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9 #시라는별 51 

악의 평범성 2
- 이산하 

˝불교 승려들이 숲을 지날 때 혹 밟을지도 모르는 풀벌레들에게 
미리 피할 기회를 주기 위해 방울을 달고 천천히 걷는다는 말에 
난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얼마나 많은 생물들을 밟아 버렸던가.˝ 

득음의 경지에 이른 어느 고승이나 성자의 얘기가 아니다.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한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의 말이다. 
전 친위대원을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만들고 
가난하고 소박한 생을 최고의 삶으로 꿈꾼 사람이기도 했다.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우리의 혀는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악의 평범성 3

몇 년 전 경주와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그때 포항의 한 마트에서 정규직은 모두 퇴근하고 
비정규직 직원들만 남아 헝클어진 매장을 수습했다. 
밤늦게까지 여진의 공포 속에 떨었다. 
대부분 아르바이트 학생들과 아기 엄마들이었다. 
목숨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세상이다. 
지진은 무너진 건물의 속살과 잔해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인간의 부서진 양심과 잔인한 본성까지도 보여준다. 
정말 인간은 언제 인간이 되는가. 
불쑥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대사가 떠오른다. 
˝우리 사람 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고 살자.˝ 


놀라운 발견. 이산하 시인이 22년 만에 펴낸 시집  『악의 평범성』은 자우메 카브레의  『나는 고백한다』 를 시로 읽는 느낌이다. 아우슈비츠와 제주 4.3 사건과 오늘날의 평범한 악이 교차 편집되어 있다.

이산하와 동지들은 제주 4.3사건을 ˝가스실 없는 한국판 아우슈비츠˝로 불렀다. 이산하의 <한라산>이 당대 정권에 던지는 ‘폭탄‘이 된 것은 아우슈비츠가 여전히 현재형이었기 때문이다. <한라산>의 문제의식을 현재화한 이산하의『악의 평범성』은 아우슈비츠의 역사적 사례들을 시적으로 재구성한다. 주된 방식은 나열과 병치이다. (김수이 문학평론가 해설 중)

시들이 우리가 몰랐던, 혹은 모르고 싶었던 숨은 본성을 일깨운다. 인간은 상황만 달라지면, 누구나 악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반성과 고찰이 중요하다. 이산하 시인의 시들은 읽기가 쉽지 않다.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찌릿찌릿 가슴을 찔러서이다. 시로 읽는 역사이고,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들이다.

놀라운 발견 2. 어제 scott님이 올린 알마 로제의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극화한 시도 있다. 제목은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

시인의 말도 서늘하다. 

자기를 처형하라는 글이 쓰인 것도 모른 채 
봉인된 밀서를 전하러 가는 ‘다윗의 편지‘처럼 
시를 쓴다는 것도 시의 빈소에 
꽃 하나 바치며 조문하는 것과 같은 건지도 모른다. 
22년 만에 그 조화들을 모아 불태운다. 
내 영혼의 잿더미 위에 단테의 <신곡> 중 이런 구절이 새겨진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이산하 시인은 『악의 평범성』으로 ‘제18회 이육사詩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8-19 07:14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악의 평범성 글 보니 무섭네요. 가장 무서운게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05   좋아요 2 | URL
ㅠㅠ 맞아요. 사람은 진짜 무섭워요. 근데 또 아름다운 것이 사람이어서. 그런 두 바퀴로 사람 세상이 굴러가나 보다 생각하게 돼요.^^

페넬로페 2021-08-19 09:2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시인이 단테의 신곡 구절을 인용할 정도로 이 시집을 읽으면 마음이 암울할 것 같지만 외면하지 말고 꼭 읽어봐야 할 책인것 같습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10   좋아요 3 | URL
네에. 적극 추천하고 싶지만 조심스럽기도 해요. 인간의 어두운 면을 들여다보는 건 유쾌하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럼에도페넬로페님이 꼭 읽어보시겠다 하니 든든해요.^^

mini74 2021-08-19 19: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가스실없는 한국판 아우수비츠 ㅠㅠ 전 현기영작가님 통해 처음 알게 됐어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던 시대도 있었지요 ㅠㅠ 참 맘이 아파요 ㅠ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12   좋아요 2 | URL
맞아요. 입밖에 낼 수조차 없던 시대도 있었잖아요. 여기까지 오는 데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려구요.

scott 2021-08-19 20:0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목숨도 정규직
비규정직 ㅠ.ㅠ

아우슈비츠 오페라
저만 ㅋㅋ 알고 있었던게 아니였네요
알마 로제 시인은 어떤 시어로 남겼는지
행복한 책읽기님에게 땡!🤞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15   좋아요 2 | URL
올해 scott님께 배우는 게 참 많습니다. 님 페이퍼 아니었으면 레비나 이산하 시집이 이만큼 읽히지 않았을 거예요. 앎과 느낌도 서로를 증폭시킵니다. 늘 감솨!!!^^

붕붕툐툐 2021-08-20 00:4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흐음~ 꼭 읽어봐야할 시집이네요. 4.3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아직도 많이 아픈 역사죠... 「나는 고백한다」와의 연관성도 너무 궁금하고요!!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17   좋아요 2 | URL
네. 툐툐님껜 적극 추천이요. 읽어주세요. 샘이시잖아요.^^

희선 2021-08-20 02: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시집 나온 것만 보고 별로 관심 갖지 않았군요 가끔 어떤 시집이 나왔는지 보기도 해요 정규직과 비정규직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네요 다 같이 해야 할 텐데, 그것보다 그날은 모두 돌아가라고 해야지...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19   좋아요 2 | URL
그죠. 재난에도 취약한 것이 취약계층 ㅠㅠ 저 글 읽으면서 넘 속상하더라구요. 직위 높은 사람들이 더 책임을 져야하는 일인 것을.ㅡㅡ

얄라알라 2021-08-20 03: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행복한책읽기님 시선으로 세상보기!
포항경주지역 지진 이후, 아직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신 분들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당시 수습인력에 누가 남아 동원되었는지는 궁금해본적도 없었어요. 시를 통해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요 행복읽기님^^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22   좋아요 3 | URL
저도 궁금해본 적도 없었어요. 그래서 또 부끄럽더라구요. 그래서 또 시인에게 고맙더라구요. 북사랑님 말처럼 말해지지 않아,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를 꺼내 주어서 말이죠. 지두 북사랑님께 감솨!!^^

han22598 2021-08-20 05:5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사람 목숨 값도 차이가 있는 세상 ㅠㅠ 슬퍼요. 사람 되기는 언감생심. 괴물이 되지 말아야지 ㅠㅠ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24   좋아요 2 | URL
목숨에 값을 매기지 않는 세상을, 우리 같이 꿈꾸어요 한님^^

라로 2021-08-20 09: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님! 저 <시녀 이야기> 다 읽고 <증언들>이틀 전에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지금 안 읽으면 올해는 못 읽을 것 같아서요. 다른 책 다 던지시고 얼릉 <증언들>집어 드시와요. (죄송해요. 제 세끼줄에따라 막무가내로 떼쓰는;;;) 엄청 재밌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26   좋아요 2 | URL
헐. 라로님 내쳐 <증언들> 집어들었다니. 아으. 우짜든가 짬을 내 달려보도록, 아니 거북이 걸음이라도 걷도록 해볼게요. 더 재밌단 말이죠. 아. 벌써 다 읽으셨을 수도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