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먹고 오후 늦으막히 집을 나섰다. 꼬마전철을 타고 다섯정거장, 센조쿠이케라는 곳에 내렸다. 이케(池)는 글자 그대로 연못인데, 센조쿠이케는 누가 발 닦은 곳인지 모르지만 '발 닦은 못'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서울의 세검정이 잠시 생각났지만, 전철역 바로 가까이 있는 센조쿠이케는 제법 큰 호수였다. 생각보다 훨씬 좋았던 저녁산책이었다.

호숫가를 한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 중고책방이 눈에 보였다. 일본에 와서 서점을 여러곳 봤지만(진짜로 '봤지만'- 밖에서 간판만 쳐다보는 것을 의미함;;) 들어가서 꼼꼼히 들여다본것은 사실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이유는 단순하다.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_-;; 책구경을 아무리 한들 뭐하나, 문맹인 것을. 쯧쯧. 아무튼 오늘은 어쩐지 책구경을 좀 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고백하자면, 그 책방 체인점들이 만화책을 많이 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에 가면 반드시 H2 전질을 사오리라!"고 마음먹은지 어언 몇년이런가. 마침 남편이 책꽂이에서 우연히 H2를 발견했고, 나는 일단 1권과 2권을 뽑아들었다. 사고야 말았다! 문제는 읽는 것.. ;; 하지만 언젠가는 읽을수 있겠지, 혹은 그림만 보면 되지 어쩌구저쩌구 속으로 궁리를 하면서 사들고 집에 왔다. 딸아이한테 보여줄 세모꼴 팝업 그림책 따위도 몇권 얹었다.

소장하고픈 만화책이 몇가지 있다. 죽어도 갖고 싶은 것은 H2. 아다치 미츠루를 아주아주 좋아한다. 우리나라에는 H2가 먼저 출간된 탓에 해적판 '터치'에 한때 'H1'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던 황당한 일도 있었다지만, 사실 아다치의 출세작은 '터치'다. 일본 아줌마친구들한테 물어보면 '터치'는 알아도 H2는 대부분 모른다(아줌마들, 무식하게 만화도 안 보고 뭐하고 살았는지;;). H2의 대사들은 하나하나 너무나 명대사들이라서 몽땅 외워버리고 싶을 정도!

H2 다음으로 갖고픈 것은 '후쿠야당 딸들'. 저자 이름은 까먹었다(바부팅이). 국내 만화 중에서는 강경옥의 '열 일곱살에'(음... 기억이 가물가물... '아이엔지-현재진행형'이었던가;;). H2와 '후쿠야당 딸들', 그리고 강경옥의 만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소재도 주제도 그림체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절제된 대사들. 절제된 말이라고는 할줄 모르는 주제에, 혹은 그런 주제인 탓에, 저들의 함축적인 대사가 강력한 인상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절제된, 절제된, 절제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전질 갖고 있고, 마츠모토 레이지의 '니벨룽겐의 반지'는 4권까지 갖고 있다. 그 뒷부분은 어찌하여 안 나오는 것인지? 지금쯤은 후속편이 나왔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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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4-11-14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한국에선 메가박스에서 일본영화제 하는데 ( 1,000원!) 60년대에서 90년대까지의 영화를 합니다. 아주 생소하지요. 그 중에서 '미유키' 영화로 만든 것이 있더군요. 보러갈까 고민중입니다.

딸기 2004-11-1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유키...가 뭘까요. 미소라는 아는데 미유키는 뭔지 모르겠어요. ^^

일본 영화를 저는 거의 못 보긴 했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간장선생'이었어요.

하이드 2004-11-14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소라는 비교적 신간이고,유도만화였던가요? -_-a 미유키는 이복동생 「미유키」와 마돈나적 존재인 동급생 「미유키」사이에서 방황하는 소년을 그린 청춘 러브코메디였네요.. 잘 기억은 안나지만, 동생이 이복동생이던가? -_-a (아니면 어쩌지;; 암튼, 기억력이 젬병이라;;)




딸기 2004-11-14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소라는 초능력 만화였는데, 중간까지밖에 못 봤어요. 다소 어이없이 끝나버렸다는 얘기를 들었고요. 미유키... 흑흑 그것도 보고싶어지네요!

