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솔루트 바디 크로스로드 SF컬렉션 2
박민규.배명훈 외 지음 / 해토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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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솔루트 바디
박민규 외, 해토, 2008년 9월

앱솔루트 바디
웹진 ‘크로스로드’의 두 번째 발걸음!


  [앱솔루트 바디]는 한국 작가들의 창작 SF 단편이 모인 단편집입니다. 국내에서 SF란 장르는 그리 대중화되지 못한 장르이고, 특히 한국 사람이 직접 창작해서 쓰는 SF를 읽는 사람은 더욱 적습니다. 그럼에도 웹진 월간 크로스로드(crossroads.apctp.org)는 3년 동안 꾸준히 웹상에 창작 SF를 게시해왔습니다.
   또한, 작년 12월 첫 작품집 [얼터너티브 드림](복거일 외, 황금가지, 2007년 12월)을 낸 지 9개월만에 두 번째 작품집인 [앱솔루트 바디]를 출간합니다. 다른 장르에 비해 독자층이 한정되어 있고, 창작 SF는 극히 적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한계 속에서도 꾸준히 작품을 게재하고 이렇게 정식으로 작품집을 출간하는 모습은 가히 놀랍기까지 합니다.

   그동안 장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국내에서는 수준 높은 SF작가들이 탄생할 계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웹진 크로스로드가 한국 창작 SF의 버팀목이 된 것 같습니다. 웹진 크로스로드는 기성 작가의 SF 단편을 싣기도 하지만, 신인 작가들의 SF 단편도 얼마든지 투고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국내 최고 수준의 원고료인 120만 원(단편)의 원고료를 주고 있습니다. 이런 시스템 덕분에 많은 SF 작가 지망생들이 작품을 써서 응모를 하게 되고, 독자들은 새로운 작가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들이 나중에는 시장을 만들고, 좋은 SF 작가들을 양성하는 계기가 되겠지요. 먼 훗날, 한국 작가의 장편 SF도 많이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더욱 더 SF 독자들이 한국 창작 SF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고 좋은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같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한국 SF의 미래와 가능성을 이 책 한 권으로 짚어볼 수 있습니다. 문단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SF 단편뿐만 아니라,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는 신인 작가도 있습니다. 읽으면서 자신과 취향이 맞는 작품을 찾을 수도 있고, SF소설 특유의 재미도 얼마든지 만끽할 수 있습니다. SF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혹은 SF 작가 지망생이라면 이 책을 관심을 가지고 구입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이 리뷰는 대상이 단편집인 만큼, 작품집 전체의 이야기를 하기엔 각각의 작품 색깔이 판이하게 다른 바, 각 작품별로 감상을 짧게 적겠습니다.

    굿 모닝, 존 웨인 ―――박민규

   이 책에 첫 번째로 실린 작품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출판사, 2003년 8월), [지구영웅전설](문학동네, 2003년 6월), [카스테라](문학동네, 2005년 6월), [핑퐁](창비, 2006년 9월)을 쓴 박민규 작가의 단편입니다. 박민규는 한겨레문학상과 문학동네작가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문단에 혜성같이 등장한 작가로, 독특한 문단 나누기와 문체가 특징이며,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소재로 글을 쓰는 것 역시 주목을 받았습니다. 등단작인 [지구영웅전설]부터 DC코믹스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장르소설로 볼 만한 환상성이 풍부한 소설을 썼고, 그 뒤에도 SF소설을 문예지에 여러 차례 발표하는 등 장르소설을 접목시킨 글쓰기를 많이 시도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합니다(그동안 박민규는 {깊}, {크로만, 운},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 등 SF로 볼 수 있는 단편을 꾸준히 발표해 왔습니다. 올해 [창작과 비평] 봄호에는 무협을 소재로 한 단편 {절}까지 발표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작품은 그런 박민규가 웹진 크로스로드에 발표한 {굿 모닝, 존 웨인}이라는 글입니다.
   먼저 ‘박민규’라는 작가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사람이라면, 이 작품은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박민규가 발표한 다른 단편들에 비해 참신성이나 이야기의 몰입성, 풍자나 재치가 그리 뛰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읽기 괴로운 정도는 아니지만, 무언가 많은 기대를 하고 읽었다가는 실망을 할 수도 있다는 거죠. 하지만 단편집의 처음을 자리하기에는 괜찮습니다. 기대가 크지 않는다면 오히려 꽤 만족하며 읽을 수 있는 무난한 단편이기도 합니다. 이 단편은 냉동과 복제기술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제목과 다르게 역시 한국 작가의 SF라는 느낌도 들게 적혀 있습니다. 냉동인간이라는 소재와 미래 사회를 연결시켜서 암울하게 전개해 나가는 이야기는 중간에 비약이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작가의 풍자적 메시지와 음울한 느낌이 잘 전달되는 글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기대가 커서 그런지 밋밋한 글이라는 느낌이었지만, 두 번째 읽으니 재미있는 구석도 보이는군요. 개인적으로 박민규가 발표한 SF단편은 오히려 저는 {크로만, 운} 같은 작품이 더 좋았습니다. 앞으로 나올 작가의 단편집이 기대되기도 하더군요.

   우리 반에서 양호실까지의 거리 ―――서진

   서진 작가는 박민규 작가와 마찬가지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로, 제12회 한겨레문학상에서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한겨레출판사, 2007년 7월)라는 작품으로 수상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이 작품은 어딘가 모르게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합니다. 소설 역시 그런 느낌이 강한데, 이는 작가가 택한 ‘가상현실’이라는 소재와 학교라는 소재, 좀비라는 소재들이 그런 느낌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소설마다 그 내용이나 형식에 따라 독자의 머릿속에서 실사로 상상되거나, 애니메이션으로 상상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단편은 후자 쪽에 속했습니다. 무겁고 진중한 작품은 아니지만 몰입도가 굉장히 뛰어나고 읽는데 재미있었습니다.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이었고, 글의 분위기도 매력적이죠. 평범한 SF에서 느낄 수 있는 본연의 재미와는 다른 느낌이지만, 단편 자체의 이야기나 재미는 좋다고 느꼈습니다. 청춘의 감정, 청춘물 같은 감성이 느껴지기도 하는 작품으로 신선한 면도 있었고, 전체적으로 게임의 스테이지 구분도 좋았고, 흡인력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SF 본연의 감각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죠.

