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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솔루트 바디 ㅣ 크로스로드 SF컬렉션 2
박민규.배명훈 외 지음 / 해토 / 2008년 9월
평점 :
앱솔루트 바디
박민규 외, 해토, 2008년 9월
앱솔루트 바디
웹진 ‘크로스로드’의 두 번째 발걸음!
[앱솔루트 바디]는 한국 작가들의 창작 SF 단편이 모인 단편집입니다. 국내에서 SF란 장르는 그리 대중화되지 못한 장르이고, 특히 한국 사람이 직접 창작해서 쓰는 SF를 읽는 사람은 더욱 적습니다. 그럼에도 웹진 월간 크로스로드(crossroads.apctp.org)는 3년 동안 꾸준히 웹상에 창작 SF를 게시해왔습니다.
또한, 작년 12월 첫 작품집 [얼터너티브 드림](복거일 외, 황금가지, 2007년 12월)을 낸 지 9개월만에 두 번째 작품집인 [앱솔루트 바디]를 출간합니다. 다른 장르에 비해 독자층이 한정되어 있고, 창작 SF는 극히 적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한계 속에서도 꾸준히 작품을 게재하고 이렇게 정식으로 작품집을 출간하는 모습은 가히 놀랍기까지 합니다.
그동안 장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국내에서는 수준 높은 SF작가들이 탄생할 계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웹진 크로스로드가 한국 창작 SF의 버팀목이 된 것 같습니다. 웹진 크로스로드는 기성 작가의 SF 단편을 싣기도 하지만, 신인 작가들의 SF 단편도 얼마든지 투고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국내 최고 수준의 원고료인 120만 원(단편)의 원고료를 주고 있습니다. 이런 시스템 덕분에 많은 SF 작가 지망생들이 작품을 써서 응모를 하게 되고, 독자들은 새로운 작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들이 나중에는 시장을 만들고, 좋은 SF 작가들을 양성하는 계기가 되겠지요. 먼 훗날, 한국 작가의 장편 SF도 많이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더욱 더 SF 독자들이 한국 창작 SF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고 좋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같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한국 SF의 미래와 가능성을 이 책 한 권으로 짚어볼 수 있습니다. 문단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SF 단편뿐만 아니라,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는 신인 작가도 있습니다. 읽으면서 자신과 취향이 맞는 작품을 찾을 수도 있고, SF소설 특유의 재미도 얼마든지 만끽할 수 있습니다. SF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혹은 SF 작가 지망생이라면 이 책을 관심을 가지고 구입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이 리뷰는 대상이 단편집인 만큼, 작품집 전체의 이야기를 하기엔 각각의 작품 색깔이 판이하게 다른 바, 각 작품별로 감상을 짧게 적겠습니다.
굿 모닝, 존 웨인 ―――박민규
이 책에 첫 번째로 실린 작품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출판사, 2003년 8월), [지구영웅전설](문학동네, 2003년 6월), [카스테라](문학동네, 2005년 6월), [핑퐁](창비, 2006년 9월)을 쓴 박민규 작가의 단편입니다. 박민규는 한겨레문학상과 문학동네작가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문단에 혜성같이 등장한 작가로, 독특한 문단 나누기와 문체가 특징이며,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소재로 글을 쓰는 것 역시 주목을 받았습니다. 등단작인 [지구영웅전설]부터 DC코믹스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장르소설로 볼 만한 환상성이 풍부한 소설을 썼고, 그 뒤에도 SF소설을 문예지에 여러 차례 발표하는 등 장르소설을 접목시킨 글쓰기를 많이 시도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합니다(그동안 박민규는 {깊}, {크로만, 운},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 등 SF로 볼 수 있는 단편을 꾸준히 발표해 왔습니다. 올해 [창작과 비평] 봄호에는 무협을 소재로 한 단편 {절}까지 발표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작품은 그런 박민규가 웹진 크로스로드에 발표한 {굿 모닝, 존 웨인}이라는 글입니다.
