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집행관
김보영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알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알 수 없는 나. 겹겹이 쌓여있는 비밀들을 한하나 들춰나가는 안개 속의 슬로모션. 아름다운 여인을 뒤로 한 채 터져나오는 핏빛 폭력의 선열한 이미지들 …
김보영의 신작 <7인의 집행관>은 그 자체로 이미 숨막히게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입니다. <다크시티> <매트릭스> <인셉션>과 같은 영화에서 우리가 경험했던,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구조 속으로 우리를 몰고가는, 새롭고 신비스러운 문학적/영화적 체험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강렬합니다. ――― 영화감독 봉준호




 김보영의 첫 번째 장편소설 『7인의 집행관』(김보영, 폴라북스, 2013년 1월)이 현대문학의 임프린트인 폴라북스에서 출간되었다. 김보영은 한국 SF 작가 중에서 가장 정통적인 SF를 집필하며, SF라는 장르에서 느낄 수 있는 경이감을 훌륭하게 묘사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멀리 가는 이야기』(김보영, 행복한책읽기, 2010년 6월)와 『진화신화』(김보영, 행복한책읽기, 2010년 6월) 두 편의 단편집만으로 한국 SF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고, 깔끔한 문장과 정교한 플롯으로 SF의 재미를 잘 전달하는 작가다. 그렇기 때문에 김보영의 첫 번째 장편소설을 기다리는 독자가 많았다. 단편에서 놀라운 솜씨를 보인 만큼, 장편이라는 긴 분량 안에서는 더 놀라운 재미를 줄 것이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김보영의 단편집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에게나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장편은 어떻게 쓸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7인의 집행관』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스타일의 장편소설이다. 이것이야말로 김보영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한 색채의 글이 아닐까. ‘나’의 대한 존재론적인 고민을 집요하게 파고들 수 있는 구성과 환상과 SF를 섞은 듯한 오묘한 분위기의 배경, 텍스트만으로 독자의 뇌를 뒤흔드는 강렬한 체험을 주는 솜씨가 잘 녹아있는 작품이다. 기억과 인격을 제거당한 ‘자아’의 동질성의 문제, 이로 인한 철학적 물음들이 독자를 소설에 빠지게 만들고, 심층 구조 속에 내재된 과학적 근거들이 이 작품을 탄탄하게 만든다. 후반에서야 드러나는 과학적 장치들은 장르소설의 근사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호오가 갈릴 수 있는 글이다. 장르소설의 색채가 강한 만큼, 장르소설의 문법에 익숙한 독자가 아니라면 지나치게 낯설게 느끼고 소설을 읽어나가기 힘들 것이다. 장르소설의 프로토콜에 익숙한 독자라면 초반에 대번에 알아차릴 여러 가지 암시나 설정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루하고 난해한 작품으로 읽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으로 이 소설은 작가가 설치해놓은 여러 가지 장치에 대한 이해가 높을수록 작품의 재미가 살아난다. 대중적인 작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높다. 문장이 허술하거나, 구성이나 인물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그럼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처음에 보는 목차에서도 알 수 있듯이 ‘1막’, ‘2막’ 식으로 장을 구분하고 있다. 장 구분은 시에서 행 구분과 연 구분이 중요한 의미를 갖듯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이와 같은 장 구분은 작가의 의도로 이 작품이 공연 무대처럼 보이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예를 들면 ‘1막’의 무대는 21세기 한국, 조폭 사무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장마다 무대가 바뀌는 것도 이 소설의 큰 매력이다. 매번 다른 세계관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다른 세계관들을 훑어보는 재미가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은 다분히 연극적이다. 무대 세트만 바뀌면서 배우들이 각자 다른 옷을 입고 비슷한 대본으로 연기를 펼친다. 각 ‘막(幕)’ 사이에 있는 ‘사이’ 파트는 공연의 ‘인터미션’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때는 연기자들이 무대 뒤편에서 잡담을 나누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런데 이 소설의 구조상 이 ‘인터미션’의 순간이 바로 현실의 순간이고 이 작품의 실상을 독자가 추리할 수 있는 순간이다. 배우가 무대 뒷편으로 간 순간, 그 공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들어선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까지 독자가 볼 수 있기 때문에 독자는 더욱 빨리 이 소설의 진실된 모습을 추리할 수 있다. 이렇게 거짓된 세상과 진실된 세상의 복층 구조는 김보영의 장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의 표면구조와 심층구조가 나뉘어 독자를 혼란케 하는 방식은 단편들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단편 「우수한 유전자」나 「0과 1 사이」에서 거짓된 세상을 보여주고 진실된 세상을 나중에 드러내는 구조를 취함으로써 반전과 경이를 동시에 독자에게 전달한 적이 있다.(구조로는 그렇고 문체나 어조(톤)는 단편 「거울애」를 연상시킨다.) 이를 보다 확장한 세계가 『7인의 집행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독자는 단순한 관객이 아니다. 이 작품은 문학에 있어서 독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수용미학으로 볼 때, 뛰어난 장점을 가졌다. 수용미학은 “작가가 서술하지 않고 그냥 둔 ‘빈 곳Leerstelle’이 있다. 이것을 독자가 채워 넣어 독자 나름으로 작품을 보완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작가가 보내는 의미를 찾는 것이다.”(김천혜, 『소설구조의 이론』, 한국학술정보, 2010, 270쪽)라는 말처럼 작가와 독자가 함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7인의 집행관』은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진행하는 스토리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즉, 선형적 내러티브가 아니라) 앞의 이미 중요한 사건은 벌어졌고, 그 결과의 사건을 실시간 장면으로 연극 무대처럼 ‘가상현실’을 이용해 선보이고 있다. 즉, 이 작품은 장편임에도 서술되는 시간이 서술 시간보다 긴 축시적 소설(서술되는 시간 > 서술 시간 → 축시적 소설)이 아니라, 서술되는 시간과 서술시간이 연극처럼 동일한 동시적 소설(서술되는 시간 = 서술 시간 → 동시적 소설)이다. 이는 실시간으로 독자가 눈앞에서 계속 벌어지는 일을 목격하는 느낌을 준다. 즉 소설을 생동감 있게 만들며 흡인력을 증대시킨다. 이렇게 연극처럼 계속 대화 위주로 바로 공연처럼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장면 위주로 장편을 끌고 가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장편소설은 1년이나 몇십 년 단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대부분의 장편소설은 축시적 소설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장마다 매번 무대를 바꿔나가는 구조를 취해서 이를 성공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장단점이 있다. 앞서 말한대로 실시간으로 벌어지기 때문에 현장감을 느낄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같은 인물들이 배역만 바꿔서 매 장마다 비슷한 구도를 취하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낄 여지가 있다. 물론 이를 해소하는 장치는 있다. 바로 ‘추리’의 요소이다. 이 소설은 일종의 추리소설 또는 추리극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독자가 계속 추리를 하게 만든다. 수용미학의 입장에서 독자는 작가가 낸 문제를 풀어서 이 작품을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다.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모든 사건을 온전하게 복원해내는 순간, 소설 속 주인공 역시 모든 기억을 복원해낸다. 독자와 주인공이 동일시되는 것이다. 여기서 오는 쾌감은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독자가 세상의 실체를 읽어내려는 노력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독자가 읽으면서 쓰는 소설이며,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모든 미스터리를 풀어야 한다. 시작은 이렇다. ‘나’는 누구인가. 또한, 이 세상의 진실된 모습은 무엇인가. 주인공이 벌인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조정자는 누구인가. 선조의 유산인 가상현실 프로그램은 어떤 원리인가. 왕의 시해자는 누구인가? 이 세계는 정말 거짓인가. 그리고 귀신은 존재하는가. 미스터리는 끊임없이 쏟아지고, 매 장마다 조금씩 단서가 주어진다. 따라서 반복되는 장의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씩 단서를 찾는 재미, 조금씩 밝혀지는 세상의 실체를 알아가는 재미로 인해 이 작품은 큰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끝까지 읽어나가게 된다.

