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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 -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
고진하 글.사진 / 비채 / 2009년 2월
평점 :
신들의 땅, 인간의 나라
― 책장 속에 느껴지는 살아있는 인도의 숨결!
인도에 가고 싶었다. 신화가 살아 숨 쉬는 신비한 땅에 닿고 싶었다. 언젠가 스스로 훌쩍 어디론가 떠나게 된다면 그 나라는 인도일 것이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날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생이 끝나기 전까지 한 번은 나는 인도의 땅을 밟고 서 있을 것이다. 갠지스 강에 발을 적시고, 금빛 모래를 들이마시고, 아이들의 손바닥에 돈을 쥐어줄 것이다. 누구나 살면서 여백을 하나 남겨두는 법이다. 나의 여백은 인도였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처음 『신들의 땅, 인간의 나라』(비채)라는 제목을 봤을 때부터 나는 거부할 없는 운명의 이끌림을 느꼈다. 책장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듯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대신, 독서를 벗삼아 살아왔다. 독서는 나에게 가보지 않은 곳을 경험하게 해주는 매개체였다. 이번에는 이 책이 내가 동경하는 신들의 땅으로 나를 인도했다. 나는 시공을 뛰어넘어 화자의 뒤에서 인도를 엿보았다.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이곳 역시 지구가 맞는 걸까.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이 책에서 인도는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도를 바라보면서 나는 내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한 번도 직시해보지 않은 내 안을 들여다보았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 안에 있는 신에 대해서, 내가 신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 책은 단순한 인도 기행문이 아니었다. 인도의 종교와 철학, 신비주의적 영성철학은 나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을 갖게 했다. 감격스러운 문장 하나마다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는 인도에 가보지 않았으면서도 인도를 경험했다.
처음 들어본 『우파니샤드』는 인도 5천년 지혜가 담긴 경전이다. 이 책은 ‘우파니샤드 기행’이라고 이름이 붙은 순례였고, 나는 이 책을 통해 인도의 땅을 밟으며 ‘우피니샤드’의 가르침을 조금 체득할 수 있었다. 완전한 이해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첫발을 내딛을 수는 있었다. 길은 끝이 없을 것이니 조급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물에 씻긴 고운 얼굴들, 해에 씻긴 지구의 혼들!
나는 그들처럼 찬 바닷물에 몸을 담글 엄두는 못 내고 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손과 발을 씻으며 여기 또한 우주 어머니의 자궁이구나, 사원이구나 하는 생각에 사무쳤다. 범신론자는 아니지만, 때로 영혼의 기갈에 시달릴 때면 저 대자연을 신성이 깃든 사원으로 여기고 그 품에 안기곤 했다. 그래, 저 물의 사원, 저 해의 사원에 더러워진 몸과 혼을 자주 내어맡기지 않는다면 나를 비롯한 이 지구별의 혼들이 어찌 해맑아질 수 있겠는가.(22쪽)
책장을 넘기면 정갈한 문체가 눈을 맑게 하는 기분이 든다. 고르고 고른 어휘들과 잘 정제된 문장들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풍경의 느낌까지 그대로 전달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마치, 여행기라기보다는 공들여 쓴 산문이나 시처럼 읽히는 아름다운 문장 때문에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잠에 들 시간이 지났음에도 도저히 책장을 덮을 수도 없었다. 소설이 아닌 여행기가 이토록 강렬한 흡인력을 가진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나는 결국 밤을 지새며 책 한 권을 한 번에 읽어 내렸다. 다 읽고 나서는 내용이 더 있지 않아서 아쉬운 마음까지 들었다.
작은 사당에도 사당지기가 있어 꽃과 돈을 지니고 나와 엎드리는 순례자들을 맞이하여 그들의 소원을 신에게 빌어주었다. 저들은 신앞에 무엇을 비는 것일까. 사당 앞에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남루해 보이는 옷차림의 아낙들도 모두 손에 붉은 꽃이나 황금색 꽃을 들고 있었다. 자기들의 생이 꽃처럼 피어나기를 갈구하는 것일까.(29쪽)
마지막 문장처럼 이 책은 곳곳에 울림을 주는 문장들이 가득했다. 계속 몰입했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여행지에서 깊은 공감과 감동을 함께 느꼈다.