   앱솔루트 바디 ―――임태운

   {앱솔루트 바디}는 이 책의 표제작으로 편지 형식으로 쓰인 작품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 순서대로 보내진 e-mail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근래 들어서 이런 작품들이 많이 늘어나는 터라 구성이 새롭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이 구성 자체에서 오는 재미가 있습니다. 일단, 흡인력이 뛰어납니다. 누군가에게 계속 말을 거는 형식이고 짧게짧게 나누어진 연속된 편지들로 인해 사건이 진행되어 가는 것은 독자의 흥미를 자극합니다. 중간중간에 벌어진 일들을 편지를 통해서 상상해내는 재미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흡인력이 뛰어나고 몰입이 상당해서 빨려드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세계관이나 배경은 조금 이질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와 많이 다른 느낌이고, 우리가 사는 현실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런 세계가 올 것 같진 않습니다. 즉,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세계관으로써 작위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이것은 단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편지 형식으로 쓰인 방식이 위화감을 꽤 줄이고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들어주죠.
   {우리 반에서 양호실까지의 거리}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설은 각각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이미지화가 다릅니다. 저에게 이 소설은 만화적인 장면으로 그려졌습니다. 다만, {우리 반에서 양호실까지의 거리}와는 다른 그림체라고 할까요. 문체나 세계관 때문에 만화적이면서도 전혀 다른 그림체로 이미지화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몸에 웜홀이 생긴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초반부는 굉장히 흥미롭게 이야기됩니다. 세계관이 이질적인 느낌이나, 과학적 논리나 근거를 생각하기 보다는 스토리에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작품입니다. 이야기 그 자체에 몰입되어서 빠르게 읽어나간다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글입니다.

   우리 사랑 이야기 ―――송경아

   1994년부터 소설을 발표한 송경아 작가의 SF단편입니다. 장르소설 번역도 많이 한 작가분이죠. 창비에서 출간된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김보영 외, 박상준 엮음, 창비, 2007년 11월)라는 청소년을 위한 SF 단편집에도 단편을 실었습니다. 다만, 그 책에 실린 송경아님의 단편 {소용돌이}는 SF라기 보다는 환상문학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따스했고요.
   반대로 이번 작품집에 실린 {우리 사랑 이야기}는 SF 단편이지만, 오히려 환상문학이었던 {소용돌이}보다 몰입도나 재미가 더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송경아님의 다른 단편들에서 보였던 위트나 따스한 느낌이 이 작품에서는 덜 느껴지고, 일부러 SF를 쓰기 위해서 지나치게 의식을 하고 쓴 작품이 아닌가, 하는 글입니다.
   {우리 사랑 이야기}는 ‘복제인간’을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흔한 소재죠. 그만큼 쓰기가 어렵고요. 이 단편의 차별화는 ‘애드돌(addoll)’이라는 설정입니다. 애드돌은 인간복제로 태어난 쌍둥이 형제입니다. 모든 삶이 마치 영화 [트루먼 쇼]처럼 광고로 뒤덮여 있죠. 이 설정은 기존의 복제인간과는 다른 관점이라 흥미롭고 재미있을 것 같지만, 이야기는 소재를 많이 살리지는 못한 느낌입니다. 일기 형식으로 쓰인 방법은 이야기에 몰입을 더해주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작위적인 느낌이나 과장된 느낌을 줍니다.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보다는 작위적인 구성인 듯한 느낌을 줍니다. 미치라는 캐릭터도 딱 맞게 ‘실미증’을 갖고 있다는 점도 그렇고 벌어지는 사건도 흥미롭기보다는 사건을 만들려고 한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여 재미있게 읽어나가지 못합니다.
  즉, 예측할 수 있는 이야기라도 즐기면서 읽게 되는 소설과 뻔히 보이거나 흥미가 가지 않아 심드렁하게 읽게 되는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은 후자 쪽에 치우친 작품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재미있어 보였던 소재라 흥미롭게 읽어나가게 되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 아쉬움을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안정적이었지만, 그게 장점이 아니라 단점으로 작용한 것 같네요.

   어떤 미운 오리 새끼의 죽음 ―――류형석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김재한 외, 시작, 2008년 8월)에 {목소리}라는 단편을 게재했던 류형석 작가의 작품, {어떤 미운 오리 새끼의 죽음}입니다. 이 작품은 {목소리}보다 이전에 쓰인 작품입니다. 작품 배경은 유전형으로 사람이 분류되는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어찌 보면 흔한 상상력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장점은 그 상상력이 아니라, 뛰어난 감정 묘사에 있습니다. 읽으면서 캐릭터에 감정이 이입되어 같이 분노하는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래서 다 읽고 나서도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소설이었습니다.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느낌이 잘 살아있다고 할까요. 예고된 파멸을 향해 치닫는 듯한 글이고, 다 읽고 나서는 씁쓸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환상진화가 ―――은림

   그동안 환상문학 단편집인 [윈드 드리머](방지나 외, 명상, 2000년 5월), [환상서고](김유정 외, 드림필드, 2001년 12월),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김이환 외, 황금가지, 2008년 7월)에 각각 작품을 싣고 장르 월간지 [판타스틱]에도 환상문학인 {할티노}를 실었던 작가 은림의 SF 단편입니다. 이 소설은 플랜 헌터(plant hunter)가 주인공인 작품입니다. 식물이면서 인간의 형태로 인간을 양분으로 삼는 플랜(plant)이 있는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당시 웹진 크로스로드에 중편으로 실렸던 글로써 꽤 분량이 많은 편입니다. 그럼에도 이야기가 지루하기보다는 순식간에 읽어버릴 정도로 잘 쓰인 작품입니다. 사실 이런 식물 형태의 새로운 종이 나타나는 설정 자체는 색다른 것이 아닙니다. 진행되는 이야기나 설정들이 새로운 것도 없고요. ‘돔’ 안에 사는 사람들이나, 몇 번이고 재생하는 사람들의 설정들은 진부한 편이지요. 하지만 이 소설은 차분한 어조로 진행되면서 시종일관 작품을 이끌어가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섬세한 묘사들과 기묘한 이야기들이 독자를 사로잡는 매력으로 작용합니다.

   조개를 읽어요 ―――배명훈

   [누군가를 만났어](배명훈ㆍ김보영ㆍ박애진, 행복한책읽기, 2007년 1월),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 등에 각각 단편을 수록한 배명훈 작가의 단편입니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한국 SF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배명훈 작가의 이 단편은, 다른 SF 단편들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조개의 언어라는 소재부터가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죠. 소재에서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재미를 줍니다. 그가 쓰는 글은 이렇게 단순히 인간이 아닌 고래나 조개 같은 생물들에게까지 그 시선이 미칩니다. 거기서 파생되는 이야기는 언제나 새로운 느낌을 전해주는 것이죠.
   조개의 언어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 소설을 읽으면, 조개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소재 자체가 이 소설이 갖고 있는 가장 강력한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개의 언어를 읽는다는 발상부터 재미있죠. 조개에 새겨진 단어를 읽는 연구자가 된 남자의 사연이 차분하게 그려져 있어서 흥미롭게 읽힙니다.
   이 소설은 1인칭 화자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소설의 대부분이 하나의 따옴표 안에 이루어진 것도 인상적이죠. 그만큼 읽기 편하고 자연스럽게 읽어나가게 됩니다. 흡인력이 좋고, 능청스러운 화자의 입담이 상당합니다.