먼저 ‘박민규’라는 작가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사람이라면, 이 작품은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박민규가 발표한 다른 단편들에 비해 참신성이나 이야기의 몰입성, 풍자나 재치가 그리 뛰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읽기 괴로운 정도는 아니지만, 무언가 많은 기대를 하고 읽었다가는 실망을 할 수도 있다는 거죠. 하지만 단편집의 처음을 자리하기에는 괜찮습니다. 기대가 크지 않는다면 오히려 꽤 만족하며 읽을 수 있는 무난한 단편이기도 합니다. 이 단편은 냉동과 복제기술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제목과 다르게 역시 한국 작가의 SF라는 느낌도 들게 적혀 있습니다. 냉동인간이라는 소재와 미래 사회를 연결시켜서 암울하게 전개해 나가는 이야기는 중간에 비약이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작가의 풍자적 메시지와 음울한 느낌이 잘 전달되는 글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기대가 커서 그런지 밋밋한 글이라는 느낌이었지만, 두 번째 읽으니 재미있는 구석도 보이는군요. 개인적으로 박민규가 발표한 SF단편은 오히려 저는 {크로만, 운} 같은 작품이 더 좋았습니다. 앞으로 나올 작가의 단편집이 기대되기도 하더군요.
우리 반에서 양호실까지의 거리 ―――서진
서진 작가는 박민규 작가와 마찬가지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로, 제12회 한겨레문학상에서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한겨레출판사, 2007년 7월)라는 작품으로 수상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이 작품은 어딘가 모르게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합니다. 소설 역시 그런 느낌이 강한데, 이는 작가가 택한 ‘가상현실’이라는 소재와 학교라는 소재, 좀비라는 소재들이 그런 느낌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소설마다 그 내용이나 형식에 따라 독자의 머릿속에서 실사로 상상되거나, 애니메이션으로 상상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단편은 후자 쪽에 속했습니다. 무겁고 진중한 작품은 아니지만 몰입도가 굉장히 뛰어나고 읽는데 재미있었습니다.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이었고, 글의 분위기도 매력적이죠. 평범한 SF에서 느낄 수 있는 본연의 재미와는 다른 느낌이지만, 단편 자체의 이야기나 재미는 좋다고 느꼈습니다. 청춘의 감정, 청춘물 같은 감성이 느껴지기도 하는 작품으로 신선한 면도 있었고, 전체적으로 게임의 스테이지 구분도 좋았고, 흡인력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SF 본연의 감각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죠.
앱솔루트 바디 ―――임태운
{앱솔루트 바디}는 이 책의 표제작으로 편지 형식으로 쓰인 작품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 순서대로 보내진 e-mail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근래 들어서 이런 작품들이 많이 늘어나는 터라 구성이 새롭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이 구성 자체에서 오는 재미가 있습니다. 일단, 흡인력이 뛰어납니다. 누군가에게 계속 말을 거는 형식이고 짧게짧게 나누어진 연속된 편지들로 인해 사건이 진행되어 가는 것은 독자의 흥미를 자극합니다. 중간중간에 벌어진 일들을 편지를 통해서 상상해내는 재미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흡인력이 뛰어나고 몰입이 상당해서 빨려드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세계관이나 배경은 조금 이질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와 많이 다른 느낌이고, 우리가 사는 현실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런 세계가 올 것 같진 않습니다. 즉,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세계관으로써 작위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이것은 단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편지 형식으로 쓰인 방식이 위화감을 꽤 줄이고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들어주죠.
{우리 반에서 양호실까지의 거리}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설은 각각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이미지화가 다릅니다. 저에게 이 소설은 만화적인 장면으로 그려졌습니다. 다만, {우리 반에서 양호실까지의 거리}와는 다른 그림체라고 할까요. 문체나 세계관 때문에 만화적이면서도 전혀 다른 그림체로 이미지화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몸에 웜홀이 생긴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초반부는 굉장히 흥미롭게 이야기됩니다. 세계관이 이질적인 느낌이나, 과학적 논리나 근거를 생각하기 보다는 스토리에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작품입니다. 이야기 그 자체에 몰입되어서 빠르게 읽어나간다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글입니다.
