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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아이 ㅣ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평점 :
일본 추리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신간이 북스피어에서 출간되었다. 미야베 미유키는 ‘미미 여사’라고 불리며 국내에서도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작가다. 일본에서 나오키 상을 포함해서 여러 상을 수상했으며, 꾸준히 안정적인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최근 『화차』 가 국내에서 영화로 개봉되면서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다.
이번 신작인 『눈의 아이』는 표제작 「눈의 아이」를 비롯해 「장난감」, 「지요코」, 「돌베개」, 「성흔」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다. 현대를 배경으로 초자연적인 현상과 관련된 단편만을 모았는데, 분량상 소품들만 있지 않을까라는 예상과 달리 씁쓸한 여운을 남기며 인상에 깊게 남았다. 공감 가는 구절도 제법 있어서 절로 감상을 남기고 싶어진 책이었다. 책이 얇은 만큼 몇 시간 만에 다 읽을 수 있다. 흡인력 있는 간결한 문체와 현대를 배경으로 초자연적인 현상과 맞물린 이야기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아직 읽지 않은 분은 주의하길.
눈의 아이
오랜만에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자연스레 어렸을 때 살해된 친구가 화제에 오른다. 목이 졸려 살해된 지 이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살해당한 아이의 이름은 유키코. 피부가 무척 희어서 눈을 연상케 하기도 했지만, 이십 년 전 그날 유키코의 시체가 전날 내린 폭설로 쌓인 눈 속에서 발견되었다. 오랜만에 한 친구의 가게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빨간 장화를 신은 꼬마 손님이 찾아온다. 꼬마 손님은 사라지고 발자국만이 남아 있다. 친구들은 죽은 유키코가 왔다고 생각한다. 초현실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동시에 살인의 진실이 드러나는 구조다. 이런 종류의 글을 많이 읽어온 독자들에게는 신선한 플롯은 아니겠지만,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짚을 줄 아는 작가가 쓴 단편에서는 끝까지 씁쓸한 여운을 전한다.
장난감
이 작품은 소문을 다루고 있다. ‘상가 모퉁이의 완구점 이층 창가에는 밤마다 교수형에 쓰는 올가미 밧줄이 걸린다.’는 소문이 떠돌고 그 소문은 점점 확장되면서 파국으로 이끈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이 소문은 사람들의 잔인함과 이기심이 만들어낸 헛소문이었고, 결국 비극을 초래한다. 그런데 소설은 반전처럼 또다른 초자연적인 현상을 드러내면서 끝맺는다. 이런 굴곡이 애잔한 정서를 전달하고 묘한 울림을 이끌어낸다. 할머니가 죽자 할아버지를 둘러싼 안 좋은 소문들이 만들어지고, 할머니의 자식들과의 유산 싸움, 상가 사람들이 상가를 떠나고 싶어서 희생물을 찾는 심리가 얽혀서 소문은 증식한다. 여러 사람들의 이기심이 어떻게 비극을 만드는지 관찰자의 시점으로 보여줘서 인상적이었다.