   집사 ―――박애진

   이 소설은 특이하게 로봇이 화자로 등장합니다. 이름이 ‘집사’인, 이름 그대로 집안에서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 하는 로봇의 이야기는 흥미롭지는 않지만, 독특합니다. 로봇 화자의 시선으로 보이는 인간들의 일상은 건조하고 남루하지만 그 사이에 보이는 절절한 감정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로봇의 무감정한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더욱 그런 점들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겠지요. 어떤 대중적인 서사나 이야기가 있는 단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로봇의 시점으로 본 인간의 어떤 삶, 외로움, 소외감 등이 잘 그려진 작품입니다.
   고래의 꿈 ―――이준성

  이 단편집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단편 중 하나입니다. 이 소설은 우주를 배경으로 우주 공간에 나타나는 거대한 빛고래를 포획하는 이야기입니다. 광속으로 달리는 우주선에 탄 주인공과 지구와의 시간 차이가 벌어진다는 것을 이용한 서정적인 이야기가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빛고래는 우주공간에 나타난 유일한 생명체이며, 공간이동을 하는 신비한 생명체로 아직까지 전혀 자세한 것이 밝혀지지 않은 생명체죠. 인간들은 빛고래를 잡아 공간이동의 비밀을 밝혀낼 생각을 하며 우주선으로 쫓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우주선 안에서 에너지 분배를 하는 일을 맡고 있죠.
  이 작품은 평범하게 진행되는 이야기가 마침내 빛고래와 조우하면서 여러 가지 비밀들이 밝혀지고 이야기가 급전환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가슴 깊이 감동이 밀려오고요. 재미있게 읽은 글입니다. 웹진 크로스로드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작가인데,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기대가 되는군요.

   플라스틱 프린세스 ―――유서하

   그렇게 불필요한 것을 모두 없애 앙상해진 소설을 작가가 레고 블럭처럼 재배치해 만들어내는 형식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플라스틱 프린세스}는 그 이상처럼 충분히 미니멀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의도로 씌어졌어요. 1년 단위의 날짜로 구분된 챕터들이 모두 ‘안녕’이라는 인사로 시작하고, ‘너’에게 하지 못한 말을 속삭이고,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로 끝나고.
―――{유서하 인터뷰: 스파게티, 리뉴얼, 플라스틱 프린세스}(거울 60호, 기획) 중에서

   이 작품은 편지 형식으로 쓰인 작품입니다. 따라서 서사가 적고 대신에 감정 묘사가 주를 이루죠. 그것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실험적이며 강렬한 느낌이 듭니다. 글이 굉장히 세심하게 정제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해서 전체적으로 깔끔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고요. 이 작품의 포인트는 이렇게 이야기보다는 글의 형식이나 1인칭의 화자가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방식에 있다고 보입니다. 감상적이고 슬프면서도 어딘가 기괴하게 비틀어진 시점으로 관조하게 되는 글입니다.

   꿈의 입자 ―――박성환

   이번 작품집에서 가장 읽기 힘든 글 중에 하나입니다. 박성환 작가는 제1회 과학기술 창작문예에서 {레디메이드 보살}이라는 뛰어난 작품으로 단편 부문을 수상한 작가입니다.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에 표제작을 싣기도 했습니다. 이 단편은 ‘꿈’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친절하게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가 혼란스러울 여지가 있습니다. 천천히 생각하지 않고 읽으면 내용 이해가 쉽지 않을 정도로 난해한 면이 있죠. 하지만 곰곰이 작품을 곱씹을수록 근사한 느낌이 드는 글이기도 합니다.
   굉장히 담담하고 차분한 문장들이 인상적인 글이고, 몽환적인 분위기 역시 멋집니다. 문자의 순서를 바꾼다든지 해서 효과를 주는 부분들도 좋군요. 전체적으로 잘 짜인 작품이고 꽉 찬 느낌이라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구의 아이들에게 ―――정희자

   {지구의 아이들에게}는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좋을 편안한 글입니다. 강렬한 이야기는 없지만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애틋한 느낌을 줍니다. 이야기의 설정은 마치 현실의 은유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습니다.
   “최근 있었던 지구 방문이 무산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일곱 번째 방문 시도였다고 들었는데요.” (398쪽)
   이런 부분들은 마치 티벳, 달라이 라마를 연상케 하는 부분들이라 글의 매력이 되고 재미를 주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데 사건의 진상에 대해 알게 되면서 소설의 재미가 더해집니다. 소설에서 ‘나’는 잡지사 기자로 케촉 주석을 인터뷰하게 됩니다. 지구와 메르윈의 관계. 지구인의 후손. 여기에 얽힌 이야기들은 굉장히 흥미롭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시킵니다.

   이제 세 번째 발걸음을 기대하며

   이렇게 웹진 크로스로드에서 꾸준히 작품집을 낸다는 사실은 굉장히 고무적입니다. 문단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비롯해 기존에 인정받은 SF 작가 그리고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인 작가까지 함께 작품집에 포함된다는 것은 웹진 크로스로드의 단편집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기획이죠. 단편집의 특성상 단편마다 취향이 많이 갈리고 작품의 편차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SF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구입하기를 권합니다. 특히, 이렇게 앞으로 창작 SF를 발전시킬 유일한 장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앞으로의 한국 SF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한 권쯤 구입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모든 작품이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분명 좋은 SF 단편들이 많이 들어 있고, 가능성 있는 신인과 문단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쓴 색다른 SF를 맛볼 수 있다는 장점으로 무장한 책입니다. 서술방식이 편향된다는 느낌은 있지만, 흡인력 있고 매력적인 이야기 전개를 볼 수 있고, 하드하지는 않지만 SF라는 느낌을 물씬 느낄 수 있는 단편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먼 훗날, 한국 SF는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작품집이 쌓이고 쌓일수록 멋진 작가들과 작품을 만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제 다음에 나올 세 번째 발걸음을 기대해봅니다. 어떤 보석 같은 작가가 처음 자신의 솜씨를 뽐낼지, 또 어떤 기성작가가 우수한 실력을 선보일지를.
   분명 한 걸음씩 내딛을수록 발걸음은 빨라지고, 마침내는 하늘 높이 도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작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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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콘택트 Nobless Club 7
박치형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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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콘택트




  『로스트 콘택트』는 노블레스 클럽에서 7번째로 나온 소설입니다. 작품의 소재는 매우 독특합니다. 독도를 노리고 일본의 명목상 반란 잠수함 4대가 동해를 침범합니다. 여기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지요. 독도를 둘러싼 잠수함들의 전쟁이라는 소재는 매우 잘 포착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노블레스클럽이 단순히 판타지 소설만 출간하는 곳이 아니고 다양한 장르의 책을 내겠다는 의지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로스트 콘택트』는 그러나 작품의 재미라든지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독서를 했다는 느낌을 받기 보다는 아쉬운 점들이 더 눈에 많이 띄는 작품입니다. 작가분이 한양대학교 해양환경학과 수중음향 석사라고 되어 있는데, 따라서 수중음향 부분에서는 진가를 발휘할지는 모르나, 소설은 굉장히 초보가 쓴 느낌이 많이 나는 작품이었습니다.