까만물고기 2004-11-14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유키는 예전에 오렌지로드라는 제목으로 나왔었죠.

딸기 2004-11-14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지로드라는 제목은 본적 있는데, 그것이 미유키...였군요.

숨은아이 2004-11-15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경옥의 "열일곱 살에..."란 "17세의 나레이션" 말씀이신가요?

딸기 2004-11-15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그런 거였군요 ^^

마냐 2004-11-22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대에게 고마운 것중 하나가 H2교에 입문하도록 해준거.

딸기 2004-11-23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같이 경전의 대사를 외워보자구!

sooninara 2004-12-1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쿠야당 딸들하고 십칠세의 나레이션은 집에 있는데..H2는 아직 못봤네요..

저도 강격옥 스타일 좋아하는데..울동네엔 H2가 없던데..ㅠ.ㅠ.

딸기 2004-12-11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2 꼭! 꼭! 보세요. 후쿠야당 딸들하고 십칠세의 나레이션을 재밌게 보셨다면, 이 만화의 대사도 분명 마음에 들어하실 거예요!
 
숨겨진 질서 - 복잡계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존 홀런드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재미로 따지면 이 책은 무조건 별 다섯개다.

숨겨진 질서(Hidden Order).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질서(작동원리)가 숨겨져 있다는 얘기도 되고, 반대로 작동원리가 꼭꼭 숨겨져 있어서 정말 찾아내기 힘들다는 얘기도 될성 싶은데. 존 홀런드의 '숨겨진 질서'는 바로 그같은, 꼭꼭 숨겨져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질서를 찾는 작업이다.

복잡계는 어떻게 진화하는가-이 책의 주제는 바로 이거다. '복잡적응계(CAS)'라고 이름붙인, 보통 복잡계라는 말로 표현되는 아주 복잡한 세계를 대상으로 그 세계의 질서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예를 들면, 뉴욕시와 같은 거대한 도시에서 어느날 빵 공급이 잠시 중단되는 등의 '사소한' 실수도 없이 어떻게 모든 일들이 제대로 되어나가는지(물론 테러참사와 같은 일도 있기는 했지만--), 이 거대한 지구는 생태적인 도전에 어떻게 응대하는지, 조그마한 아메바 따위가 존재하던 곳에 어떻게 인간 같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생물들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하는 것들을 파헤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복잡계라는 개념 자체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거기에 '유전알고리듬'이니 비트니, 또 숱한 공식들이 나오면 상당히 머리가 아프다. 허나!(경빈 version) 미 MIT 출신의 물리학자인 홀런드는 이 복잡한 세상을 생각보다 쉽고 재미있게 풀이해낸다.

복잡한 세상의 질서를 깨우치기 위해 저자가 제안한 것은 '모형'을 만드는 것이다. 작은 단세포 생물과 같은 기초적인 '행위자'를 설정해놓고, 그것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것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유전자 조합이 어떻게 교차되고 변형되는지를 살펴보고, 거기에 작동하는 원리를 조금씩 복잡하게 만들어보고, 그렇게 해서 최초에 극히 단순했던 '계'를 복잡계로 '진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 작용하는 원리(질서)에 맹점은 없는지, 이 작은 '계'의 설정과정에 모순은 없는지를 현대 물리학의 여러 성과들을 바탕으로 꼼꼼이 검토해 설명하는데, 꼭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작은 생물들을 관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 과정은 실제로 아메바를 실험실에 데려다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머리 속의 계산과 상상을 통해 이뤄지는 일종의 탐험이자 게임인데, 책에 나오는 다양한 공식과 유전자 표현을 모두 해석해보지 않고(완전히 이해할 능력도 없지만--;;) 핵심 길잡이만 따라가도 줄거리를 너끈히 소화할 수가 있다.