지요코
작품 전체에서 가장 이질적이다. 왜냐하면 인형탈을 쓰면 사람들이 추억하는 인형을 쓴 모습으로 보인다는 설정 자체가 환상적이면서도 귀엽기 때문이다. 미미 여사가 “이번 낭독회에서는 인형탈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인형탈이 나오는 소설을 쓰면 되겠네, 그뿐입니다.”라고 밝혀서 썼다는 작품인데, 발상처럼 인형탈을 쓴 아르바이트생의 환상적인 하루를 다룬 소품이다. 발상 자체가 완전히 새롭다고 할 수 없지만, 귀여운 발상 안에서 주인공이 인형을 쓰지 않은 소년을 보면서 이 현상의 의미가 정의되면서 이야기가 완성된다. 앞의 단편들이 서늘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이 작품은 따스하다. 과연 나는 이 소설 속 아르바이트 생의 눈에는 어떤 인형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돌베개
분량이 대폭 늘어난 작품으로 그만큼 앞의 작품들이 소품에 가까웠다면, 「돌베개」는 호흡이 길고 본격적인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한 여고생이 마을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연못에 빠졌고, 연못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의식을 잃은 상태로 한 겨울 차가운 물 속에서 동사한 사건이다. 사건의 진상은 경찰 수사로 일주일 만에 범인이 밝혀진다. 여고생이 헤어지자고 해서 홧김에 저지른 범행. 그런데 단순해 보이는 이 사건은 마을 사람들이 여고생을 둘러싸고 온갖 추측을 해대면서 살이 불어난다. 여고생을 둘러싸고 원조를 했다느니, 약을 했다느니, 나이를 속여 술집에서 일했다느니 하는 소문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런 이야기를 자기 딸 아사코에게 듣는다. 여기서 여중생인 아사코가 말하는 소문의 심리가 예리하다. 이 소설집에서, 아니 미미 여사의 글에서 가끔씩 번뜩이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렇듯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화차』에서도 전화 통화에서 남의 불행을 확인하여 자신의 행복을 검증하려는 심리를 읽어낸 것처럼, 여기서도 아사코가 읽어낸 사람들의 심리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런 여자애라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말해야지만 자기들이 안심할 수 있어서야. 불량 소녀였으니까 그런 식으로 남자에게 살해 당한 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믿고 싶은 거야. 그 언니가 우등생에 주위 평판도 좋았다면 그런 아이가 집착이 강한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사건은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무서운 일이 됐을 거야. 왜냐하면 자기나, 자기 딸도 남자를 잘못 사귀면 언제든 같은 꼴을 당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 그러면 모두들 두려워지겠지. 그래서 그 언니를 깔아뭉개고 싶어 해. 그런 짓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로 만들고 싶어 해.”(89)
이런 인식은 비단 이 사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상에 깊이 남은 부분이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많은 기사들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여중생인 아사코가 지적한 심리가 엿보일 때가 있다. ‘왕따’ 같은 사건만 해도 그렇다. 왕따를 당한 아이가 그래도 뭔가 잘못한 것이 있겠지, 왕따를 당할 여지를 준 쪽도 잘못이다, 내가 보니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더라, 식으로 피해자에게 문제점을 만들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닌 것도 왕따 피해자에게는 가장 결정적인 단점인 것처럼 과장하며 아무런 이유 없이 왕따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그건 역시 위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자기나, 자기 자식도 왕따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혹은 자기가 가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가해자였기 때문에 이유를 만들어낸다. 합리화를 시도한다. 그런 짓을 당할 수 없는 아이로 만드는 것이다. 중학생도 할 수 있는 이런 인식을 사람들은 외면한다. 도입부에 나온 이런 아사코의 인식에 흥미를 보이며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그런데 그 뒤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단순하게 여고생의 소문을 해소하는 것으로 흐르지 않고, 다른 사건과 연결된다. 따라서 플롯이 약간 산만하다고 느껴지는 단점이 있지만, ‘돌베개’라는 설화를 삽입해서 아사코의 사유를 진전시켜 나가고 중심을 잃지 않는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정서, 아내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정서와 돌베개에서 나타는 인과응보의 벡터 문제, 현대 범죄의 죄악감 등 여러 방향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모아진다.