  먼저 주제에 집착하면서 이야기를 흐린 것 같습니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보면 주제를 생각하지 말라고 적혀 있지요. 소설을 쓸 때 작가가 일단 자기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만 생각하면 글은 고리타분해지고 단순해지고 이야기의 힘을 잃는 법이니까요. 이야기 자체에서 주제가 형성되게 써야 합니다. ‘사랑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대신 죽는 ‘사랑’ 그 자체를 보여주어야 하는 법이지요. 소설은 주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일본이 독도를 노리는 진짜 이유는 독도 해저의 지하자원, 메탄 하이드레이트에 있으며, 이를 위해서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작가 소개란에 버젓이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 말한 주제를 소설로 써서, 소설 속에서 캐릭터들의 대사로 아무리 강조한다 한들, 이미 이렇게 요약 가능한 이야기를 굳이 소설로 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떤 작품이든 작가가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작가는 글로 말합니다. 독자가 글을 읽고 스스로 느껴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작가가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 교훈적인 이야기를 독자에게 강조하고 주입하는데 급급합니다. 이러니 독자가 이야기를 읽는 것인지, 연설문을 읽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소설은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논설문 같은 게 아닙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독자가 몰입해서 즐길 수 있는 이야기여야 합니다. 이 소설은 읽는 내내 처음 작가의 의도를 말하기 위해서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소설을 닮은 어설픈 모형 같은 느낌이 강했습니다.

  이 소설이 모형 같은 느낌은 바로 ‘클리셰’들로 인해 일어납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클리셰의 향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사들은 경직되어 있고, 뻔하고 작위적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의 목소리라고 보기에는 80년대 드라마 속 대사 같이 느껴지는 진부한 대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대사도 톡톡 튀고 개성 있는 대사가 없습니다. 독자는 새로운 이야기를 읽는 게 아니라, 과거의 유물을 바라보는 느낌입니다.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친 문장들 속에서 수사들은 전부 낡고 오래된 것뿐입니다. 평범하고 진부한 문장들 밖에 없어 독자는 쉽게 피로해지고 읽는 재미가 없습니다. 문장은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고 전형적입니다. 또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설명적이기도 합니다. 항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수재들이 다니는 대학이라는 식으로 직접적인 설명 밖에 없습니다.

  구성 역시 너무 뻔히 들여다보여서 읽는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소설은 처음 진행부터 어떤 식의 과정을 거쳐 결국 결말이 어떻게 될지 뻔히 짐작됩니다. 그 동안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쓰인 기초적인 구성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부한 클리셰로 만들어진 소설을 독자가 새롭게 읽을 여지가 없습니다. 재미를 느낄 수도 없지요. 하나씩 문제가 발생하고 주인공이 결국 잠수함의 함장이 되어서 위기를 물리친다는 구성은 지나치게 단순합니다. 차라리 잠수함의 전투 장면부터 시작해서 새롭게 이야기를 엮어나갔다면 더 낫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국 앞의 이야기들은 기존에 수많은 이야기들의 클리셰에 불과하니까요. 있으나 마나 별다른 차이가 없지요. 캐릭터들도 개성이 있는 게 아니라 전부 딱딱하고 단순합니다. 정말 오래된 영화 속 캐릭터들 같지요. 대사들도 너무 진부하기 때문에 오히려 읽는 사람이 창피한 느낌마저 받습니다.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지요.

  이런 점들뿐만 아니라 상황 자체도 독자를 납득시키기 힘듭니다. 여러 가지 정황이 지나치게 부자연스럽습니다. 이는 처음에 말했듯이 작가가 주제에 집착하여 이야기의 개연성이나 재미는 생각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주제를 전달할 수 있을까에 온 신경을 쏟은 탓입니다. 이렇게 만들면 내 말이 전달되겠지, 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그냥 처음에 작가 소개만 봐도 전달되는 내용이고, 이야기는 진부하고 흥미가 없고 지루하기까지 하니, 직접 구입하는 독자들이라면 돈만 아까울 것입니다. 이런 소설보다 차라리 메탄 하이드레이트에 관해서 자세하게 써놓은 인터넷 글이나 동영상이 훨씬 효과적이겠지요. 아마 그것이 인터넷 곳곳에 퍼지는 파급력이 이 소설보다는 몇 배로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군비 증강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소설은 결국 소설 본연의 자세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소설의 주제마저도 전달시키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소재는 좋았습니다. 잠수함들의 전투도 몇몇 씬에서는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이 소재가 좋으면 좋을 수록 이 소재를 살리지 못한 이 소설이 참으로 아쉽게만 느껴집니다. 조금 더 소설을 읽어보고 구성을 어떻게 잡고, 어떤 식으로 캐릭터를 만들고,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 되어서 두고두고 회자될 수 있는지 생각했다면 더 좋은 글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주제보다 먼저 이야기에 집중하면, 주제는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놀아들고 독자가 스스로 파악해내게 됩니다. 작가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 소설을 도구화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결국 독자는 소설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책을 덮게 되겠지요.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주제까지 체득할수록 그 주제는 독자에게 선명하게 기억되고 자기 스스로 발굴한 주제인 만큼 더 다양한 관점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소설은 너무 드러내고 직접 말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육성이 소설 전체를 뒤덮고 있어서 소설 자체의 매력이 전혀 살아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독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교훈을 들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요. 먼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주십시오. 그러면 독자는 재미있게 읽고 나서 만족감 속에서 주제 또한 느끼게 될 테니까요. 재미있는 이야기는 독자의 상상을 넘어서야 합니다. 독자가 예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지 않고 항상 다르게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는 재미있게 느끼지 않습니다. 모든 게 예상한대로만 가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요. 결국 안 봐도 무방한데 말입니다. 작가분이 독도에 관한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 그건 작가 소개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캐릭터들이 이게 정말 중요하다. 이것 때문이다. 이렇게 몇 번이고 되뇌이고 반복해서 주입시키고 강요할 필요는 없겠지요. 작가분이 소재를 정하고 나서는 어떻게 주제를 전달할까를 생각하기 이전에 어떻게 하면 독자들에게 정말 끝내주게 재미있는 소설을 들려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노블레스클럽이 단순히 판타지 소설에서 벗어나 이런 소재까지 발굴하려는 노력은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책이 나오기 전까지 편집자도 작가와 함께 좀 더 만족스러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이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으로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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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새 - 상 - 나무를 죽이는 화랑 Nobless Club 8
김근우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피리새  

  * 출판사 : 로크미디어 
  * 총 페이지 수 : 959쪽 
  * 권 수 : 2권 
  * 꼭 읽어야 할 사람들 : 판타지 소설을 읽고 싶은데 읽을 만한 작품이 없다는 사람들. 노블레스 클럽에 기대를 갖고 괜찮은 작품을 찾던 사람들. 오랜만에 재미있는 장르 판타지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 
  * 작품의 끓는 점 : 75쪽, “가람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검을 뽑았다. 동해용왕의 신력神力이 깃들어 있다는, 그래서 세상에 베지 못할 것이 없다는 화랑신검이 빛을 뿜었다.” 

