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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의 그물 ㅣ Nobless Club 12
문형진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노블레스클럽 열두 번째로 출간 된 문형진 작가의 『인드라의 그물』입니다. 이 작품은 일단 노블레스클럽에서 처음으로 신인 작가의 투고작을 출간한 경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많은 기대를 하고 읽게 되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보통의 판타지 소설과는 다른 세계관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점이 특히 이 소설의 흥미를 끄는 요소이자,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페이지를 넘기면 목차 다음에 ‘≪화엄경≫ 제이십사장 십인품’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심코 넘겼던 이 부분이 나중에 다시 읽을 때는 이 소설의 중요한 핵심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먼저 눈에 띄는 점은 ‘모뎀’입니다. 우리가 지금 인터넷을 할 때 ‘모뎀’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이지만, 이 세계에서 ‘모뎀’은 새와 유사합니다. ‘모뎀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11쪽) 같은 문장으로 바로 다른 세계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면서 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는 또한 단말기를 통해 우리 세계의 인터넷 같은 ‘인드라망’에 연결시켜 줍니다. 이런 설정들이 새로운 의미를 파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색다른 세계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설정 중 하나는 ‘강림 현상’이었습니다. 하나의 장치로 존재하는데, 마치 인터넷을 하다가 렉이 걸린 것처럼 화면이 깨지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메시지들이 가득 채우다가 예언 같은 ‘계시’가 뜨기도 합니다. 신화 속 예언이나 계시가 인터넷 상에서 ‘강림현상’으로 나타난다는 설정은 기발하고 매력적입니다. 프롤로그에서 이런 강림현상 끝에 ‘정각당 뒤편의 숲에 나타난 우차이슈라바스를 잡아라.’(15쪽)라는 예언이 나타나고 교와 여의는 예언에 따라 움직이면서 목이 뚫린 아기를 발견합니다. 놀랍게도 아기는 살아있었고 치료를 하고 데려가는 동안 아기는 점점 커져 스무 살 가량이 됩니다. 아이의 이름은 하얀 말에게 죽을 뻔했기 때문에 교가 ‘백마’라는 뜻을 가진 편경에 나온 단어인 ‘칼키’라고 짓죠.
프롤로그가 끝난 후, 1장부터는 시점이 바뀌어서 ‘칼키’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칼키는 백치와도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낯선 세계관을 설명하기에 아주 편합니다. 1인칭인 시점도 독자를 쉽게 끌어들이고 이야기에 몰입시키는데 효과적이죠. 프롤로그는 갑작스런 상황들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면 1장은 흥미로운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캐릭터들의 매력을 드러내고 세계관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조금씩 진행시켜나갑니다. 독자를 압도하는 전개는 아니지만 서서히 세계를 선보이면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이어나갑니다. 지금까지 어디서도 읽지 못했던 낯선 세계관과 새로운 캐릭터들의 조화가 재미있었습니다.
자칫 제목만 보면 어려운 소설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읽기 편하게 쓰여졌고, 불교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해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세계관은 낯설지만 난해하지 않고 단번에 이해가 가능하게 만들어졌고, 캐릭터들은 친숙하고 개성이 살아있어 쉽게 매력을 느끼고 작품을 읽게 됩니다.
이 소설의 주요 플롯은 주인공의 정체와 이 세계관의 비밀에 관한 것입니다. 캐릭터가 중심인 캐릭터 소설도 아니고 모험이 펼쳐지기보다는 교가 납치되고 구하기 위한 칼키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세계에 비밀에 접근하게 됩니다. 지루하지 않고 다양한 인물들의 등장과 얽힌 이야기들이 펼쳐지면서 꽤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는 소설입니다.
앞에서 말한 설정들 말고도 이 세계의 모습들은 매우 흥미롭고 재미를 주는 요소입니다. 국내 판타지 소설들이 이렇듯 기존에 나온 세계관을 답습하지 않고, 각자 새로운 세계관을 만드는 작업이 많아져야 하겠죠. 노블레스클럽은 대여점 위주가 아닌 서점 시장을 지향하는 고급 환상문학 브랜드이기 때문에, 판에 박힌 세계관이 아니라 색다른 세계관의 소설들이 많이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런 노력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형화된 판타지 소설 독자들도 이런 새로운 시도의 판타지 소설들을 접하고 읽어나가면 새로운 재미를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 책이 장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앞서 나온 많은 리뷰들에서도 지적하듯이 캐릭터들이 직접 대사로 모든 것을 풀어내고 다급하게 결말로 치닫는 모습은 초반부에 가졌던 기대감 만큼 큰 실망으로 다가옵니다. 소설은 말하기가 아니라 보여주기이며, 캐릭터들의 대사로 안이하게 풀기 보다는 상황으로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에 마치 연극무대처럼 나란히 서서 대사를 주고받는 씬은 그래서 많이 아쉬운 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량이 더 길어서 천천히 엔딩을 맺어야 했다는 의견도 있고 전체적으로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지막에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책을 다 읽고 충만감을 느끼는 동시에 감동이 밀려오고 여운이 남기보다는 당황스럽고 맥이 빠지며 아쉬움이 밀려왔다고 할까요. 그러나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첫작품이기 때문에 아쉬움은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고 상당히 몰입해서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신인이라고 볼 수 없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글이었습니다. 자연스러운 문장과 캐릭터들과 이야기들이 구성의 아쉬움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고 있습니다. ‘인드라의 그물’은 불가에서 세상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의 비유로 흔히 쓰인다고 하지요. 노블레스클럽 또는 『인드라의 그물』은 한 구슬이 바뀌면 다른 구슬의 모습도 바뀌는 것처럼 계속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발전해나갈 것입니다. 지금과 또다른 모습으로 선보일 노블레스클럽의 신작들과 문형진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며 부족한 리뷰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