 조동일 교수는 소설이라는 장르를 “외적 자아의 개입이 있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 양식”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구도로 표면적으로만 이 작품을 살펴보았을 때, 소설의 ‘내적 자아’는 두 개로 분열되어 있으며 ‘내적 세계’는 8개 이상으로 분열되어 있다. ‘내적 자아’는 온전한 기억이 있는 ‘자아’와 기억을 잃은 ‘자아’로 나뉠 수 있다. “나는 이제 이 시계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내 손에서 떠나보내게 될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 시계는 내게 아주 소중한 것이다.”(13) 라는 말이 고딕체로 표현되는데 이는 기억을 잃기 전의 진짜 ‘내적 자아’다. 시스템의 빈틈을 뚫고 ‘내적 자아’는 기억과 인격을 잃은 거짓 내적 자아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이 진실한 목소리는 고딕체로 표현되며 계속 복층 구조의 소설에서 힌트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이 소설은 끊임없이 ‘기억, 지식, 지력, 사고능력, 판단능력, 신체능력’을 모두 잃고 ‘나’를 유지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이 물음은 흥미로운데, 이 작품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느 정도 나오기 때문에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주인공의 내적 자아는 백지 상태로 매번 새로운 세계에 덧씌운 기억으로 살아간다. 이는 ‘환생’, ‘윤회’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매번 비슷한 행동과 사고를 하는데, 이는 근원의 ‘나’가 조금씩 드러나서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잃고도 ‘나’를 유지할 수 있으리란, 신비적이고 경이로운 분위기가 작품을 긴장감 있게 만든다. ‘나’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기억’인가. ‘육체’인가. 이런 성찰들이 작품 곳곳에 배어 있어 매혹적이다. 여기서 ‘내적 세계’는 가상현실로 구성되는데, 이는 ‘꿈’, ‘다른 시간대’, ‘평행 우주’ 등을 연상시킨다.(이 소설 속 가상현실은 ‘꿈’으로 자주 비유가 되는데, 이 작품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전부 꿈으로 처리되더라도 그 의미는 퇴색되지 않으며 오히려 외적 세계의 외적 자아인 우리네 꿈들이 이 작품 속과 마찬가지로 무게감을 가진다는 점은 재미있는 은유로 다가오게 한다.) 실제 서술에서도 이 세계가 단순한 가상현실이 아니라 실제 다른 우주일지도 모른다는 언급을 하여, 독자로 하여금 빈 부분을 채우게 만든다. 이를 다른 시공간의 분화로 본다면(영화 『소스 코드』 같이) 이 작품의 내적 세계는 실제 내적 세계와 가상현실의 내적 세계 말고도 7개의 내적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작품의 스케일이 커진다. 이런 확장으로 인한 경이감은 SF의 코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구조가 7개의 막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매번 연극 무대가 바뀌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했는데, 이를 연극무대의 단위로 보는 게 아니라 평행세계처럼 본다면 우주를 넘나드는 자아의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정체성이라기보다는 자아의 근원을 유지하는 우주적 미스터리처럼 보인다. 끊임없는 꿈 속의 꿈이라는 이미지는 작가의 단편 「몽중몽」에서 제시되었던 것이지만, 그것이 깊이 내려가는 하강의 이미지라면 이번에는 수평적으로 세계를 이동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 소설이 단순히 부도국의 왕자 흑영이 형이자 주군인 왕을 시해한 죄로 여섯 개의 세계에서 여섯 번의 사형을 구형하는데 그치는 이야기라면, 독자는 이야기를 읽을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줄거리만으로는 참신하고 매혹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단 한 줄로 함축되어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는 소설이라면 줄거리만 읽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모든 게 미스터리이고, 음모처럼 보인다. 주인공은 수 겹으로 꼬인 음모 속에서 한 줄기의 진실을 찾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것도 기억과 인격을 잃은 채로 풀어야 하는 미스터리. 단서라고는 “-내기를 기억하라.”(11)라는 말뿐이다. 처벌을 받기 전에 어딘가에서 내기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말로써, 자아가 바뀌었음에도 내기가 있었다는 말만은 꿈처럼 남는다. 이 소설의 중요한 복선이라고 할 수 있는 장치다. ‘내기’라는 단어 하나를 기억한다고 해서 기억과 인격을 잃은 채로, 집행관에 의해 6번의 죽음이 집행되는 상태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미 제목에서부터 이야기는 단순히 6번의 죽음이 집행되고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독자는 흥미를 가지고 이 작품을 읽어나갈 수밖에 없다. 삶이 단순하지 않듯, 소설 역시 복잡한 구성으로 독자와 두뇌 게임을 벌인다.(이 게임은 흥미롭게도 텍스트에서만 가능한 트릭을 사용하여 소설의 매력을 강조한다.) 기억과 인격을 잃은 주인공이기에 반복되는 주인공의 진술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집행관과 독자 모두 혼란스럽다. 이 혼란이 이 소설의 매력인 셈이다. 독자를 능수능란하게 흔들고 헤집어놓을 수 있는 작품이란 매력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세계가 변화할 때마다 소설의 매력이 달라지는데, 초반에 조폭물에서는 피 튀기는 액션 장면을 깔끔하게 묘사해서 인상적이었다. 집행관들이 신처럼 그려진 세계에서는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로저 젤라즈니, 김상훈 옮김, 행복한책읽기, 2006년 4월)가 떠오르면서 매력적이었고, 종말 이후의 세상에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을 읽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이렇게 세계를 형성하는 것은 가상현실과 필립 K.딕을 연상케 하는 기억 조작이다.(이미 이 두 개의 소재만으로 세계를 바꾸면서 처벌하는 발상이 가능한 만큼, 이를 바탕으로 무한한 우주가 생성될 수 있고 무한한 거짓 인격과 가상의 인물이 나올 수도 있다.) 가상현실과 기억 조작이라는 소재를 조합하면 소설을 무한한 방향성을 지니기 때문에 작가가 제대로 조정을 하지 않으면, 독자가 받아들일 수 없을 이야기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작가는 차분하게 단계별로 소설의 설정을 드러내면서 그런 위험성을 제거했다. 기억조작은 주인공의 자아를 새로운 세계에 데려다 놓는 장치로 한정했다. 그러면서도 기억조작을 통해 소설의 암시와 복선으로 활용하면서 독자와 집행관 주인공까지 모두 혼란에 빠트리는데 성공했다. 기억 조작은 매력적인 설정이다. 제대로만 살린다면 소설의 긴장감을 부여하며 장르소설의 재미를 마음껏 펼칠 수 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혼란스럽게 만든다면 거기서 오는 희열도 그만큼 크다. 기억 조작은 ‘자아’의 인격을 형성하며 존재론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한 소재이다. 우리는 모두 기억을 통해 우리를 확신한다. 삶을 살아가는 것은 기억을 쌓는 일이며, 죽는다는 것과 흡사한 것이 기억을 제거하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기억 조작이 가능해서 자유자재로 다른 기억들이 삽입되고 다른 인격이 만들어진다면 ‘나’는 ‘나’일 수 있을까. 테세우스의 배처럼 풀리지 않는 고찰이다. 기억이 ‘나’일까. 기억이 아니고도 ‘나’일까. ‘기억’이 없다면 없는 일이 될까. 세상도 나도. 기억을 조작하면 세상을 창조하고 인물도 창조할 수 있을까. 그럼 어떤 게 진실일 수 있을까. 진실과 거짓도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닐까. 삶은 기억인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이 있는가.

 초반부터 압도적인 이미지로 밀고나가는 소설이며, 마지막의 결말은 인상적이다. 중간에 언변으로 독자와 집행관을 모두 거짓과 진실의 파도 속에 몰아놓는 기술도 뛰어나며, 인물을 형상화도 제한된 정보를 조금씩 흘리면서 안정되게 이뤄냈다. 장막 공연을 본 느낌이다. 장편소설임에도 비슷한 처형이 반복되면서 깔끔한 하나의 단편소설을 읽은 듯한 느낌도 받는다. 결국에는 다 읽고 나서 모든 사건이 함축된 하나의 에피소드가 머릿속에 정리된다. 완성된 퍼즐, 시작하는 삶, 단 한 번의 생과 사. 꿈은 끝났다.
 집행관들이 고혹적인 분위기가 일관되게 흐르고, 매번 피 흘리며 죽는 주인공이 처절한 분위기를 이끌어내어 긴장감을 조성한다. 때로 어떤 소설들은 한 번이 아니라 반드시 두 번 읽어야 하는 소설들이 있다. 『7인의 집행관』 역시 마찬가지다. 복잡한 구조와 인물들도 인해, 단 한 번에 소설의 전체 모습을 이해하고 수용하기란 쉽지가 않다. 독자가 추측을 통해 작품을 완성한 뒤에. 다시 한 번 완성한 작품을 감상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때서야 온전한 『7인의 집행관』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심장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이야기였다. 또한, 머리를 상쾌하게 만드는 복층 구조가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서사를 읽고 싶은 독자라면, 『7인의 집행관』을 추천한다. 자아와 기억, 세계에 대한 대립을 환상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분명 경이로운 가상세계를 체험할 것이고, 세계 너머의 세계를 가닿게 만들 것이다.■


 나는 보지도 않고 다음 놈을 찌른 뒤 날이 박힌 손으로 마지막 놈의 목을 온 힘을 다해 눌렀다. 면도날이 내 손과 그의 목을 동시에 눌렀다. 그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도니 뒤에야 나는 깊이 박힌 면도날을 이빨로 물어 빼낸 뒤 땅에 뱉었다. 피 맛이 지리다.(44)


