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찌지 않는 습관 - 대한민국 건강 지킴이 이재성 박사의
이재성 지음 / 소라주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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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요요로 고생한, 독한 다이어트로 몸을 망친 분들에게 추천하는 책입니다. 두꺼운 만큼 내용이 정말 방대하고 다 읽고 나면 의식이 바뀌게 됩니다. 엄청나게 자세한 잔소리를 듣는 기분이랄까요. 그만큼 생각이 바뀌고, 저절로 살 안 찌는 습관으로 바뀌어요. 평소보다 단 것도 줄이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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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고민상담소 - 독자 상담으로 본 근대의 성과 사랑
전봉관 지음 / 민음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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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고민상담소 – 1930년대 미즈넷? 네이트판? 마녀사냥?

 

1930년을 살아가는 사람이든, 2014년을 살아가는 사람이든, 사람의 본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청춘의 고민들도 비슷한 고민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경성 고민상담소]는 남성 위주였던 1930년대 남녀 청춘들의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다.

1930년대 조선일보 독자문답란인 ‘어찌하리까’와 조선중앙일보 독자문답란 ‘명암의 십자로’에 소개된 사연과 답변을 위주로 당시 남녀 관계 문제들을 정리하고 있다. 사실 살면서 1930년대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살았는지, 그때 청춘들의 일상을 생각해보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들도 지금 이 땅에서 똑같이 살아간 사람들이라는 점이 피부로 와 닿았다.

여기서 고민하는 불륜 등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흔한 고민 중 하나다. 미즈넷 등에서 사연을 읽어보면 근대의 불륜과 지금의 불륜이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의 고민은 비슷비슷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고민들이 흥미로운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매우 재미있을 것이다. 반대로 미즈넷의 사연들이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독자라면, 이 책 역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리라. 그렇더라고 하더라도 이 책은 1930년대 사람들의 사고관과 생활상을 훑어볼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미즈넷이이나 네이트판 말고도 TV 프로그램도 연상케 하는데, 독자 상담이라는 사료를 분석한 자료이니만큼, 비슷한 포맷인 KBS의 고민 해결 프로그램 “안녕하세요?”나 “마녀사냥” 같은 프로그램들을 떠올리게 한다. 모두 본인이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을 이야기하고 그 해답을 듣는다는 점에서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다.

경성 고민상담소의 특징은 당시 시대가 구시대와 신시대의 경계에 있다는 점이다. 유교적 문화와 새로운 문화가 맞부딪치면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점들이 지금 살펴봐도 분명 흥미롭게 다가온다. 조선 시대의 사상과 새로운 사상이 혼재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구여성과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함께 있는 세계였다. 이런 시대는 격변기인만큼 가장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당시 벌어진 문화적 충돌은 마치 시간 여행을 가서 그 시절을 생생히 살펴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한편, 생각해 볼 지점은 그때에서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고민들이다. 시부모의 갈등이 핵가족이 진행된 지금에 와서도 변함이 없다는 점이나, 불륜에 있어서도 구 여성과 신 여성의 차이 뿐만이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점들에 있어서 생각해 볼 점들이 있었다.