  로크미디어의 노블레스클럽에서 처음으로 두 권으로 나온 『피리새』는 소재 면에서도 독특합니다. 바로 한국적인 배경과 소재를 활용한 장르 판타지입니다. 이 소설은 이제는 다양하게 해석되고 변용되어서 유명할 수밖에 없는 ‘바리데기’ 혹은 ‘바리공주’ 신화를 원형으로 적힌 소설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소설의 기본적인 뼈대는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과연 재미있을까요? 바로 대답하자면 네,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노블레스클럽 전체를 통틀어 봐도 재미있는 소설 가운데 하나이며 국내에 나온 판타지 소설 중에서도 재미있는 소설 중 하나입니다. 두 권이나 되지만 둘 다 450페이지와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총합 95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의 소설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구석 지루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시종일관 끊임없이 긴장된 사건을 제시하고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페이지 수가 많지만, 오히려 읽을수록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안타깝게 만듭니다. 읽다가 졸음이 와도 페이지를 손에 놓기가 힘들고, 오랜 만에 밤을 새서 읽을 만한 판타지 소설을 만난 것 같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정말 밤을 새서 재미있게 읽었던 판타지 소설이 많았지요. 이 소설은 다시 그런 기분을 느끼게 만듭니다. 
  이 소설은 화랑 바오 가람과 일곱 번째 공주 피리새의 이야기입니다. 화랑 바오 가람은 나무를 죽이는 숙명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곳곳에 신목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나무는 사교이기 때문에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그의 아버지도 나무를 베었습니다. 먼 옛날 신인이 신령스런 나무 신단수를 타고 지상에 내려왔다는 전설 때문에 생긴 나무 숭배는 현재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이 수목신앙이 이 소설의 주요 소재인데, 소설 내에서도 언급하지만 세계 각지에 이런 신화들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기도 합니다. 일단 바로 떠오르는 것이 판타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세계수'겠지요. 
  서역에 위치한 사리온이라는 나라에서 천년 왕국 서야로 공주를 무당으로 보내오라고 사신이 나타납니다. 가리 박사라는 정체불명의 사신은 하늘의 뜻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왕은 병환으로 이미 쓰러져 의식불명의 사태입니다. 공주 밖에 없는 궁에서는 첫째 공주인 달이랑 공주와 둘째 공주인 별이랑 공주가 한창 권력다툼을 하는 와중이고요. 
  긴박한 내전이 벌어지고 모든 것이 정리되어 가는 와중에 갑자기 뜬금없이 그동안 열리지지 않았던 일곱번째 공주가 등장합니다. 바로 '피리새'라는 이름을 가진 작고 연약한 벙어리 소녀지요. 이 소녀가 정말 일곱 번째 공주일까요? 화랑인 바오 가람은 자신이 돌봐주던 하녀가 갑자기 자신이 모셔야 하는 일곱 번째 공주로 나타나게 된 것을 놀라게 됩니다. 게다가 이 소녀는 저 모래 바람이 불어오는 서역으로 떠나야만 합니다. 운명을 거부할 수 없다는 듯이 하늘에서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나누는 황천강이 나타나기까지 합니다. 운명. 그리고 운명 그 너머. 과연 피리새는 진짜 일곱 번째 공주가 맞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서역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이며, 거기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익숙하면서도 낯선 새로운 한국 판타지의 신화, 피리새. 그 파란만장한 모험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 한국적 세계관
 

  이 소설의 첫 번째 매력은 한국적 세계관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작가는 한국적 판타지를 써야한다든가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만, 독자 입장에서 다양한 세계관의 작품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움이지요. 특히 이렇게 보통 접하기 힘든 한국적인 세계관은 무척 반가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작품은 동양적인 세계관이 나오는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나 윤형승의 『뫼신 사냥꾼』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역시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만들었습니다. 단지 옛날 옛적을 배경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옛날 옛적이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나라와 역사가 있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화랑이 존재하고 처용이 제작했다는 화랑신검이 존재하지만 한 편으로는 막 ‘총’이라는 무기 역시 등장할 무렵입니다. 이런 점들은 확실히 다른 소설들과도 차별화 되는 점이라 눈에 띄었습니다. 즉, 한국의 옛 설화와 신화 등을 모티브로 했지만, 전혀 다른 세계임을 보여주는 부분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런 점들이 충돌하거나 위화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제법 잘 조화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구성이 잘 되어 있고, 소재들을 잘 배치시켜놓은 덕분이겠지요. 처음에는 이런 부분들을 모르고 예상과 다르게 현대적인 느낌이 많이 나서 당황하기도 했는데,(말투, 캐릭터들의 생각과 행동, 도구들 등등) 읽다 보니 이 세계가 상당히 현대적인 느낌을 줄 수밖에 없는 시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단수, 무당, 처용, 주몽과 화랑, 역신과 도깨비, 오구신, 바리데기, 수목신앙 등을 조합해서 만들어놓은 세계관은 상당히 그럴 듯하고 친숙하면서도 처음 보는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작가의 다양한 해석도 이 소설을 읽는 재미중에 하나입니다. 서술과 대화로 작가는 옛 설화를 새롭게 해석해서 들려줍니다. 그래서 독자는 즐겁게 이 세계를 구경하고 빠져들 수 있습니다. 소재들에 대해서 작가가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 조사했다는 점이 책 곳곳에서 묻어나오고, 다소 설명적인 부분들이 튀기는 하지만 흥미롭기도 하고 이야기를 탄탄하게 만들어주는 버팀목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관을 맛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가치는 충분할 것입니다. 게다가 재미까지 있습니다. 