 “밖으로 나가면 모두들 이것이 긴 악몽이고 꿈이었으며, 네가 죽음에 이르러 만들어낸 환상이었다고 믿을 것이다. 가끔씩 모여서 말하겠지. 세상에 의혹은 많지만 진실은 결국 알 수 없는 것이라고.”(412)


 내가 나라면.
 나는 벽을 우그러트리고 일어나며 생각했다.
 기억을 잃고도 능력을 잃고도, 지식과 지력을 잃고도, 판단력과 취향과 성격과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잃고도 내가 나일 수만 있다면.(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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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김이환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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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흰색 상자를 열며

 여기, 흰색 상자가 하나 있다.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상자다. 어디로 열어야 할지 모를 정도다. 조그맣게 ‘OPEN’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자, 상자를 열어보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소원이 이루어질까? 비극이 벌어질까?
 아홉 개의 이야기가 주먹만한 상자 속에 담겨 있다. 이야기는 때로는 섬뜩하게도 다가오지만 한편으로는 입가에 내내 미소를 띄울 정도로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사람의 본성이다. 이야기가 곧 삶이기에. 삶은 이야기이기에.
 김이환 작가의 아홉 번째 작품 [오픈]은 연작소설이다. 환상소설이면서 연작소설은 그렇게 많이 나오는 장르는 아니다. 초고층 건물을 소재로 한 연작소설집인 배명훈의 [타워](배명훈, 오멜라스(웅진), 2009년 6월)나 소원을 이루어주는 남자가 등장하는 한 저택을 중심으로 한 하지은의 [보이드 씨의 기묘한 저택](하지은, D&C미디어, 2010년 3월) 같은 몇몇 연작소설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단권으로 된 환상소설 연작은 희귀하다고 할 수 있다. 김이환 작가의 [오픈]은 소원을 이루어주는 하얀 상자를 소재로 한 연작소설이다. 연작소설이 흔히 공간이나, 인물을 중심으로 한다고 할 때, 도구를 중심으로 한 이 작품은 약간의 긴밀한 연관관계는 떨어지는 편이다. 어떻게 보면 ‘상자’라는 소재만 겹칠 뿐, 독립적인 단편들이 실려 있는 느낌이었다.(상자가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점만 빼고는 공통적으로 묶을 지점이 없기에 그만큼 각 작품의 자유도가 높았던 것이다. 즉, 이야기나 사건, 시점 등이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단편이 잘 읽혔고 흥미로웠다. 물론 단편집들의 특성 상 모든 단편이 마음에 들 수는 없고, 사람마다 취향에 따라 가장 마음에 드는 한두 편이 생기고 나머지는 아쉬운 점이 크게 다가오긴 하나,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재미가 고른 편이라고 느꼈다. 문장이 깔끔했고, 구성도 단정했으며, 특히 마지막 단편을 통해 ‘상자’를 소재로 한 한권의 연작소설을 이루기 위해서 여러모로 신경 쓴 점이 느껴져 좋았다.
 각각의 단편의 독립성 때문에 이 리뷰 역시 전체적인 평보다는 각각의 작품별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한 작품씩 살펴보자.

 그의 상자

 이 연작소설집의 첫 번째 실린 단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은 단순함 감이 있고, 이야기가 그리 인상적이지도 않다. 어떻게 보면 도입부이기 때문에 독자에게 ‘상자’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인 것처럼 보인다. 즉, 소설의 핵심은 인물이 아니라 상자라고 할까. 이렇게 처음에 상자를 선보여야 이어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다시 설명할 필요 없이 상자만 제시되어도 모든 게 이해 가능할 테니 당연한 선택처럼 보인다. 또한, 이야기 역시 이런 도입부라는 점 때문에 희생된 면이 있다. 전통적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물체로 인해 벌어지는 단순한 서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환상적으로 처리되었고, 기괴하기는 하나, 새롭거나 매력적으로 비치지는 않는다. 작품 전체적으로 미국의 환상특급이나, 일본의 기묘한 이야기 같은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는데 이 작품만이 개성이 가장 떨어지는 면이 있다. 한 남자가 소원을 이루어주는 상자를 받게 되고 소원이 정말 이루어지나,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은 이야기를 읽는 초반에 이미 독자들은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제는 식상한 구조라서 아쉬운 점이 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대중에게 쉽게 다가오는 이야기라는 점, 깔끔한 문장과 전개로 쉽게 상자를 독자에게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도입부의 기능적으로는 안정적인 느낌이었다.

 호랑이의 상자

 술에 깨어나 보니, 갑자기 자취방에 호랑이 탈을 쓴 사람이 밥을 차리고, 청소도 하고 옷도 정리한다. 기묘한 시작으로 이야기는 점점 환상적으로 치닫는다. 호랑이 인형 옷에 호랑이 탈을 쓴 사람이 말없이 일을 하고 이곳저곳 끌고 다녀, 귀여운 정서를 느끼게 만들었다.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전개해나가서 차분하게 수수께끼를 생각하며 이야기를 즐기게 된다. 담백한 이야기였고, 끝에 가서는 좀 뻔한 반전이지 않나 싶긴 하지만 호랑이 탈 쓴 인형의 귀여운 이미지가 인상에 박힌 작품이었다. 한편의 우화처럼 읽힌다.

 꼬마의 상자

 앞의 두 편에 비해 여기서부터는 좀더 신선하고 재미있는 느낌을 받았다. {꼬마의 상자}는 그 서막을 연 작품인데, 꼬마의 시점에서 사건을 관찰하고 있어서 더욱 흥미롭고 재미있었다고 할 수 있다. 꼬마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환상적으로 처리되면서, 한편으로는 매우 긴박하고 잔혹한 사건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독자는 상상으로 보완하게 된다.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 작가가 쓰지 않은 부분을 상상하고 보완해서 같이 작품을 완성하는 수용미학의 관점에서 이 작품은 특히 매력을 더한다고 할 수 있다. 꼬마의 시선은 제한적이고 단순하며 모호하게 처리된 부분까지 있기 때문에 그 단절을 독자는 계속 채우려고 하고 그로 인해 상상의 폭이 넓고 더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작가의 역량이 상당히 발휘된 작품으로 보였는데, 그 이후는 꼬마의 제한된 시선으로 쓰는 게 상당히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분량도 상당히 많은 편이며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읽었고, 인상에 깊이 남아서 다 읽고 나서 뇌리에 남는 두 세 개의 작품 중 하나였다. 이 작품에서만 흐르는 미묘한 공기, 독특한 정서가 읽는 내내 머릿속을 간질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읽어보면 무슨 느낌인지 알 것이다.

 아들의 상자

 {아들의 상자}는 거의 대부분이 대화로만 이루어진 소설이다. 단편소설에서 대화로만 처리하는 방식이 낯선 실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런 환상소설이면서 또한 연작소설집에서 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듯 이 소설은 앞에서 꼬마의 시점으로 진행하면서 흥미를 끌다가 이번에는 대화 위주로 단편을 씀으로써 독자가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기법으로 여러 서사를 연주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이 연작소설집 전체가 흥미롭게 느껴지며 작가가 재미있게 쓴 느낌을 받게 되고 독자 역시 즐거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대화를 통해서 두 인물이 어떤 관계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기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럼에도 강렬한 대립 과정과 반전을 대화만으로 표현해 내면서 독자에게 재미를 느끼게 하고 있다. 대화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문이 없다고는 하나 희곡적인 작품이었다. 대화는 독자에게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즉, 소설 내의 시간인 ‘서술되는 시간’과 독자가 읽는 시간인 ‘서술시간’이 동일한 소설로 독자가 현장감을 느끼며 작품을 읽게 된다. 대화를 통해 단적으로 제시된 정보들은 수용하는 독자가 보완하면서 이 작품 역시 함께 완성해 나가는 글이다. 실험적인 성격 외에도 이야기의 스케일이 앞의 세 작품에 비해 갑자기 커졌고 작위성이 높은 상황 설정으로 인해 이 작품의 이질감은 전체 연작소설 중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다른 소설들이 같은 한국에서 동시간대에 벌어지는 느낌을 준다면, 이 소설만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준다.