또한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남성들에 대한 시선, 가정 폭력, 여성들의 약자적 위치가 지금에 와서도 강도만 달라지고 퍼센트만 달라졌을 뿐, 비슷한 점들이 많다는 것도 아직 사회가 성숙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으며, 가족 제도나, 한국 사회의 남녀평등 문제도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는 점을 다시 깨닫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아직도 남자에 예속되어 있는 여성의 지위 문제나 남녀 사이의 갈등과 폭력 등 근절되어야 할 여러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당시 사회상을 들여다보고, 지금 이 시대를 성찰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책이지만, 논문을 단행본으로 만든 책이기 때문에 구성 자체가 딱딱한 느낌을 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사연을 인용하고, 그 뒤에 다시 한 번 사연을 설명하고 이어나가는 방식이 같은 이야기를 두 번씩 되풀이해서 듣는 듯해서 지루함과 답답함을 주기도 한다. 단행본으로 만들어지면서 이런 부분들은 과감하게 쳐내고 좀 더 간결하게, 대중들을 생각하게 바꿨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연과 답변도 나중 가서는 비슷한 패턴을 보여서 전체적인 서술이 지겨운 느낌을 준다. 따라서 단숨에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종류의 책은 아니다. 말 그대로 재미있는 논문을 읽듯이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서 역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했다. 그저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고, 당시 무슨 사건이 벌어졌는지 외우던 역사가 사실은 그 시대에 숨 쉬고 있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던 시대였다는 것. 역사 교육이라는 게 그렇게 사실들만 외우는 것보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풍속사를 보는 것이 더 재미있게 와닿고 역사에 더 관심을 가지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살던 세계로 접근하면, 역사가 어려운 과목이나 지루한 수업이 아니라, 다른 나라나 세계를 엿보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이런 종류의 책들이 더 많이 나올 필요가 있고, 이런 미시사가 역사를 공부하는 청소년들에게도 교육되면 좋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고민을 하게 된다. 원시인들도 남녀 문제를 걱정했을 것이다. 자신의 외모를 생각하고,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기만하고 걱정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들의 삶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바로 책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책은 과거를 되살리고, 머릿속에서 펼쳐지게 만든다. 우린 실제로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할 수는 없지만, 머릿속에서 활자를 통해 체험해볼 수는 있다. 그들의 고민을 공감하면서 내 고민과 연결시켜 볼 수도 있고, 다른 해답을 내놓을 수 있다. 그들의 삶을 엿보면서 과거를 재구성하고, 현재를 돌아보게 만드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과거와 역사와 사람을 공부한다. 지금 우리의 삶도, 언젠간 책으로 변할 것이다. 미래에는 지금의 삶을 우리가 남긴 이런 리뷰와 책들, 드라마, 영화, 인터넷 게시판에 남길 글들로 재구성할 것이다. 그리고 깨달을 것이다. 환경이 다를 뿐 우린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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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jjoker 2014-07-22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ㅁㅅㄷㅅ
 
스토리텔링 애니멀 -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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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이야기에 열광한다. 자신은 소설책을 읽지 않는다고? 열광하는 운동 경기, 정치에도 이야기는 깃들어 있다.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게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도 이야기를 지어낸다. 과거는 자신이 각색한 소설이고, 미래 또한 장밋빛 꿈으로 기대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이야기 없이 살아갈 수 없으며, 인간의 본질에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가 힘들다.
[스토리텔링 애니멀]은 바로 이 인간과 이야기의 관계를 깊이 천착한 책으로, 픽션을 중심으로 하면서 모든 스토리텔링을 훑고 있다. 읽으면 구절구절마다 동감하면서 맞장구를 치게 되는데, 그야말로 놀라운 독서 경험이다. 뛰어난 흡인력, 흠잡기 힘든 구성은 이 책 역시 기막힌 스토리텔링이 녹아 있음을 알게 한다. 인간의 본질이자, 인간이 영원히 추구할 이야기 DNA를 파고든 이 책은 매력적이다. 특히, 평소에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등의 서사에 애착을 가진 독자라면 더욱 빠져들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이렇게 심도 깊게 전개해나간다는 점에서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건 마치, 좋아하는 작품을 두고 두 명의 매니아들이 수다를 떠는 흥겨운 대화의 시간과도 같다.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서 얼마든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밤새 떠들 수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이야기'라는 것을 두고 저자와 독자가 함께 수다를 떠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최근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일면 상업적인 이유로 단어가 소비되는 경향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우리 삶에 녹아 있는 이야기성에 사람들이 관심을 두기 시작한 면도 크다. 소설 같은 전통적인 서사물에서 벗어나 누구나 연상하는 광고를 뛰어넘어 바야흐로 모든 분야에 스토리텔링이 화두다. 현대의 경쟁 사회 속에서 사람을 끌어들이는 수법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스토리텔링이라는 단어로 응집한 셈이다.
이 책은 학술서는 아니다. 따라서 딱딱한 책이라고 오인할 필요는 없다. 매우 읽기 편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즉 모든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물론, 소설가, 습작생, 영화 감독, 드라마 감독, PD, 카피라이터 등 창작에 관련있는 사람들이라면 훨씬 재미있게 읽을 것이다. 아는 사실이라도 공감하며 재미를 느끼고 미처 지나치고 있던 부분들도 짚어주며, 새로운 사실도 전해주기 때문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책의 내용을 살펴보자. 워낙 이곳저곳 다양한 이야기를 툭툭 던지는 책이기 때문에 쉽게 요약을 하거나, 내용을 갈무리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 책은 읽다보면 이야기를 심리학으로 풀어냈다는 인상이 강하다. 서두에서도 이 책은 생물학, 심리학, 신경 과학을 동원해서 이야기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이야기를 소재로 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받게 된다. 전문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서술로 이야기를 다양한 학문으로 해부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속살을 엿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특히 심리학 부분은 누구나 흥미로운 학문일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이야기와 이야기에 열광하는 인간 심리를 다루고 있어서 특히 재미있게 읽었다.