  2. 캐릭터
 

  이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캐릭터에 있습니다. 사실 장르 소설에서 캐릭터만큼 중요한 요소도 없죠. 캐릭터가 살지 않으면 이야기는 지루해지고 맙니다. 독자는 흥미를 느낄 수 없죠. 캐릭터가 살아있지 않으면 모든 갈등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 소설은 초반부터 캐릭터 정립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1권의 내용은 각 인물들의 등장과 그 인물들의 성격을 보여주고 후반부에 들어가서는 왕권을 둘러싼 자매들의 대결과 거기에 얽혀 들어가는 화랑 바오 가람의 이야기가 주가 됩니다. 제가 처음에 이 소설을 접하고 생각했던 것은 상당히 신화적일 것이라는 예상이었습니다. 예상은 반만 맞았습니다. 1권은 신화보다는 정치 쪽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야기를 붕 뜨게 만들지 않고 현실감 있게 만들고 캐릭터들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도와주며 이야기의 갈등을 제시해주는 요소가 됩니다. 이 점이 또한 ‘바리데기’를 어떻게 재해석했느냐, 이유가 부족한 원래 이야기에 얼마나 타당한 개연성을 집어넣었느냐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현실적인 이유들이 곳곳에 배치되면서 독자는 주인공인 ‘피리새’가 서역으로 떠나야 하는 이유를 천천히 납득해 가게 됩니다. 현실과 운명 사이에서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같이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말입니다.
 
  바오 가람. 나무를 죽이는 화랑. 그는 화랑입니다. 화랑에 걸맞지 않는 안하무인적인 성격을 가졌지만, 그는 화랑이 되어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초반부는 너무 과장된 성격 묘사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끝까지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게 그의 캐릭터 성이기도 합니다. 
  피리새. 이승과 저승을 잇는 새. 피리새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소녀입니다. 일곱 번째 공주. 바오 가람의 하녀로 일하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알려지지 않았던 일곱 번째 공주로 불리고 서역으로 떠나야 합니다. 이 갑작스런 사태를 캐릭터가 살아있지 않으면 제대로 독자에게 전달이 되지 않겠지요. 또한, 독자 역시 주인공에게 가장 애정이 가야 소설도 재미있고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피리새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잘 살아있습니다. 심성이 착하지만 곧고 또 강인하고 고집이 센 면도 있습니다. 항상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고 혼란스러운 사태들 속에서도 중심을 잡아줍니다. 
  또 다른 주요 인물인 가리 박사. 서역에서 온 사신으로 바오 가람과 항상 충돌합니다.(사실 일방적으로 위협당한다고 봐야죠. 가리 박사는 깐죽거린다고 할까요.) 이 점이 이야기의 지루함을 덜어주고 긴장을 풀어줍니다. 계속 피리새에게 운명을 강의하기도 하고 장광설을 늘어놓기도 하고 항상 나사 하나 풀린 제멋대로인 모습이지만, 이 강렬한 캐릭터가 있어서 이야기가 탄력 있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껄렁껄렁하고 괴짜이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신비를 감춘 전형적인 캐릭터이기는 하나 극의 재미를 더해주고 전형성에서 벗어난 느낌도 어느 정도 갖고 있습니다. 2권에서의 상당 부분 캐릭터가 주는 웃음은 가리 박사가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달이장 공주. 그리고 미루 공주. 달이장 공주는 차갑고 냉철한 캐릭터라 조금 단순했다면,(물론 그러면서도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미루 공주는 상당히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1권에서 가장 빛나는 모습들을 많이 보여줍니다. 귀엽죠. 재미있고 밝고 강인한 캐릭터였고 이 소설 전체에서도 쉽게 잊기 힘든 캐럭터였죠.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소설의 전체적인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다른 캐릭터들도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단순무식한 상관과 책벌레 부하 캐릭터의 말다툼도 재미있는 요소였죠. 이런 개성 있고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이 멋진 세계관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충돌하고 뛰노는 모습들을 보면서 계속 미소를 짓게 되고 즐겁게 책을 읽어나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3. 안정된 구성과 문체
 

  김근우 작가는 1996년 『바람의 마도사』를 출간한 이후 꾸준히 장편 판타지 소설을 출간해온 작가입니다. 따라서 문장이 기본기가 튼튼하고 안정되어 있습니다. 간혹 장르 소설들을 보면 문장부터 읽기가 싫어지고 맞춤법조차 지켜지지 않는 작품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이 작품은 문체가 읽기 좋게 편안합니다. 읽는데 걸리는 부분이 없고 글을 읽기에 아주 수월하지요.
 
  작품의 구성 또한 잘 짜여 있습니다. 중구난방으로 뛰어놀지 않고 작가의 계획 하에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이 느껴지고 천천히 모든 이야기의 베일이 풀려나가는 모습이 계속 독자가 책을 붙잡고 있게 만듭니다. 지루함 없이 뒷내용이 궁금하게 계속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죠. 원래 문피아에서 연재될 때는 훨씬 많은 분량이었던 작품이 2권으로 압축되면서 이야기의 밀도가 훨씬 높아진 느낌입니다. 대부분 뒷부분을 쳐냈다고 하는데, 둘 다 읽어본 게 아니라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이쪽이 훨씬 좋은 느낌을 주지 않나 싶습니다. 만약, 후반부가 늘어졌더라면 이야기에 몰입도가 떨어졌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압축된 구성 속에 이야기가 몰려 있어서 읽으면서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늘어지거나 불필요한 부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야기가 더 길지 않은 게 조금 아쉬운 느낌까지 주는 것이지요. 이 책을 읽기 전에 기대한 것이 과연 그 많은 분량을 쳐내고 압축한 게 단점이 되었을까, 장점이 되었을까 궁금했는데 지금 느낌으로는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깔끔하게 2권으로 잘 끝난 근사한 작품이었습니다.

  당신이 아직도 판타지 소설의 모험을 기억한다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래전에 이불 속에서 혹은 차 속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하던 판타지 소설을 읽던 기억이 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이전에 노블레스 클럽에서 나온 소설들과는 다릅니다. 다른 작품들이 보통 단 권 완결이라는 구성상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게 제한되어 있었다면, 이 소설은 애초에 단 권 구성이 아니라 장편 판타지 소설로 쓰인 작품이 다시 오랜 기간 수정을 거쳐 두 권으로 압축된 케이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 작품은 전형적인 장편 장르 판타지 소설을 읽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굉장히 잘 쓰였고 소재도 독특하고 내용도 재미있고 캐릭터들도 잘 살아 있죠. 구성 역시 계속 커다란 사건들이 연속으로 터지면서 끊임없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곳곳에 클라이막스가 배치되어서 읽는 이에게 충분한 만족감을 주는 작품입니다. 
  한국적 세계관 속에서 한바탕 엄청난 폭풍처럼 몰아치는 신화 같은 이야기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 소설을 강력 추천합니다. 현재까지 나온 노블레스 클럽 중 최상의 재미와 감동을 갖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올해 나온 판타지 소설들을 통틀어도 보기 드문 재미와 감동으로 무장한 소설이었습니다. 
  판타지 소설의 매력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가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새롭고도 낯선 세계에 홀연히 빠져들어, 등장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목숨을 건 모험을 하게 되는 잊지 못할 경험. 아직도 그때 그 수많은 모험들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은 충분히 매력적인 여행을 경험하게 해줄 것입니다. 지금 피리새의 험난하고도 기이한 여정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리새는 자기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울고 싶어지고는 했다. 피리새는 피리처럼 우는 새다. 피리 같은 소리로 사랑스럽게 노래한다. 그러나 그 새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그녀는 노래는커녕 울음소리도 제대로 낼 수가 없다. 목소리는 고왔지만 그 목소리로 가슴속에 담긴 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표현의 욕구는 본능이다. 주관이 있고 감정이 있으면 당연히 표현을 하게 된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도 그렇다. 개도 컹컹 짖고 소도 음매음매 운다. 그런데 피리새는 그것을 할 수가 없었다. 할 능력이 있지만 해서는 안 되었다.
― 『피리새』 상, 김근우, 로크미디어, 363쪽 

