B급 문화, 포르노 등을 가감 없이 인용하며 당대의 문화가 직면했던 패러다임의 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한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충돌이라 일컬어지던 1960년대 서구문화의 급격한 혼란을 손택은 충돌이 아닌 변화와 혼융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극심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캠프에 대한 단상’ 이후, 손택은 문학계의 숨통 터질 듯한 해석학의 수장들을 향해 본격적인 일침을 날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리얼리즘의 교주 게오르그 루ツ÷甄?

지식인들의 임의적 잣대에 반기

손택은 루카치의 주장을 ‘위대한 맑스주의자의 성과’가 아닌 ‘감수성의 총체적 부재’일 뿐이라며 반박한다. 1970,80년대 한국문학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루카치의 명성에 가해지는 손택의 비판은 그가 예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사랑과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손택에 의해 루카치는 예술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강간하고 매장한 가식적인 도덕군자로 전락한다. 요컨대 루카치는 문학을 도덕논쟁의 도구로 폄훼했을 뿐, 문학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그 자체로 즐기지는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루카치보다는 훨씬 감수성에 민감했던 발터 벤야민과 브레히트 등이 더욱 영민한 예술옹호자였다는 게 손택의 주장이다.

문학도 문학이지만, 손택이 가장 적극적인 지지와 관심을 가졌던 장르는 영화였다. ‘해석에 반대한다’에는 고다르, 브레송, 레네 등의 작품에 대한 매우 정치한 글들이 손택 특유의 감수성 충만한 문장들로 쓰여져 있다. 손택에 의하면 영화는 단순히 소설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영상으로 환원한 ‘제3의 매체’가 아닌 그 자체가 독자적인 스타일로 창조되는 ‘새로운 예술’이었다. 영화와 소설은 각각의 스타일을 통해 전혀 다른 세계의 일면을 표상한다.

그런 점에서 손택이 자신의 예술론을 피력하면서 고다르와 브레송의 영화에 찬사를 보낸 건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가능성과 매력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증명해낸 이 두 명의 예술가는 ‘과연 영화가 어떤 것인가’, ‘영화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라는 명제 앞에서 고뇌하며 진정한 영화적 스타일을 창출해낸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화는, 지금 우리가 숱하게 접하고 있는 ‘영화의 아류’(순전히 내가 보기에)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영화의 태생적 본질을 질문하며 세계가 감추고 있는 또 다른 질서를 탐색한다.

그러나 그들은 의미를 설교하기보다는 영상이 가지고 있는 특유한 스타일을 발견함으로써 자신들의 소임을 완수한다. 카메라를 통해 그들이 완수한 소임은 다름아닌 세계 자체가 가지고 있는 ‘투명성(Transparency)’의 재발견이었다.

손택을 얘기할 때 ‘투명성’은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사실 그가 예술을 예술 자체로 바라보자고 얘기할 때에도 기저에는 ‘투명성’이 있다.

이것은 사물 자체의 본성과 역할에 충실하자는 철학적 태도이기도 하다. 실제로 암으로 투병했던 시절이 있고 어린시절 결핵으로 아버지를 잃기도 했던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소위 정치적으로 유포되는 질병의 은유(대표적인 것이 에이즈)를 통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재앙의 이미지를 발생시키고 부추긴 사회현실을 강하게 공격한 바 있다.

병을 병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그런 은유들은 단순한 육체적 병증을 견강부회하여 사회심리학적인 공포심리와 정치적 금기사항에 대한 강박증을 초래한다.

거기에 맞서 손택은 ‘좌파든 우파든 전체주의 운동은 두드러지게? 노골적으로? 질병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예술뿐 아니라 질병에 있어서도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도덕의 장막은 여지없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예술의 도덕의 노예가 아니다

그렇다고 손택이 소위 ‘도덕 불감증에 걸린 쾌락주의자’라는 오해는 하지 마시라. ‘해석에 반대한다’의 첫 장에 실린 ‘스타일에 대하여’란 글을 보면 그가 가지고 있던 심미적 쾌락과 도덕의 연관성이 명쾌한 논리로 풀이되어 있다. 그 글에서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예술은 도덕성과 연관되어 있다고 나는 주장해야겠다.

그렇게 연관될 수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술이 도덕적 쾌감을 주기도 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에서 얻을 수 있는 도덕적 쾌감은 어떤 행동을 두고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에 지적인 희열을 주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주는 도덕적 쾌감이자 예술이 행하는 도덕적 역할이다.”