성흔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의 소설이며, 그만큼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소설이었다. 구조가 잘 짜여져 완성도가 높게 느껴졌고, 재미있게 읽었다. 주인공은 센카와 조사사무소를 운영하는 회사의 대표이자 유일한 조사원인 여자다. 이 사무소에 한 남자가 자기 아들에 관련된 조사를 의뢰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우연성이 많이 겹쳐진 소설이긴 하지만, 초자연적인 현상을 테마로 한 소설집의 이야기에도 역시 초자연적인 현상이 중심축이기 때문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의 전반부는 남자가 어떤 조사를 부탁하기에 앞서 배경 설명을 하는데 전부 사용된다. 그만큼 사건이 복잡하고 충격적이기 때문에, 또한 후반부 이야기 전개에 앞서 꼭 필요하기 때문에 빠질 수 없는 설명이다. 과거에 의뢰인의 아들 시바노 가즈미는 ‘소년A’로 불렸다.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존속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인터넷에서 소년A가 감별소에서 자살했다는 글이 올라온다. 또한, 소년A를 추종하는 인터넷 세력이 생겨난다. 사이트가 만들어지고 부모에게 학대받는 사람들이 소년A와 동질감을 느끼고, 자살한 소년A가 구세주가 되어 나타나기를 바란다. 이게 다 증거는 없지만 ‘데루무’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은 과거 오보로 밝혀진 기사를 근거로 자기 주장을 개진하면서 벌어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충고하거나 야유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의 자살은 그를 감별소에 처넣은 국가 권력의 패배이므로 국가가 인정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진실은 항상 이렇게 감춰진다”(163)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어디서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인터넷에서 떠도는 잘못된 정보, 혹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유사하다. 항상 국가가 숨긴다, 더 큰 세력이 정보를 조작하고, 진실은 항상 감춰지며 자기가 하는 말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인터넷 루머들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예언자의 역할을 한 ‘유다스 마카베우스’가 등장하여 ‘희생되는 어린양’들 앞에 등장하면서 인터넷에서 사이트의 세력은 공고해진다. 이건 마치 인터넷에서 소문의 증식을 보는 것과 같으며, 사이비 종교가 만들어지는 광경을 연상시킨다. 연예인들에 대한 가십들, 안티들의 생성과도 같고, 몇몇 사이트들을 떠올리게 한다. 2010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최근의 인터넷 사이트 흐름을 정확히 꿰뚫고 있어서 소름이 돋았다.
“「너희 중 누구라도 좋아. 시바노 가즈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 본 녀석 있어?」”(167)라는 핵심을 찌르는 방문자의 공세에도 사이트를 이용하고 추종하는 ‘어린양’들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묘사나 “지금은 어린양들이 자신들의 공상을 ‘교의’로서 신봉하기에 이르렀다. 소년A가 자살한 것과 사후에 다시 태어나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어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주장은 그들에겐 확고한 사실이었다.”(168)는 문장에서 현실에서의 사건들과 사이트가 겹쳐보였다. 인터넷에서 퍼지는 루머들을 누구도 직접 확인해 본 사람이 없으면서 그것들을 퍼트리고 누가 공격해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연예인들이 자살을 해도 끝없는 자기합리화를 할 뿐 반성하지 않는다. 너무나 현실적으로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그리고 있어서 인상적인 작품이었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문장은 인상적이었다.
“―자기들만이 진실을 안다고, 정의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렇게 되어 버린다구요.”(181)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악플러, 안티, 루머를 생산하는 자들, 자기들 말만이 사실이고 진리며 진실이고 팩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남의 말은 듣지 않은 채 자기들만이 정의를 실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잘못’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설화와 달리 인과응보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과 초자연적인 형상을 배합해서 독특한 정서와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었다. 인터넷 현상의 한 단면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그리면서도 기묘한 이야기로 묶어내어서 홀린 것처럼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되고,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 생각에 잠겨야 했다.
전체적으로 다섯 편의 단편만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책도 얇은 편인데도 재미있게 읽었다. 흡인력이 있고, 이야기들도 마치 연작소설처럼 공통적인 요소들도 존재했다. 초자연적인 현상 속에서 주목하는 것은 사건의 해결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다. 살인, 죄악감, 이기심 같은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부분들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따스한 시선도 있다. 「지요코」에서 어릴 때 잊어버렸던 인형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드러나는 부분이나, 「돌베개」에서 딸을 아끼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장난감」에서 완구점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구미코의 마음에서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섯 편의 단편만으로도 한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예리한지 체감할 수 있었다. 공감을 느끼고 다양한 사유를 하게 만드는 메시지와 완성도 높은 플롯, 개성 있는 인물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풀어낸 흥미로운 이야기가 결합된 근사한 작품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