 엄마의 상자

 아기자기하면서 당황스럽고 독특한 느낌을 주는 단편으로, 역시 인상에 남은 단편 중 하나였다. 다른 작가들은 쉽게 묘사해내지 못할 현실 속에서 능청스런 장난을 펼치는 작품인데, 장난의 도를 높여서 환상적인 느낌까지 자아낸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묘한 정서를 내는데, 김이환 작가만이 가진 개성이 이끌어낸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엄마가 어느 날 부턴가 갑자기 온 동네에 장난을 하는데, 이 장난의 강도가 높고 워낙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곳에 동시다발적으로 벌이면서 일본 드라마이자 영화인 [기묘한 이야기] 같은 느낌을 준다. 일상적 인물들 사이에서 약간 비틀어진 비일상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 작품은 또한 다른 작품들과 다른 이질감을 내는데, 그건 ‘상자’가 동떨어진 듯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상자를 암시하는 듯한 장면 처리가 없었다면, 일상의 급작스런 변화를 다룬 일반 단편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현실에서는 절대 벌어지지 못할 것 같은 한 엄마의 장난의 연쇄 속에서 단편적인 구성을 취하며 이야기를 능숙하게 봉합하고 있다. 읽으면서 괜히 내가 민망하고 당혹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유쾌한 느낌이 드는 재기발랄한 단편이었다.

 노인의 상자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이야기. 앞의 {엄마의 상자}까지 읽고 나서는 이제 독자는 ‘상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작가가 이번에는 얼마나 기이한 이야기를 뻔뻔하고 능청스럽게 펼칠까, 기대하게 된다. {노인의 상자} 역시 어딘가 들어봤을 법한 저승사자 이야기를 비틀어서 전개하는데, 그러면서도 작가만의 독특한 개성적 분위기를 놓치지 않으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단편에서 독자가 예측하기 힘든 이야기 전개를 하는 것은 힘들지만, 중간까지는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몰라서 흥미로우며, 특히 독자가 단순하게 읽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를 추리할수록 더욱 재미있는 단편이었다.
 노인이 죽기 직전 상자를 가지고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하루 빌리는데 천 만원이라고 하는 순간, 높은 가격대에서 오는 묘한 현실감이 든다. 은행에서 돈을 빼서 하루의 시간을 갖고 그 돈 쓴 것을 자식들이 추궁하면서 기이한 리얼리티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고 재미있게 읽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여기서 액수는 점점 커지고 노인은 계속 삶을 늘려나간다. 그 과정이 시트콤처럼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김이환식 저승사자 이야기랄까.

 두 사람의 상자

 앞의 이야기가 김이환식 저승사자 이야기라면, 이번에는 김이환식 도플갱어 이야기나 복제인간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상자를 본 순간, 상자를 주운 사람과 안 주운 사람으로 분리되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역시나 또 다른 자신이 생겼는데도, 무섭거나 기괴하게 처리하는 게 아니라 쉽게 받아들인다. 이런 점이 이 연작들이 몇몇 작품을 빼고는 비슷한 정서를 띄게 하는 요인으로 보인다. 내가 둘이 되면 어떨까. 이런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몇몇 작품에서 기괴하게, 무섭게 다루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천연덕스럽게 다루면서 재미를 주고 있다. 물론 앞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깊이 생각할 여지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의 상자

 이 단편 역시 {아들의 상자}처럼 대화 위주로 쓰인 작품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들의 상자}가 나라간의 전쟁이라는 상당히 큰 스케일의 이야기를 대화로 풀어냈다면, {다른 사람의 상자}는 한 남자가 윗집에 일어나는 일에 관여하면서 벌어진 일을 풀어내고 있다. {아들의 상자}가 대화를 통해 동시간대의 일을 독자가 눈앞의 연극처럼 보는 느낌이라면, {다른 사람의 상자}는 취조 과정을 통해 사건을 되짚어보는 형식이다. 즉, 사건이 현재 실시간으로 대화를 통해서 진행되는 게 아니라, 이미 벌어진 사건을 복기하는 것이다. 이때, {아들의 상자}가 바로 갈등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장감이 뚜렷한 작품이었다면, 이 작품은 사건은 이미 종결된 이후이기 때문에, 추리소설처럼 범행이 끝난 후, 독자가 탐정이 되어 범행 과정을 되짚어보는 식의 구조를 취한다. 퍼즐을 맞추는 구조이기도 하다.
 문답을 통해 사건을 설명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서사나 인물이 인상적이거나 아주 특이한 환상이나 설정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사건을 복기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글이다. 즉, 독자가 대화를 통해서 사건을 재구성하는 재미가 있다. 분량을 짧고 실험적인 형식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소품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친구의 상자

 주인공인 김성진은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이다. 회사가 부도 나기 직전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내내 돈 생각을 한다. 갑자기 돈벼락이 쏟아질 일이 있을까? 그런데 옆 좌석에 앉은 남자가 술에 취해서는 핸드폰으로 통화를 한다. 내용이 심상치 않다. 로또 번호를 맞춰보더니 2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가는 방향이 같아서 남자를 뒤따라가게 된 김성진은 뺏을까, 라는 고민이 든다. 종이조각 하나만 빼내면 무려 7,000만원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는 “누구나 소원 한두 가지씩은 있죠, 그렇죠?”라며 로또 영수증을 하라는 대로만 하면 주겠다고 말한다. 기이한 일이다. 상자에 다른 사람이 신고 있는 양말 한 짝을 받아서 넣어오기만 하면 7,000만원을 준다니?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다. 이제 김성진은 양말 한 짝을 구하려고 움직인다. 흥미로운 설정,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아니고 잠시 쉬어가는 이야기처럼, 소품으로 느껴지는 글이었다. 발상이 앞에서 {엄마의 상자}처럼 일상 배경에서 약간 비튼 방식인데, 기묘한 우연이 이어지면서 사건은 단순하게 결말을 맺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일종의 징검다리다. 바로 마지막 에피소드인 {아내의 상자}에 도달하기 위한.

 아내의 상자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은 일종의 메타픽션처럼, 앞의 나온 이야기들이 텍스트화 되어 등장한다. 소설 속의 소설인 셈인데, 지금까지 읽었던 이야기들이 이 단편 안에서 소설로 등장하니 그 느낌이 묘하고 재미있었다. 마지막 단편인 만큼 연작소설집 전체를 하나로 봉합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 남자의 사무실로 흰색 상자가 배달된다. 발신인이 없는 빈 선물 상자가 배달되었지만,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 무가지의 퀴즈를 풀다가 문득 포장지가 배달된 물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포장지를 살펴보니 그 정체는 소설이다. 바로 소설의 제목은 이 책의 제목인 [오픈]이고 {그의 상자}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바로 이 책의 첫 번째 실린 단편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지금 이 소설 속 화자가 읽는 그 소설이 자신이 맨 처음 읽었던 바로 그 단편이라는 것을 안다. 같은 텍스트를 공유하지만, 다른 것은 화자는 소설 속에 있기 때문에 바로 옆에 그 상자가 실체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화자에게는 우리가 재미로 읽는 이 책이 일종의 매뉴얼이자 예언서인 셈이다. 독자는 이 단편을 읽으면서 차례차례 앞에 읽었던 단편을 화자와 함께 공유하며 되짚어볼 수 있게 된다. 계속 소포가 도착하는 것이다. 작가가 직접 마지막 단편에 자기가 쓴 단편들의 내용을 간추려서 작품에 녹여냈다는 점이 재미있게 다가온다. 독자는 소설 속 화자와 함께 앞의 이야기들의 감상을 나누는 기분마저 들게 된다. 그리고 앞의 소설들에서 상자가 어디에 등장했고, 왜 소설마다 결말이 다른지에 대해서 화자가 추리하는 부분을 읽으며 일종의 작가의 해설을 읽는 느낌도 들고, 또 다른 독자의 리뷰를 읽는 기분도 들면서 신기한 기분에 빠지는 것이다. 게다가 예전 MBC 드라마 [테마게임]처럼 바로 앞 {친구의 상자} 속에 화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급속도로 짜맞춰지며 결말로 향한다. 이런 장치들이 이 소설의 매력을 더하고 있고, 소설 자체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깔끔한 결말을 맺으면서 깊은 인상을 준다. 연작소설이 하나의 잘 짜인 구성처럼 느껴지게 만들며, 독자가 한 권의 장편소설을 읽은 것처럼 충족감을 들게 하는 마지막 단편이었다.