이러한 관점을 제대로 이해할 때 손택을 수식하는 두 가지 상반된 듯한 문구들이 포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행동하는 지성’을 가진 ‘예술에 온 정신이 팔린 심미가’는 현실을 방관한 채 예술의 세계로 잠수한 인물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로 존재하는 예술의 세계를 통해 보다 풍부한 인간적 애정으로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힌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소위 ‘현실에 대한 재현과 모방’이라는 고전적 예술관이 현실과 예술을 동시에 왜곡하고 은폐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예술은 인간의 관념이나 도덕률을 강조하기 위한 의식의 노예가 아니라, 심미적 쾌락을 통해 인간이 가진 ‘다정다감한 감정’을 고무시키는데 기여한다.

그럼으로써 인간본성에 대한 섬려한 이해가 〈?蠻嗤?세계를 보다 아름답게 재편할 수 있는 한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예감하며 병마와 씨름하던 손택이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실시간의 사진 이미지를 통해 여전히 고뇌했던 내용도 바로 그것이다. ‘타인의 고통’은 그런 의미에서 그가 제기했던 문제의식의 본질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반증하는, 꼭 대답해야 줘야 할 우리 모두의 화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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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1 2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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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숨은아이 >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 관한 신화학자 조현설의 해석

[조현설의 우리신화의 수수께끼]
선녀, 가정을 박차고 훨훨 날아가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를 모르는 한국인이 있을까? 마음씨 착한 노총각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를 구해준 덕분에 선녀의 깃옷을 감춰 행복하게 살다가 깃옷을 내어주는 바람에 선녀 및 자식과 헤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 동화를 한번쯤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시 나타난 노루의 천기누설로 두레박을 타고 하늘나라에 올라가 가족과 상봉하는 이야기, 혹은 지상에 두고 온 늙은 어머니를 뵈러 내려왔다가 천마에서 내리지 말라는 금기를 어겨 영원히 지상에 남게된 나무꾼 이야기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다양하게 변주되는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에는 변주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무리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도 나무꾼과 선녀가 지상에서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없다. 행복한 결말을 유난히 좋아한다고 소문이 자자한 한국인들은 왜 이들 부부가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이야기를 짜지 않았을까? 물론 하늘나라에서 선녀와 자식들을 만나 거기서 잘 사는 나무꾼 이야기도 있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지 않던가. 게다가 지상에는 노모가 남아 있지 않은가.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가 숨기고 있는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한국인은 몇이나 될까? 수수께끼 풀이의 첫번째 단서는 ‘금지의 위반’이다. 나무꾼은 노루가 절대로 내줘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 선녀의 날개옷을 꺼내준다. 독자들이 혹은 청중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쯧쯧 어리석은 나무꾼 같으니라구. 나무꾼이 노루의 말을 따르지 못한 것은 금지에는 늘 위반이 뒤따르는 민담의 이야기 문법을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이 위반에는 또다른 비밀이 숨어 있다. 나무꾼이 금지를 위반할 수밖에 없는 비밀.

이승에서 행복한 결말 없는
민담 ‘나뭇꾼과 선녀’는
몽골 백조처녀 신화의 변주
생성을 잉태한 ‘금지의 위반’
그 속에 여성을 붙잡아 두고 싶은
남성들의 욕망 숨어있어

비밀의 문을 여는 주문은 신화 속에 있다. 비밀은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가 본래는 신화였으며 우리가 아는 상당수의 전설이나 민담은 신화의 변형이라는 사실에 있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부근에 사는 몽골 브리야트족은 백조를 신성하게 여기는 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옛날 어떤 사냥꾼이 새를 잡으러 갔다가 호수에서 깃옷을 벗고 여자가 되어 헤엄을 치고 있는 백조 세 마리를 본다. 사냥꾼은 한 마리의 깃을 감춘다. 날아가지 못하고 남은 여자를 붙들어 살았는데 여섯 아이가 태어난다. 어느 날 아내가 소주를 빚어 남편을 취하게 한 후 깃을 달라고 한다. 감추었던 깃을 내주자 순식간에 백조로 변한 아내는 다섯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날아갔다는 것인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백조는 바로 천신 에세게 마란의 딸이고 이 백조로부터 바이칼 지역 브리야트인들의 족보가 시작되었으며 이들이 백조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고 신화는 설명해준다.

이런 유형의 백조처녀 이야기는 유럽에서 몽골, 시베리아, 중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이 기원신화에서 우리의 눈길을 잡는 부분은 백조 역시 깃을 찾아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떠나버린다는 것이다. 사냥꾼과 나무꾼, 백조와 선녀, 너무도 닮은 모습이다. 그러나 지상의 두 남자, 하늘의 두 여자 사이에는 전혀 닮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것은 나무꾼에게는 있는 금지가 사냥꾼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노루와 같은 동물이 등장해 천기를 누설하는 일과 같은 흥미로운 행위가 신화에는 없다.

