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비연 > [퍼온글] 수전손택, 나쁜 취향은 죽지 않는다(강정)

2005. 2. 1 한국일보

수전 손택

나쁜 취향은 죽지 않는다
도덕의 이름으로 예술을 범하려 하는가
"예술작품에서 내용이란 무의미한 것
형식적 스타일의 관점에서 향유해야"

‘대중문화의 퍼스트 레이디’ ‘동시대 미국 문단의 악녀’ 등 도발적인 닉네임으로 유명했던 비평가 수전 손택이 지난해 12월 28일 뉴욕의 슬론-케터링 암센터에서 별세했다.
향년 71세였다. 손택이 사망하기 1년 전 출간했던 책은 사진을 통해 전해지는 전쟁의 참상이 고통을 직접 겪지 않은 인간들로 하여금 얼마나 고통에 둔감하게 만드는지를 탐색한 ‘타인의 고통’(이재원 옮김, 이후 발행)이었다. 이 책에서 손택은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예의 탁월한 이미지 분석을 통해 설파했다.


‘예술에 온 정신이 팔린 심미가’로서 일생을 보낸 그가 ‘헤게모니 독점에 온 정신이 팔린 권력자’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일침이었다. 그럼에도 전쟁은 지속됐고, 이라크는 신자유주의 열강의 ‘공공의 밥’이 되었으며,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안타깝게도 ‘타인의 고통’은 수전 손택의 메아리 없는 ‘스완 송(Swan song)’이 돼버린 셈이다.

이산하 김남주 등 5명의 문인투옥사건을 탄원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수전 손택이지만, 그의 저술들이 우리나라에 제대로 소개된 건 불과 몇 년 전부터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가하는 복수’라는 도발적인 전언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해석에 반대한다’(이민아 옮김, 이후 발행)가 번역된 게 2002년의 일이다.

그리고 곧바로 ‘은유로서의 질병’(이재원 옮김, 이후 발행), ‘타인의 고통’ 등이 연이어 출간됐다. ‘캠프에 대한 단상’으로 그가 뉴욕 지성계의 백인 보수주의자들에게 신랄한 조소를 퍼부으며 등장한지 4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런데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2000년대에 읽는 그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고 문제적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주장들은 우리가 오래도록 긁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몸 안에 숨은 종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긁어주는 듯하다. 그 종기는 예술을 예술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의미론적 강박증의 더께가 아닐까 싶다.

수전 손택은 일생동안 ‘예술의 성애학’을 주장했다. 요컨대 예술작품을 억지로 발가벗겨 흠집을 내며 ‘강간’하지 말고, 그 ‘유혹’을 즐기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의 그런 주장은 19세기 말 오스카 와일드 등에 의해 주창된 유미주의에 기반한 것이 사실이지만, 단순한 호사취미나 정신의 허영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

수전 손택이 궁극적으로 주장했던 건 예술을 인간의 이념과 도덕에 복무시키거나 문화를 좋은 것과 나쁜 것, 고상한 것과 천박한 것, 진지한 것과 가벼운 것 등으로 나누는 이분법에 대한 반발이었다.

소위 지식인들에 의해 ‘좋은 취향’이라 장려되는 것들이 실상은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훼손하고 도덕률의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손택은 예술을 내용이 아닌 형식, 즉 스타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즐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손택에 의하면 예술작품의 내용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무의미하다.

이런 주장은 오스카 와일드가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서문에서 ‘예술이 반영하는 것은, 예술을 보는 인간이지, 인생 그 자체가 아니다. 어떤 예술 작품에 관한 의견이 여러가지인 것은 바로 그 작품이 참신한 동시에 복잡하고 생명력에 넘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손택은 실제로 자신의 글에서 오스카 와일드와 장 콕토의 예술관을 상당부분 인용하고 있다.

손택이 뉴욕 지성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1964년 발표한 ‘캠프에 대한 단상’이란 글을 통해서 였다. ‘캠프’란 소위 나쁜 것, 조잡한 것, 싸구려 같은 것에 열광하는 것을 지칭하는 일종의 은어다.

한국문단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키치’나 ‘컬트’ 등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지만, 단순한 엽기 취향보다는 스타일에 열광한다는 점에서 좀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손택은 양성애와 B급 문화, 포르노 등을 가감 없이 인용하며 당대의 문화가 직면했던 패러다임의 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한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충돌이라 일컬어지던 1960년대 서구문화의 급격한 혼란을 손택은 충돌이 아닌 변화와 혼융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극심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캠프에 대한 단상’ 이후, 손택은 문학계의 숨통 터질 듯한 해석학의 수장들을 향해 본격적인 일침을 날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리얼리즘의 교주 게오르그 루ツ÷甄?