 흰색 상자를 닫으며

 특이하고 또한 특별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몇몇 단편은 이런 종류의 영상매체나 소설을 많이 읽어온 독자들에게는 식상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또 몇몇 단편은 분명 독특하고도 개성적인 정서를 띄며 독자를 사로잡는다. 작가는 능청스럽게 종이로 만든 하얀 상자 가지고 아홉 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괴이하고, 기이하면서 환상적이고 참혹하거나 때론 처연한 이야기들. 생각할 수 없는 반전이나 강렬한 인물, 첨예한 갈등, 엄청난 스케일의 작품은 아니다. 애초에 하나의 공통된 소재로 모인 단편들일 뿐이기 때문에, 단편집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는 책이다. 그런 관점에서 단편소설의 다채로운 매력을 품고 있는 책이다.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들이 김이환 작가만의 독특한 색채로 그려지고 있다. 완숙한 문장과 깔끔한 전개가 연작소설들을 하나로 묶어 준다. 물론 단순한 단편집은 아니다. 아홉 개의 이야기의 배치 순서부터 치밀하게 구성된 것을 알 수 있다. 도입부의 단순함부터 마지막의 모든 이야기를 내포하는 이야기까지 독자가 상자에 대해서 하나씩 새로운 정보들을 접하고 이야기를 다르게 볼 수 있게 맞춰 놓았다. 첫 번째 단편에서는 기존의 여러 공포소설처럼 소원을 들어주며 파국을 맞게 하는 단순한 ‘상자’처럼 보이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상자가 꼭 파국을 불러들이는 것도 아니며, 기존에 있던 이야기만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다른 인물과 구조의 이야기를 펼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독자의 예상을 깨트리는 재미를 주는 것이다.
 가볍게 읽어나가게 만들고, 현대를 배경으로 기이한 환상을 경험케 한다. 즐거운 이야기들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이 흰색 상자를 열기 주저하지 않은 것처럼, 여러분도 한 번 [오픈]을 열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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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소녀 욜란드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박애진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폴라북스에서 나온 박애진 작가의 [부엉이 소녀 욜란드]는 독특한 환상 소설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엉이 소녀’라는 특이한 설정을 가지고 쓴 장편 환상소설이다. 실제로 부엉이가 소녀로 변신한 것이 아니라, 부엉이에게 자란 한 소녀가 자신의 비틀어진 운명을 찾아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자아 찾기’의 일종으로 동화풍의 소설이지만, 일반적인 동화로 볼 수는 없으며 ‘어른들을 위한 동화’에 가까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어떻게 보면 청소년소설을 연상케 하는 구석도 있다.) 이런 종류의 환상소설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일단 그 희귀성이 갖고 있는 매력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를 띄게 했다. 국내 환상소설의 다수가 검과 마법을 바탕으로 한 모험물임을 감안할 때, [부엉이 소녀 욜란드]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성장소설에 가깝다.(욜란드가 두 세계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는 점에서, 여로형플롯으로 된 각성형 성장소설(Initation story)로 볼 수 있다.) 원래 환상소설과 성장소설은 겹치는 경우가 많지만, 국내 작가에 의해서 집필되는 사례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부엉이 소녀 욜란드]처럼 매력적인 문장과 세계관, 구성, 인물이 잘 조합된 소설을 만난 것은 좋은 일이었다.

 

 마녀는 흠이라도 있는지 꽃잎을 구석구석 살피며 솥 안에 넣었다.
 “가장 고운 꽃잎만을 모아왔습니다요.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모두 오늘 피운 꽃으로…….”
 “소녀의 머리카락은?”
 까마귀는 날갯죽지에서 소녀가 태어나 처음으로 자른 머리카락을 꺼내 내밀었다. 마녀는 머리카락을 곱게 쓸더니 솥 안에 넣었다.
 “벚꽃가루.”(10쪽)


 프롤로그는 마녀의 마법으로 시작한다. 이 프롤로그만 가지고는 어떤 작품인지 전체 모습을 그려볼 수 없으나, 동화풍의 세계라는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마녀가 나오고 고양이와 까마귀, 그리고 솥에다가 온갖 재료를 붓고 마법을 거는 장면은 여러 동화 속에서 본 마녀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익숙한 장면조차 대충 처리하는 게 아니라 안정된 문장력으로 세세히 묘사하면서 독자에게 사실적인 장면으로 전달한다. 여기서 장면이 눈에 보일 듯하면서 소설의 개성적인 매력이 살아난다.
 그 다음 장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움트다’라는 장에서는 훨씬 매력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환상소설은 현실이 아닌 다른 2차 세계를 그리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세계관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독자 역시 최대한 이 세계를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텍스트가 놓여 있다. 작가는 고운 문장으로 세계를 채색한다.

 너른 들판 한켠에 자리한 절벽이 노을에 물들어 주홍색으로 빛났다. 욜란드는 절벽에 자리한 둥지에서 상체를 빼고 저물녘 하늘을 즐겼다. 황금빛 머리가 붉게 물들고 등 뒤로 긴 그림자가 졌다. 물에 비친 달처럼 일그러진 태양과, 욜란드의 머리와 같은 색으로 빛나는 하늘을 배경으로 까만 그림자가 춤추듯이 움직였다. 그림자는 습지를 지나는 거대한 구렁이러첢 꿈틀대다가 목을 늘인 자라가 되었다가 둥글게 뭉치는가 싶더니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검은부리오리 떼가 추는 군무였다.
 욜란드는 습지에 가본 적이 없었다. 가는 길에 표범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었다. 표범과 마주한 건 한번뿐이지만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15쪽)


 독자는 이미 프롤로그에서 호숫가에 마녀가 솥에 기이한 재료들을 넣고 마법을 부리는 것을 보았다. 이 동화풍의 세계는 욜란드의 등장으로 더욱 확장된다. 그리마와 셰퍼드라는 부엉이에 의해 자라는 욜란드.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부엉이 소녀의 등장. 이 소설의 특이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렇다고 부엉이처럼 날개가 돋은 것도 아니고, 날아다닐 수도 없다. 욜란드는 야생에서 자란 발가벗은 소녀에 불과하다. 연약한 살은 언제든 쉽게 찢길 수 있고, 인간의 규칙은 알지 못하는 순진한 존재다. 독자는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이 아이는 왜 부엉이에게 길러지는 걸까. 이 아이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흐를까. 그리고 그 전에 독자는 그리마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날개 길이만 욜란드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산솔부엉이, 그리마. 온 부엉이의 어머니라는 신비한 생물. ‘그리마’라는 이 신비한 부엉이나, ‘약속 나무’, 태어나 자란 곳이 축복해 주는 날, 온 부엉이의 어머니만 갖는다는 시간의 그림자를 나는 날개는 이 소설의 신비함과 매력을 더한다. 동화적인 상상력, 환상성이면서 앞의 마녀처럼 도식화된 모습이 아니라 개성을 갖고 독자를 사로잡는 마력을 발휘한다. 독자는 이 세계에 흥미를 느끼고, 이 지점부터 이 소설의 세계를 더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독자를 2차적 시공간으로 편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부엉이 소녀 욜란드]만의 세계관이 성립되고, ‘욜란드’라는 캐릭터가 제시되는 장이기도 한다. ‘욜란드’라는 캐릭터는 단지 부엉이에게 자란 소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는 이 시점에서 욜란드와 마찬가지로 출생에 대한 비밀을 모르고 있다. 출생은 욜란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근원이다. 또한, 욜란드를 그리마가 거둬들임으로써 욜란드는 인간이면서, 실제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시공간을 나는 ‘그림자를 나는 날개’를 가지고 있다. 이 설정은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데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간 시간을 보고, 다가올 시간을 볼 수 있는 그림자를 난다는 설정은 환상적이고 경이롭다. 환상소설의 매력을 충분히 함축하고 있는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날개가 욜란드에게 주어짐으로써 ‘부엉이 소녀’라는 정체성이 확립된다.

 욜란드는 그녀의 말에 따랐다. 벌판에 거대한 불이 일었다. 멧토끼, 들쥐, 노루가 불을 피해 달아났지만 역부족이었다. 약속 나무와 떡갈나무만이 아니라 몇백 년을 살아온 나무가 까맣게 타오르고, 나무에 살던 투구벌레, 매미, 자벌레가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개미들은 이 와중에도 알을 꺼내 달아나려 했지만 불길이 한 번 지나고 나자 모두 녹아 없어졌다. 날아서 피하던 꿩과 까치, 제비가 독한 연기를 들이마시고 화염 속으로 추락하고, 한 손에는 새끼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나무를 타던 굵은꼬리원숭이가 새끼를 놓치고, 뒤이어 자기도 떨어졌다. 큰 소쩍새 수컷이 암컷이 알을 낳는 둥지를 지키다 불이 나무를 덮치는 순간, 날개를 펼쳐 입구를 막았다. 나무가 통째로 불탔다. 시커먼 연기가 그녀가 있는 곳까지 올라왔다. 욜란드는 숨을 쉴 수 없었다.(52쪽)


 그런데 욜란드가 그림자를 날아서 본 광경은 벌판에 불이 나는 파국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을 시간대이며, 욜란드와 그리마가 없는 미지의 시간대. 불안한 징조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리마 역시 욜란드에게 의미심장한 부탁을 한다.