우리 사랑 이야기 ―――송경아
1994년부터 소설을 발표한 송경아 작가의 SF단편입니다. 장르소설 번역도 많이 한 작가분이죠. 창비에서 출간된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김보영 외, 박상준 엮음, 창비, 2007년 11월)라는 청소년을 위한 SF 단편집에도 단편을 실었습니다. 다만, 그 책에 실린 송경아님의 단편 {소용돌이}는 SF라기 보다는 환상문학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따스했고요.
반대로 이번 작품집에 실린 {우리 사랑 이야기}는 SF 단편이지만, 오히려 환상문학이었던 {소용돌이}보다 몰입도나 재미가 더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송경아님의 다른 단편들에서 보였던 위트나 따스한 느낌이 이 작품에서는 덜 느껴지고, 일부러 SF를 쓰기 위해서 지나치게 의식을 하고 쓴 작품이 아닌가, 하는 글입니다.
{우리 사랑 이야기}는 ‘복제인간’을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흔한 소재죠. 그만큼 쓰기가 어렵고요. 이 단편의 차별화는 ‘애드돌(addoll)’이라는 설정입니다. 애드돌은 인간복제로 태어난 쌍둥이 형제입니다. 모든 삶이 마치 영화 [트루먼 쇼]처럼 광고로 뒤덮여 있죠. 이 설정은 기존의 복제인간과는 다른 관점이라 흥미롭고 재미있을 것 같지만, 이야기는 소재를 많이 살리지는 못한 느낌입니다. 일기 형식으로 쓰인 방법은 이야기에 몰입을 더해주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작위적인 느낌이나 과장된 느낌을 줍니다.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보다는 작위적인 구성인 듯한 느낌을 줍니다. 미치라는 캐릭터도 딱 맞게 ‘실미증’을 갖고 있다는 점도 그렇고 벌어지는 사건도 흥미롭기보다는 사건을 만들려고 한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여 재미있게 읽어나가지 못합니다.
즉, 예측할 수 있는 이야기라도 즐기면서 읽게 되는 소설과 뻔히 보이거나 흥미가 가지 않아 심드렁하게 읽게 되는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은 후자 쪽에 치우친 작품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재미있어 보였던 소재라 흥미롭게 읽어나가게 되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 아쉬움을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안정적이었지만, 그게 장점이 아니라 단점으로 작용한 것 같네요.
어떤 미운 오리 새끼의 죽음 ―――류형석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김재한 외, 시작, 2008년 8월)에 {목소리}라는 단편을 게재했던 류형석 작가의 작품, {어떤 미운 오리 새끼의 죽음}입니다. 이 작품은 {목소리}보다 이전에 쓰인 작품입니다. 작품 배경은 유전형으로 사람이 분류되는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어찌 보면 흔한 상상력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장점은 그 상상력이 아니라, 뛰어난 감정 묘사에 있습니다. 읽으면서 캐릭터에 감정이 이입되어 같이 분노하는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래서 다 읽고 나서도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소설이었습니다.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느낌이 잘 살아있다고 할까요. 예고된 파멸을 향해 치닫는 듯한 글이고, 다 읽고 나서는 씁쓸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환상진화가 ―――은림
그동안 환상문학 단편집인 [윈드 드리머](방지나 외, 명상, 2000년 5월), [환상서고](김유정 외, 드림필드, 2001년 12월),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김이환 외, 황금가지, 2008년 7월)에 각각 작품을 싣고 장르 월간지 [판타스틱]에도 환상문학인 {할티노}를 실었던 작가 은림의 SF 단편입니다. 이 소설은 플랜 헌터(plant hunter)가 주인공인 작품입니다. 식물이면서 인간의 형태로 인간을 양분으로 삼는 플랜(plant)이 있는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당시 웹진 크로스로드에 중편으로 실렸던 글로써 꽤 분량이 많은 편입니다. 그럼에도 이야기가 지루하기보다는 순식간에 읽어버릴 정도로 잘 쓰인 작품입니다. 사실 이런 식물 형태의 새로운 종이 나타나는 설정 자체는 색다른 것이 아닙니다. 진행되는 이야기나 설정들이 새로운 것도 없고요. ‘돔’ 안에 사는 사람들이나, 몇 번이고 재생하는 사람들의 설정들은 진부한 편이지요. 하지만 이 소설은 차분한 어조로 진행되면서 시종일관 작품을 이끌어가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섬세한 묘사들과 기묘한 이야기들이 독자를 사로잡는 매력으로 작용합니다.