신화에서 사냥꾼이 술에 취해 깃을 내준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실수가 사냥꾼을 이별의 고통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신화에서 사냥꾼의 실수는 브리야트족이라는 새로운 민족을 생성시키는 계기가 된다. 드러난 금지는 없지만 금지가 있더라도 금지가 위반돼야 새로운 생성이 가능하다는 것이 신화가 깃옷처럼 감추고 있는 은밀한 이야기다. 이것은 에벤키족의 웅녀가 새끼를 찢어 사냥꾼과 절반씩 나누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죽어야 새로운 민족이 생성될 수 있듯이 천신의 딸과 지상의 사냥꾼이 헤어져야 브리야트족이 지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입과 귀를 드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상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결말이 없는 것은 이 이야기의 원천이 신화였기 때문이다. 마치 유전자와 같은 신화에 대한 기억이 행복한 결말을 원하는 한국인의 심성을 방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화가 아닌 전설이나 민담은 선녀와의 이별을 나무꾼의 통곡으로 처리하거나 하늘나라의 재회로 마무리했던 것이다.


첫번째 수수께끼가 풀리려는 이 대목에서 의문이 머리를 든다. 우리나라에는 백조처녀가 어떤 집단의 시조가 되었다는 신화가 없는가? 없다면 몽골에는 있는 것이, 일본에도 있는 것이 왜 우리에게는 없는가? 이런 의문이다. 정답은 천신 에세게 마란만이 알고 있겠지만 두 가지 추정은 가능하다. 하나는 백조처녀 신화를 지닌 집단이 한반도로 들어왔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 자체가 중개과정을 거쳐 들어왔을 가능성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들어온 민족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집단의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에 시조신화 역시 더 이상 전승되지 못하고 전설이나 민담으로 변형되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처음부터 전설이나 민담으로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4세기 중국 동진(東晋) 사람 간보(干寶)가 기록한 <수신기(搜神記)>에도 이미 ‘모의녀(毛衣女)’라는 백조처녀 전설이 실려 있으니까.

변형의 내력이야 어쨌거나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변하는 부분도 있는 법. 신화가 전설이나 민담으로 변형되면서 사냥꾼은 나무꾼으로, 백조는 선녀로, 백조의 깃은 선녀의 날개옷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변화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 그것은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인가라는 물음과 관련있다. 두 번째 수수께끼다.

브리야트 기원신화에서 주인공은 사냥꾼이 아니다. 사냥꾼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깃을 숨겨 천신의 딸을 차지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백조의 처지에서 보면 깃은 지상의 사냥꾼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일 수도 있다. 백조는 사냥꾼을 끌어들여 여섯 자식을 낳고 결국에는 지상에 딸 하나를 남겨두고 승천하기 때문이다. 이 딸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브리야트족이고 그래서 백조는 이들의 신성한 어머니가 된다. 신화는 이 신성한 어머니의 이야기다.

그러나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의 주인공은 선녀가 아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마음씨 착한 노총각 나무꾼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다. 신화의 사냥꾼은 드러난 이유 없이 백조를 발견하지만 전설의 나무꾼은 노루의 목숨을 구해준 선행 덕분에 선녀를 붙잡을 수 있었다. 착한 남자는 마땅히 아름다운 선녀를 만날 자격이 있다! 물론 이 착한 노총각의 이야기는 금기를 어겨 선녀를 놓치는 결말로 풀리기도 하고, 두레박을 타고 하늘나라에 올라가 가족이 재회하는 결말로 매듭지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결말이든 거기 숨어 있는 것은 남성들의 욕망이다. 나뭇꾼과 선녀 이야기는 선녀를 가정 안에 붙잡아 두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이야기다.

지리산 발치에 박두규라는 시인이 있다. 그는 술이 깊어지면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데 <금강산녀>라는 노래도 레파토리 중 하나다. “내 옷은 어디로 갔나. 그 누가 가져 갔나. 오늘 꼭 올라가야 내일부터 베를 짜는데”로 이어지는 노래. 장기수들이 부르던 북한 노래라고 한다. 이 노래 속의 금강산녀가 바로 나무꾼에게 날개옷을 빼앗긴 <금강산 선녀>의 선녀다. 장기수들은 자신들의 신세를 옷을 잃은 선녀에 비유했겠지만, 이 애절한 노래는 지금 우리에게는 남성적 이야기의 감옥에 갇힌 여성들의 절규로 들리기도 한다.


조현설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연구교수 mytos21@hanmail.net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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