프로 레슬링은 스포츠라기보다는 삼류 연극에 가깝다. 모든 장면은 사전에 짠 각본대로 진행되며 거드름 피우는 프로모터, 미국적인 남성, 사악한 공산주의자, 사내답지 못한 나르시시트 등 사랑스러운 주인공과 혐오스러운 악당이 등장해 정교한 플롯을 전개한다. 화려한 볼거리와 웅장한 규모, 사나운 포효와 과장된 동작은 오페라를 연상시킨다. 프로레슬링의 가짜 폭력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하지만 어토믹 드롭, 몽골리언 촙, 캐멀 클러치 등의 프로 레슬링 기술은 또한 작렬할 때마다 누가 누구 마누라랑 잤다느니, 누가 누구를 배신했다느니, 누가 미국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느니, 누가 무늬만 애국자라느니 하는 슬랩스틱 멜로드라마의 플롯에 기여한다.
각본 없는 격투 스포츠도 비슷한 스토리텔링 관습을 따른다.(33쪽)



먼저 인용한 부분처럼 꿈과 공상, 노래와 소설과 영화뿐만 아니라 픽션이 어디에나 있음을 저자는 상세히 짚고 넘어간다. 공감을 이끌어내면서 재미를 선사하는 지점이다.
2장 픽션의 수수께끼에서는 아이들이 흉내 놀이를 즐기는 이유, 아이들이 왜 이야기의 동물인지를 포괄적으로 설명한다. 아이들의 놀이에서 픽션의 기능을 설명한다. 아이들의 심리나 놀이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저자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3장 지옥은 이야기 친화적이다에서는 이야기 세계가 현실 도피적이라면 즐거워야 하는데, 오히려 살인과 폭력 같은 위험이 도사리는 세계라는 점을 살펴본다. 독자는 그럼 지금까지 읽어온 작품들이 다 험난한 여정이 들어가 있고, 각종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왜 그럴까? 갈등이 드라마를 일으키는 힘이기 때문에? 저자는 이야기의 가장 기본적인 공식은 "이야기 = 인물 + 어려움 + 탈출 시도"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픽션이 대단히 창조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픽션의 창조성은 우물 안 개구리의 창조성에 불과하다. 이야기꾼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은 꽉 짜여진 문제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며 이들이 지어내는 이야기는 전개, 위기, 해결의 패턴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난 100년간 문제 구조라는 감옥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리친 작가들이 있었다. 작가들은 자신이 관습과 공식의 잘 짜여진 테두리 안에 갇혀 있음을 깨닫고 몸서리쳤다. 그 순간 문학에서 모더니즘 운동이 탄생했다. 작가들은 인류만큼이나 오래된 스토리텔링 욕구를 가지고 새롭게 단장하려 했다.
관습적 이야기를 뛰어넘으려던 모더니스트들의 노력은 더없이 영웅적이었다.(실패할 운명이지만 숭고한 반란이었다고나 할까.) (80쪽)



이렇게 보편 문법을 이야기하면서 관습적인 스토리텔링에 저항한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 등을 인용하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보편 문법과 서사를 무화하려는 소설들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다. 정말 좁은 시선이 아니라 다양한 시선에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이야기를 추구하는 것은 이야기를 즐기기 때문이지만, 이야기를 즐기도록 자연이 우리를 설계한 이유는 연습의 유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픽션은 인간의 문제를 시뮬레이션 하는 데 특화된 아주 오래된 가상 현실 기술이라는 것이다.(85쪽)



위의 이론은 심리학자이자 소설가인 키스 오틀리의 주장이다. 이처럼 이 책은 각종 소설, 영화를 소개하는 것과 동시에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곁들여서 흥미로운 내용들을 알려주며 생각을 넓히게 만든다.