굉장히 어려운 모형화 과정을 쉽게 설명해놓은 이 책에 대해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인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홀런드가 수십년동안 쌓아온 연구성과의 정수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저작'이라고 극찬했다.
그 말 그대로, '생동감 넘치는 지성'이다. 컴퓨터공학과 생물학, 경제학, 수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활달한 섭렵의 과정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모형을 만들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복잡계의 '진화'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듣다 보면, '세상을 이런 눈으로 볼 수도 있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결국 중요한 것은 통찰, 꿰뚫어보고 살펴보는 그 능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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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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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만물의 척도다, 하느님은 인간을 위해 세상 만물을 만드셨으니 인간은 세상만물의 주인이다- 이런 '인간 제일주의'의 편견을 깨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내놨을 때 이미 인간이 제일이라는 생각은 깨져나갔어야 했는데 다윈이 어정쩡하게(자기가 속해있고 또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서양 제국주의 문명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탓에) 진화론 속에 '진보'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놓는 바람에, 창조론을 뒤집을 절호의 찬스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제일주의가 깨지지 못했다는 야그.

그럼 진화란 무엇인가. 진화는 실재하는 사실(현상)이지만 진화에 대해 흔히 오해를 한다. 진화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일 뿐이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세상만물로 들어찬 '풀 하우스'이지 직선으로 연결된 위계질서의 사다리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진화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풀하우스' 안에서 변이의 정도가 어떻게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지 다종다양한 생물 군상을 무시하고 '고등한 인간'의 오만함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런데 왜 '진화'라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들 오해를 하는 것일까. 여기에 바로 '통계의 함정'이 숨어 있다. 9명의 가난뱅이들과 1명의 빌 게이츠가 있다. 9명은 오늘 먹을 빵도 없는데 빌 게이츠는 혼자 연간 10억달러를 벌었다면 이들 10명의 연평균소득은 자그마치 1억달러! 이 '평균'이란 과연 유효한가? 아니다, 9명의 가난뱅이들의 진실을 숨기고 무시하고 없애버리는 장난질에 불과한 것이 바로 '통계'라는 것이다.

저런 통계의 장난들이 진화론을 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물들을 보는 우리의 시선을 가리고 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무지하게 많은 박테리아들과 원생생물들, 인간보다 '하등'하고 심지어 포유류보다도 못하고 척추동물보다도 못난 것으로 간주되는 숱한 생명체들이 몽땅 무시당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진화는 곧 한 방향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고등한 생물로 향한 고속도로'가 아니라는 점, 인간을 위해 이 세상 만물이 복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인간은 지구가 굴러가다보니 생겨난 고등생물일 뿐이라는 점. 이렇게 주장해서 남는 것이 뭐가 있느냐. 아메바로부터 감사 편지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냐.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는 사실을 여러 통계학적, 생물학적 지식을 통해 입증해보임으로써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다양성은 다양성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직선의 진화를 주장한 서구문명의 오만함은 곧 제국주의의 오만함이요, 오늘날과 같은 망가진 지구를 만든 물신주의의 오만함이 아니던가. 다양성을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깨는 것은 서구문명의 오만함을 반성하자는 것이요, 인간을 위해서라면 이 지구야 어떻게 되든 좋다는 인간의 무지몽매함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과학평론가들 중에서는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이다. 물론, 평론가 아닌 과학자로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그에 대해 조금의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인간복제 얘기만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는 비관론자라는. 그런데 이 책은, 굴드가 과학저술가로서 왜 유명한지 대번에 알아차리게 해준다.

돌리 탄생 이후 저자가 끄적끄적했던 몇 편의 짧은 글들에서는 느낄수 없었던 깊이와 지적인 도전,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 싸움꾼의 기질 따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알기 쉽게 통계의 허점들을 지적하는 것도 그렇고, 다소 오만해보이기까지 하는 자존심도 그렇고, 일목요연하게 주장을 펼쳐나가는 논리력도 그렇고...일단 대단히 재미있게 읽었고, 그 다음으로 저자의 '좌파적 진화론'에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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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11-15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어요... "인간에 대한 오해"도 아직 안 읽었는데... (저 책더미 어딘가에 박혀 있겠지... --;)

딸기 2004-11-15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에 대한 오해,는 주제가 명확한 대신 재미는 좀 떨어져요. 저는 풀하우스가 더 재밌었던 것 같아요. :)

panda78 2004-11-17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의 엄지는 어떤가요? ^^;;

딸기 2004-11-17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판다님... 그건 판다님이 잘 아시겠지요! ㅋㅋ

판다의 엄지는 안 봤어요, 아직.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못 읽고 있는 책 중의 하나입니다.

