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책을 읽는 동안 침잠하는 즐거움은 누릴 수 있었다. 산문으로 쓴 시적 에세이. 저자의 빛나는 사유들에서 종종 걸음을 멈추게 된다. 이 책의 가장 좋은 점은 소개된 시집들이고 가장 아쉬운 점은 인용된 시들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하여 모조리 보관함에 담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3-17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도 예쁘고 구성도 좋은데 100페이지 조금 넘는 분량에 책값이!!

행복한책읽기 2021-03-17 17:59   좋아요 1 | URL
그죠. 이 시리즈 가성비는 좀 아님요 ㅋ
 
















20210315 #시라는별 19 

단어를 찾아서 Szukam slowa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Wislawa Szymborska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나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의 분노처럼, 

피 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고문실 벽처럼 피로 흥건하게 물들고, 

그 안에 각각의 무덤들이 똬리를 틀기를, 

정확하게 분명하게 기술하기를,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내가 듣는 것, 

지금 내가 쓰는 것, 

그것으로 충분치 않기에. 

터무니없이 미약하기에.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소리는 적나라하고, 미약할 뿐. 

온 힘을 다해 찾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폴란드 태생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1923년에 태어나 2012년에 타계했다. 22세 때 <단어를 찾아서>라는 시로 등단하여 살아생전 12권의 시잡을 출간했다. 별세 후 미완성 유고 시집 <<충분하다>>가 출판되었다. 시인의 나이 73세 때인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폴란드 중서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시인은 여덟 살 때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로 이주한 후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쉼보르스카가 타계하고 며칠 후, 이 시인의 책상 서랍 속에서 오래된 원고 뭉치가 발견되었다. 40여 년 전 시인의 전남편이자 편집자였던 아담 브워테크가 시인의 생일 선물이자 등단 25주년과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축하하는 이벤트로 그녀의 초기작들을 모아 만든 가편집본 시집이었다. 쉼보르스카는 자신이 초기작들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목적의식이 강한 사회주의리얼리즘에 경도된 시들이었기 때문이라고. 그랬기에 시인은 선물로 받은 이 원고 뭉치를 차마 없애지는 못하고 책상 서랍 속에 간직해 둔 것이었다. 새내기 시인 쉼보르스카의 생각과 고민, 시적 모티브, 그리고 2차 대전의 상흔이 끼친 영향이 담겨 있다고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임에도 나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라는 시인을 알라딘 광고로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알고 싶어져서 시집을 냉큼 구입했다. 이십대는 꿈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꿈이 잡히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시기다. 젊은 쉼보르스카도 다르지 않다. 그런 고민을 생생하게 표현한 시가 등단작인 <단어를 찾아서>이다. 자신이 내뱉는 말이 힘이 없고 기술하는 글이 충분치 않다고 속상해 하던 젊은 시인은 원로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충분하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평생을 시인으로 살아온 이의 지혜로운 한마디가 아닐 수 없다. 

국내에 출간된 쉼보르스카 시집으로는 시선집 <<끝과 시작>>과 유고 시집 <<충분하다>>가 있다. 번역이 쉽지 않았을 텐데, 최성은 한국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 교수의 노고가 고맙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21-03-15 0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끝과 시작만 읽었는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여전히 대단하다고 느꼈던 느낌이 생생하고 여전히 잘 보이는 곳에 버려두고 있지요. ㅠㅠ 다시 들쳐 봐야겠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3-15 16:11   좋아요 1 | URL
와. 라로님은 이분 시집을 진즉 읽으셨군요. 역쉬 서재에 오랜 세월 적을 둔 알라디너답습니다. 아직 몇 편 못 읽었는데, 시들이 진솔하다 느껴집니다요 ^^

라로 2021-03-15 17:09   좋아요 0 | URL
네, 2008년에 처음 읽었고, 2010년까지 기록이 있는 것을 보니 그때까지는 읽었나봐요. ^^;; 알라딘 오래 한 덕을 보는 거죠~~!!^^

미미 2021-03-15 0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그렇게 연결되는군요! 저도 덕분에 쉼보르스카를 알게되네요.😉 번역시는 되도록 안보려고 했는데 이 시집들 끌려요ㅋ주섬주섬 담아갈래요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3-15 16:13   좋아요 1 | URL
저도 번역시는 껄끄러운데, 폴란드어를 전혀 모르니 영시보다 읽기 편하더라구요. 제목 연결은 제맘대로 했습니다요. ㅋㅋ

scott 2021-03-15 1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 번은 없다 / 비스와봐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행복한 책읽기님 덕분에 월요일 쉽보르카의 시와 함께 하게 되네요 ^0^