1990년대 이탈리아의 신경 과학자들이 아주 우연히 거울 뉴런을 발견했다면서 펼치는 이야기에서는 김보영 작가의 단편 '거울애'가 떠오르기도 했다.(소설집 [진화신화]에 수록되어 있다.) 아무튼 여러 뇌의 과학적인 반응을 예시와 근거로 들면서 픽션이 뇌의 시뮬레이션 기능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미 아는 내용이라도 다양한 이론, 학설, 심리학, 뇌과학과 결합해서 간단명료하게 정리된 이 책을 읽는 재미는 매우 뛰어나다. 특히 이런 내용들을 뛰어난 입담으로 능숙하게 설명하는 데 매우 모범적인 책이다. 독자가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고 어렵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모든 부분이 읽기에 매끄러웠다.
밤의 이야기에서는 꿈과 스토리텔링의 관계를 자신의 꿈과 연관시켜서 소개하고 있다. 이 부분 역시 누구나 꿈을 꾸는 만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마음은 이야기꾼에서는 중증 간질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뇌를 반으로 자른 실험 등 유명한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역시 흥미진진한 파트였다.

가자니가와 동료들은 이 연구를 온갖 기발한 방식으로 변주했다. 분리 뇌 환자의 우반구에 우스운 그림을 보여 준 실험에서는 피험자가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왜 웃고 있나요?"라고 물었을 때 질문에 답하는 임무를 맡은 좌뇌는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함께 웃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명을 지어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피험자는 우스꽝스러운 사건이 막 떠올랐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걸으세요'라는 단어를 피험자의 우뇌에 잠깐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피험자는 시키는 대로 일어나 방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연구자가 피험자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피험자는 목이 말라서 콜라를 가지러 간다며 즉석에서 이야기를 지어내고는 스스로 믿었다.(129쪽)



유명한 실험이지만, 이야기와 연관해서 설명되는 지점들이 재미있었고, 이를 모든 사람의 뇌에 작은 셜록 홈스가 들어 있다고 말하며 이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야기하는 마음은 중대한 진화적 적응이다.'(133쪽)라는 것이다. 음모론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 음모론적 사고를 단순히 멍청하고 무식하고 정신 나간 자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음모론은 바로 이야기하는 마음이 의미를 강박적으로 추구한 결과라는 것이다. 평소 여러 음모론자들에 대해서 답답함만을 가질 뿐이었지만, 이 부분을 읽고서 여러 차원에서 다시 음모론과 인간 사고에 대해서 또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했다. 이 외에도 이야기의 도덕에 관해서, 먹사람(텍스트 속 인물)이 세계를 바꾼 사례와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아주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읽어내렸다. 8장 삶 이야기는 인간의 기억 서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부분 역시 너무나 인상적으로 읽었다. 필립 K.딕의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이작 아시모프, 테드 창 등 여러 SF 작가들이 기억을 소재로 한 다양한 이야기와 작품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믿을 수 있는가. 기억은 정확할까? 우리가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추억은 아름답게 각색된 기억이고 때론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믿는 경우까지 있다. 이야기하기의 동물인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자아내고 이를 믿어버리는 일이다. 이때 그럼 현실과 이야기의 구분은 가능한 것일까.

이제 마리 G에게 돌아가 보자. 마리의 얘기를 들은 행정관은 그녀를 데리고 강간 사건을 신고하러 경찰서에 가지 않고 히폴리트 베른하임이 요청한 대로 그의 정신 병원을 찾았다. 행정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베른하임은 마리를 소파에 뉘었다. 마리는 끔찍한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했다. 베른하임은 마리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아가씨가 본게 확실한가요?" "꿈꾸거나 환각을 본 건 아닌가요?" 마리가 질문에 '예'라고 답하자 베른하임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제가 아가씨에게 강간에 대한 거짓 기억을 심은 게 아니라고 확신하세요?"(202쪽)



인간의 기억이 불안전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다시금 인간의 과거가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지적은 섬뜩했다. 내가 믿는 과거가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 윤색되고 편집된 과거. 가장 많은 생각을 한 부분이었다.
마지막 장인 이야기의 미래는 전통적인 서사인 소설에서 벗어나 여러 픽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픽션이 소설에만 한정될 수 없으며 다양한 매체로 픽션은 이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미 인터넷에서 유명한 사실이지만 영화를 넘어선 게임 등을 이 책에서도 당연히 최신 정보로 언급하고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고급' 픽션만이 아니다. '저급' 픽션도 애먹기는 마찬가지이다. 혐오스러운 싸구려 '리얼리티' 방송이 각본 있는 텔레비전 방송을 밀어내는 현상에 많은 이들이 개탄한다. 비디오 게임을 비롯한 디지털 오락이 전통적 이야기에서 관객을 뺏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게임 업계는 이제 출판계보다 규모가 훨씬 크며 심지어 영화계도 앞질렀다. 2009년에 출시된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2]는 발매 24시간내 판매액이 3억 6000만 달러로, 영화 [아바타]의 같은 기간 내 흥행 수입을 능가했다.(218쪽)



저자는 전통적 픽션이 죽어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야기의 보편 문법이 바뀌리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토레틸링이 향후 50년간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라는 말한다. 스토리텔링은 어느새 우리가 직접 체험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한다. [스타 트렉]의 홀로소설을 지향점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는 가상현실을 추구하는 인간의 목표와 맞닿아 있는 말일 것이다. 