푸하 2005-01-05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핵심을 짚어내는 리뷰같아요,,, 진화가 진보가 아니고 다양성의 증가라는 진술은 비단 생물학(과학)에서 뿐 아니라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도 다양한 시도가 있다고 들었어요...
 
핀치의 부리 -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생명과 진화에 대한 보고서'
조너던 와이너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추천 / 이끌리오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핀치의 부리(The Beak of Finch). 네이처지에서 '그동안의 과학저술 중 최고'라고 격찬했다고 책 뒤표지에 써있는데, 정말 네이처지에 그런 서평이 나왔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의 찬사가 아깝지 않은 책입니다.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이라고 하는데, 어떤 호평을 붙여도 이 책을 다 칭찬하기에는 미흡할 거예요.

계속 도는 칼, 보이지 않는 해안, 보이지 않는 문자들, 낯선자의 힘, 특별한 섭리...이 책의 단락단락에 붙여진 소제목들인데, 꼭 판타지 소설의 소제목들 같죠. 이 아름다운 '소설'의 주인공은 갈라파고스 군도에 사는 참새과의 작은 새들, 핀치들입니다. 그리고 그들 한마리 한마리를 20년간 지켜보면서 열정적으로 연구활동을 펼친 진화생물학자 그랜트 부부와 제자들. 주인공은 또 있습니다. 찰스 다윈 말입니다.


이 책은 갈라파고스 군도의 작은 섬 다프니 메이저에서 외롭지만 의미있는 연구작업을 해온 그랜트 부부의 활동을 꼼꼼히 기록한 '인물다큐멘터리'이면서 동시에 진화생물학의 모든 성과들을 모아놓은 '진화의 역사책'이기도 합니다. 부부 생물학자의 학문적 열정도 인상적이지만, 진화론의 역사와 의미를 입체적(말 그대로 입체적!)으로 접할 수 있는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앞서 이 책을 판타지 소설에 비유했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아주 유려해서 읽는 재미가 문학작품 못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진화생물학 연구 현장과 다프니 메이저의 지나온 20년, 그리고 150여년전 다윈의 항해에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뇌파의 활동을 확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판타스틱'하기 그지없습니다.


지나친 찬사가 아니냐구요. 과학저술가인 지은이 조너던 와이너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무려 2000편의 책과 논문을 뒤졌다고 합니다. 당초 그랜트 부부의 활동을 다큐식으로 쓰기 위해 다프니 메이저에 갔다가, 지은이 자신이 진화론의 역사에 푹 빠져든 거죠. 진화에 관한 논문 뿐 아니라 성경과 셰익스피어를 포함해 방대한 자료들을 문장 속속에 인용해놓았습니다. 그래서, 한 문장 한 문장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습니다.

이 책에는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생명과 진화에 대한 보고서'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갈라파고스에서 보내온 이 보고서가 주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왜 진화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봐야 하는가- 인간은 오만합니다. 어느 정도 오만하냐면, 자기들이 이 세상 40억년 진화의 역사, 진화의 방대한 나무에 달려 있는 작은 가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간해서는 인정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다른 생물의 한 종류를 아예 절멸시키려 하기도 하고, 지구의 생태계를 마치 핀치가 선인장 씨 빼먹듯 멋대로 빼먹으려 하기도 하지요.


'핀치의 부리'는 그런 인간들에게, '진화는 나의 집 마당에서, 가로수에서, 내 방 안의 화분 위에서, 심지어는 나의 몸 안에서도 언제나-지금 이순간에도 이뤄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오만함으로 눈을 가린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이 지구의 생물들은 끝없이 적응하고 투쟁하고 공존하고-즉 '진화'해 나간다는 겁니다. 지구 환경에 대해 인간이 오만하게 주먹을 들이댈수록 자연의 적응, 즉 진화는 인간이 의도한 반대방향으로 가속화할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합니다. 오랫동안 기억하고, 되풀이해 읽고 싶은 책을 만나게 돼서 아주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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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11-13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인문학적 이성 죽이기>란 '선정적인' 책도 나온 듯한데, 그들의 자부심의 배경에는 (저도 즐겨 읽는) 이런류의 교양과학서들이 있다고 봅니다. 인문학도들이 분발해야 할 텐데, 워낙에 생계도 힘든 형편이라...(자업자득인가?..)