조개를 읽어요 ―――배명훈
[누군가를 만났어](배명훈ㆍ김보영ㆍ박애진, 행복한책읽기, 2007년 1월),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 등에 각각 단편을 수록한 배명훈 작가의 단편입니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한국 SF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배명훈 작가의 이 단편은, 다른 SF 단편들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조개의 언어라는 소재부터가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죠. 소재에서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재미를 줍니다. 그가 쓰는 글은 이렇게 단순히 인간이 아닌 고래나 조개 같은 생물들에게까지 그 시선이 미칩니다. 거기서 파생되는 이야기는 언제나 새로운 느낌을 전해주는 것이죠.
조개의 언어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 소설을 읽으면, 조개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소재 자체가 이 소설이 갖고 있는 가장 강력한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개의 언어를 읽는다는 발상부터 재미있죠. 조개에 새겨진 단어를 읽는 연구자가 된 남자의 사연이 차분하게 그려져 있어서 흥미롭게 읽힙니다.
이 소설은 1인칭 화자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소설의 대부분이 하나의 따옴표 안에 이루어진 것도 인상적이죠. 그만큼 읽기 편하고 자연스럽게 읽어나가게 됩니다. 흡인력이 좋고, 능청스러운 화자의 입담이 상당합니다.
집사 ―――박애진
이 소설은 특이하게 로봇이 화자로 등장합니다. 이름이 ‘집사’인, 이름 그대로 집안에서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 하는 로봇의 이야기는 흥미롭지는 않지만, 독특합니다. 로봇 화자의 시선으로 보이는 인간들의 일상은 건조하고 남루하지만 그 사이에 보이는 절절한 감정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로봇의 무감정한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더욱 그런 점들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겠지요. 어떤 대중적인 서사나 이야기가 있는 단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로봇의 시점으로 본 인간의 어떤 삶, 외로움, 소외감 등이 잘 그려진 작품입니다.
고래의 꿈 ―――이준성
이 단편집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단편 중 하나입니다. 이 소설은 우주를 배경으로 우주 공간에 나타나는 거대한 빛고래를 포획하는 이야기입니다. 광속으로 달리는 우주선에 탄 주인공과 지구와의 시간 차이가 벌어진다는 것을 이용한 서정적인 이야기가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빛고래는 우주공간에 나타난 유일한 생명체이며, 공간이동을 하는 신비한 생명체로 아직까지 전혀 자세한 것이 밝혀지지 않은 생명체죠. 인간들은 빛고래를 잡아 공간이동의 비밀을 밝혀낼 생각을 하며 우주선으로 쫓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우주선 안에서 에너지 분배를 하는 일을 맡고 있죠.
이 작품은 평범하게 진행되는 이야기가 마침내 빛고래와 조우하면서 여러 가지 비밀들이 밝혀지고 이야기가 급전환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가슴 깊이 감동이 밀려오고요. 재미있게 읽은 글입니다. 웹진 크로스로드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작가인데,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기대가 되는군요.
플라스틱 프린세스 ―――유서하
그렇게 불필요한 것을 모두 없애 앙상해진 소설을 작가가 레고 블럭처럼 재배치해 만들어내는 형식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플라스틱 프린세스}는 그 이상처럼 충분히 미니멀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의도로 씌어졌어요. 1년 단위의 날짜로 구분된 챕터들이 모두 ‘안녕’이라는 인사로 시작하고, ‘너’에게 하지 못한 말을 속삭이고,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로 끝나고.