 
컴컴한 하늘 한가운데 거대하고 누르스름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기어가고 있었다. 하늘을 가릴 만큼 압도적인 크기와 꿈틀꿈틀 움직이는 모습 따위가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용이라도 등장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용은 아니었다. 머리도 없고 여의주도 없고 꼬리나 발도, 움직인다는 것 외에는 생물다운 특징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세상 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 장대하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그 모습은 마치……. 
  “가람!” 
  “뭐? 갑자기 제 이름은 왜 부르고 난리야?” 
  “아니요, 그게 아니고! 저걸 보세요! 모르시겠습니까? 다들 놀라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저건, 가람, 그러니까 강입니다. 강이라고요!”
― 『피리새』 상, 김근우, 로크미디어, 3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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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 SF 르네상스 1 - The Hard SF Renaissance 1
데이비드 브린 외 지음, 홍인수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하드SF르네상스


  ― 하드 SF의 향연!


  SF의 진수라고 하는 하드SF. 과연 하드SF는 무엇일까?

  물 론 대부분의 용어들이 그러하듯이 정확히 딱 들어맞는 정의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보편적인 의미의 하드SF는 작품 내부의 과학적 상상력을 과학적 엄밀성이라는 엄격한 틀 안에서 전개해 나가는 소설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어렵다.’라고 느끼는 SF의 본격적인 이미지를 가진 것이 하드SF일 것이다. 최신 과학 이론이 나오고, 물리학적인 지식이 필요로 하고, 여러 이론들이 들어가 있어서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SF소설. 그러나 그렇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하드SF’가 평소에 과학에 관심이 적은 독자들에게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즉,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가 갖고 있는 인간의 이해와 재미와 감동이 있다.


 “(……) 하드SF가 문제풀이식 접근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읽기 어렵다거나 무미건조하다는 식의 인상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훌륭한 하드SF작 가라면 아무리 어려운 과학기술적 난제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과학 자체는 어디까지나 시각 또는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일종의 시각에 불과한 만큼, 문제풀이방식 역시 그에 천착할 수밖에 없다. 즉 소설적 갈등을 풀어내는 형식과 소설 내의 과학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또 하나의 이질성을 부여하며, 바로 이러한 이질적인 두 요소들이 새로운 긴장감을 생성한다고 볼 수 있으리라.”

  ― SF리더스위키, 「하드SF」항목 중에서(http://wiki.sfreaders.org/하드SF )


  하드SF? 딱딱하고 지루하고 어렵게만 느껴진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후회 없이 읽어라. SF의 매력 그 자체가 하드SF에 있으니까.


  이 번에 행복한 책읽기에서 나온 『하드SF르네상스』 1권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하드SF 앤솔로지이다. 게다가 기존에 단편집들처럼 오래된 단편들을 묶은 선집이 아니라,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에 창작된 최신의 하드 SF 작품집이라고 한다. 매번 고전들만 읽어야 했던 한국 SF 독자들에게 이런 책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이 신선하기까지 하다. 이런 멋진 기획을 한 행복한 책읽기에 다시 한 번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각 단편별로 짧은 느낌을 적어보자면, 첫 번째 실린 「리얼리티 체크」는 굉장히 짧은 우화다. 처음을 여는 것으로는 괜찮다고 할까. 이 단편은 과학자들을 위한 작가 데이비드 브린 특유의 유머라고 한다. 이 작품이 『네이처』지에 새 천 년을 기념하기 위해 2000년에 특집으로 수록한 한 페이지 분량의 SF 연재물 중 하나라는 사실이 이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당시 『네이처』지를 읽었을 때 과학자들이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생각해보면 더욱 재미있다.


  두 번째로 실린 「올림포스 산」은 화성에 있는 ‘올림포스 산’을 탐험하는 이야기다. 아직은 벌어질 수 없는 이야기지만 먼 미래에 진짜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그렸다. 이 이야기가 과학적 논리 아래 현실적으로 그려진 소설임에도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주용 주요 인물인 두 사람의 내면을 잘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어떤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노력이 이 소설이 단지 과학적인 논리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과 목표의 추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단편을 읽으며 실제로 화성에서 탐험을 하고 온 것 같은 체험을 느낄 수 있는 게 또한 매력적이다. 하드SF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그런 재미가 아닐까 싶다.


  세 번째로 실린 「어느 성화학자의 생애」는 이 단편집에서 가장 빛나는 소설이다. 즉 가장 재미있고 뛰어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역자를 비롯해서 독자들의 반응까지 하나같이 이 작품을 가장 재미있게 잘 읽었다는 데 이견이 없을 정도다. 작가가 생물학 학사와 사회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만큼, 생물공학을 다루고 사회학적인 요소까지 있는 근사한 작품이다. 적당히 야하면서 끝은 SF의 경이감으로까지 치닫는 이 작품은 정말 멋지지 않을 수가 없다.


  네 번째로 실린 「틈새」는 심해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단순히 읽기에는 조금 난해할 수 있다. 그만큼 주인공의 심리가 서술과 섞여서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대단히 어둡고 음울하다. 읽는 독자 역시 심해 속에서 사방이 수압으로 내리 누르는 듯한 묵직하고 답답한 심정을 체감할 수 있다. 소설은 내내 갇혀 있는 듯하고 묘사되는 심리는 절절하고 끈적끈적하고 차갑다. 감성이 풍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 보다는 이런 감성적인 면에 치중한 소설이며 전체적으로 독특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단편집에는 작품이 끝날 때마다 작가 해설이 자세하게 적혀 있는데, 이 작가의 해설에는 본인이 직접 경력을 써서 보냈다. 다른 작가들의 해설도 재미있고 인상적인 부분들이 많지만, 특히 이 작가의 경력은 재미있다. 궁금하시면 직접 읽어보시라.