딸기 2004-11-13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적 '이성'이라면 굳이 죽여야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

어쨌든 저 책은, 최근 몇년간 읽은 책들 중에 최고봉이었어요, 제게는. 로쟈님도 저 책 마음에 드셨나요?

하이드 2004-11-14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thanks to 를 하면 추천이 되는거군요. ^^

딸기 2004-11-14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그런가요? 추천 고맙습니다. ^^

숨은아이 2004-11-15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화는 인간이 의도한 반대방향으로 가속화"... 모기를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 (앗, 썰렁하다. =3=3=3)

딸기 2004-11-15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썰렁하지 않아요, 숨은아이님. 바로 그 얘기거든요. 이른바 '해충'들.
 
천 년 동안에 1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현실을 바라보는 용기를 밑바탕으로 하는 꿈이나 이상이라면 몰라도,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소도구로 문학이 존재한다면 나는 거부하고 싶었다. ... 집단으로 형성된 세계는 그것이 어떤 세계든 나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샐러리맨의 세계를 거기에서 또다시 재연하다니 넌덜머리가 났다. 혼자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세계이기에 뛰어든 것이다. ...내가 바라던 삶은 좀더 남자답고 - 비웃고 싶으면 비웃어도 좋다 - 좀더 긴장되고 좀더 산뜻한 그 무엇이 아니었던가.'

마루야마 겐지의 재미없는 소설에 반했습니다.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라는 소설을 작년에 비교적 재미있게 봤지요. 흥미진진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문장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허걱... <천년 동안에>는 두 권으로 이뤄진, 아주 긴 소설입니다. 판타지 소설이라면 10권 짜리라도 보겠지만, <천년 동안에>는 아주 지루합니다. 저처럼 얄팍한 취미를 가진 사람한테는 참 재미없는 소설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사람 이름이 하나도 나오지 않고 2인칭 시점으로 돼 있는 소설이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지겨울까요 ^^

인용해놓은 것은 마루야마의 에세이 '소설가의 각오'에서 따온 겁니다. 아쿠타카와상을 탄 뒤의 생각을 적은 것이라고 하네요. 우리나라에는 이문열 같은 작자들이 보수의 탈을 쓰고 범죄적인 수준의 곡학아세를 서슴지 않는데 일본에는 그래도 이런 작가가 살아있구나. <천년 동안에>는 '작가 정신이란 바로 이런 것'을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저는 마루야마의 철학과 투쟁에 반했습니다.

소설은 세 가지 시간 축을 돌며 진행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무'인데, 천년을 살아온 나무입니다. 나무가 지내온 천년의 흐름, 나무가 내다본 한 인간의 인생역정 28년, 나무가 미래를 내다보는 동안의 한나절의 시간을 세 축으로 해서 소설은 진행됩니다. 줄거리는 별로 중요치 않구요 ^^
나무의 입을 빌어 작가가 말하는 것은 '고이지 말고, 끊임없이 흐르라'는 겁니다. 군국주의와 환경파괴, 어리석은 대중과 그들에 기반을 둔 권력의 절대화. 이 어리석은 시대와 사회,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과 중우정치, 집단 우선주의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쉬지 말고 흘러라. '집단으로 형성된 세계는 그것이 어떤 세계든 나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는 마루야마의 정신은 아주 높고, 고양돼 있습니다.

깜짝 놀란 것은, 90년대 중반에 쓰여진 이 소설이 고이즈미 집권 이후 현재의 일본 정치상황을 쪽집게처럼 예견해놨다는 겁니다. 대중을 휘어잡는 정치인의 등장이 곧바로 군국주의화, 전쟁의 길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지만, 과연 '21세기의 묵시록'이라 할 만한 책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되 매몰되지 않으려 하는 소설가의 통찰력이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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