행복한책읽기 2021-03-15 16:16   좋아요 1 | URL
허걱. 쉼보르스카도 이미 읽으셨단 말입니까. 진정. 당신은 AI. 올려주신 시 멋있습니다. 두 번은 없다! 제목 똑부러집니다. 합쳐지지 않는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 흠흠흠. 일치점을 찾아보겠습니다. ^^

희선 2021-03-16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몇해 전에 《충분하다》만 봤어요 그러고 보니 거기에는 죽음을 말하는 시가 있었다는 게 조금 생각나는군요 심보선은 비스와봐 심보르스카라 쓰고 자기 고모라 했어요


희선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시인선 54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0311 #시라는별 18

불안도 꽃
- 이규리

누가 알고 있었을까
불안이 꽃을 피운다는 걸

처음으로 붉은 피 가랑이에 흐를 때
조마조마 자리마다
꽃이 피었던 걸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몸이 마르고
밤마다 어둠을 고쳐 보는 동안
불안은 피고 있었네

불안은 불안을 이해했을까
그 속에 오래 있으면
때때로 고요에 닿는다는 걸
그건 허공이니까
두드리면 북소리 나는 공명이니까

불안으로 불안을 넘기도 하는 것처럼
꽃은 그것을 알아보았고 그것은 꽃을 도왔으니

수많은 당신이 불안이었던 걸
이제 말해도 될까

흔들리면서
일어나면서

불안도 꽃인 것을


이규리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를 띄엄띄엄 읽다 날 잡은 듯 몰아서 다 읽어 버렸다. <<당신은 첫눈입니까>>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이규리 시인은 차가운 눈과 달리 속이 따뜻한 사람 같다. 인간을 보는 눈은 예리하나 인간을 대하는 태도는 부드럽다. 삶의 속성을 날카롭게 파헤치나 삶을 살아내는 존재들은 다정하게 보듬는다. 예순에 이른(출간 당시) 시인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지는 시집이다.

이규리 시인이 보는 우리 인간은 ˝저마다 아파˝하고(<붕붕 한라봉>), ˝의심과 불안˝을 껍질째 먹고(<껍질째 먹는 사과), 슬픔이라는 ˝찬란에 눈이 베이며 살며 또 견디며˝(<비유법>) 사는 ˝흠 있는 존재˝(<청송사과>)이다. 한마디로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당부한다. ˝넌 누굴 닮아 그 모양이니?˝ 같은 말로 누구에게나 있을 상처를 ˝꾹꾹 눌러 확인하지 마라˝고.(<그늘의 맛>) 왜냐하면 붉은 열매가 되지 못한 파란 열매는 파랗다는 사실만으로 생의 가혹함을 겪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나 불완전해서 인간은 또한 실수하고 실패하고 상처 입히고 산다. ˝절정인 줄 모르고˝ 절정을 놓치고(<벗꽃이 달아난다), ˝잘못 찾은 무덤 앞에서 통곡˝도 하고(<때가 되면>),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수 있다는 걸 모른 채 지낸다(<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불완전해서 불안이 점점 증폭될 수 있다.

어찌해도 가스통은 불안통
그 아슬한 불안들을 앞에 보면서

덜그럭 뭐, 그냥 간다.(<뭐, 그냥 간다>)

인생이란 불안을 싣고 가는 ˝가스통.˝ 불안의 용량이 초과하면 언제고 폭발할 가스통. 그럼에도 ˝덜그럭, 뭐 그냥˝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특별한 일> 중)

˝잘려나간 꼬리˝는 우리가 살면서 잃는 무엇일 것이다. 잃음으로써 얻는 것은 무엇일까. 젊음과 건강을 잃는 대신 지혜를 얻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대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에 대한 연민을 쌓는다(<특별한 일>). 모두가 최선을 다해 산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이 자기 나름의 최선으로 산다는 것쯤은 알게 된다. 최선이라는 것도 저마다의 역량과 경험에 따라 그 모양과 색깔이 다른 법이므로. 그러나 제 꼬리가 잘려 위태위태한대도 꿈틀거리며 기어코 어딘가를 향해 가는 존재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최선은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흔들리면서 / 일어나면서 / 불안도 꽃˝이 된다. 우리 모두는 ˝꽃˝이다.