  다섯 번째로 실린 스티븐 벡스터의 「기러기 여름」은 일단 배경이 지금은 행성의 지위를 잃어버린 명왕성이라서 흥미롭다. 이 단편은 여기에 실린 단편들 중에 가장 무난한 느낌이었다. 기본적인 구성대로 쓰인 단편이랄까. 그러나 많은 부분이 예측되는 이야기 전개임에도 진부하게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흥미롭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


  여섯 번째로 실린 「헤일로」는 광속에 가깝게 이동하는 우주선과 헤일로 세계라는 갈색 왜성이 공전하는 행성계의 이야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엘리스는 평화로운 생활을 하던 중 광속에 가깝게 이동하는 우주선에서 절박하게 보낸 메시지를 수신하게 된다. 그 메시지는 이 우주선이 탈취당했고 이들이 이미 ‘티아라’라는 곳을 파괴했으며 다음 목적지는 주인공인 엘리스가 살고 있는 ‘듀’라고 알려준다. 엘리스는 이 메시지를 경찰에 넘기지만, 마음에 걸려서 계속 메시지를 수신하게 된다. 차분한 시선 속에 펼쳐지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이야기 구조는 단순할지 몰라도 갈등에서 생겨나는 어쩔 수 없는 비극과 절망이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인상 깊은 소설이다.


  일곱 번째로 실린 「착한 쥐」는 더 이상 위험한 실험에 사용할 실험용 동물이 없고, 오직 생계를 위한 인간 자원자만이 존재할 뿐인 세상을 그린 작품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누구나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소재일 수도 있겠으나, 작품은 굉장히 세심하게 공을 들이며 서술해 가서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특히, 화자의 시점에 맞춰서 일부러 문장들이 맞춤법이 틀리고 오류가 난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법은 인상적이었다. 읽으면서 진짜 화자의 시점으로 작품을 읽게 만든다. 몰입감이 대단하다고 할까. 재미있는 기법이었고, 작품 자체의 흡인력이나 매력도 뛰어났다. 단순한 소재의 아쉬움을 다른 부분들이 충분히 메꿔 주고 있다.


  여덟 번째로 실린 「시간의 모래성」은 이 단편집에 실린 유일한 시간을 소재로 한 단편이다. 개인적으로 ‘시간’이라는 소재를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었다. 처음에는 이론들이 난무하고 술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야기만으로 진행되어 조금 단순하고 지루한 느낌이 들기도 하나, 이야기가 차츰 진행되면서 그 이론을 설명하고 실제로 나타나는 상황의 이야기를 듣는 부분들은 매우 흥미롭다. 게다가 마지막 부분을 읽는 순간, 앞부분부터 다시 읽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아홉 번째로 실린 「불사조 품기」는 분량이 꽤 많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일단 우주선의 인공지능인 히파티아와 주인공인 ‘나’ 사이의 대화에서 오는 재미가 상당하다. 둘다 여자이긴 하지만 애니메이션 등에서 흔히 보이던 구조가 아니던가. 우주선의 인공지능이 홀로그램 상태로 나와서 주인공과 계속 티격태격하는 소설 말이다. 물론 이 소설은 가볍지만은 않고 진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야기가 부드럽게 연결되고 남자 작가가 썼음에도 여성 화자를 재미있고 능숙하게 잘 다루고 있다. 이 단편은 지금 지구에서 보는 별들이 과거의 모습이듯이 이미 멸망한 별을 과거에서 지켜볼 수 있는 위치에서 탐색하는 소설이다. 한 행성과 종족의 멸망이 소설 속에 그려지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단편이다.


  마지막으로 실린 로버트 리드의 「매로우」는 꽤 어둡고 신비로운 소설이다. 이 소설은 지구 공동설에서 착안한 목성만한 크기의 우주선 안에 있는 공동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사실 과거의 이야기가 섞이면서 조금 난해하고 읽기 어려운 면도 있긴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세계관이 이해되고 숨겨진 이야기들이 밝혀지면서 극의 재미가 커진다.

  공동 안에서 벌어지는 ‘캡틴’들의 모험은 마치 미래인들이 원시시대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 원초적인 느낌을 준다. 소설 자체가 고전적인 문체와 분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이 다른 소설들과 차별화된 독특한 개성을 준다. 분위기가 매력적인 소설 중에 하나로 꽤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이 근사하고 마음에 들었는데, 뒤에 실린 작가 해설에서 이 작품이 동명의 장편 소설로 개작되었다는 글을 읽고, 장편소설로도 읽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뉴욕타임스』는 “문자 그대로 무제한의 영감을 품은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라고 평했는데, 거기에 걸맞는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SF 독자라면 이런 멋진 SF단편들의 향연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기존에 SF독자가 아니더라도 이 책은 얼마든지 재미있는 SF단편집으로 다가갈 수 있다. 오히려 다른 SF단편집에서 보지 못했던 과학적 근거 하에 펼쳐지는 묵직하고 무겁고 위험한 탐험과 모험들이 더 재미있게 다가올 수 있다.

  다 읽고 나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오랜만에 꽉 찬 단편집을 읽었다. 하드SF와의 ‘최초 접촉’(first contact)은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더 읽고 싶다. 다행히 『하드SF르네상스』 2권이 대기 중이라고 한다. 이 갈증을 해소시킬 묵직한 재미가 다시 나를 내리 누르기를 기대한다. 또한, 이 무겁고 단단한 재미와 감동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한번쯤 맛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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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올해도 중단편선이 나옵니다.
  장르문학은 단편이 활성화 되어 있지 않고 장사도 안 되는 편인데, 그래서 그 동안 판타스틱이 생기기 전까지 웹진 《거울》 같은 공간이 단편을 활발히 창작하고 읽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죠. 이제는 황금가지, 시작 등에서 단편집이 나오기까지 하지만, 웹진 거울은 초심(?)을 잃지 않고 올해도 5년 째 책을 내는군요.
  장르문학 좋아하시는 분들이나, 장르 단편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 번 구입해서 읽으셔도 좋을 듯합니다.
  장르 월간지 『판타스틱』에 4개의 글을 싣고, 그 외에도 SF작가에게 주어지는 거의 모든 지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배명훈의 글도 있고, 김창규, 박애진, 은림 등 최근 출간된 환상문학 단편집, SF 단편집에 각각 작품을 실었던 작가들의 근작이 실려 있습니다. 또, 장르 월간지 『판타스틱』에서 「고등어 아빠」, 「검은실」을 실었던 조성희 작가의 글도 있는게 이채롭더군요. 작년 말에 웹진 거울 독자란에 글을 올려 독자우수단편으로 뽑혔던 것이 이번에 같이 묶여 나온 거더라고요.

  자세한 수록 작품 목록 및 작가 소개는 제 블로그에 올려두었습니다.

  http://twinpix.egloos.com/395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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