 
 “인간 세상으로 간 뒤에도 우리를, 부엉이를, 벌판을 기억해주겠니? 널 거둔 건 나 혼자가 아니란다. 벌판이 널 받아준 거야. 네 아이한테도 알려주겠니? 네 생명이 우리에게 왔음을, 고로 네 아이의 생명도, 그 아이가 낳을 아이도 우리한테 왔음을 잊지 않고 이야기해주겠니?”(54쪽)


 이렇게 ‘그림자를 나는 날개’와 그 능력, 그리고 다가올 파국이 강조되면서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의 후반부가 굉장히 무겁고 자연과 인간의 대립으로 갈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의 세계처럼 이 소설 속의 세계 역시, 인간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무참히 자연을 부술 것이고 참사가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든 것이다. 이 사이에 부엉이에게 자라난 인간 소녀 욜란드가 어떤 임무를 맡을 것인가, 기대가 되었다.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 서술 역시 그런 미래를 암시하는 듯했다.

 욜란드가 본 일이 실제로 일어나 부엉이가 생존을 두고 인간과 싸워야 할 때가 온다면, 그녀가 인간 아이와 함께했던 시간이 그들과 맞서는데, 혹은 공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56쪽)


 초반에 욜란드의 캐릭터성을 그리면서 그리마라는 온 부엉이의 어머니를 보여주며 독특한 세계관 전달에 성공한 소설은 이후 갑작스런 이야기의 전환을 꾀한다. 사실 독자는 이미 예측한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게 급작스럽다는 느낌은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제까지 욜란드가 부엉이에게 길러지리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는 당연히 욜란드가 인간 세계로 갈 것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이야기 전환은 지루함을 느끼기 전에 적당한 때에 일어난다. 여기서 반전은 과정에 있다. ‘그리마’라는 매력적이고 신비한 존재가 인간의 화살에 죽으면서 욜란드는 에드워드에 의해 인간의 길에 들어선다. 욜란드가 느꼈을 충격은 고스란히 독자에게도 전달되며 이야기의 긴장감은 이어진다. 이제 앞으로 혼자가 되어 인간 세계에 던져진 욜란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욜란드는 생각보다 현명하고 빠르게 인간 세계에 적응해 나간다. 호감을 가진 에드워드가 적극적으로 도운 탓이겠지만, 욜란드의 적응력은 놀라울 정도라서 약간은 의아함마저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너무 느릿느릿 어수룩하게 인간 세계 적응 과정을 그렸다면 소설이 늘어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프롤로그의 마녀도 나오면서 이야기는 계속 의문점을 제시한다. 마녀의 존재, 욜란드의 근원, 앞으로의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소설의 제목대로 주인공은 욜란드이고, 욜란드의 운명이 바로 곧 소설의 흐름을 좌우했다.
 ‘만나다’ 장에서는 욜란드가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 이건 욜란드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림자를 날아서 자신의 운명을 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림자를 나는 날개가 플롯을 이끌어간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반전이 일어나면서 소설은 독자를 다시 알 수 없는 운명의 흐름으로 이끈다. 이야기는 단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운명대로 흐른다면 소설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욜란드가 본 운명이 어긋나기 때문에 소설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자, 이제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이미 이 세계에 몰입해서 욜란드와 감정 이입을 한 독자라면 여기서 중단할 수 없다. 욜란드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 결말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에드워드와 함께 수도로 가서 욜란드는 사람들과 더욱 섞인다. 그 속에서 욜란드는 홀연히 길을 떠나기로 한다. 자신의 부모를 찾으러 나서는 것이다. 왜 마녀가 자신을 벌판에 나둬 죽이려 했는지, 자신의 부모는 누구인지. 그것은 곧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알려는 노력이다. 욜란드는 부엉이가 길러 인간 세상에 섞이고 나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였고, 운명이 어긋나면서 그림자를 나는 날개가 욜란드를 이끌 수도 없었다. 이제 욜란드는 온 부엉이의 어머니의 날개가 아니라, 인간의 다리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자신을 낳은 부모를 찾으러 간다. 과거와 마주해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인 것이다. 날개가 없는 인간은 언제나 다리로 땅을 걸어서 어디로든 갔다. 그것 역시 과거이자 현재와 미래를 밟아나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과거가 아름다우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만 보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미련은 분명 발목을 잡고 뒤를 돌아보게 만들 것이기에.
 간결한 문장과 빠른 전개로 독자가 지루함을 느낄 구석이 없다. 욜란드가 과거를 찾아 떠나는 부분은 자칫하면 늘어지는 서사가 될뻔 했지만, 기괴한 묘사와 놀라우리만치 현실적인 인간의 심리를 그려내면서 독자를 매번 긴장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읽어나가게 만든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씁쓸한 장면을 그리기도 하고, 현실적인 인간상을 제시하면서 소설이 인간을 보여주는 것임을 여실히 느끼게 만든다. 그 여정을 통해 욜란드가 성장함은 당연할 것이다.
 이 흥미로운 서사 전개와 성장 과정 마침내 욜란드가 도착한 지점까지, 매력적인 여정이었고, 아직 이 순진하면서도 당차고 용기 있는 부엉이 소녀를 만나지 못한 독자라면 얼른 접해보길 추천한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온 부엉이의 어머니와, 부엉이 소녀 욜란드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것이다. 그 안에서 자신을 찾아 나가는 한 소녀를 보며 공감하고 사랑스럽게 여기기도 할 것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상당히 안타까울 정도로 잘 쓰인 환상소설이었다. 동화적이면서도 개성 있는 세계관과 매력적인 인물들, 환상과 로맨스를 잘 배합한 구성과 안정적이면서 잘 그려진 인물들. 욜란드를 따라서 하나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초반에 언급한 대로 욜란드의 자아 찾기가 중심이 된 소설이 아니라, 욜란드의 성장 이후에 인간과 자연의 대립 가운데 거대한 서사가 펼쳐지고 거기에 욜란드가 중요한 임무를 맡을 줄 알았기에, 욜란드의 성장에서 결말을 맺은 이야기는 갑작스런 끝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마가 받아들인, 기대한 욜란드의 의미는 이후에 벌어지는 다른 사건들 속에서 후세의 이야기 속에서 독자가 상상으로 보완하며, 또다른 그림자를 나는 날개로 그려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계기를 준, 아름답고 정갈한 환상을 보여준, [부엉이 소녀 욜란드]의 여정을 엿볼 수 있어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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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 미래의 문학 2
고마츠 사쿄 지음, 이동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일본 침몰](고마쓰 사쿄, 이성현 옮김, D&C미디어, 2006년 8월)의 작가로 유명한 코마츠 사쿄의 장편소설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가 폴라북스 미래의 문학 두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코마츠 사쿄는 호시 신이치와 츠즈이 야쓰타카와 함께 일본 3대 SF작가로 불린다. 이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의 일본에서의 인기는 상당한데, 1997년 SF매거진 500호 기념 특집 일본 올타임 베스트에 꼽혔고, 2001년 일본 SF작가 클럽 선정 일본 SF작품 1위로도 뽑혔다고 한다. 그야말로 일본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장편 SF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펼치면 필연적으로 실망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일본에서 여러 순위에서 1위를 기록했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이 1966년에 출간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2013년인 지금의 눈으로는 아무래도 낡거나 유치한 면들이나 흔한 느낌을 주는 요소가 없지 않다. 지금의 독자들까지 완벽하게 사로잡는 고전이라기에는 아쉬운 점 역시 많이 갖고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탄탄한 구성을 바탕으로 놀라운 시간대와 초월을 거침없이 전개해나가는 그 이야기의 박력은 충분히 훌륭하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공룡을 등장시키는 압도적인 장면에서 바위 틈새에 울리는 전화기를 보여준다. 이때부터 독자는 호기심을 자극받는다. 공룡과 휴대폰이라니? 이 믿기지 않는 환상적인 장면은 장르소설의 매력이며, 이런 관습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소설에서 수많은 시간 이동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또한, 이 장면이 나중에 다시 복기될 것임을 알고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시간이동 소설의 매력이라면 바로 이 시간 퍼즐을 맞추는 것이다. 곳곳에 깔아둔 복선이 하나씩 맞춰질 때마다 희열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장에서는 중생대 지층에서 4차원 구조의 모래시계가 발견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20세기, 바로 책을 읽는 독자와 비슷한 시간대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단편처럼, '현실적 결말'은 짧게 끝이 난다. 4차원 구조의 모래시계를 발견한 사람들이 전부 실종되고,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며 조용히 여생을 마치는 여자의 아련한 에필로그까지 읽다보면 가슴이 저릿하면서도 숨겨진 내막이 궁금해서 페이지 넘기는 것을 멈출 수 없다.(또한, 이 에필로그가 두 번째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소설의 끝에는 이 에필로그에 앞선 첫 번째 에필로그가 마련되어 있다. 작가가 의도한 절묘한 배치는 소설의 전체적인 완성도와 재미를 높이고 있다.)