봄이 성큼성큼 오고 있다. 꽃망울이 꿈틀대며 제 속을 톡톡 연다. 추운 겨우내 꽃을 피우지 못할까 얼마나 불안했을까. 아니 꽃들은 불안해하지 않는다. 불안해하는 것은 내 마음이다. 최선을 다해 줄기를 밀어올려 봉오리를 터뜨리는 꽃들을 지긋이 들여다보아야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3-11 12: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흔들리면서 / 일어나면서 / 불안도 꽃 우리 모두는 꽃


╭ ⁀ ⁀ ╮
( ˘▾˘🌸❀°🌸 )
╰ ‿ 🌸❀° 🌸 ╯

행복한 책읽기님 오늘 멍때리기 잊지 말귀 ~ㅎ시력 보호를 위해!

행복한책읽기 2021-03-11 12:56   좋아요 2 | URL
넹~~~~^^

희선 2021-03-12 0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안도 사람이 늘 느끼는 거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것도 좋게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죠 아니 사람 본능이 본래 위험이 찾아올 것을 많이 생각하기도 한답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3-12 12:50   좋아요 1 | URL
희선님도 시인이시라 역시 뭘 좀 안다니까요. ^^
 
진보와 빈곤 - 개정판
헨리 죠지 지음, 김윤상 옮김 / 비봉출판사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헨리 조지의 삶과 철학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책은 정말 읽기 버거웠다. 절반과 결론 읽고 미완의 독서로 남겨 놓는다. 발전은 오라! 빈곤은 가라! 평등은 오라! 격차는 가라! 이 길을 향해 온 생을 바친 조지님 발자취는 계속 더듬겠다. 원문이 만연체이나 번역을 더더더! 손보면 좋겠다. ㅠ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1-03-09 16: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어요! 고통이 전해집니다. 600페이지가 넘는데 만연체에 번역문제라니.. 🥲

행복한책읽기 2021-03-10 12:08   좋아요 1 | URL
ㅎㅎ 정말 미치는줄 알았어요. 저자의 의도는 알겠는데. 공감도 되는데 난독증을 일으키더라고요. ^^;;;
 














20210309 책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면. . .  

보름전 안과에 갔다. 

눈에 모래가 잔뜩 낀 듯한 서걱거림과 통증을 더는 그냥 두면 안 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의사의 진단은 세 가지였다.

건조증. 검은자 스크래치. 백내장. 

ㅡ 백내장이요? 제가요? 

ㅡ 네. 도수를 아무리 올려도 시력 교정이 안 되시는데요. 백내장이 시작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헐. 의사들은 대개 좋게 말하면 쿨하게 말하고, 나쁘게 말하면 참 싸가지 없이 말한다. 툭 던지듯 내뱉는다. 뭐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래 놓고는 엄포를 놓는다.

ㅡ 건강 검진 받듯 눈 검사도 정기적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점점 더 나빠지다 안 보이십니다. 

의사는 백내장이 시작되었을 뿐 수술 단계는 아니고 지금은 건조증으로 인한 검은자 스크래치 치료가 급선무라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안약을 넣고 나니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서걱거림은 가셨는데, 안압이, 안압이 날마다 높아졌다. 밤에 눈을 감는 것도,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조금씩 무서워졌다.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이라니. 기어이 정수리 두통까지 수반되었다. 결국 다시 안과를 찾았다. 의사는 여전히 쿨하게,  혹은 무신경하게 말한다. 

ㅡ 흠. 검은자 스크래치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이게 좋아져야 시력을 맞출 수 있어요. 약을 좀 바꿔 보죠. 

바꾼 약은 젤 타입이다. 나는 지금 안약을 넣은 생태에서 희뿌연 화면을 보며 타자를 치고 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임. ㅋ 

어슐러 K. 르 귄 언니(나는 이 작가를 언니로 부르기로 했다. 애트우드 언니처럼. 완전 걸크러쉬다)의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를 삼분의 일 정도 읽었다. 잘 이해 안 되는 대목이 간혹 등장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주 좋다. 특히 어제 읽은 집, 책, 잠에 대한 에세이는 푹 빠져들어 읽었다. 