다음번에 어떤 비평가가 소설이 참신함의 결여로 죽어 간다고 말하거든 하품이나 한번 쏘아 주기 바란다. 사람들이 이야기 나라를 찾는 이유는 새롭고 신기한 것을 바라서가 아니다. 보편적 이야기 문법이 주는 낡은 위안을 원하기 때문이다.(240쪽)



이야기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이 책만큼 대중친화적인 책이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어느 한구석 지루하지 않게 읽었다. 앞에서도 말했듯 이야기 산업에 종사자들은 한 번씩은 펼쳐볼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욕망을 갖고 태어났으며, 또 이야기하는 종족으로 진화해 나갔다. 앞으로도 이야기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후손은 우리와 비슷한 패턴의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체감하며 즐길 것이다. 스토리텔링 애니멀이 멸종하기 전까지 이야기는 생생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샘솟을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기를 이토록 평생 즐기도록 설계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을 펼치면 목차가 나오기도 전에 인상적인 인용문 하나가 보인다. "신은 이야기를 사랑하여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인간은 이야기를 사랑하여, 신화를 써내고 읽었다. 때로는 이야기 속에서 신을 찬양하고, 때로는 죽였다. 이야기는 삶과 죽음, 신과 인간의 매개였다. 우리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소비하는 이야기 하는 동물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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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브
우르줄라 포츠난스키 지음, 안상임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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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이브 - GPS 보물찾기가 연쇄 살인의 힌트로 이어진다면?