―――{유서하 인터뷰: 스파게티, 리뉴얼, 플라스틱 프린세스}(거울 60호, 기획) 중에서
이 작품은 편지 형식으로 쓰인 작품입니다. 따라서 서사가 적고 대신에 감정 묘사가 주를 이루죠. 그것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실험적이며 강렬한 느낌이 듭니다. 글이 굉장히 세심하게 정제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해서 전체적으로 깔끔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고요. 이 작품의 포인트는 이렇게 이야기보다는 글의 형식이나 1인칭의 화자가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방식에 있다고 보입니다. 감상적이고 슬프면서도 어딘가 기괴하게 비틀어진 시점으로 관조하게 되는 글입니다.
꿈의 입자 ―――박성환
이번 작품집에서 가장 읽기 힘든 글 중에 하나입니다. 박성환 작가는 제1회 과학기술 창작문예에서 {레디메이드 보살}이라는 뛰어난 작품으로 단편 부문을 수상한 작가입니다.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에 표제작을 싣기도 했습니다. 이 단편은 ‘꿈’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친절하게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가 혼란스러울 여지가 있습니다. 천천히 생각하지 않고 읽으면 내용 이해가 쉽지 않을 정도로 난해한 면이 있죠. 하지만 곰곰이 작품을 곱씹을수록 근사한 느낌이 드는 글이기도 합니다.
굉장히 담담하고 차분한 문장들이 인상적인 글이고, 몽환적인 분위기 역시 멋집니다. 문자의 순서를 바꾼다든지 해서 효과를 주는 부분들도 좋군요. 전체적으로 잘 짜인 작품이고 꽉 찬 느낌이라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구의 아이들에게 ―――정희자
{지구의 아이들에게}는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좋을 편안한 글입니다. 강렬한 이야기는 없지만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애틋한 느낌을 줍니다. 이야기의 설정은 마치 현실의 은유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습니다.
“최근 있었던 지구 방문이 무산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일곱 번째 방문 시도였다고 들었는데요.” (398쪽)
이런 부분들은 마치 티벳, 달라이 라마를 연상케 하는 부분들이라 글의 매력이 되고 재미를 주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데 사건의 진상에 대해 알게 되면서 소설의 재미가 더해집니다. 소설에서 ‘나’는 잡지사 기자로 케촉 주석을 인터뷰하게 됩니다. 지구와 메르윈의 관계. 지구인의 후손. 여기에 얽힌 이야기들은 굉장히 흥미롭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시킵니다.
이제 세 번째 발걸음을 기대하며
이렇게 웹진 크로스로드에서 꾸준히 작품집을 낸다는 사실은 굉장히 고무적입니다. 문단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비롯해 기존에 인정받은 SF 작가 그리고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인 작가까지 함께 작품집에 포함된다는 것은 웹진 크로스로드의 단편집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기획이죠. 단편집의 특성상 단편마다 취향이 많이 갈리고 작품의 편차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SF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구입하기를 권합니다. 특히, 이렇게 앞으로 창작 SF를 발전시킬 유일한 장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앞으로의 한국 SF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한 권쯤 구입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모든 작품이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분명 좋은 SF 단편들이 많이 들어 있고, 가능성 있는 신인과 문단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쓴 색다른 SF를 맛볼 수 있다는 장점으로 무장한 책입니다. 서술방식이 편향된다는 느낌은 있지만, 흡인력 있고 매력적인 이야기 전개를 볼 수 있고, 하드하지는 않지만 SF라는 느낌을 물씬 느낄 수 있는 단편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먼 훗날, 한국 SF는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작품집이 쌓이고 쌓일수록 멋진 작가들과 작품을 만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 다음에 나올 세 번째 발걸음을 기대해봅니다. 어떤 보석 같은 작가가 처음 자신의 솜씨를 뽐낼지, 또 어떤 기성작가가 우수한 실력을 선보일지를.
분명 한 걸음씩 내딛을수록 발걸음은 빨라지고, 마침내는 하늘 높이 도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작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