철학적 성격이 강한 불교가 포교를 위해 금붙이를 불상으로 만들고 보살을 신격화하였듯이, 힌두교는 우파니샤드 철학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형상이 있는 인격신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브라흐만이라는 추상적인 신은 창조의 신 브라흐마,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로 인격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이 세신은 각자의 역할을 맡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이다. 즉 유일신 브라흐만으로 귀일하는 것이다.(31쪽)
이 책에서는 이렇듯 인도 신화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겸하고 있다. 나는 인도 신화에 대한 관심만 있었을 뿐, 그 실상에 대해서는 무지하였기 때문에 이 책이 아주 유용하였다. 힌두교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유일신으로 귀일한다는 사실 자체도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 책은 또한 ‘우파니샤드’의 우화가 곳곳에 배치되어서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은 직접 사람들이 사는 인간들의 땅, 인도를 밟으면서 한 편으로는 삼억 삼천 만의 신과 여신들이 거하는 신들의 나라를 방문하고 있다. 인도의 실체에 대한 묘사와 동시에 우파니샤드의 내용을 같이 언급하면서 영적인 지식 전달에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은 어렵고 난해할 수 있는 우파니샤드를 친절하게 풀어 해석하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내면에 신성의 불꽃이 타오른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신성의 불꽃을 외면하고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39쪽)
때론 어떤 문장은 마음에 큰 위안이 되기도 했다. 우리 내면에 신성의 불꽃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위의 문장은 위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비록 고난과 역경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모두 신이며, 내면에는 신성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책을 통한 깨달음이 다시 삶을 진실되게 살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인도 캘커타의 한 식물원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보리수나무를 본 적이 있었는데, 한 그루의 보리수나무가 이룬 수역이 무려 500미터를 넘었다. 멀리서 보면 수천 그루의 나무들이 이룬 숲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오직 한 그루 어머니 기둥에서 뻗어 나온 기근들이 수많은 뿌리를 내려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 뿌리에서 비롯한 거대한 숲을 보며 우리 인간 종족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지구별 위의 인간들은 모두 대지모신이라는 한 어머니의 자식들이라는!(50쪽)
읽다보면 밑줄을 그어야 할 문장들을 자주 마주쳤다. ‘지구별’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정겨운 것 같았다. 인도라는 단어와 지구별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지구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삶아 비루할 지라도 수 천 수 억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모두 한 어머니의 자식들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닷새쯤 먹을 수 있는 쌀과 감자가 있답니다. 아내는 매일 아침 숲에서 땔깜을 구해다가 차를 끓여 줍니다. 아내가 끓여주는 차는 아주 맛있습니다. 그걸로 나는 만족합니다.”
적어도 카틱에게서는 욕망의 갈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소유에 얽매이지 않는 영혼의 자유로움과 소박하고 절제된 삶의 향기가 피어나왔다.(56쪽)
인도 사람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문장이었다. 현대 사회는 속도 경쟁에 빠져 있다. 누가 더 지치고 고된가를 경쟁하는 것처럼. 하지만 인도에는 알 수 없는 여유가 넘친다. 신들의 나라이기 때문일까. 욕망과 소유가 느껴지지 않는 인도는 평화로운 인상이다.
브라흐만은 인간의 지성이 묘사하는 속성조차 초월해 있는 존재인 것이다.
기독교 신비가인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통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말하든 간에,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리켜 말한 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우리의 하느님을 가리켜 말하지 않은 것, 그것이 하느님이다.(66쪽)
신은 인간의 인지를 벗어난 존재인 것은 틀림없다. 다만, 인간은 믿기 위해서 인격신을 만들고 지성을 묘사한다. 그러나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이 부분에서는 우피냐사드에서 묘사하는 브라흐만의 이런 속성과 기독교 신비가가 말한 통찰이 유사하다고 말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로움. 다른 종교를 존중하면서 또한 기독교에 대한 교리와 합일시키기도 하는 모습은 감탄스러웠다.