 이제 3장부터는 '현실적 결말'이 아닌 모든 사건의 진상이 차례차례 드러난다. 이 간극은 독자에게 경이감을 느끼게 만드는 지점이다. 20세기 현대에서 한정되었던 2장과 달리 중생대, 25세기, 45세기 등 10억 년에 걸친 시공간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이 확장 또는 초월이 이 소설의 근원이자 매력인데, 이를 위해서 불필요한 설명이나 감정적인 교류는 최대한 절제하고 오직 설정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데만 주력했다. 따라서 짧은 분량 안에서 놀라운 시간대를 다루는데, 이 서술시간과 서술되는 시간의 대비가 소설의 속도감과 스케일을 확장시키고 있다. 한 번에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스케일이며, 2장에서 벌어진 사건의 모든 내막이 밝혀지는 구조에서 오는 쾌감과 우주에 대한 장대한 물음이 독자의 뇌를 끊임없이 자극시키고 사유를 증진시킨다. 스케일의 확장에서 오는 재미와 인류의 존재와 진화의 의미를 묻는 사유의 재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고, 앞에서 암시된 사건들이 설명되면서 구조적인 쾌락을 느낄 수 있다. 구조를 짜맞출 수록 한 번에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선형적 구조가 아니라는 점에서 독자의 머리는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이것은 기분좋은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구성을 완성시켰을 때 느낄 희열은 그 혼란을 느낀 것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2장 '현실적 결말'로 보았을 때는 기다리는 한 여성의 시각에서 감동적인 한편의 미스터리한 단편소설이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는 장대한 시간을 넘나들며 초의식과 진화의 상관관계를 우주적 구조를 꿰뚫으면서 읽어나가는 과학소설이다. 과학소설은 인간의 호기심을 기초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되고,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상상력으로 독자에게 재미를 줄만한 가설들을 자유롭게 제시한다. 이 소설은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곳곳에 도구를 숨겨놓았는데, 이를 따라가면서 결국 가장 중요한 질문과 마주하게 되고, 작가가 유추해낸 우주의 본원을 응시하면서 압도된다. 독자의 우주관을 깨트리면서 작가의 우주관이 제시되고 자아와 세계를 초월하여 우주 그 자체가 되는 것이 이 소설의 전체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우주에 대한 질문에서 그것을 초월한 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밀도나 이야기의 응집력이 떨어지며 급하게 결말까지 치닫는 느낌이 들어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장대한 시간과 설정을 짧은 분량 안에 속도감 있게 설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도 보였다. 다시 정리하자면, 스케일의 확장에서 오는 경이와 일상과 비일상의 교차에서 오는 감동을 매력적으로 묶어냈고 구조적으로 장면 배치를 흐트러놓아서 전체 이야기를 완성시켜야 하는 재미도 가지고 있다.

 현실에서도 발생한 여러 미스터리를 이 소설 안에서 사실은 이런 것이었다, 라고 설명하는 방식도 재기있는 부분이었고, 자칫 이야기가 스케일에 묻혀서 무너질 수 있는 것을 구조적으로 잘 보완해서 결말에 계속 여운을 느낄 수 있게 장치한 점도 좋았던 작품이었다.(이런 장치가 없었다면 이 책은 소설이 되지 못하고 기성 작품의 설정을 빌려와 자기 발상을 표현해내는 패러디에 그쳤을 것이다. 결국 2차 계단, 20세기 일본의 무대 속 한 인물이, 이 책을 소설로 만드는데 공헌을 하고 있다.) 전개에만 집중하고 세부적인 묘사나 설정을 자세히 파고들지 않아 간결한 느낌을 받았다. 그야말로 이야기 전개, 발상을 설명하는데 집중한 느낌으로 몇 시간 만에 읽어내릴 수 있는 소설이었다. 흡인력이 있는 대신, 단번에 소설 전체 내용을 받아들이기는 약간 버거운 느낌을 받았다. 막판에 갈수록 의식의 대화 밀도를 높이고 장면으로 처리했다면 더 근사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제목에 맞게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 무엇이 있는지 뻗어나가는 이야기가 매력적인 소재와 발상으로 적혀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시간이동이 나오고, 시간의 흐름, 우주의 끝을 소재로한 작품군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작품을 구입해서 만족스럽게 읽었다.(여러 SF 작가의 영향이 드러나는 부분들도 재미있었다. [타임 패트롤](폴 앤더슨, 강수백 옮김, 행복한책읽기, 2008년 9월), [영원의 끝](아이작 아시모프, 김창규 옮김, 뿔(웅진), 2012년 6월) 등) 정확하게 설명되거나 드러나지 않은 부분들은 오히려 독자의 상상으로 채워 넣을 구석이 되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전체적으로 1960년대에 한 일본 작가가 SF를 읽고 쓰면서 당시 기발했던 발상을 한 편의 장편소설로 완성한 결과물을 이제서라도 2013년의 한국에서 체험할 수 있어서 즐거운 독서였다. 그 시대에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작품이었을지, 그 당시 반응을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고, 지금도 충분히 울림을 주는 감동적이고 아련한 정서의 에피소드나, 일상과의 간극이 클수록 경이롭고 뇌의 신선한 충격을 주는 듯한 시간선을 초월한 우주관, 초의식 너머의 초월, 초월의 초월을 거듭하는 끝없는 인식의 확장에서 오는 쾌감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아무튼 우리는, 그러니까 오즈미나 저, 그리고 세계 도처에 있는 내 친구들은 현재까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기묘한 사실을 모으고 있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최근 갑자기 기묘한 양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모래가 갑자기 어던 모양을 그리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죠. 그게 어떤 모양을 그리려고 하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알아냈다고 해도 그 형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가 해석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요.”(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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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아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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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추리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신간이 북스피어에서 출간되었다. 미야베 미유키는 ‘미미 여사’라고 불리며 국내에서도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작가다. 일본에서 나오키 상을 포함해서 여러 상을 수상했으며, 꾸준히 안정적인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최근 『화차』 가 국내에서 영화로 개봉되면서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다.
 이번 신작인 『눈의 아이』는 표제작 「눈의 아이」를 비롯해 「장난감」, 「지요코」, 「돌베개」, 「성흔」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다. 현대를 배경으로 초자연적인 현상과 관련된 단편만을 모았는데, 분량상 소품들만 있지 않을까라는 예상과 달리 씁쓸한 여운을 남기며 인상에 깊게 남았다. 공감 가는 구절도 제법 있어서 절로 감상을 남기고 싶어진 책이었다. 책이 얇은 만큼 몇 시간 만에 다 읽을 수 있다. 흡인력 있는 간결한 문체와 현대를 배경으로 초자연적인 현상과 맞물린 이야기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아직 읽지 않은 분은 주의하길.

 눈의 아이

 오랜만에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자연스레 어렸을 때 살해된 친구가 화제에 오른다. 목이 졸려 살해된 지 이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살해당한 아이의 이름은 유키코. 피부가 무척 희어서 눈을 연상케 하기도 했지만, 이십 년 전 그날 유키코의 시체가 전날 내린 폭설로 쌓인 눈 속에서 발견되었다. 오랜만에 한 친구의 가게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빨간 장화를 신은 꼬마 손님이 찾아온다. 꼬마 손님은 사라지고 발자국만이 남아 있다. 친구들은 죽은 유키코가 왔다고 생각한다. 초현실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동시에 살인의 진실이 드러나는 구조다. 이런 종류의 글을 많이 읽어온 독자들에게는 신선한 플롯은 아니겠지만,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짚을 줄 아는 작가가 쓴 단편에서는 끝까지 씁쓸한 여운을 전한다.

 장난감

 이 작품은 소문을 다루고 있다. ‘상가 모퉁이의 완구점 이층 창가에는 밤마다 교수형에 쓰는 올가미 밧줄이 걸린다.’는 소문이 떠돌고 그 소문은 점점 확장되면서 파국으로 이끈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이 소문은 사람들의 잔인함과 이기심이 만들어낸 헛소문이었고, 결국 비극을 초래한다. 그런데 소설은 반전처럼 또다른 초자연적인 현상을 드러내면서 끝맺는다. 이런 굴곡이 애잔한 정서를 전달하고 묘한 울림을 이끌어낸다. 할머니가 죽자 할아버지를 둘러싼 안 좋은 소문들이 만들어지고, 할머니의 자식들과의 유산 싸움, 상가 사람들이 상가를 떠나고 싶어서 희생물을 찾는 심리가 얽혀서 소문은 증식한다. 여러 사람들의 이기심이 어떻게 비극을 만드는지 관찰자의 시점으로 보여줘서 인상적이었다.