 어렸을 때 누구나 보물찾기를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서 혹은 교회에서 말이다. 어린이대공원 같은 유원지에 가서 미리 선생님들이 숨겨 놓은 쪽지를 찾는다. 보물이 대단할 필요는 없다. 연필이든, 공책이든, 그때는 보물이 적혀 있는 쪽지 한 개를 발견하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다.
 이런 보물찾기를 어른들이 전세계적으로 하고 있다면? 민음사에서 최근 출간된 『파이브』는 이색 스포츠, 놀거리로 2000년부터 전세계적으로 퍼진 '지오캐싱'을 소재로한 스릴러 소설이다. 지오캐싱이란 보물찾기의 어른 버젼이라고 할 수 있는데, GPS(위성항법장치) 좌표를 토대로 보물을 찾는 것이다. 누구나 락앤락 같은 통에다가 물건을 숨겨놓고 지오캐싱 사이트에 좌표를 올려둔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그 좌표를 GPS 기계로 찾아서 보물을 찾고 다시 다른 물건을 넣어둔다. 이런 식으로 보물찾기는 무한히 이어지고 수 천번의 보물을 찾은 사람들도 나타나게 된다. 이로써 GPS 좌표를 찾아 가면서 매번 색다른 장소도 가게 되고, 아름다운 풍광이 있는 장소에도 도달하게 된다. 매일 비슷한 산에 오르는 것보다, 좀 더 게임 같은, 모험 요소가 들어가 있다. 찾기 어렵게 숨겨놓은 경우도 있고, 미스터리를 풀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주말마다 일상에서 벗어나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렇게 찾은 상자 안에는 과연 어떤 물건이 있을지 기대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이 '지오캐싱'은 전세계 5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십 만원 상당의 GPS 기계를 사야 이 게임에 참여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이 보급되어 이 게임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바뀌었다. 모든 스마트폰에는 GPS 모듈이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장비를 마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지 GPS 좌표를 추적할 간편한 어플만 설치하면 된다. 평소 여행을 즐겨하지 않던 사람도 이 지오캐싱을 핑계로 다양한 곳을 여행할 수도 있고, 마침 지방에 가서 지오캐싱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런데 추리/스릴러 소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이 '지오캐싱'이 어떤 미스터리 소재로 적절하다는 것도 바로 깨닫을 것이다. 익명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게임을 즐긴다는 점이나, 미스터리를 풀어서 좌표를 찾아가기도 하고, 그 좌표 안에 어떤 물건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점 등에서 말이다. 그야말로 미스터리 소설을 쓰기 위해서 맞춤으로 만든 게임 같이도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반대로 이 지오캐싱이 먼저 있었고, 소설이 나왔다. 그러나 이 소설의 서사를 끌어가는 힘은 지오캐싱이라는 게임에 있다. 게임의 룰을 하나씩 숙지하면서, 게임의 규칙 속에서 단서를 쫓아간다. 범인이 만들어낸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느 스릴러 소설처럼 이 소설에서도 살인사건으로 시작된다. 한 여자가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었는데, 주인공인 베아트리체는 피해자의 발바닥에 이상한 숫자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음을 발견한다.(그녀는 섬세한 관찰력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고, 사건 현장을 볼 때 '잠수' 하듯이 몰입해서 세세히 살핀다.) 그 숫자는 GPS 좌표다.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다. 왜 피해자의 발에 GPS 좌표가 새겨져 있단 말인가. 범인은 보통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게임에 초대하는 숫자인 셈이다. 그 좌표를 통해 간 곳에는 락앤락 통이 있다. 그 안에는 잘린 손과 쪽지가 있다. 이 손의 주인은 누구일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바야흐로 연쇄 살인의 시작이다. 어느덧 베아트리체는 범인의 게임에 말려든다. 이대로 게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사건은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쪽지에 적힌 대로 스테이지2로 가기 위해, 다음 좌표를 받기 위해 쪽지에서 수수께끼처럼 단서에 나온 사람을 추적한다.
 이 소설은 범인을 좇는 노력과, 범인이 남긴 지오캐시를 찾는 노력이 동시에 진행되는 소설이다. 그러나 범인에 대한 힌트가 전무하기 때문에 베아트리체와 동료인 플로린은 상당히 애를 먹는다. 이는 베아트리체 시점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명탐정이 나와서 재빨리, 활극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당연히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훨씬 사실적이고, 섬세한 심리묘사와 함께 진행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장점은 그런 사실성과 심리 묘사에 있다. 스릴러 소설답게 연이은 살인 사건과 이어지는 단서 등이 게임처럼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며, 정교하게 짜인 플롯이 쾌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전에 실제 있을 법한 배경과 심리 묘사가 독자를 이 소설 속 세계로 끌어들인다. 베아트리체는 이혼녀이고, 두 명의 자녀를 키우면서 일을 한다. 