지식인들의 임의적 잣대에 반기

손택은 루카치의 주장을 ‘위대한 맑스주의자의 성과’가 아닌 ‘감수성의 총체적 부재’일 뿐이라며 반박한다. 1970,80년대 한국문학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루카치의 명성에 가해지는 손택의 비판은 그가 예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사랑과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손택에 의해 루카치는 예술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강간하고 매장한 가식적인 도덕군자로 전락한다. 요컨대 루카치는 문학을 도덕논쟁의 도구로 폄훼했을 뿐, 문학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그 자체로 즐기지는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루카치보다는 훨씬 감수성에 민감했던 발터 벤야민과 브레히트 등이 더욱 영민한 예술옹호자였다는 게 손택의 주장이다.

문학도 문학이지만, 손택이 가장 적극적인 지지와 관심을 가졌던 장르는 영화였다. ‘해석에 반대한다’에는 고다르, 브레송, 레네 등의 작품에 대한 매우 정치한 글들이 손택 특유의 감수성 충만한 문장들로 쓰여져 있다. 손택에 의하면 영화는 단순히 소설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영상으로 환원한 ‘제3의 매체’가 아닌 그 자체가 독자적인 스타일로 창조되는 ‘새로운 예술’이었다. 영화와 소설은 각각의 스타일을 통해 전혀 다른 세계의 일면을 표상한다.

그런 점에서 손택이 자신의 예술론을 피력하면서 고다르와 브레송의 영화에 찬사를 보낸 건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가능성과 매력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증명해낸 이 두 명의 예술가는 ‘과연 영화가 어떤 것인가’, ‘영화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라는 명제 앞에서 고뇌하며 진정한 영화적 스타일을 창출해낸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화는, 지금 우리가 숱하게 접하고 있는 ‘영화의 아류’(순전히 내가 보기에)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영화의 태생적 본질을 질문하며 세계가 감추고 있는 또 다른 질서를 탐색한다.

그러나 그들은 의미를 설교하기보다는 영상이 가지고 있는 특유한 스타일을 발견함으로써 자신들의 소임을 완수한다. 카메라를 통해 그들이 완수한 소임은 다름아닌 세계 자체가 가지고 있는 ‘투명성(Transparency)’의 재발견이었다.

손택을 얘기할 때 ‘투명성’은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사실 그가 예술을 예술 자체로 바라보자고 얘기할 때에도 기저에는 ‘투명성’이 있다.

이것은 사물 자체의 본성과 역할에 충실하자는 철학적 태도이기도 하다. 실제로 암으로 투병했던 시절이 있고 어린시절 결핵으로 아버지를 잃기도 했던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소위 정치적으로 유포되는 질병의 은유(대표적인 것이 에이즈)를 통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재앙의 이미지를 발생시키고 부추긴 사회현실을 강하게 공격한 바 있다.

병을 병 자체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그런 은유들은 단순한 육체적 병증을 견강부회하여 사회심리학적인 공포심리와 정치적 금기사항에 대한 강박증을 초래한다.

거기에 맞서 손택은 ‘좌파든 우파든 전체주의 운동은 두드러지게? 노골적으로? 질병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예술뿐 아니라 질병에 있어서도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도덕의 장막은 여지없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예술의 도덕의 노예가 아니다

그렇다고 손택이 소위 ‘도덕 불감증에 걸린 쾌락주의자’라는 오해는 하지 마시라. ‘해석에 반대한다’의 첫 장에 실린 ‘스타일에 대하여’란 글을 보면 그가 가지고 있던 심미적 쾌락과 도덕의 연관성이 명쾌한 논리로 풀이되어 있다. 그 글에서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예술은 도덕성과 연관되어 있다고 나는 주장해야겠다.

그렇게 연관될 수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술이 도덕적 쾌감을 주기도 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에서 얻을 수 있는 도덕적 쾌감은 어떤 행동을 두고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에 지적인 희열을 주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주는 도덕적 쾌감이자 예술이 행하는 도덕적 역할이다.”

이러한 관점을 제대로 이해할 때 손택을 수식하는 두 가지 상반된 듯한 문구들이 포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행동하는 지성’을 가진 ‘예술에 온 정신이 팔린 심미가’는 현실을 방관한 채 예술의 세계로 잠수한 인물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로 존재하는 예술의 세계를 통해 보다 풍부한 인간적 애정으로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힌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소위 ‘현실에 대한 재현과 모방’이라는 고전적 예술관이 현실과 예술을 동시에 왜곡하고 은폐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예술은 인간의 관념이나 도덕률을 강조하기 위한 의식의 노예가 아니라, 심미적 쾌락을 통해 인간이 가진 ‘다정다감한 감정’을 고무시키는데 기여한다.

그럼으로써 인간본성에 대한 섬려한 이해가 〈?蠻嗤?세계를 보다 아름답게 재편할 수 있는 한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예감하며 병마와 씨름하던 손택이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실시간의 사진 이미지를 통해 여전히 고뇌했던 내용도 바로 그것이다. ‘타인의 고통’은 그런 의미에서 그가 제기했던 문제의식의 본질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반증하는, 꼭 대답해야 줘야 할 우리 모두의 화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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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1 2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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