 지요코

 작품 전체에서 가장 이질적이다. 왜냐하면 인형탈을 쓰면 사람들이 추억하는 인형을 쓴 모습으로 보인다는 설정 자체가 환상적이면서도 귀엽기 때문이다. 미미 여사가 “이번 낭독회에서는 인형탈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인형탈이 나오는 소설을 쓰면 되겠네, 그뿐입니다.”라고 밝혀서 썼다는 작품인데, 발상처럼 인형탈을 쓴 아르바이트생의 환상적인 하루를 다룬 소품이다. 발상 자체가 완전히 새롭다고 할 수 없지만, 귀여운 발상 안에서 주인공이 인형을 쓰지 않은 소년을 보면서 이 현상의 의미가 정의되면서 이야기가 완성된다. 앞의 단편들이 서늘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이 작품은 따스하다. 과연 나는 이 소설 속 아르바이트 생의 눈에는 어떤 인형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돌베개

 분량이 대폭 늘어난 작품으로 그만큼 앞의 작품들이 소품에 가까웠다면, 「돌베개」는 호흡이 길고 본격적인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한 여고생이 마을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연못에 빠졌고, 연못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의식을 잃은 상태로 한 겨울 차가운 물 속에서 동사한 사건이다. 사건의 진상은 경찰 수사로 일주일 만에 범인이 밝혀진다. 여고생이 헤어지자고 해서 홧김에 저지른 범행. 그런데 단순해 보이는 이 사건은 마을 사람들이 여고생을 둘러싸고 온갖 추측을 해대면서 살이 불어난다. 여고생을 둘러싸고 원조를 했다느니, 약을 했다느니, 나이를 속여 술집에서 일했다느니 하는 소문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런 이야기를 자기 딸 아사코에게 듣는다. 여기서 여중생인 아사코가 말하는 소문의 심리가 예리하다. 이 소설집에서, 아니 미미 여사의 글에서 가끔씩 번뜩이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렇듯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화차』에서도 전화 통화에서 남의 불행을 확인하여 자신의 행복을 검증하려는 심리를 읽어낸 것처럼, 여기서도 아사코가 읽어낸 사람들의 심리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런 여자애라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말해야지만 자기들이 안심할 수 있어서야. 불량 소녀였으니까 그런 식으로 남자에게 살해 당한 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믿고 싶은 거야. 그 언니가 우등생에 주위 평판도 좋았다면 그런 아이가 집착이 강한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사건은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무서운 일이 됐을 거야. 왜냐하면 자기나, 자기 딸도 남자를 잘못 사귀면 언제든 같은 꼴을 당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 그러면 모두들 두려워지겠지. 그래서 그 언니를 깔아뭉개고 싶어 해. 그런 짓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로 만들고 싶어 해.”(89)

 이런 인식은 비단 이 사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상에 깊이 남은 부분이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많은 기사들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여중생인 아사코가 지적한 심리가 엿보일 때가 있다. ‘왕따’ 같은 사건만 해도 그렇다. 왕따를 당한 아이가 그래도 뭔가 잘못한 것이 있겠지, 왕따를 당할 여지를 준 쪽도 잘못이다, 내가 보니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더라, 식으로 피해자에게 문제점을 만들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닌 것도 왕따 피해자에게는 가장 결정적인 단점인 것처럼 과장하며 아무런 이유 없이 왕따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그건 역시 위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자기나, 자기 자식도 왕따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혹은 자기가 가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가해자였기 때문에 이유를 만들어낸다. 합리화를 시도한다. 그런 짓을 당할 수 없는 아이로 만드는 것이다. 중학생도 할 수 있는 이런 인식을 사람들은 외면한다. 도입부에 나온 이런 아사코의 인식에 흥미를 보이며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그런데 그 뒤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단순하게 여고생의 소문을 해소하는 것으로 흐르지 않고, 다른 사건과 연결된다. 따라서 플롯이 약간 산만하다고 느껴지는 단점이 있지만, ‘돌베개’라는 설화를 삽입해서 아사코의 사유를 진전시켜 나가고 중심을 잃지 않는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정서, 아내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정서와 돌베개에서 나타는 인과응보의 벡터 문제, 현대 범죄의 죄악감 등 여러 방향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모아진다.

 성흔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의 소설이며, 그만큼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소설이었다. 구조가 잘 짜여져 완성도가 높게 느껴졌고, 재미있게 읽었다. 주인공은 센카와 조사사무소를 운영하는 회사의 대표이자 유일한 조사원인 여자다. 이 사무소에 한 남자가 자기 아들에 관련된 조사를 의뢰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우연성이 많이 겹쳐진 소설이긴 하지만, 초자연적인 현상을 테마로 한 소설집의 이야기에도 역시 초자연적인 현상이 중심축이기 때문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의 전반부는 남자가 어떤 조사를 부탁하기에 앞서 배경 설명을 하는데 전부 사용된다. 그만큼 사건이 복잡하고 충격적이기 때문에, 또한 후반부 이야기 전개에 앞서 꼭 필요하기 때문에 빠질 수 없는 설명이다. 과거에 의뢰인의 아들 시바노 가즈미는 ‘소년A’로 불렸다.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존속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인터넷에서 소년A가 감별소에서 자살했다는 글이 올라온다. 또한, 소년A를 추종하는 인터넷 세력이 생겨난다. 사이트가 만들어지고 부모에게 학대받는 사람들이 소년A와 동질감을 느끼고, 자살한 소년A가 구세주가 되어 나타나기를 바란다. 이게 다 증거는 없지만 ‘데루무’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은 과거 오보로 밝혀진 기사를 근거로 자기 주장을 개진하면서 벌어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충고하거나 야유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의 자살은 그를 감별소에 처넣은 국가 권력의 패배이므로 국가가 인정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진실은 항상 이렇게 감춰진다”(163)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어디서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인터넷에서 떠도는 잘못된 정보, 혹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유사하다. 항상 국가가 숨긴다, 더 큰 세력이 정보를 조작하고, 진실은 항상 감춰지며 자기가 하는 말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인터넷 루머들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예언자의 역할을 한 ‘유다스 마카베우스’가 등장하여 ‘희생되는 어린양’들 앞에 등장하면서 인터넷에서 사이트의 세력은 공고해진다. 이건 마치 인터넷에서 소문의 증식을 보는 것과 같으며, 사이비 종교가 만들어지는 광경을 연상시킨다. 연예인들에 대한 가십들, 안티들의 생성과도 같고, 몇몇 사이트들을 떠올리게 한다. 2010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최근의 인터넷 사이트 흐름을 정확히 꿰뚫고 있어서 소름이 돋았다.
 “「너희 중 누구라도 좋아. 시바노 가즈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 본 녀석 있어?」”(167)라는 핵심을 찌르는 방문자의 공세에도 사이트를 이용하고 추종하는 ‘어린양’들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묘사나 “지금은 어린양들이 자신들의 공상을 ‘교의’로서 신봉하기에 이르렀다. 소년A가 자살한 것과 사후에 다시 태어나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어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주장은 그들에겐 확고한 사실이었다.”(168)는 문장에서 현실에서의 사건들과 사이트가 겹쳐보였다. 인터넷에서 퍼지는 루머들을 누구도 직접 확인해 본 사람이 없으면서 그것들을 퍼트리고 누가 공격해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연예인들이 자살을 해도 끝없는 자기합리화를 할 뿐 반성하지 않는다. 너무나 현실적으로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그리고 있어서 인상적인 작품이었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문장은 인상적이었다.

 “―자기들만이 진실을 안다고, 정의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렇게 되어 버린다구요.”(181)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악플러, 안티, 루머를 생산하는 자들, 자기들 말만이 사실이고 진리며 진실이고 팩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남의 말은 듣지 않은 채 자기들만이 정의를 실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잘못’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설화와 달리 인과응보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과 초자연적인 형상을 배합해서 독특한 정서와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었다. 인터넷 현상의 한 단면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그리면서도 기묘한 이야기로 묶어내어서 홀린 것처럼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되고,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생각에 잠겨야 했다.

 전체적으로 다섯 편의 단편만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책도 얇은 편인데도 재미있게 읽었다. 흡인력이 있고, 이야기들도 마치 연작소설처럼 공통적인 요소들도 존재했다. 초자연적인 현상 속에서 주목하는 것은 사건의 해결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다. 살인, 죄악감, 이기심 같은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부분들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따스한 시선도 있다. 「지요코」에서 어릴 때 잊어버렸던 인형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드러나는 부분이나, 「돌베개」에서 딸을 아끼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장난감」에서 완구점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구미코의 마음에서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섯 편의 단편만으로도 한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예리한지 체감할 수 있었다. 공감을 느끼고 다양한 사유를 하게 만드는 메시지와 완성도 높은 플롯, 개성 있는 인물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풀어낸 흥미로운 이야기가 결합된 근사한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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