새벽마다 전화하는 전남편이 주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두 아이에 대한 연민과 걱정, 남자 상사의 핀잔과 압박(그러면서도 남자 동료에 대해서는 신뢰를 보내는 점이 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동료에 대한 애정이 섞인 혼란스러운 마음, 문자까지 보내오는 정체불명의 범인에 대한 두려움. 이런 심리들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무런 약점 없는 히어로 같은 탐정이 아니라,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한 여성 캐릭터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헤어진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전남편의 괴롭힘과 애정을 쏟고 싶어도 직업상 쉽지 않아 복잡한 감정이 드는 두 아이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번민하고 방황하고 좌절하는 베아트리체의 모습이 때로는 답답하고, 갑갑하게 느껴지지만, 일반적인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준다. 그럼에도 베아트리체가 소설 내내 끌려다니기만 하고, 여러 상황들의 압박 속에 놓여 있기만 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이 만약, 시리즈의 시작이라면, 점점 성장하는 베아트리체를 보게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 작품만으로는 베아트리체가 큰 사건을 통해 좌절하고 앞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지점에서 소설이 끝난 느낌이었다. 정당한 두뇌 대결이라기보다는 베아트리체는 어쩔 수 없이 범인보다 한 발 느리게 가고, 마지막까지 큰 반전을 만들지는 못한다. 이 점이 주인공의 활약이라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많은 소설이지만, 그만큼 작가가 주인공을 활약하게 만들기 위해서 타협하지 않고 자기가 설계한 대로 이야기를 밀고 나갔다는 소리도 된다. 결국 이 소설은 주인공의 활약에 포커싱을 맞춘 게 아니다. 죄의식, 죄책감. 살인의 동기와 범인이 소통하는 자로 베아트리체를 삼은 이유는 같다.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면 인간은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놀이. 만약 내가 뭘 했다면, 어쨌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것은 무한하고 한 번 벌어지면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아닌 이상 돌이킬 수 없으며, 시간을 역전시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한계는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만약'을 되풀이한다. 자신을 자책한다. 이 소설은 결국 이 '만약'이 만든 또 다른 비극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인의 동기와 베아트리체가 형사가 된 동기는 유사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이 소설의 방점이 찍혀 있다.
 무려 526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만큼, 중간중간 늘어지거나, 지루한 듯한 느낌도 있다. 긴박하게 흘러가지만 심리묘사가 지나치게 많은 탓이기도 하다. 사건의 진상은 이미 수많은 소설에서 다룬 내용이지만, 그건 이미 이 장르의 축적된 역사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지오캐싱'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인물을 사실감 있게 묘사하고, 플롯의 완성도가 높은 점은 이 작품을 잘 만든 스릴러 소설로 추천할 수 있게 한다.
 소설을 읽고 나서 섬뜩한 살인이 얽혔음에도 불구하고 '지오캐싱'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해보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게 만들고, 베아트리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으로 다가와 베아트리체를 주인공으로 한 다른 소설들도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찬찬히 쌓아올린 심리와 사건, 마침내 밝혀지는 살인사건의 진실과 그 결말. 모든 사건이 끝나도 삶은 지속된다. 지오캐싱이 끊임없이 색다른 장소로, 색다른 물건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처럼, 이 소설 역시 수많은 스릴러 소설들과 함께 독자를 유혹한다. 함께 사건의 진상이라는 보물을 찾지 않겠느냐고. 우리는 GPS 좌표를 찾아 떠나듯, 책장 속으로 떠난다. 그 속에는 비슷하면서도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읽고 나면 읽었다는 흔적을 리뷰로 남기고, 다른 보물을 찾는다. 지오캐싱에는 여러 약어를 사용하는데, 보물을 숨긴 자는 오너라고 부르고, 보물을 남긴 곳에는 TFTH. Thanks for the hunt(찾아 줘서 고마워)라는 약어를 쓴다. 보물을 책으로 바꾸자면, 쓴 사람은 작가, 남기는 글에는 TFTR. Thank for the read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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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보르코시건 : 남자의 나라 아토스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6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 지음, 최세진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남자의 나라 아토스 – 마일즈가 없어도 재미있다는 것을 증명하다