나에게 독서는 유희다. 내게도 분명 지적 허영이 있지만 내가 책을 읽는 건 대체로 좋아서다. 즐거워서다. 잘난 척하고 싶어 어려운 책을 골라 읽더라도 그 책이 즐거움을 주지 않으면 나는 내려놓는 편이다. 나는 물도 싫어하고 수영도 못하지만 책을 읽고 있으면 책이라는 바다에서 깊이 잠수하는 듯하다.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는 책바다를 유영하노라면 고요와 자유와 희열이 찾아든다. 행복감이 몸속 깊이, 깊이 스며든다. 대체 그 어떤 것에서 이런 환희를 맛볼 수 있단 말인가. 가성비 끝내주는 유희가 아닌가. 르 귄 언니의 말대로 "첨단기술을 뽐내지는 않지만 복합적이고 극도로 효율적"이며 "빛과 사람의 눈, 그리고 사람의 머리만 있으면"(133쪽)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덜커덩, 내 유희를 굴러가게 해주는 바퀴에 제동이 걸렸다. 저 세 바퀴, 빛과 눈과 머리 중 눈에 펑크가 난 것이다. 바람이 쉭쉭 샌다. 바퀴가 쪼그라든다. 데굴데굴 구르지 못하고 픽픽 주저앉는다. 이것은 슬픔이 아니다. 이것은 악몽이 아니다. 이것은 저주다. 책을 읽을 수 없는 세계는 암흑의 세계다. 사람은 어리석어 어둠을 예측하지 못하거나 예측하고도 밀어내려 한다. 나는 전자였다. 내 눈은 오랫동안 말짱할 거야. 노안도 빨리 안 왔잖아 라면서 좀 기고만장했다. 그 거만함에 귀싸대기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그것도 엄청 얼얼하게.

나는 책과 오래오래 놀고 싶다. 그러니 눈 관리를 잘하자!!! 

어떤 집의 아름다움은 ‘거주‘를 통해서 활성화하고 채워진다. - P102

이 글을 쓰다 보니 소설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나의 생각 중 많은 부분이 결국 그 집에 살았던 경험으로 배운 게 아닌가 싶어진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평생 단어로 그 집을 다시 지으려 애써 왔는지도 모른다. - P122

독서는 능동적이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행동이고, 내내 깨어 있어야 한다. 사실상 사냥이나 채집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스스로 말하지 않기에, 책은 도전이 된다. 책은 물결치는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 줄 수도, 요란한 웃음소리나 거실에 울리는 총소리로 귀를 먹먹하게 만들 수도 없다. 책은 머릿속으로 귀 기울여야 한다. 책은 영상이나 화면처럼 눈을 움직여주지 않는다. 스스로 정신을 쏟지 않는 한 정신을 움직이지도 않고, 마음을 두지 않는 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해 주지 않는다. 단편 소설 하나를 잘 읽으려면 그 글을 따라가고, 행동하고, 느끼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실상 그 글을 쓰는 것만 빼고 다 해야 한다. 읽기는 게임처럼 규칙이나 선택지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읽기는 작가의 정신과 능동적으로 협력하는 작업이다. 모두가 빠져들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 P133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1-03-09 12: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놀라셨겠어요!! 저는 지난번 안과 다녀온후 온찜질에 인공눈물에 눈 주위뼈 마사지, 영양제 구입, 숲멍때리기등 열심히 챙기고 있어요. 그러다가도 또 잠깐 소홀하면 눈의 피로가와서 정신차리라고 너가 아끼는 책 보렴 이럼 곤란하다고 찰싹찰싹ㅋㅋㅋ같이 힘내요♡

행복한책읽기 2021-03-09 14:10   좋아요 1 | URL
숲멍때리기. ㅋㅋ 이거 넘 좋다요. 네 미미님 우리 같이 힘내 오래오래 책 보자요. 응원 감솨 감솨!^^

새파랑 2021-03-09 1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한책읽기를 위해서는 눈건강이 필수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3-09 14:11   좋아요 2 | URL
그니까요 ㅠㅠ 제가 좀 방심했어요. 행복한책읽기를 위해 눈을 지키자 지키자!!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scott 2021-03-09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젤타입 약이면 행복한 책읽기님 상태 초기인데
동네병원보다 큰병원에서 정확하게 검진을 받아보세요.
요즘은 거의 백내장 수술하지 않고 약으로 지연 시켜요.
넘 걱정 하지 마시고 관리 잘하시면 됩니다.
미미님 말씀처럼 온찜질 인공눈물 눈주위 뼈 마사지!
그리고 커피 같은 카페인 음료 줄이시고
외출시에는 선글라스 착용!