아트만은 이처럼 속박이 없고, 고통이 없고, 소멸하지 않고, 얽매임이 없는 참 자유의 근원이요 불멸의 신성이다. 그런데 이런 불멸의 신성이 인간 속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 신은 초월하지 않고 내재한다.(83쪽)
이런 문장들 역시 위안이 되었다. ‘불멸의 신성’이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단언하는 문장들은 참으로 근사하지 않은가. 아트만에 대한 앎을 통해 자신도 신처럼 고귀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는 말이 얼마나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주던지. 평범한 존재에서 깨달은 존재로 바뀌는 순간, 삶은 더 이상 행과 불행, 삶과 죽음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자기 안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그리하여 ‘참자아’의 실현, 곧 삶의 완성에 이르도록 돕는다. 단순히 인도 여행기라고 책을 펼쳤다면, 놀랍고도 신비로운 이야기의 향연 속에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그렇다. 내가 이미 바다와 하나라는 자각이 뚜렷하다면, 우리에게 덧붙여지는 이름들이란 하찮은 것이다. 우리는 ‘이름 붙일 수 없는 큰 물건’이기 때문이다. 아트만, 브라흐만은 이름 붙일 없는 큰 물건에 편의상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알라니 야훼니 하는 이름들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들이 부르는 신의 이름들이 각기 다르지만, 또 그 이름과 그 형태에 집착하여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지만 바다에 당도하면 그런 강들이 지니는 이름은 소멸되고 만다. 제도로서의 종교는 영원한 것이 아니고, 그 종교가 부르는 신의 이름도 형상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상의 한 형식일 뿐이다. 우리가 지구별에 머무는 동안에만 필요한 형식일 뿐이라는 말이다.(114쪽)
열린 마음으로 본 종교의 모습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신은 인간을, 세상을, 우주를 초월한 분이다. 시간과 공간 너머에 계신 분이 인간이 만든 작은 이름과 형식에 얽매이실 리가 없다. 따라서 거대한 바다이며 우리는 이미 그 바다와 하나라는 자각은 놀라운 깨달음이다. 그야말로 우리는 이미 신 속에 있고 또한 신이 내재되어 있으며 앞으로 신에게 귀속된다는 뜻이니까. 기독교가 교파끼리 싸우고, 종교들끼리 다툼이 일어나는 것들이 이런 문장을 보면 모두 하찮게 느껴진다. 중요한 것은 인간들의 다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종교에 대한 시선을 넓게 만든다.
우리가 마야의 주문에 걸려들지 않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세상이 환영임을 깨닫는 동시에 그 환영의 세상 또한 브라흐만의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브라흐만을 궁극적 근거로 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128쪽)
이 책에서는 다양한 지식을 알려준다. 세상이 환영이라고 지칭하는 ‘마야’ 같은 단어도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매트릭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 ‘환영의 세상’ 또한 브라흐만의 일부라는 깨달음, 앞에서 말한 바다라는 깨달음은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가 우리 속에 진정한 주인으로 살던 ‘아트만’을 어쩌지는 못한다. 육신이 지상에서 소멸된다 해도 아트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트만은 영원불변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육신이 소멸되는 그날 우리의 주인으로 있던 소우주의 실재인 아트만은 대우주의 실재인 브라흐만으로 귀일할 뿐인 것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불멸의 영혼인 아트만이 곧 ‘나’의 본래 모습이라는 자각이 있다면 나는 불멸 그 자체인 것이다.(155쪽)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거나,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거나,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거나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이 책에서는 아트만, 자신의 ‘참자아’를 직시하고 깨달음을 얻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죽음 또한 없다고 말하고 있다. ‘죽음 없음’의 자각. ‘불멸.’ 놀라우면서도 매혹적인 내용이다.