 『남자의 나라 아토스』는 씨앗을 뿌리는 사람 출판사의 대형 기획인 16권에 달하는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중 6번째로 출간된 책이다.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인 만큼, 시리즈의 핵심 주인공인 마일즈 보르코시건이 어느 정도 등장할 줄 알았으나, 이름만 언급되고 마는 시리즈의 외전이다. 그만큼 분량도 얇아서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외전이면 보통 본편보다 크게 재미가 떨어지지 않나 하고 염려할 수 있다. 그러나 웬걸, 이 책 충분히 재미있다.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는 16권이나 되는 시리즈이지만, 각 권이 단독으로도 충분히 완성도가 높고 그 자체로 다 재미있다는 점이다. 작가의 능수능란한 스토리텔링 능력과 단권 내에서 플롯을 풀어나가는 능력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점 때문에 작가의 단편들도 수준급의 재미와 완성도를 지닐 수 있음은 물론이다.
 분량으로 따지면 경장편이라고 할만한 이 작품의 주인공은 남자들만 사는 아토스라는 행성의 에단 박사다. 미래 우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에 인공자궁을 통해 남자들만 태어나고 사는 행성이 가능하다. 아토스는 바로 그런 행성으로 그리스신화의 여성들만 사는 아마존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이곳은 굉장히 바르고 선한 사람들이 모인 행성처럼 비친다. 일종의 경쟁과 다툼, 싸움, 폭력이 없고 시골의 정다움만 느껴지는 곳처럼 묘사된다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또 남자들끼리의 관계도 굉장히 귀엽고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평화롭고 조용한 행성에서 난소배양조직들이 사멸되어가고 있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행성의 존립이 위험한 것이다. 외부와 단절되고 자기들만의 문화에 안주하고 있는 이 행성에서는 통신 판매로 난소 조직을 사지만, 그게 어이없게도 엉터리 물건이 도착한다.
 배송 사기를 당한 셈이다. 이 점은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의 핵심 재미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예산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점을 언제나 잘 드러낸다는 것이다. 『전사 견습』에서도 용병단을 말로 집어 삼키는 마일즈이지만, 용병들의 수당이나 보험 문제로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진다. 보통 다른 데서라면 쉽게 넘어갔을 문제들을 현실적으로 그려냄으로서 이야기의 질감을 부여하고 독특한 관점에서 오는 재미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 외전 역시 행성의 운명이 달린 난소 조직을 통신 판매로 구입하는데 배송 사기를 당해서 에단 박사가 직접 행성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러우면서 흥미롭고 재미를 주는 부분이었다.
 광활한 우주, 또 미래지만, 현실적인 돈 문제가 언제나 이 소설을 지탱하고 있다. 에단 박사가 행성의 돈을 긁어모아서 클라인 우주정거장으로 나가는 것도 재미있고, 돈 때문에 벌벌 떨고, 또 새로운 문화적 충격을 받는 부분들은 역시 이 소설의 백미 중 하나다.
 클라인 우주정거장에서 에단은 온갖 고생을 하게 된다. 여러 소설에서 나오는 시골에 살다가 대도시에 나가서 경험하는 신문물의 충격 등이 재미있게 잘 묘사되고 있다. 그러면서 아토스 행성을 호모들의 행성으로 보고 핍박하는 부분에서는, 미래 우주 시대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성적인 편견과 박해가 있다는 점이 지금 사회를 되돌아보게 만들면서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진짜로 몇 세기가 지나도 인류는 변함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면서 씁쓸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에단 박사를 돕는 인물은 바로 덴다리 용병대 중령, 엘리 퀸이다. 이전 작품에서 플라즈마 총에 얼굴이 녹아버렸지만 마일즈가 배타 개척지의 의술로 아름다운 얼굴을 갖게 된 인물이다. 덴다리 용병대에서 엘리 퀸 혼자만 단독으로 첩보 임무를 수행하는 데 이야기가 처지는 곳 하나 없이 숨가쁘게 잘 전개되며, 엘리 퀸의 매력도 잘 살아 있는 작품이다.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이 작품이 바로 전작인 『마일즈의 유혹』과 이어진 연계성이다. 『마일즈의 유혹』에서 마일즈는 대화를 하나 엿듣는데 거기서 나온 단어를 가지고 엘리 퀸을 투입시켜서 사건을 파헤치게 만든 것이다. 두 작품이 통신 대화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는 셈인데, 이런 점들이 시리즈의 연계성을 강화해서 재미있는 부분이다.
 전작인 『마일즈의 유혹』이 하드보일드 추리물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우주 정거장을 배경으로 한 첩보물이다. 원래 다양한 첩보물을 좋아하는 터라, 이렇게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첩보물은 신선하면서도 매우 재미있고 만족스러웠다. 이처럼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작품마다 다른 장르가 느껴진다는 점도 장점이자 매력이다. 『명예의 조각들』은 로맨스 소설의 전형이었고, 『전사 견습』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재미와 성장소설의 재미를 동시에 가진 작품이었다. 『남자의 나라 아토스』 같은 경우도 우주를 배경으로 한 첩보 소설이자, 아토스라는 행성에만 살아온 인간이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모험을 겪는 소설로 여러 재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 처음 단독 임무를 맡은 엘리 퀸의 실력과 또 성장을 엿보는 재미도 크다. 우주 정거장의 묘사는 이 시리즈가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써 매우 재미있으면서도 SF적인 배경을 잘 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주정거장인 만큼 여러 행성의 세균이나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제한된 생태계를 지키는 생물통제국의 권한이 막강하다는 설정 등은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런 배경 설정을 그냥 보여주고 마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전개 됨에 따라 적절한 복선으로 작용하여 이야기의 실마리가 되는 부분은 절로 탄성이 나오게 하는 지점이다.
 앞에 5권이나 나왔지만, 하나도 읽지 않고 이 작품만 읽어도 충분히 SF소설로써, 장르소설로써, 모험소설로써, 첩보소설로써 등 다양한 재미를 가진 오락소설로 즐기기 충분하다. 외전이고 분량도 적기 때문에 독립적인 작품으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다. 따라서 처음부터 다른 책을 접하기에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면 얇은 이 책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책들을 읽은 다음에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새삼 엘리 퀸이라는 인물이나 몇몇 대사들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할 것이다.
 장르를 떠나서 재미있는 소설을 찾는 이들에게 언제나 부담없이 권할 수 있는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그 시리즈의 첫 외전인 『남자의 나라 아토스』는 기분 좋은 모험을 떠나게 해주는 좋은 소설이다. 재미있는 소설을 찾는다면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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