당분간 책은 오디오로만 들으시고 멍! 때리는 시간을 늘리기 ^ㅎ^

행복한책읽기 2021-03-10 18:46   좋아요 1 | URL
잉잉. 큰병원 가기 싫어요. 큰병원 의사들 싫어요. 정말 싫어요.^^;;; 커피 줄이라는 말씀에 허걱 했슴요. 아, 맞다. 카페인이 수분을 앗아간다고 했는데. 물기 촉촉한 눈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슴다. scott님 페이퍼를 읽어야 해서리 ㅋㅋㅋ 고마워요~~~^^

라로 2021-03-09 1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어째요?? 저도 눈이 점점 빠르게 나빠지고 있지만, 책님 증상을 들으니 더 심하신 것 같아요. 아직 젊으신데,,,백내장은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시길 추천합니다. 햇볕이 백내장을 더 빨리 생기게 한다고 하네요. 안과에서 추천하는 방법이에요. 그래서 저도 안 끼던 선글라서 아주 열심히 끼고 다녀요. 백내장 조금이라도 늦추려고요. 스캇님 말대로 약으로도 지연이 된다고 하니까,, 뭐 그래도 안되면 백내장 수술은 간단하니까 넘 걱정하지는 마세요. 백내장 수술 잘하는 의사 찾아서 수술하세요. (저 백내장 수술하는 거 봐서 알아요.ㅋ) 어쩄든 그래도 중요한 것은 연기하는 것이니까 우리 눈 너무 혹사하지 맙시다. 책도 적당히 읽자구요. 아니면 저처럼 대부분 오디오북으로 듣던지요.

얄라알라 2021-03-10 00:29   좋아요 2 | URL
헉, 지금 라로님 댓글을 읽다보니 제가 거꿀, 거꾸로 가고 있었네요. 햇볕 많이 쬐는 건 근시 증상에 해당하는 처방이었나봐요 백내장은 다르군요^^;; 행복한 책읽기님께 어설픈 조언 드릴뻔 했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3-10 18:49   좋아요 1 | URL
앗. 백내장 아주 심각한 건 아니고. 이미 시작은 됐으니 눈 관리 잘하라고 의사가 엄포를 놓은 거예요. 라로님이 저보다 더 걱정을 해주시는 것 같아 송구합니다. 햇볕이 백내장에 나쁘다고라 ~~~~ 저 햇볕 쬐는 거 엄청 좋아하는데, 오늘은 볕이 좋아 낮에 산책까지 했는데, 선글라스 끼는 거 싫어하는데, 아, 껴야 한단 말입니까. ㅠㅠㅠㅠ 그래도 눈을 보호해야 하니, 책을 오래 읽어야 하니, 이제부터는 선글라스 챙기겠습니다. 고마워요. 비록 온라인 친구지만 간호사 친구 있으니 넘 좋다요 ~~~~^^

얄라알라 2021-03-10 0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차분하게 쓰셨지만, 얼마나 놀라시고 속상하셨을까요? 특히 행복한 책읽기님처럼 책 없는 삶 상상하기 힘든 분께 눈의 변화가 얼마나..

사실 3월 내내 모니터만 보고, 문밖에도 안 나가니 저도 눈이 침침해서 무서워지는 상태인데..

안과가면 늘 햇볕쬐면서 야외활동 많이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같이 눈도 지키고, 오래오래 책 읽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3-10 18:51   좋아요 1 | URL
맞아요. 책없는 삶은 상상하기 힘든데. 언젠가는, 아주 먼먼 날은 받아들여야겠죠. 흠. 아니다. 그때쯤이면 의학이 발전해서 여전히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 되기를 꿈꿔 봅니다. 북사랑님 고마워요. 햇볕은 선글라스 낀 눈으로 보겠습니다.^^

syo 2021-03-11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게 눈은 생명줄입니다.
생명을 지킵시다 ㅠㅠ 화이팅...

행복한책읽기 2021-03-12 12:50   좋아요 0 | URL
홧띵!!!^^

희선 2021-03-12 0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읽기 좋아하는 사람은 눈을 잘 지켜야 해요 눈에 문제가 있었군요 이번에 받은 약은 괜찮으면 좋겠네요 눈에는 뭐가 좋을지... 마사지 잘 하세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3-12 12:51   좋아요 1 | URL
네. 저번약보다 괜찮아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