근원에 대한 망각은 사람과 신의 간극을 넓힐 뿐이다. 이 간극을 좁히고 신과 ‘사이 없는 사이’가 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들숨날숨을 쉴 때마다 이 ‘위대한 구절’을 늘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브라흐만(신)이다.”(223쪽)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위대한 구절’로 불리는 이 가르침은 앞에서 나온 이야기들과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신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간명한 가르침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덮고 다른 모든 건 다 잊어도 이 위대한 구절 하나만 기억한다면 제대로 ‘으뜸 된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아트만을 자기 존재의 뿌리로 아는 사람은 자기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아트만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유의지로 자기의 운명을 바꿔나갈 수 있다. 인간의 운명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운명은 오늘의 행위 또는 생각 여하에 따라 바뀔 수 있다.(246쪽)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은 낙관적으로 읽힌다. 그 다음 문장에서 물론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없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제시되는 예로 ‘예수’가 있다. 이렇게 곳곳에 기독교와 연관시키는 내용들은 놀랍고 흥미로웠다.
너는 신성(아트만)을 품고 있는 존재이니 네 본성을 자극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가을날을 살 듯 생의 부요를 누리라는 것이다. 세상에 집착하지도 말고 세상을 등지지도 말고 너의 다르마(의무)에 충실하며 모두가 원하는 검처럼 빛나는 생을 살라는 가르침이다.(250쪽)
이 책에서 계속 반복하는 ‘아트만’은 책을 덮고 나서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인 단어가 되었다. 좋은 문장들이 많았다. 우파니샤드에서 나온 문장들은 물론 내용과 재미 모두 가지고 있었으며 해설하는 문장 역시 친절하고 확실하게 내용 이해를 도왔다.
만일 나와 나 자신을 가르는 심연을 건널 수 없다면 달까지 여행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발견을 위한 모든 탐색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면 다른 모든 것은 무용지물일 뿐만 아니라 재앙이 될 것이다.
토머스 머튼(284쪽)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다. 이 책에서는 ‘유한한 것들과의 동일시’는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물질적 자아가 아닌 불멸의 자아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불멸의 자아’를 깨닫는 순간 덧없는 삶의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이 불멸의 자아는 곧 우리 속에 거하는 신(브라흐만)을 가리킨다고 한다.
반딧불이는 폭풍에도 빛을 잃지 않는다.
이 비유는 우리의 마음 공부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아주 명료하게 일깨워 준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말로 비유되는 욕망(혹은 감각)을 잘 다스리지 못할 때 우리는 삶의 방향을 잃고 샛길로 빠지고 만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주목할 것은 요가가 우리에게 욕망을 없애라고 주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94쪽)
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다. 예전에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반딧불이는 폭풍에도 빛을 잃지 않는다.’도 비슷한 뜻의 문장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도에 대해서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고, ‘으뜸의 가르침’인 종교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보면 닫혀 있는 종교가 아니라 모든 종교가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얼마나 좁은 사고로 종교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았고, 커다란 틀에서 모두 하나라는 사실을 느꼈다. 어떤 책은 한 번 읽고 다시는 안 읽는 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책은 자주 들쳐보게 되는 책이 있다. 이 책은 후자가 될 것이다. 마음에 와 닿았던 문장들에 밑줄을 치고, 힘이 들 때마다 위안이 되는 문장들을 찾아보게 될 것 같다. ‘모든 인간이 던지는 종국적인 질문은 ’나‘라는 존재로 향하게 되어 있다’고 한 시집의 뒤편에 적혀 있었다. 이 책은 그 종국적인 질문을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고 있는 글이다. 인도 곳곳을 빤히 들여다보고 때로는 비스듬하게 쳐다보고 다시 우리에게 ‘나’를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숨이 턱 막히는 구절도 있고, 왜 이런 것을 몰랐지, 라고 생각되는 구절도 있었다. 흐트러진 마음에 위안으로 다가오는 위로의 말도 있었고, 흥분과 희열에 찬 메시지도 있었다. 우리는 강이란 이름을 버리고 바다를 봐야 하고,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진정 모두가 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